75. 신소소
슬금슬금.
학익정(鶴翼庭)으로 엎드린 채 숨어 들어오는 인영.
“야, 너 뭐 하냐?”
“헤헤헤, 거지한테 들켰네. 오랜만이야. 하림.”
“이 자식이…… 형이라고 불러라.”
남하림보다 두 살 적은 나이의 청년.
표후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표호천이 옷을 탁탁 털고 일어나면서 웃었다.
“그냥 오면 안 되냐?”
“그럼 재미없잖아.”
“하긴 어릴 때부터 더럽게 말 안 들었어.”
“십 년이 넘었다.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진짜 오랜만이긴 하네. 근데 그때보다 더한 것 같군.”
“흐흐, 넌 그때보다 더 잘난 체하는 것 같아.”
“당연하지. 좀 잘나긴 하잖아.”
둘은 어릴 적부터 서로를 싫어했다.
한 명은 잘난 척하는 게 보기 싫었고,
또 다른 한 명은 다른 사람 말을 들어먹지 않는 게 보기 싫었다.
표호천은 벌써 쫓아내고 싶은 듯한 남하림의 표정을 무시한 채, 먼저 안으로 들어가 네 사람을 보았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이며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아이고, 거지 형님들 안녕들 하슈. 여기 하림이 사촌 동생 표호천이오.”
‘싸가지가 밥 말아 먹었다는 놈이군.’
표호천의 첫인상은 예전 하북상국의 백한묵을 닮아 있었다.
‘부장이 기생오라비라고 하더니만.’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표강상국에 오기 전 남하림에게 외가 얘기를 좀 들은 네 사람은 표호천이 어떤 녀석인지 금세 알아챘다.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올해 열여덟. 두 살 차이면 친구 해도 되겠는데? 말을 놓아도 좋을 것 같지 않나?”
“아니. 미안한데 난 어린놈이랑 친구 안 해.”
“그럼 말고.”
덥석.
표호천은 갑자기 팽유도의 손을 잡았다.
‘허, 빠르군.’
팽유도가 미처 반응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
피식.
‘뭐야. 별로잖아.’
표호천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도광걸의 반도가 한 번 펼쳐질 때마다 산이 울리며 땅이 무너진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봐?”
“대체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다닌 거야?”
“에헤헤, 역시 뻥이였군. 하여튼 무림은 너무 거품이 많아. 별로 강해 보이지도 않고.”
‘이것 봐라. 은근히 긁는데?’
따악!
남하림이 표호천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외숙 말씀이 이제야 이해가 되네. 너 진짜 피곤하게 자랐구나.”
꿀밤 한 대론 끄떡없다는 듯, 표호천은 가장 만만하게 보이는 팽유도 옆에서 계속 깔짝댔다.
“뭐야, 나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왜 이리 작냐?”
‘이 자식이.’
남하림의 사촌 동생만 아니었으면 그대로 팼을 것이다.
그때 전음이 들려왔다.
[유도야, 적당히 손봐줘라.]
생긋 웃은 팽유도가 허리에서 타구봉을 잡았다.
“우리 한판 해볼까?”
“으하하핫! 나중에 쪽팔려서 밖에 나다니지 못할 텐데?”
“뭐 어쩔 수 없지.”
“그래……? 그럼 해볼까? 앗! 저게 뭐지!”
파앗!
표호천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동시에, 팽유도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따악!
하지만 팽유도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손등에서 소리가 났다.
“아악!”
손등 뼈가 몽땅 부서지는 줄 알았다.
“이…… 거지 새끼가…….”
“하하, 좀 아프지?”
팽유도는 득달같이 달려든 표호천의 반대편 손에 멱살을 잡혀주었다.
“야, 거지. 이젠 내 손에 죽었어.”
“죽긴 누가 죽어.”
타타타타-!
순식간에 표호천의 얼굴을 향해 타구봉이 떨어졌다.
찰진 타격감이 끝없이 이어졌다.
“아아악-! 사람, 사람 살려!”
남하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외숙, 도저히 말로는 부탁을 들어드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대신 조금 패서 사람 만들어보겠습니다.’
* * *
‘허어…… 하늘이 맑구나.’
바닥에 드러누운 청년.
오랜만에 누워서 하늘을 보았다.
하늘을 바라보는 표호천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엄청 세잖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설사 이기지 못해도, 쉽게는 지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상대도 되지 않았다.
‘속도에서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계속 누워 있을 거냐?”
벌떡!
팽유도의 말에 표호천은 몸을 일으켰다.
“한 번 더 해볼래?”
“됐수다. 나를 패는 재미에 들린 모양이지?”
잠깐 사이, 표호천은 걸협오성의 위명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냥 평범해 보이는데…….’
학익정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쉬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거지들과 별반 다름없었다.
진짜 거지긴 하지만.
표호천은 남하림 옆으로 슥 붙었다.
“하림 형.”
갑자기 심각한 표정.
“형이라고? 뭘 원하는 거냐?”
“나도 개방에 들어가면 안 될까?”
“네가? 왜?”
“무공이 강해지잖아. 여기 이 사람들도 개방에서 무공을 익힌 거고. 안 그래?”
“개방에서 강해졌다고? 아니, 원래부터 모두 강했어. 근데 넌 아닌 것 같다.”
“무슨 말이야. 내가 무공 따위는 신경을 안 써서 그렇지 마음먹고 하면 네놈들보다 나을걸.”
“정말 답 없군. 여하튼 네가 알아서 해라. 단, 외숙에게 내가 허락을 받아줄 생각은 없어.”
“에잉…….”
아버지가 허락해 줄 리 없었다.
하지만 굳이 허락을 받을 생각도 없다.
“왜 개방에서 네가 결정권자야?”
“그건 아니지만, 난 반대를 할 수 있거든.”
“……어떻게 반대한다는 거지?”
“넌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남하림은 개방의 후개다.
“후개가 그 일까지 할 수 있다고? 뻥치고 있네.”
“거짓말 같아? 후개 자리 이럴 때라도 써먹어야지. 생각은 자유니깐 네가 알아서 해봐.”
“내가 싫은 모양이지? 아니면 혹시 내가 개방에 들어가서 후개 자리를 빼앗을까 봐 걱정돼서 말리는 거야?”
“상상은 자유라고 하더니…… 딱 네놈을 두고 하는 말이군.”
“어감이 그런 것 같은데?”
“너 하는 것을 보니 절대로 받아줘선 안 될 것 같다.”
한눈에 봐도 표호천의 상태는 피곤해 보였다.
“아, 왜?! 난 무조건 개방에 들어갈 거야. 네가 말려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음대로 해라. 근데 절대로 불가능할 거다.”
“아, 진짜 짜증 나네. 사촌동생이 들어가겠다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반대를 하겠다니 말도 안 되잖아. 지금 후개라고 유세하는 거야?”
“말 되게 잘하네. 맞을 말만 골라서.”
퍽!
남하림은 손을 뻗었다.
“아악!”
얼굴을 한 대 맞은 표호천은 바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지?’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넌 오늘 좀 더 맞아야겠다. 아마 외숙도 이해를 해주시겠지.”
남하림은 표호천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아 씨, 일단 비영류신법으로 도망을…….’
하지만 신법을 펼치는 순간, 남하림에게 뒷목덜미가 잡혔다.
“어딜, 갈 땐 가더라도 좀 맞고 가야겠다.”
퍽퍽퍽!
인정사정 볼 것 없는 손길.
죽지 않을 정도로 적당하게 팼다.
아혈을 눌렸는지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툭.
부었던 눈은 이제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
“너 똑바로 들어. 자꾸 이상한 짓 하면 표강상국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아니, 왜! 네가 뭔데 멀어진다고 해? 갑자기 어슬렁 들어와서! 표강상국은 우리 거야. 남씨들 상국이 아니라고!”
“에효, 이제야 본성을 드러내는군. 방금까진 개방에 들어오겠다더니, 이젠 내가 표강표국과 호북상국을 가지고 가는 게 배가 아픈 모양이지?”
“……이이익!”
남하림은 눈을 부릅뜬 표호천을 바라보았다.
“물에 빠진 놈 건져놓으니깐 봇짐 내놓으란 짓이잖아.”
“뭐…… 물에 빠진 놈?”
“표강에서 본 상국에 상환해야 할 자금이 얼마인지 알고나 떠들고 있어? 오 년 전 내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나.”
“그 정도는 갚을 수 있어!”
“그 많은 돈을 한꺼번에 융통하겠다고? 물론 모든 사업체를 팔면 되겠지. 팔아서 갚아라.”
“…….”
“남천상국에서 원금에 이자까지 유예해 주고 있을걸. 물론 유예한 이자도 이자를 받아야 하지. 멍청한 놈아, 똑바로 정신 차리고 살아. 외숙 힘들게 하지 말고.”
“…….”
표호천은 충격을 받았는지 힘없이 학익정을 빠져나갔다.
“와…… 하림 형,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너무 심하게 한 거 아냐?”
“외숙에게 들었을 땐 이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어.”
“근데 너무 충격이 심한 것 같은데.”
“상관없어. 외숙도 분명 좋아할 거야. 이제 볼일도 마쳤으니 가자.”
* * *
투닥투닥.
“아이고, 다리야.”
길가에 앉아 손으로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는 손길.
“무작정 가는 것도 힘드네.”
신려세가에서 가출한 신소소는 힘들었지만, 이내 흐트러진 각오를 다시 되새겼다.
“아니야. 난 할 수 있어. 꼭 그분을 만나뵙고 말 거야. 좋아합니다. 사랑합니다.”
“푸흐웁, 소형제. 성공하길 바라네.”
“으악!!”
신소소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비명을 질렀다.
“아하하…….”
팽유도는 바닥에 주저앉은 신소소를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뒤에 나타난 다섯 명의 사내들.
번성을 나와 양주 총부에서 다시 이틀을 보낸 후, 하남으로 발길을 돌린 걸협오성이었다.
신소소는 유행 거지 복장을 한 그들을 보면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깜짝 놀랐잖아요!”
“어? 여자아이네?”
“…….”
지금까지 단 한 번에 자신의 정체를 알아본 사람들은 없었다.
“누…… 누가 여자…… 라고 그래요?”
“크흡, 미안. 근데 목소리도 완전 여자 같잖아.”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약을 잘못 먹어서…….”
팽유도 곁으로 당무독이 나섰다.
“유도야. 약이란 게 원래 부작용이 심해. 이렇게 정신없는 애들이 나오기도 하는 편이지.”
“당신들…… 누구예요?”
“우리? 걸협오성.”
“아…… 아하하하하!”
신소소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한 명씩 바라보며 웃기 시작했다.
“그럼…… 당신은 독광걸이라는 당무독이겠네요?”
“약 잘못 먹은 애도 우릴 잘 아는 걸 보면 유명하긴 한가 봐.”
“자꾸 약 이야기 할래요?”
“미안.”
“그럼…… 누가 후개…… 앗, 당신인가요?”
그녀는 일행 뒤에서 미소 짓고 있던 남하림을 발견했다.
“흐음…… 당신은 일단 잘생기긴 했네요. 다들 비슷하게 변장은 잘했어요.”
“칭찬해 줘서 고마워. 소형제도 변장 잘했네. 멀리서 봤을 땐 완전 미소년인 줄 알았거든.”
“아, 됐어요. 그만 가세요. 혼자 있고 싶어요.”
신소소는 얼른 다섯 명의 사내들과 헤어지고 싶었다.
“그러지 뭐. 근데 꼬마…… 아니, 소형제는 어딜 가는 거야?”
“왜 물어봐요? 헛, 혹시…… 나를?”
팽유도가 깜짝 놀랐다.
“무슨, 야, 뭘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됐어요. 요즘 변태 같은 사내들…… 흐음, 아니, 그냥 세상이 그렇다고 해서…….”
“알면서 왜 혼자 다니는데. 보아하니 있는 집 자식 같은데 빨리 집에 가라.”
“괜찮아요. 내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요.”
신소소는 옆에 내려놓은 검을 잡았다.
‘굳은살이 좀 있군. 제법 열심히 수련했어.’
“그럼 우린 갈 테니 꼭 그 사람이 소형제의 사랑을 받아주기를 빌겠네.”
“고맙네요. 그럼 전 먼저 갈게요.”
파앗-!
신소소가 신법을 펼치며 빠르게 사라졌다.
* * *
다섯 명의 사내와 헤어진 신소소는 이윽고 마을에 들어섰다.
‘큰일 났네.’
누군가와 거리가 자꾸 좁혀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잡힐 것만 같은 상황.
‘어떻게 하지?’
주위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앞뒤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
‘앗, 저거다.’
덜렁거릴 정도로 크고 해진 듯한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저 옷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맞아. 거지는 중원 어디에도 있잖아. 요즘 진짜 거지들도 일부러 깨끗하게 옷을 빨아서 입는다고 했다고.’
신소소는 곧바로 포목점을 찾았다.
* * *
“젠장, 또 놓쳤군.”
신려세가의 무인들.
수석 호위대주 병주학이 마을에 들어섰다.
‘분명 여기로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열다섯 정도의 미소년의 행방을 확인하면서, 세가에서부터 포위를 좁히며 움직였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무조건 데리고 오도록.
세가주의 지엄한 명령을 떠올린 병주학이 지시를 내렸다.
“주위를 살펴라.”
“넵, 대주님.”
수하들이 흩어지면서 마을을 살피기 시작했다.
* * *
‘오, 좋은데…….’
한편 신소소는 동경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눈앞에 잘생긴 젊은 거지가 보였다.
“됐어.”
벗어놓은 옷을 본 그녀는,
‘아, 맞다.’
뒤적거리더니 옷 속에서 노리개를 꺼냈다.
붉은 노리개.
어릴 때 아버지가 준 선물이다.
신소소는 손바닥 안에 들어갈 정도의 노리개를 허리에 채웠다.
“수고하세요.”
포목점 밖으로 나오자, 마을에 들어오기 전 만났던 다섯 명이 보였다.
‘하필이면…… 만나면 피곤한데.’
슬금슬금.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다섯 명이 가는 방향의 반대로 몸을 돌렸다.
‘헉?’
상가 안을 자세히 살피면서 다가오는 무리들을 보았다.
신려세가의 복장.
‘흐익, 진짜 큰일 났다. 호위대주다.’
점점 거리가 좁혀졌다.
‘어떻게 하지?’
고개를 돌린 앞으로는 피하고자 했던 다섯 명이 보였다.
‘에이!’
스윽-
신소소는 손을 들며 다섯 명을 향해 달려가면서 소리쳤다.
“형님들!”
병주학은 고개를 돌려 다섯 명의 거지들 앞으로 가는 소년 거지를 보았다.
“거지 놈들…….”
최근 들어 개방의 위세가 커지면서 호북성에도 거지 복장을 한 놈들이 늘어났다.
‘생긴 것들은 멀쩡한 놈들이…….’
남하림은 얼굴을 숨긴 채 뛰어오는 신소소를 보았다.
‘푸훗, 쫓기고 있는 모양이군.’
덥석.
남하림은 친한 사이처럼 신소소의 목을 팔로 둘렀다.
툭툭.
그러고는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머리를 두드렸다.
“어딜 갔다 오는 것이냐?”
“으악! 으아아아-!”
병주학은 장난을 치는 사내들을 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가 저런 놈들과 만나진 않을 것이다.’
병주학은 시선은 다시 상가 안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그들을 일별한 남하림에게 팽유도의 전음이 들렸다.
[하림 형, 신려세가네요.]
[신려세가?]
[호북 의창에 있는 사파로 천사혈천이십문에 속한 가문입니다. 정파로 치면 십대세가에 비견할 수 있어요.]
[그곳에서 이 녀석을 왜 쫓는 것이지?]
[글쎄요. 아주 나쁜 짓을 했겠죠.]
* * *
“으으윽-”
신소소는 목을 놓지 않는 남하림의 팔을 마구 두드렸다.
“그놈들 아직 안 갔는데.”
“…….”
다시금 팔이 얌전해졌다.
“생긴 건 멀쩡해 보이는데 무슨 짓을 한 거냐?”
“몰라도 돼요.”
“그래? 그럼 저들에게 물어볼까?”
“아니요!”
스윽.
남하림은 팔에 힘을 풀었다.
“으으, 목이야. 부러지는 줄 알았네. 연약한 내 목을…….”
신소소는 뻐근한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자신을 잡으러 온 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먼저 살폈다.
“휴우…….”
안도의 한숨.
그러고는 남하림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세게 잡았잖아요.”
“하하.”
“웃지 마세요.”
“알겠다. 그럼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해보지? 나쁜 짓을 한 모양이지?”
“그게…….”
“아-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린다.”
“거참, 좋아요. 알겠어요. 그리고 나쁜 짓은 안 했거든요! 말해줄 건데! 지금 여기에서 나간 뒤에 해줄게요.”
“그래? 나중에 쌩까는 건 아니겠지?”
“…….”
“만일 그런 거라면 내가 잡아서 그들에게 끌고 갈 테니 알아둬.”
“알…… 겠다고요.”
졸래졸래.
신소소는 다섯 명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아직도 마을 주위에 자신을 쫓아오던 세가의 무사들이 간혹 눈에 띄었다.
‘당분간은 이들과 함께 마을을 벗어나야겠어.’
그녀는 언제라도 신형을 펼치며 도망칠 준비를 했다.
마을 초입을 벗어나던 중.
스윽.
남하림이 신소소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으으으으……?’
갑자기 몸에 힘이 빠지면서 단전에서 내력이 사라졌다.
‘이자가…….’
놀란 신소소의 눈이 커졌다.
보통 내력이 아니고서는 함부로 타인의 내력을 거둘 수 없다.
남하림은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딜 가는 중이지?”
“…….”
아무리 사내아이로 변장했어도 이들은 자신이 여자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숙녀한테 너무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닌가요?”
“풋!”
뒤에 있던 팽유도가 갑자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휙.
신소소의 매서운 눈빛이 팽유도를 노려보았다.
“아, 미안. 갑자기 숙녀라고 해서…….”
“지금 무시하는 거예요?”
팽유도는 결국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무시하는 게 아니라 너무 웃기잖아! 애가 어른 흉내를 내는 것 같아서……!”
“진짜 이 사람들이……! 자기들도 걸협오성 놀이나 하고 놀면서! 내가 누군지나 알고 까불어요?”
“누구지? 숙녀께서는?”
남하림의 목소리에 신소소는 순간 흠칫했다.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소소라고 해요. 난 개방에 가는 길이에요.”
“개방? 상당히 먼 길을 혼자서?”
“네, 그래요. 제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보러 가는 중이라고요.”
남하림은 물론, 네 명 모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걸협오성 중에서?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누구인데?”
“제일 잘생긴 사람이죠. 무공도 강하고…….”
성철각은 남하림을 슬쩍 쳐다본 후 다시 물었다.
“혹시 부장…… 아니, 후개?”
“당연하잖아요. 난 너무 키 큰 사람은 싫어해요.”
팽유도가 물었다.
“그럼 나, 아니, 도천걸은?”
“난 무식하게 도를 쓰는 사람을 제일 싫어해요.”
“그거 편견이야!”
“후후후, 당무독 그 친구도 사람 좋다고 하던데? 얼굴도 잘생긴 편이고.”
당무독은 은근히 자신이 있었다.
“독광걸도 진짜 싫어요. 무인이 비겁하게 독을 쓰다니.”
“편견에 가득 찬 아가씨군.”
“그럼…… 한심걸은 어때?”
“흠, 그나마 좋긴 한데, 너무 차갑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그는 사귀는 사람이 있잖아요. 무림에 공표를 했기 때문에 건드리면 안 돼요.”
“엥? 누가 사귄다고? 뭘 공표? 처음 듣는데?”
“몰랐어요? 중원 여자들 사이에 소문이 쫙 났는데. 남천상국 금월미(金月美) 남희미의 연인이라고.”
“그런 소문이 나?”
“불문율이 있어요. 서로가 결혼 약조를 인정하면 중원의 여인들은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되죠. 서로 깨지기 전에는요.”
남하림은 처음 듣는 말에 이휘연을 쳐다보았다.
“…….”
이휘연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뭐…… 여하튼 후개를 만나러 간다는 거네.”
“그래요. 나를 만나줄진 모르겠지만…… 한 번이라도 얼굴을 본 뒤 내 인생을 결정하려고요. 부모님이 얼굴도 못 본 사람한테 시집을…… 앗.”
그녀는 얼른 말문을 닫았다.
남하림은 미소를 지었다.
“아항, 이제야 알겠군. 보아하니 신려세가의 소공녀 신소소시구만.”
“헉, 어떻게 알았어요?”
“우린 개방이야. 당연히 중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식통을 알고 있지.”
“…….”
신소소는 의심의 눈초리로 다섯 명을 훑어보았다.
“진짜 개방?”
“왜, 아닌 것 같아?”
“그럼 걸협오성님들을 알아요?”
“알지. 늘 함께 밥을 먹는 사이거든.”
“거짓말하지 마세요. 내가 보기엔 어디 작은 분타 소속의 거지 같은데!”
“믿고 안 믿고는 소형제가 알아서 판단해.”
“……그럼 믿어줄 테니 제발 한 번만 도와주세요. 진짜 나이 많은 아저씨한테 시집가기 싫다고요!”
“얼마나 나이가 많은데?”
“나보다 열다섯 살이나 많아요.”
“허어, 완전 도둑놈이구만.”
“그쵸? 그래서 한 번이라도 걸협오성의 후개를 보고 싶어서 집에서 나온 거라고요.”
“만일 후개가 싫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
“왜 싫다고 하겠어요? 중원에서 나보다 멋진 여인이 어디 있다고?”
당무독은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자신감은 좋군. 그건 마음에 들어. 응원할게. 잘해봐.”
그러고는 남하림을 보며 웃겨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