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백리천중 찾아오다
백리세가에서 찾고자 했던 게 사람이 아니라 구천신품임을 깨닫자, 오종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천하당에 모인 개방의 주요 인사들은 아무도 말문을 열지 못했다.
스윽.
분기를 추스린 오종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남하림부터 이휘연, 당무독, 성철각, 팽유도의 어깨를 한 명씩 자랑스럽게 두드렸다.
“수고했다. 나머지는 우리가 맡을 테니 너희들은 돌아가서 편히 쉬어라.”
“네,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남하림과 네 명은 인사를 한 후 천하당을 나섰다.
주작남지로 들어서는 도중에도 특외부를 향한 환영 인사가 이어졌다.
갈영 분타주가 전해준 말에 다들 큰 감동을 받은 것도 있었고,
항상 퉁명스러운 놈이지만, 오 년쯤 지나자 남하림이 보이는 것만큼 인성 없는 놈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기 시작한 점도 있었다.
뒤뚱뒤뚱.
멀리서 오 척 단신에 두꺼운 허벅지를 가진 부종 또한 특외부를 향해 반갑게 다가왔다.
이제 그는 신입생이었던 남하림과 특외부 네 명을 자신의 손으로 교육시켰다는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덥석!
그는 남하림의 몸을 두꺼운 팔로 덥석 껴안았다.
“남 부장! 어서 오게나. 이번에 고생 많이 했다고 들었어!”
스멀…….
남하림은 얼른 숨을 멈추었다.
“욱, 부종 사범, 머리 언제 감았어요?”
부종의 정수리에서 올라온 머리 냄새가 코에 닿았다.
“어? 얼마 전에 감았는데? 달포가 지났나?”
“썩은 내가 진동을 해요. 아 진짜, 제가 좋은 창포를 줬잖아요.”
“아까워서 잘 숨겨두었지. 나중에 삶아서 머리 감을게.”
“에이, 진짜…….”
부종은 신경질을 내는 남하림이 밉지 않았다.
“캬하하하!”
툭! 툭! 툭! 툭!
부종은 남하림에게서 떨어진 후 돌아가면서 격정적으로 네 사람의 등을 두드렸다.
“하하! 네놈들은 내 손을 지나간 놈들 중에서 최고지. 내가 요즘 네놈들 땜에 산다니까!”
“부종 사범님, 신입생들이 많이 들어오나요?”
“유도야, 이젠 너무 많이 신청을 해서 귀찮아 죽겠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수련관에 한번 와보는 건 어떠냐?”
“수련관에요?”
“애들이 걸협오성이 궁금하다고 어찌나 성화인지…… 안 바쁘면 얼굴이라도 잠시 보여주고 가라.”
“헤헤, 알았어요! 시간 되면 갈게요.”
“고맙다, 고마워.”
부종은 팽유도를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부 사범, 그만 갈게요.”
“그래, 그래. 푹 쉬어라.”
부종은 주작남지 끝으로 사라지는 그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덜컹.
팽유도가 앞서 문을 열었다.
“음…… 좋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 편안함이 바로 느껴졌다.
털썩.
평소대로 각자 자신의 자리에 앉아 그동안의 모든 긴장을 내려놓았다.
“역시 우리 집이 제일 편안해.”
“하림 형 말이 맞아요.”
스윽.
당무독은 앉은 채로 길게 드러누운 남하림을 돌아보았다.
“부장, 방주님께서 엄청 화가 나신 것 같던걸. 그런 모습 처음이야.”
“어…… 나도.”
성철각도 같은 생각이었다.
“모든 것을 버리신 분이니까 당연히 탐욕이 전혀 없겠지. 그런 분께서 백리세가가 찾던 물건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화가 안 날 수가 있나. 원래 있는 놈들이 더 욕심이 많거든.”
“부장, 백리세가뿐 아니라 그때 관여한 세가들이 많잖아. 혹시…… 한두 개가 아니지 않을까?”
“그들 모두가 백리세가처럼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확실히 얼마나 중원에 숨겨져 있는지는 모를 일이야.”
남하림의 말처럼 어느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다.
스윽.
남하림이 품 안에서 동경을 꺼냈다.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은 방주 오종에게 준 가짜가 아니라 진품인 동경이었다.
당무독은 진품을 들고 있는 남하림을 보며 궁금한 게 있었다.
“부장, 가짜를 방주님께 드려도 괜찮아?”
“아마도.”
“이유가 있지?”
“뭐…… 내가 많은 사람을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릴 때부터 아버지 밑에서 사람에 대해 많이 공부해서 아는데, 방주님처럼 깨끗한 분은 안 계셔.”
“그게 무슨 말이야?”
“내 예상대로라면 방주님은 그걸 돌려줄 거야.”
“누구한테? 혹시 백리세가?”
“그렇겠지.”
정확히 따지면 동경은 백리세가의 물건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분란을 일으키는 물건을 훔쳐와 그렇게 오랫동안 숨기다가, 이제 와서 당당히 주인이라 요구하는 이들에게 넘기는 건 너무 찜찜했다.
‘하지만 방주님은 넘기실 테지. ……정말 이게 뭐라고.’
남하림은 누운 상태에서 동경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흐흐.”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팽유도가 얼른 돌아보았다.
“하림 형, 왜 웃어?”
“동경을 계속 보고 있으니…….”
“헛, 이상한 게 보여? 역시 안에 뭔가 있어?”
“동경 속에 내가 너무 잘생긴 것 같아서.”
“……아, 그렇구나.”
“이런, 유도야, 부장이 갈수록 심해지는데 어쩌냐.”
당무독과 팽유도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맞아. 부장은 정말 잘생겼어. 내가 지금까지 본 사내 중에서 최고야.”
“크, 역시 철각의 눈이 제일 높다니까. 고마워.”
“하하, 당연한 건데.”
성철각이 순진하게 웃었다.
벌떡.
히히 웃던 갑자기 남하림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앉았다.
“아무리 봐도 단순한 동경 같아. 전승 아저씨가 해체해서 완전히 살폈는데도 이상한 점이 없다고 했거든.”
구천신품이라 불리고 있었지만 남하림의 손에 들린 동경은 구천마제가 사용했던 물건일 뿐이었다.
남하림은 이런 물건을 중원인들이 왜 귀한 물건으로 여기는지 정말 의아했다.
스윽-
고개를 슬쩍 흔든 남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나 욕탕으로 걸어갔다.
“하, 이건 욕조 앞에 걸어놔야겠다. 그렇지 않아도 동경 하나가 필요했는데 잘됐네. 나 먼저 씻는다.”
성철각은 욕탕에 들어가는 남하림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멋지다. 구천신품을 욕조에 두고 사용할 생각을 하다니…… 부장은 확실히 우리와는 생각하는 게 다른 사람이야.”
“그래서 재밌잖아요.”
팽유도가 얼른 대답을 했다.
“재미있기도 하지만, 오 년 동안 겪었던 부장을 생각해 봐. 방주님은 모든 것을 버리신 분이라 욕심이 없다면, 부장은 욕심을 초월한 사람이야. 얼마나 돈이 많은지 죽을 때까지 펑펑 써도 못 쓰고 죽을 것 같다고 하잖아. 크, 이거야말로 새로운 깨달음의 경지가 아닐까?”
당무독의 말에 세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욕탕 안에서 남하림의 목소리가 울렸다.
“밖에 내 욕하는 거 아니야? 귀가 왜 이리 간지럽지?”
“……!”
* * *
개방에 걸협오성이 왔다는 소문은 하루가 지난 후 개봉 전체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쿵! 쿵! 쿵!
거친 발소리를 내며 협의문으로 다가오는 무리들.
백리세가의 무인들이었다.
‘소문이 빨리도 퍼지는군.’
백리세가의 삼장로인 고검수천(高劍秀天) 백리천중.
빠르게 걷는 그의 걸음걸이 뒤로 상의 자락이 휘날렸다.
‘보통 기세가 아닌데…….’
백리천중은 굳은 인상으로, 마치 목숨이 걸린 결전에 들어선 사람처럼 협의문에 도착했다.
척.
강단구가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고검수천님을 뵙습니다.”
“걸협오성이 왔다고 들었다.”
“네. 어제 도착했습니다.”
“잘됐군. 들어가서 그들을 만나볼 수 있나?”
“…….”
강단구는 움직이지 않았다.
방주 오종의 명을 받았다.
“본 방주의 허락 없이 외부인은 어느 누구도 협의문을 들어올 수 없도록 하라.”
스윽.
강단구는 허리를 숙이며 방주 오종의 명을 그대로 전했다.
“송구합니다. 방주님의 허락이 계셔야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흥. 개방에서 날로 먹겠다는 말이군.”
강단구는 일단 안심했다.
‘휴우, 이 정도면 다행이네. 길길이 날뛸 줄 알았는데…….’
백리천중은 화를 내서는 안 될 문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 안에 연락을 하라.”
“알겠습니다. 방주님께 전언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강단구는 다시 한 번 더 허리를 숙인 후 돌아섰다. 그러고는 얼른 수하를 보내 협의문의 상황을 알리려 했다.
‘헉……!’
그때.
멀리서 협의문으로 나오는 다섯 명이 보였다.
‘아, 망했다. 저놈들은 하필 오늘 아침 일찍부터 나타나고 지랄이냐.’
강단구는 안절부절못하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필! 왜! 지금! 나오냐고!
주룩.
등과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강단구는 어색하지 않게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마주 오는 남하림을 향해 얼굴을 찡그리고 중얼거렸다.
“야아…… 드르…… 그르…….”
하지만 그의 눈물겨운 노력은 소용이 없었다.
번쩍!
남하림은 손을 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강 위걸장님! 왜 이렇게 땀을 많이 흘리세요? 요즘 몸이 안 좋아요?”
“어…… 그게…….”
“밖에 나가는 김에 몸보신 약을 지어야겠네요.”
“어어…… 고맙긴 한데…… 제발 그냥 돌아가…….”
스윽.
하지만 남하림은 이미 협의문에 서 있는 인물들을 본 상태였다.
“저들 때문에 그래요?”
“부장, 백리세가야.”
당무독이 고개를 내밀며 대답했다.
“그래? 엄청 무섭게 생겼군.”
“어? 저분은…….”
그들 중 한 명이 낯익은지 팽유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유도, 아는 사람이 있어?”
“고검수천 어르신 같아요. 백리세가에서 성정이…… 제일 불같은 분이라고 했어요.”
오래전에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인상이 깊었는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오호, 재밌겠는데……?”
사악하게 웃는 남하림을 보면서 반대로 강단구는 똥줄이 탔다.
‘이놈아! 넌 재미있겠지만 난 죽을 맛이다!’
인귀항이 처음 왔을 때도 협의문에서 남하림과 마주쳤다.
어쩌면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가 건수 걸리겠다 싶으면 나오는 게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하아, 이놈 때문에 심장이 약해져서 오래 못 살겠다.’
“걱정 마세요. 조용하고 얌전하게 지나갈 테니까요. 심장약도 챙겨 드릴게요.”
전혀 믿을 수 없었다.
‘난 그 말이 더 무섭다. 아니, 내 심장은 어떻게 안 거야?’
강단구는 바짝 긴장한 채 남하림과 네 명의 뒤를 따랐다.
슥.
인귀항이 허리를 숙인 채 백리천중에게 아뢰었다.
“고검수천님, 저 녀석들이 걸협오성입니다.”
“저놈들이…… 생긴 대로 특이한 놈들임엔 틀림없군.”
인귀항도 긴장했다.
잠시 동안이지만 그 또한 남하림이란 인물을 충분히 겪었다.
그가 아는 남하림은 보통사람과 달리 존장에 대한 예를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백리천중은 그와는 전혀 반대다.
예를 누구보다 중시했다.
백리세가에서도 젊은 세가인들은 그의 그림자만 봐도 천 리 밖으로 도망갈 정도.
‘제발 무사히만 지나가라.’
척!
남하림이 협의문에 멈춰 섰다.
그 뒤로 바짝 붙은 네 명이 호위하듯 자리를 잡았다.
백리천중의 시선이 남하림을 빠르게 지나갔다.
광채가 나는 깨끗한 이마.
빛이 날 정도로 단정하게 빗은 머리카락.
미간에서 인중까지 사내답게 뻗어 내린 콧등.
백리천중이 먼저 한마디를 툭 던졌다.
“낯짝은 계집애들이나 울리게 생겼군.”
“당신을 보니 단월가에 울릴 계집애라도 있을지 모르겠군요.”
남하림의 대꾸에 강단구와 인귀항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헉……!’
‘커억!’
단월가는 백리세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허, 하하하하!”
백리천중은 어이없는 시선으로 남하림을 보며 대소를 터뜨렸다.
“이런 무례한 놈이 있나? 당신이라니…… 어른이 앞에 있으면 인사를 먼저 해야 할 게 아니더냐? 개방에서 그렇게 가르치더냐?”
“백리세가도 만만치 않은데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만나자마자 헛소리하도록 가르친 모양이죠?”
“이놈이…… 지금 뭐라고 하는 것이냐? 말투를 보니 못 배운 놈이 틀림없구나. 거지 놈들이 다 그렇지.”
“지금 하는 말은 많이 배워서 나오는 사람 말투인가요? 선생이 누구신지 몰라도 한참 잘못 배운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말싸움에 불이 붙자 남하림의 뒤에 서 있던 네 명은 여유롭게 전음을 주고받으며 구경을 시작했다.
[크흡, 큽, 저 어르신, 혈압 올라서 쓰러지겠어.]
[부장의 구공(口功)은 신의 경지에 올라선 것 같아.]
[우리 부장 형, 진짜 믿음직스럽다!]
[재밌군.]
울컥.
백리천중의 눈이 점점 커지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안 되겠다. 네놈의 사부가 누구더냐? 내 필히 네놈의 잘못을 꼭 따져야겠다.”
“항상 뭔가 안 되면 부모나 사부를 찾더라. 우리 사부님은 바빠요.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날 이유도 없고. 그러고 보니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크윽……!”
백리천중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순간 노기를 참을 수 없었는지 그가 손을 뻗어 백리세가의 비전 천수장(天守掌)을 펼쳤다.
타타타타!
“비겁하게 기습을 하시네!”
남하림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강룡십팔장을 뻗어 반격했다.
우르르르르-
콰아아아앙!
강 대 강.
두 장법이 두 사람 사이에서 부딪히며 서로를 밀어냈다.
주르르륵-
‘허어…… 이놈이……!’
백리천중은 남하림이 펼친 무공을 단번에 눈치챘다.
‘강룡십팔장을 이렇게 빨리 시전하다니……?’
강룡십팔장은 중원제일의 강공인 장법이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바로 내력을 응집한 후 펼치기까지 빠르게 시전할 수 없다는 점.
그런데,
남하림은 천수장이 뻗는 순간을 본 후 곧바로 강룡십팔장을 펼치며 대응했다.
“네놈 사부가 누구냐?”
“왜 자꾸 사부님을 찾아요? 아침잠이 많으신 분이라 주무신다니까요. 우리 사부님과 친해 보이지도 않는데…… 성격 더러운 사람은 안 좋아하시거든요.”
“이런 아래위도 모르는 불한당 같은 놈이 있나!”
대화를 할수록 백리천중의 머리끝에 김이 올라오는 듯했다.
스윽.
인귀항이 얼른 남하림 앞으로 나섰다.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남 대협, 이분은 본 세가의 고검수천 백리천중 어르신입니다.”
“그래서요?”
“그게…… 남 대협에게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물어볼 게 있어 찾아왔소이다.”
“그럼 진작 그렇게 말하면 되는 게 아닙니까? 조용히 지나가는 사람에게 왜 보자마자 시비를 거는 것이오?”
“…….”
인귀항은 슬쩍 백리천중의 눈치를 살폈다.
“흠, 인 대주 얼굴을 봐서 나도 이만하죠.”
“고맙소이다.”
“그럼 볼일 보고 가시오.”
“그게 무슨……?”
“난 할 말도 없고, 방주님께서 당부를 하셔서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굳이 나랑 대화를 나누고 싶으면 방주님께 허락을 맡으면 될 것 같소. 그럼, 볼일이 바빠서 이만.”
남하림은 그들을 슥 지나쳤다.
“이놈! 어딜 내빼려고 하는 것이냐? 냉큼 앞에 서서 내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할까?”
백리천중의 목소리는 여전히 노여움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소리 지르면 목 안 아프세요? 난 아직 젊어서 잘 들리니까 소리 안 질러도 됩니다.”
“네놈이 강룡십팔장을 익혔다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구나. 오늘 기필코 네놈에게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백리천중은 제대로 천수장을 펼치기 위해 팔 성의 내력을 끌어 올렸다.
“클클클…… 거참…… 아침부터 못 볼꼴을 보는군.”
그때, 남하림의 뒤에서 끌끌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부님,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캬하하, 자는데 귀가 자꾸 간지러워서 나왔다. 저 영감탱이가 나를 계속 찾는 모양이구나.”
백리천중은 팔자걸음으로 다가오는 장두철을 보며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개방의 인물들 중 가장 상대하고 싶지 않은 거지가 나왔다.
“어이, 천중. 오랜만일세.”
“…….”
“아까는 내 제자에게 잘도 말하더만 어째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는가. 한마디 해보게나.”
“항걸. 저놈이 네 제자냐?”
“어때? 놀라 자빠지겠지? 워낙 뛰어난 녀석이라서. 클클클.”
“난 저 녀석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묻고 싶은 건 알겠는데 우리도 절차라는 게 있지. 먼저 방주께 가서 허락을 받아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구먼.”
“…….”
백리천중은 한 치 눈앞까지 다가온 장두철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곧 콧구멍으로 전해져 오는 악취에 고개를 뒤로 물렀다.
“흐, 혹시 구천신품 때문에 온 건 아니겠지?”
속삭이는 장두철의 목소리에 백리천중의 눈동자가 흔들거렸다.
“역시…… 클클, 그 문제라면 내 제자를 만날 필요는 없겠구만.”
“역시 개방에서 가지고 있나?”
“궁금하면 직접 방주를 만나보든지. 여기서 시끄럽게 굴지 말고.”
툭.
장두철은 뒤로 물러나기 전 가볍게 백리천중의 가슴을 쳤다.
“약았어. 아니, 음…… 뭐라고 할까? 물건을 몰래 빼돌리다니 백리세가에 실망했다고 해야 하나?”
“…….”
백리천중은 대꾸를 하지 못했다.
구천신품을 몰래 가지고 나온 건 사실이니까.
“너희들은 볼일 봐도 된다. 나중에 부를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일찍 들어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사부님, 혹시 드시고 싶은 건 없으세요?”
“클클, 개천교 다리 위에 파는 만두가 맛있더라.”
“알았어요. 나중에 뵐게요.”
남하림은 인귀항의 옆으로 다가섰다.
“아 참. 부가주께선 그때 볼일을 잘 마쳤나요?”
“그런 걸로 알고 있소이다.”
“잘됐습니다. 그놈을 만나 보니 별 볼 일 없던데 부가주가 사람 보는 눈이 낮아서 걱정이군요. 쯔쯔…… 앞으로도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될 텐데.”
“…….”
“하기야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별 뜻 없으니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길.”
“아…… 알겠소.”
남하림은 그를 지나쳐 협의문 밖으로 떠나갔다.
스윽.
인귀항은 조심스럽게 옆을 보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노기가 가득한 백리천중이 아니었다.
‘부가주님…….’
백리천중의 뒤로 늘어선 일행 중 남장을 한 여인.
백리희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협의문에서 점점 사라지는 남하림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