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물 (1)
유성백은 깊게 심호흡했다.
그 숨결의 끝에서 심장이 거칠게 뛰는 것을 느꼈다.
생(生)이었다.
“……하.”
가벼운 숨을 몰아쉬는 것조차 은혜다.
혈액이 전신을 투과하면서 머리가 맑아지는 감각.
그 찰나 동안 칠성교주가 움직였다.
“한낱, 망령 따위가!”
“망령.”
유성백은 마물의 주구가 주절거리는 것을 곱씹으며 피식 웃었다.
“내가 망령이라면, 너는 썩은 시체다.”
느릿하게 검을 들었다. 그러나 손아귀에 실린 힘은 태산과 같았다.
삼단전의 합일, 천주.
유성백은 내력을 천주에 실었다.
어떠한 마기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지상에서 하늘을 떠받치듯이 굳건하게 뿌리박았다.
그러면서 속으로 감탄했다.
‘노력하였구나.’
죽는 순간, 남은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부양할 재산도 제대로 남기지 않았으면서 객지에서 갑자기 죽어 버렸으니까.
그러나 유성한이 열심히 단련한 육신과 삼단전을 보니…… 걱정은 기우였다.
‘무인답게 자라 주었어.’
동년의 유성백보다 낫다.
유성한의 육신은 아직 덜 자랐을지언정 집념과 용기를 먹고 강건했다.
그래서.
“후우.”
숨을 지극하게 내뱉었다.
검해의 심상에 있으면서 제대로 배운, 몇 안 되는 무학이었다.
다른 무인이 보기에는 그저 간단해 보일 뿐이지만, 유성백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미 완성된 무학을 몸에 품고 있으므로.
쩌적!
딛고 있던 땅이 움푹 패는 것과 동시에 유성백의 검이 휘둘러졌다.
주변에서 숨을 고르고 있던 위문엽이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건……!”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아미복호검의 무학이다.
그러나 강맹함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유성백이 은연중에 옆에서 지켜보면서 익힌 아미복호검은 복호가 아니라, 멸마에 가까웠다.
콰콰쾅!
검기가 벽력이 되고, 간단한 호흡조차 돌풍이 되는 경지.
경천동지할 유성백의 일 검에 칠성교주이 양팔을 교차했다.
“양팔을 내어 주더라도 여기까지 도달하겠다?”
가소롭다는 듯, 칠성교주를 비웃은 유성백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수로 대응했다.
“어디, 이건 어떨까?”
텁.
유성백의 좌수가 칠성교주의 멱살을 붙잡았다.
“……?!”
칠성교주는 깜짝 놀랐으나 도리어 기회라고 생각했다.
가까워지면 결국 마공을 익힌 육체가 더욱 강력하고, 상대의 정신을 어지럽힐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상대는 유성백이었다.
“그딴 잔재주가 통할 것 같으냐?”
천주를 이룬 무인은 몸뚱이 하나만으로 명검이라고 할 수 있다.
신검합일처럼 그럴듯한 단어와는 아예 달랐다.
적어도 유성백이 생각하기에는 ‘신검합일’은 멋을 내기 위한 단어였다.
합일이라고 칭하려거든, 수도를 내리치는 것만으로 금강석을 베어야 하는 것이 전제다.
유성백은 생전에 그것을 이룬 상승 고수였다.
“어디 얼마나 단단한가 볼까?”
유성백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꽈꽝!!
“커헉!”
칠성교주가 경천동지할 힘으로 땅에 때려 박혔다.
피를 한 됫박이나 토한 탓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 모습을 본 십대고수들이 제정신을 차리고서 일어났다.
-지금이 아니면 몰아붙일 수 없다!
유성한 안에 스며든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마교와 함께 싸울 동지인 건 틀림없었다.
하물며.
“꼬맹이가 다 해 먹는 걸 두고 볼 순 없지.”
위문엽은 입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 내며 전의를 다졌다.
그 모습을 본 유성백이 피식 웃었다.
“백무량이 돌아오기 전에 이놈은 우리끼리 처리하지.”
“우리가 다 끝내 놓자?”
“아니.”
유성백의 시선이 제단으로 향했다.
쉬지 않고 흘러넘치던 아지랑이가 멈춘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 후배 상대는 저기, 따로 있으니까.”
칠성교주를 상대하느라 힘을 빼게 할 순 없다.
하물며 칠성교주는 백련교주와 비교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설욕전이 되겠군.’
백련교주에게 패배했던 과거를 깨부술 기회다.
유성백은 몸을 빌려준 유성한에게 감사를 느끼며 검을 쥐었다.
***
한편, 무계봉신술 내부.
그곳에서 심천검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자(大字)로 누운 백무량을 쳐다보고 있었다.
“얼씨구? 뭐 하냐?”
“명상 중입니다.”
“퍼질러 누워 있는 게 명상이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도사게?”
“불가에는 그런 소리가 있잖습니까? 모두가 부처라고…….”
‘여기 너무 오래 있다 보니 미쳐 버린 건가?’
심천검은 어떻게든 해 보라는 듯, 주백천을 흘낏 곁눈질했다.
이에 주백천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백무량에게 물었다.
“얼마나 있었느냐?”
“뭐, 십 년부터는 안 셌지요.”
“……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심천검과 주백천은 무계봉신술의 기둥을 부수면서 시간이 길다는 걸 느끼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백무량은?
술자가 직접 지정한 대상의 시간은 어땠을까?
주백천의 표정이 굳었다.
“괜찮으냐?”
“괜찮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지루해서 이러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사형과 선배가 올 걸 알고 있었고요.”
백무량은 어딘가 힘이 풀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몸이 찌뿌둥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 말에 불안함을 느낀 심천검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래서 뭐?!”
“저랑 대련 좀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선배라면 알겠지만, 저 지금 내공 운용도 안 되니까…… 두려워하실 필욘 없습니다.”
왜 저렇게 말하니까 더 무섭게 느껴지는 걸까?
심천검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대련은 무슨 대련이야. 이제 하나만 부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어.”
“그러니까 더 해야죠. 이대로 나가면 감이 무뎌져서 제대로 싸우지 못할 겁니다.”
“아니, 내공을 못 쓰는 상대랑 어떻게 싸워?”
“……하하. 선배, 겁이라도 집어먹었습니까?”
백무량이 히죽 웃으며 자신을 도발했다.
한데 왠지 검을 섞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호승심이라는 게 완전히 꺾인 기분이었다.
‘이건 좀 이상한데?’
심천검이 자신의 감각에 의구심을 느낄 찰나에 주백천이 앞으로 나섰다.
“나라도 괜찮겠느냐?”
“사형이 선배보다 낫군요.”
“뭐 인마?”
심천검이 순간 울컥하여 말했지만, 백무량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홀로 수련하며 지냈던 고독을 털어 낸다는 기쁨에 젖은 듯했다.
“아, 이거 참. 검을 쥔 것도 몇 년 된 것 같은데.”
백선신검을 가볍게 말아 쥐는 모습에 여유가 있었다.
검이 아니라 젓가락을 쥐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심천검은 그 모습을 천천히 지켜보다가, 주백천을 만류했다.
“잠깐, 내가 해야겠다.”
“……?”
“주 후배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심천검이 앞으로 나섰음에도 백무량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여유로웠고, 어딘가 결핍된 사람처럼 보였다.
‘정말로…… 수백 년을 지낸 건지도 모르겠어.’
심천검은 속으로 백무량을 가늠했다.
무계봉신술을 이루는 기둥 대부분을 부수기까지 겨우 사나흘이었건만, 백무량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 모양이었다.
전과는 사뭇 다르다.
심천검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공을 운용해도 되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
주백천의 눈이 커졌다. 순간 두 도사가 미친놈처럼 보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공을 못 쓰는 사람한테 진지하게 하겠다는 사람이나, 마음대로 하라는 사람이나!”
“정말로 상관없을 것 같지 않냐?”
심천검은 백무량을 턱짓했다.
“저놈 표정을 봐라. 내가 내공을 쓰겠다고 하면, 예전에는 노발대발해서 별말을 다 했을 놈이 저러고 있잖으냐.”
“하지만…….”
“네 사제를 한번 믿어 봐라. 헛소리를 자주 하긴 해도, 실망하게 한 적은 없잖아?”
심천검의 물음은 주백천을 향했지만, 동시에 백무량에게 묻는 것이기도 했다.
“근거 없는 허세라면 뭐, 다시 봐야겠지만.”
“그럴 일 없습니다.”
백무량은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하수를 상대하는 듯한 모습에 자존심이 상한 심천검이 땅을 박찼다.
꽈앙!
마수를 단번에 짓눌러서 터트렸던 압력이 백무량을 향했다.
천근의 바위와 같은 내공이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백무량의 표정은 한없이 자유로웠다.
“이런 곳에 붙잡혀 있다고 한들, 아무런 내공이 느껴지지 않아도, 검해는 늘 함께 있었습니다.”
“……뭐?”
“이것을 알기까지 팔 년이 걸렸지요.”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그저 가볍게 오른손을 들었다가, 아래로 천천히 내렸다.
“파결(波訣).”
쏴아아아……!!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
시간만 무의미하게 흐르는 무계봉신술 내부에 세찬 파도가 밀려들었다.
검해였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될, 다다르지도 못해야 할 존재가 무계봉신술의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기류는 파문(波紋)이었고, 파동(波動)이기도 했다.
“뭐냐, 이건!”
심천검이 제자리에서 멈춰 서서 또 다른 백선신검을 휘둘렀다.
마수를 수십 마리씩 터트리던 압력도 백무량이 자아낸 파도를 밀어 내지 못했다.
오히려 심천검의 몸이 밀려 나가고 있었다.
“이런 건…… 내가 검해에 있으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 뒷말을 하지 못했지만, 백무량은 심천검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맛보기만 보여 줬습니다.”
“이게 맛보기라고?”
심천검이 순간 식겁하며 묻자, 백무량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진심으로 펼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칠성교주가 불쌍해지는군.”
“그놈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깥에 있는 동도가 무찔러 줄 테니까요.”
“허, 이젠 아주 천이통까지 깨쳤더냐?”
심천검은 농담을 던졌지만, 백무량의 대답은 그렇지 않았다.
“비슷하게 가능하죠.”
“…….”
마물을 홀로 쓰러뜨릴지도 모르겠다.
심천검은 숙원의 끝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
“됐다!”
청노는 제단이 서서히 무너지는 것을 보며 광소를 터트렸다.
“드디어 부활한다! 이제…… 칠성교주 따위는 필요 없다!”
천마.
마물.
지고의 이형(異形).
시대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린 만마의 주인이 제단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고오오…….
천하가 어두워졌다.
누구도 이기지 못했던, 물러나게 만드는 것이 전부였던 마물이 지상에 강림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무량은 말했다.
어두컴컴한 구름이 화창하게 개었을 때.
비로소 새로운 하늘을 맞이할 수 있는 법이라고.
쩌적!
허공에서 실금이 터졌다.
그와 동시에 칠성교주를 물리친 침투조 전원이 제단 앞에 도착했다.
“저거 봐라, 역시 늦지 않게 도착했군.”
유성백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리저리 터진 실금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천의를 이은 도사, 백무량. 이제 네가 나설 차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