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물 (5)
청노와 암반.
두 문제를 두고서 현종휘가 한 생각은 아주 간단했다.
“저 마인은 선배님들께 맡기겠습니다.”
믿고 맡긴다.
이곳에 있는 십대고수들과 양대호법, 유성한에게 거하고 있는 신비 고수라면 청노쯤은 간단하게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은 그저 입에 담은 대로, 암반을 부수는 것을 행하면 된다.
‘모든 걸 내가 할 필요는 없어.’
백무량의 등 뒤를 보면서 늘 생각했다.
어째서 혼자서 모든 걸 하려고 하는 것일까?
다른 사람에게 조금씩 짐을 넘기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 생각은 여전히 현종휘 안에 존재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하니까.’
사람마다 질 수 있는 짐에 한계가 있다.
백무량은 그저 자기가 질 수 있을 만큼 들었을 뿐이었다.
그 짐이 천마라서 모든 걸 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들지 못한 것도 있었다.
현종휘는 그가 남긴 짐을 대신 들고자 했다.
“저는 저것을 부수겠습니다.”
“그래.”
누가 대답했는지조차 듣지 않았다.
현종휘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거대한 암반.
모산을 향해 낙하하고 있는 재앙을 향해 현종휘가 발을 내디뎠다.
발아래에서 청노와 무인들이 생사를 다투고 있는 소리가 들렸지만, 마음이 급박하거나 들뜨지도 않았다.
명정을 유지했다.
어떻게 해야 저 암반을 부술 수 있을까, 깊고 숙하게 고민하면서 운룡대팔식을 무의식중에 펼쳤다.
퉁, 퉁, 퉁.
조금씩 위로 더 솟구칠수록 발이 허공을 울리는 소리가 거칠어졌다. 내공이 금방이라도 바닥을 드러낼 듯 휘청거렸고, 눈앞이 아득했다.
그러나 발아래에 검해가 있었다.
천마와 싸우면서 물방울처럼 튄 공력 한 줌, 한 됫박이 태청신공을 운용하는 현종휘의 등을 떠밀어 주고 정신을 청량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가능했다.
“……후우.”
조금 더, 크게, 아래는 바라보지도 않고서 계속 위로.
검을 휘두르면 닿을 정도가 되서야 현종휘의 운룡대팔식이 멈췄다.
그러나 쉴 수는 없었다.
의식을 놓치면 그대로 나동그라져서 죽어 버릴 높이였으니까.
이럴 때 의지할 수 있는 건 평생 동안 익히고 펼쳐 온 무공이었다.
삼보.
운룡대팔식을 펼치면서 쌓인 바람이 발아래에서 휘몰아쳤다.
백무량의 검해와 비교하면 손색이 있지만, 허공에서 자세를 잡기에는 충분한 바람이었다.
‘언젠가 이런 경험이 있었지.’
밤이 다 되어 가는 시각, 곤륜파의 수련장.
그때 백무량에게 비무를 청했었다.
상황이나 심기에 따라 싸우는 걸 주저해서야 무인으로 거듭날 수 없다고 말했었다.
막상 그 상황이 되니…… 유쾌하진 않았다. 압박감으로 흉부가 쪼그라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피하지는 않았다.
현종휘는 자세를 꼿꼿이 잡고서 암반의 밑면을 노려보았다.
마기가 침습하여 검게 물든 밑바닥.
한두 조각씩 떨어지는 돌멩이에 불길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저걸 맞아도 문제지만, 저게 떨어지면 백무량이나 침투조한테도 거슬릴 게 분명했다.
‘단번에 부순다.’
암반을 통째로 부수고, 먼 곳으로 밀어 버린다.
현종휘의 상단전이 크게 열렸다. 줄곧 답답하게 막혀 있던 심상이 희끄무레한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현종휘가 이루고자 하는 극치.
극치에 오르고서 행하려는 업.
그 모든 것이 단번에 꿰뚫리는 감각이었다. 열린 상단전을 한껏 펼치고자 눈을 열었다.
‘내가 펼쳤던 무학의 한계가 어디까지였지?’
곤륜의 절벽을 허물었던 균천관일.
분광뇌운결의 경력을 삼보와 운룡대팔식으로 극대화해서 펼쳤던 일격.
……그걸론 부족했다. 암반을 쪼개는 것은커녕 반도 쪼개지 못할 터였다.
그렇다면 더욱더 여는 수밖에 없었다.
‘찢어져도, 부서져도 좋아.’
한계를 넘은 행공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기혈이 터질 것처럼 꿈틀거렸고 정신이 몽롱했다.
그마저도 검해의 파편이 조금씩 도와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조님의 기운을 발판으로 삼아서, 더, 더…….’
분광뇌운결, 태청신공, 구천화우검, 삼보, 운룡대팔식…….
현종휘란 무인이 아는 모든 무학이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한데 그 방식이 백무량의 검해와는 달랐다.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부딪쳐서 물어뜯는 형국이었다. 언제든 상단전이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궁리였고 무리한 운용이었다.
그러나 현종휘는 멈추지 않았다. 코앞으로 낙하하고 있는 암반을 두고서 냉정을 잃지 않았다.
자기(自己)를 걸고서, 적공한 무학으로 이루려는 업을 위해서.
현종휘의 의지가 인간이란 껍데기를 부수는 순간.
“……아.”
탈각이 찾아왔다.
수없이 백열하는 시야 속에서 현종휘는 손안의 감각만을 믿었다.
“검, 오직 검이다.”
두 손으로 쥔 검에 공력을 때려 박았다.
단 한 초식에 정신을 담고, 업을 담고, 무학 전체를 담았다.
뿌드득.
손목이 시큰거리고 팔뚝이 찢어질 듯 아팠다. 감히 이런 걸 휘둘러도 되겠냐는 걱정도 순간 떠올랐다.
하지만 때를 놓치지 않았다.
탈각이 찾아온 순간을 붙잡고서 휘둘렀다.
그 찰나에 생각한 무학의 이름은…….
“검천경(劍天經).”
쩌적- 쿠콰콰쾅!!
암반이 여섯 조각으로 쪼개지고는 먼 곳으로 밀려 나갔다.
“됐구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현종휘가 전신의 힘을 풀었다.
그 모습을 본 침투조가 서둘러 현종휘의 몸을 받아 내기 위해 움직였다.
당연하지만, 청노는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
***
“보이냐? 네가 자신하던 권능이니 뭐니 하는 게 사라졌구나, 부하와 함께 말이야.”
백무량은 피식 웃으며 천마를 도발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듯 무심한 어조로 대꾸했다.
“제사장은 다른 사람을 구하면 되는 일이다. 대계에 변함은 없다.”
“네가 말하는 대계가 무엇이냐?”
“……등천(登天), 멸세(滅世).”
하늘에 올라 세상을 멸망시킨다.
어린 꼬마가 하면 아직 덜 여물었다고 웃어넘기겠지만, 천마가 말하니 달랐다.
그는 실제로 이루어 내겠다는 의지가 있었고 가능할지도 모를 강함이 있었다.
백무량은 혀를 차며 검을 쥐었다.
“역시 너 같은 놈은 천하에 존재해선 안 돼.”
검해로 펼친 균천관일과 호천풍연을 얻어맞았음에도 천마의 사지는 멀쩡했다.
오히려 주변에 널브러진 바위나 나무 따위가 무성했다.
그러나 백무량은 한 가지를 직감하고 있었다.
‘조금씩 깎여 나가고 있다.’
처음 마주할 때만 해도 피부가 찢어질 정도였던 마기가 조금씩 약해져 간다.
힘이 무한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천마가 오래 살았다고 한들 마인의 껍데기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백무량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그래도 참으로 다행이다.”
“……뭐라?”
“검해와 싸우기 전에 좋은 연습 상대가 되어 주고 있으니까.”
“……!”
천마의 표정이 구겨졌다.
백무량은 이미 자기를 이겼다고 여기면서, 천의와 맞서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천마에겐 그것이 몹시 역겹게 느껴졌다.
“천의 덕택에 목숨을 연명하였으면서…… 하늘과 싸우겠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그래, 네가 보기에 모순처럼 보이겠지.”
천마가 말하는 바를 백무량도 알았다.
이미 죽었던 놈 주제에 되살아나서는, 자기를 가로막는 꼴이 몹시 화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놈이 자길 살려 준 하늘과 싸우겠단다.
천마가 생각하기에 어처구니가 없을 터였다.
백무량은 피식 웃고서 말했다.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대화가 돼먹질 않는군.”
천마가 마기를 사방으로 퍼뜨리자, 백무량도 기수식을 취했다.
‘사연을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피차 길어질 뿐이다.
백무량은 검해를 모두 퍼냈다.
‘설령 이번 초식을 마지막으로 무공을 펼치지 못하는 몸이 될지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
어떠한 방법이든 하늘에게 대항하여 검해에 묶여 있는 선배와 사형을 구하고, 주연호까지 구해 낼 테니까.
고난은 이미 숱하게 겪어 보지 않았던가?
‘두려워할 것은 없어.’
파결, 천결, 해결.
검해를 다루는 세 가지 형식을 단번에 뒤섞어서 펼친다.
백무량은 백선신검의 상태를 살폈다.
도철이 봐준 것도 무색하게도, 천마와 여러 차례 부딪치다 보니 이곳저곳에 금이 갔다.
‘얼마나 버텨 줄지 모른다.’
백선신검의 한계를 알아차린 백무량이 보신경을 펼쳤다.
“자, 오너라.”
그걸 본 천마가 쌍마멸천장과 천마군림보를 동시에 펼쳤다.
꽈과광!!
모산이 크게 뒤흔들렸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큰 진동이었다.
백무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먼저 하산해라!”
“하지만…….”
위문엽이 머뭇거리는 목소리에 다시 한번 크게 외쳤다.
“어서!”
“……알겠소!”
등 뒤에서 현종휘를 부축하고서 자리를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백무량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이제야 제대로 싸울 수 있겠군.”
침투조까지 휘말릴까 봐 펼치지 못했던 마지막 초식.
검해가 천마의 마기에 대항하기 위해 크기를 부풀렸다.
콰르르르……!
망검을 비롯하여 역대 곤륜도가 축적한 모든 것, 무학의 바다인 검해.
그것을 모두 퍼내자 천마의 마기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백무량은 그것을 백선신검에 담고서 옛 기억을 반추했다.
-곤륜검해, 무명식.
백련교주와의 마지막 싸움에서 펼쳤던 무의식.
경지가 부족하여 이름조차 붙이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뭐, 그래도 거창한 이름은 필요 없지.’
종결식(終結式).
천마와 얽혀 있던 굴레를 끊는 데 이만한 이름이면 충분하지 않겠나.
백무량은 숨을 크게 머금었다.
가공할 만한 마기 때문에 어두운 장막이 펼쳐진 것처럼 보였지만, 두려움이나 망설임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너를 넘고서 하늘에 도전하겠다.”
“……너를 죽이고, 하늘을 찢어 버리리라!”
백무량과 천마가 부딪치는 순간.
쿠르르르……!!
모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온갖 흙먼지가 시야를 가리고 세상이 어둡게 물들었다.
시각, 촉각, 육감까지도 무의미한 찰나의 연속.
심적권청의 순간에 백무량과 천마는 무수한 합을 나눴다.
힘과 기교.
마인과 무인의 싸움이 무한히 계속되었다.
그러나 영원하지 않을 거란 건 서로 알았다.
“……크윽.”
“큭!”
천마의 상반신에 긴 검상이 그어지면, 백무량은 한쪽 다리를 절어야 했다.
집중이 흐트러지면 치명상으로 이어진다.
그 싸움에서 백무량이 우위에 있었다.
“구천화우검의 구초, 유천앙시.”
“……!”
검해가 별안간 양옆으로 갈라지며 수많은 무학을 드러냈다.
그건 백무량이 한때 익혔던 무학이기도 했고, 찰나의 번뜩임으로 만든 기예이기도 했다.
그 심상이 백선신검의 끝에서 그윽하게 펼쳐졌다.
“너를 죽일 초식의 이름이다.”
파스스…….
마침내 백선신검이 수백 조각으로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검해의 파도가 조각들을 삼키고서 천마의 전신을 찢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