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걸황무적-70화 (71/328)

70. 무당파로

빠직.

백리천강은 입술을 깨물며 구천신품을 담은 상자를 밟았다.

“휴우…….”

그는 숨을 내쉬며 흥분된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놈에게 화를 낸들 쏟아진 물을 담을 수는 없다.’

채애앵-!

백리세가 가주 백리천강.

마지막은 자신이 끝을 내고 싶었다.

푸른빛의 검신.

백리천강이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았다.

‘네가 나의 끝을 지키는구나.’

휘익-

“주군.”

그의 앞으로 호월위장 문백구가 부복했다.

“주군, 목숨을 보존하소서.”

“이보게.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무림맹이 원하는 것은 백리세가일세. 내가 죽어야 백리세가가 죽는 것이지. 하지만, 그렇다면 이것이 세가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지 않겠는가.”

“……주군.”

문백구는 고개를 바닥에 숙였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네.”

“아닙니다. 주군을 모셔서 영광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아가씨께서는 세가를 떠났습니다. 즐거운 표정이었습니다.”

“잘됐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떠났으니. 이리 급박하게 돌아갈 줄은 몰랐군. 내 책임일세.”

“주군, 아가씨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괴로워하실 수도 있습니다. 세가를 떠난 뒤에 주군께서……!”

“그래서 자네가 있지 않는가. 다행이구나. 호월위장, 앞으로 나 대신 그 아이를 부탁하네.”

“……네. 소신의 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아가씨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자네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놓이는군. 그만 가보게나. 내 죽음을 보이고 싶지 않네.”

“주군…….”

문백구는 눈물을 참고, 가주를 향해 인사했다.

스윽.

“그가 오는군.”

백리천강은 표표한 모습으로 마지막 인사를 건넨 가신을 지나쳤다.

그 끝자락에서, 주룡군장 호거아가 단월검을 든 백리천강을 맞이했다.

“백리 형, 오랜만이외다.”

“낙검, 자네와 이렇게 만날 줄이야.”

“그러게 말이외다. 난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소. 항상 사리에 밝았던 분이 탐욕을 부리다니.”

“이미 지나간 일을 말하면 뭐 하겠는가. 그만하세.”

“알겠소.”

저벅. 저벅.

두 사람이 검을 들고 서로를 향해 걸었다.

“마지막을 그대가 함께해서 고맙군.”

스팟-

백리천강이 단월천수검법의 극성을 단번에 펼쳤다.

호거아를 향한 단월검의 검기.

물 위에 비친 달그림자를 일검에 수십 개의 조각으로 베어내는-

단월만각의 극의가 펼쳐졌다.

마치 백광의 불빛처럼, 수십 개의 단월검기가 호거아를 향해 쏟아졌다.

팟! 팟! 팟!

백리천강의 전신은 하늘 위의 달마저도 자를 수 있을 만큼 예기가 뭉쳐 흘렸다.

백색 눈동자.

번쩍.

백리천강의 안광이 폭발하며, 단월검기가 마치 폭죽이 사방으로 터지듯, 수십 조각으로 화려하게 퍼져 나갔다.

‘단 한 수에 목숨을 걸었다.’

그 한 수에, 호거아는 물러설 수도 없었다.

백리천강은 작은 미련조차 남기지 않았다.

‘백리 형의 뜻을 알겠소.’

그렇다면 그 또한, 그가 할 수 있는 최강의 무공으로 상대하는 것이 예의일 터.

“낙우천장(落雨天障).”

수천 갈래의 검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호거아의 검이 단월검기를 하나씩 부수며 백리천강을 향해 떨어졌다.

쿠구구구구구구구-

수십 개의 검기가 백리천강의 신형을 뚫고 바닥에 박혔다.

“……백리 형, 어찌 검을 거두었소?”

“후후…… 내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소이까.”

털썩.

백리천강은 무릎을 꿇었다.

그의 머리와, 손에 들린 단월검이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끝났…… 구…… 나.’

백리세가의 가주, 백리천강의 죽음.

찬란한 역사를 지닌 산서성의 강자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날이었다.

* * *

헉헉…….

백리세가를 몰래 빠져나가는 두 명의 인물.

‘젠장……!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백리천기가 천에 싼 물건을 가슴에 꼭 안고서 전력으로 내달렸다.

“헉헉, 아버지, 잠시 쉬고 가는 것이……!”

“알…… 겠다.”

전쟁터에서 충분히 빠져나왔다고 생각한 백리천기가 헉헉대는 아들을 보며 속도를 줄였다.

“헉, 허억, 멍청한 놈들!”

용병림이라면 그래도 비벼볼 거라 생각했건만!

예상이 빗나갔다.

그들은 무림맹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 이제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일단 여기를 빠져나간 뒤 생각을 해보는 게 좋겠다.”

“…….”

백리조는 불안한 듯 뒤를 자꾸만 돌아보았다.

‘그래도 무림맹인데…….’

백리조는 그들이 백리세가를 완전히 멸문시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저들이 가주를 죽였다고 해도, 백리씨 자체를 완전히 멸문시키진 않을 것이다.

그래, 설마 씨를 말리기야 하겠어?

백리조의 마음이 갈등으로 심하게 흔들렸다.

‘맞아. 난 아버지의 말만 따라 들었을 뿐이야. 내 잘못은 없어.’

구천신품은 백리세가에 몇십 년 동안 있었지만, 아무도 그 비밀을 풀지 못했다.

당장 있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중원에 구천신품은 한 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를 준다 해도…… 언젠가 또 다른 하나를 손에 넣을 수도 있다.

백리조는 백리천기의 가슴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차라리…… 저것을…….’

백리조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아버지. 우릴 무림에서 받아주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아니다. 굳이 정파가 아니라도 사파나 마도에 가면 된다. 충분히 우리를 받아줄 것이다.”

“남의 눈치를 보고 살아가자는 말입니까?”

“어쩔 수 없지 않느냐? 그래도 남부럽지 않게 제법 좋은 지위는…….”

‘망했다.’

백리조의 목소리가 차가워지며, 짜증이 물밀듯 밀려왔다.

백리세가에 있었다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즐기면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호흡이 편해진 듯하자 백리천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자꾸…….”

슈욱!

“억……?”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

‘으으윽…… 거…… 검이……?’

그의 내장을 뚫고 차가운 물건이 삐져나왔다.

“커어어억!”

스으으윽-

검을 뽑자 피가 떨어져 내렸다.

“왜, 왜……?”

“난 구차하게 살기 싫습니다. 구천신품을 무림맹에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럼 난 편히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파앗-!

백리조는 눈을 질끈 감고 검을 휘둘렸다.

처억-

백리천기의 피가 뿜어지며 백리조의 얼굴을 붉게 덮었다.

슥슥.

소매로 피가 묻은 얼굴을 닦았다.

“죄송합니다. 아들을 위해 좋은 일 하셨다고 생각하십시오.”

몸에 붉은 피가 잔뜩 뿌려진 백리조는 바닥에 쓰러진 백리천기의 몸을 뒤졌다.

‘이, 이것만 있으면…….’

“클클클, 완전히 호로자식이구만.”

“누구냐?!”

소스라치게 놀란 백리조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검을 뻗었다.

팔이 거의 무릎까지 닿을 정도의 괴인.

게다가 머리카락 또한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당신은…… 누구요?”

“나? 무림에선 날 괴동이라 하지.”

괴동(怪童) 장약금.

백리조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사음문……! 사파의 괴물이 눈앞에 있다니……!’

“왜……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백리조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크큭, 네놈의 목.”

* * *

백리천강과 백리천중이 죽었다.

백리세가의 삼분의 이 또한, 목숨을 잃었다.

백리십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백리묵은 주룡군장 호거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털썩.

백리세가의 깃발이 무너졌다.

무릎을 꿇은 그들의 앞으로, 무림맹 군사의 명이 떨어졌다.

십 년 동안 봉문에 들 것이며, 백리세가의 이름으론 면산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결국 치욕을 받아들였다.

* * *

산서성 백리세가의 상황은 중원 무림으로 퍼져 나갔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굵직한 결전.

특히 용병십군 오왕군 마축동과 걸협오성의 후개 남하림의 대결은 그날의 백미였다.

용병십군 마축동은 절대상무위의 고수.

그를 쓰러뜨린 후개 남하림의 위명은 이제 중원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퍼져 나갔다.

스윽-

백리묵은 시체를 확인하기 거적을 들어 올렸다.

시체 두 구의 정체는 백리천기와 백리조.

썩은 피 냄새가 올라왔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을…….’

백리묵은 인상이 구긴 채로 시체를 바라보았다.

백리천기의 사인과 백리조는 달랐다.

특히 백리천기는 무방비 상태에서 죽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백리조의 죽음은 검이 아니라 조법 때문.

죽은 그들의 몸에서 구천신품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맞습니다.”

“말도 안 나오는군. 자식이 아버지를 죽였소.”

“할 말이 없습니다.”

“구천신품을 훔친 자의 무공은 사파의 무공이오.”

“…….”

“결국 백리세가에서도 가지지 못할 것을 왜 욕심냈는지…… 쯧. 비록 구천신품은 찾지 못했지만, 무림은 이번 계기로 확실히 깨달았을 것이오. 무림맹의 명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말이외다.”

호거아는 비록 구천신품은 찾지 못했지만, 이번 임무 결과에 만족했다.

그는 무림맹으로 떠나기 전 군사의 명을 떠올렸다.

“중원에 무림맹의 존재가 어떠한지 명확하게 알릴 필요가 있겠소. 십대세가도 멸문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지. 호거아께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해 주시오.”

구천신품이 정말 대단한 물건이었다면, 이십 년 전 이미 무림맹에서 거두어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군사가 내린 두 번째 명은,

“후개, 그 아이가 어떠한 인물인지 보시오.”

‘……엄청난 녀석이 되었다. 똑똑한 줄은 진작 알았지만.’

오군왕 마축동을 꺾은 남하림은 겨우 약관의 나이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네 명 또한 다섯 살 많은 이휘연을 빼고는 남하림과 나이가 같았다.

‘군사는 왜 이 녀석을 특별히 살펴보라고 한 거지?’

어차피 후개는 정파에 속한 개방의 제자.

얼마든지, 언제든지 제재할 수 있다.

‘아니면 군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무림맹 군사의 속마음은 무림맹주조차 알지 못할 정도다.

한동안 고심하던 그의 시선이 사람들 사이에 모여 있는 남하림을 주시했다.

걸협오성은 내원의 끝에 모여 있었다.

남하림은 살아남은 백리세가의 일원들이 두 구의 시체를 수습하는 장면을 보는 중이었다.

“결국 저들도 얻지 못하고 죽었군.”

“누가 죽였을까?”

성철각이 물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쁜 놈이겠지.”

“부장 말이 맞아. 워낙 동네방네 구천신품에 대해서 떠들어대니 어디서 누가 왔는지 알 수가 있나.”

“확실한 건, 무림맹에선 구천신품에 대해 관심이 없군. 저들은 구천신품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

“……정말 그렇겠네. 하긴 중요한 물건이었다면 예전에 무림맹에서 차지했을 거야. 하림 형, 맞지?”

“아마도.”

“백리세가가 운이 없었어. 무림맹에선 본보기가 걸리기를 기다렸던 건데 말이야.”

당무독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중원 무림 문파는 무림맹의 명을 함부로 거역할 수 없을 거야. 본 방도 마찬가지겠지?”

“이번 일이 안 좋은 선례가 되어버렸어. 앞으로 문파들이 활동하는 것도 무림맹이 제재할지 몰라.”

무림맹의 힘이 강하면, 중원 각 문파의 움직임은 좁을 수밖에 없다.

반면 각 문파의 힘이 강해지면 무림맹의 힘이 줄어들었다.

“하림 형.”

팽유도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혹시나 해서 알아봤는데요. 백리 소저는 싸우기 전에 떠났다고 해요.”

“……다행이네.”

마음 한편에 걸려 있던 가시가 사라졌다.

“혼자 사라졌다고 하던데. 무림은 정말로 위험한 곳이잖아요.”

“아니, 알아서 잘할 거야. 제대로 다짐한다면 말이지.”

“그래도 여인 혼자서 무림을 나선다는 건 힘들지 않겠어요?”

남하림은 고개를 저었다.

“혼자가 아닐 거야. 누군가 주위를 지키고 있을 게 분명해. 걱정 안 해도 된다.”

남하림은 백리희가 잘할 것이라 생각했다.

스스로 헤쳐 나가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으니까.

* * *

백리세가는 무림맹 산서총부에서 운영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모든 일이 끝난 후.

한 무리의 개방도들이 팔자걸음으로 백리세가 정문에 도착했다.

“크으응.”

순간 훅 올라온 냄새에 문 앞에 선 무림맹 무인이 코를 막았다.

휙!

거지 하나가 개방의 신패를 자랑스럽게 꺼내 들었다.

“무, 크흡, 무슨 일이오?”

“본 방의 후개 님을 만나뵈러 왔소.”

부양분타 삼결 현구가 목소리에 힘을 주며 외쳤다.

요즘 들어 중원 무림에 나온 방도들의 어깨가 한 뼘이나 솟아올라 있었다.

“안에 들어가 보시오.”

“고맙소이다!”

현구의 뒤로 열 명 정도의 방도들이 우르르 뭉쳐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그들의 존재는 단번에 눈에 띄었다.

‘크크큭, 우리를 보는 시선들이 달라졌어!’

예전 같으면 무림맹 무인들이 있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었다.

안으로 들어갔어도 이유 없이 서너 번은 잡혔고.

그런데 지금은, 인상은 쓰지만 누구 한 명 그들을 저지하지 않았다.

씨익-

현구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후개 님은 대단하시군.’

안으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뒤에서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본 방의 방도가 여긴 무슨 일입니까?”

휙!

‘히야, 걸협오성 님이시다!’

소문으로만 듣던 헌앙한 모습!

현구를 필두로 한 개방도들은 얼른 다섯 명 앞으로 뛰어가다,

‘아닌가……? 비단옷인데……?’

순간 멈칫하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본인이 남하림이오.”

“앗, 죄송합니다. 후개 님을 뵙습니다.”

“후개 님을 뵙습니다!”

현구를 따라 나머지 방도들도 재빠르게 소리쳤다.

“부양분타에서 왔습니다. 현구라 합니다.”

그의 허리에 세 개의 자루 매듭이 매달려 있었다.

“분타주군요. 부양이라면 제법 거리가 있는데 무슨 일입니까?”

“개방 본 방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나에게?”

“후개 님이 아니라 한심걸 님 앞으로 온 서신입니다.”

“서신을 주시오.”

이휘연은 서신을 받았다.

“…….”

부르르-

서신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휘연 형, 무슨 일이야?”

“사부…… 사부님께서 편찮으신 모양이다.”

“휘연 형의 사부님이시라면…… 무당파에 계신다는 분?”

남하림이 이휘연에게서 서신을 받아 다시 읽어 내렸다.

#NAME?

남하림은 서신을 곱게 접었다.

“가자.”

“…….”

“휘연 형의 사부님이시면 우리에게도 사부님이나 마찬가지야. 그렇지 않아도 무당산에 가서 한 번 뵙고 싶었는데 잘됐네.”

“부장.”

이휘연은 바로 무당산으로 가자는 남하림의 말이 고마웠다.

“우리들은 곧바로 무당산으로 가겠다고 본 방에 연락해 주세요.”

“넵. 후개의 명을 받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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