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64화 (264/275)

봉인 (5)

***

정말 오랜만이었다.

모든 걸 잊고서 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라.

적을 코앞에 두고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어느 때보다도 안심이 되었다.

‘내가 있지 않더라도.’

누군가가 강호에 빛을 밝힐 것이다.

나의 뜻에 동조하는 고수가 무려 여덟이나 있었으니까.

그래서 마음이 놓였다.

마교의 술법에 당했으나 위기란 기분이 들지 않았고, 오히려 코웃음이 나왔다.

“칠성교주 그놈, 나 말고는 나머지를 아주 개무시한 모양인데.”

남천의 무공은 형을 부순 파격에 강점이 있고, 위문엽은 근본부터 달라진 아미복호검의 진정한 후예다.

하물며 낙매신검과 척준환, 양대호법은 어떠한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도가 고수로서 이곳에 섰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꺾이거나 무너지는 일은 없을 터였다.

현종휘와 유성한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아이들이라면, 잘해 줄 거야.”

확신이 있었다.

자신을 그토록 따랐고, 한때는 동경했으며, 지금은 앞지르기 위해 노력하는 둘.

그 둘이라면 자신이 없더라도 힘내 줄 것이다.

‘나도 뭐, 가만히 있을 순 없지.’

그냥 망연히 누가 구해 줄 때까지 주저앉아 있을 생각은 없다.

백무량은 머릿속에서 단전과 내공심법, 수많은 기혈을 지웠다.

그저 순수하게 근육을 쥐어짜듯이 움직였다.

“후우…….”

근육을 한 올 한 올 풀어 내리는 작업.

지루하고 길었으나 백무량에게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었다.

그렇게 몸을 완전히 풀고 나서는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조금씩 방향을 달리해서 내리치고, 숙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일종의 궁리였다.

‘마인을 상대로 할 때와 마물을 상대로 할 때의 검격은 완전히 달라야 한다.’

심천검을 비롯한 다른 선배들, 그리고 고대의 도사들이 왜 실패하였는가를 따져 보면 귀결되는 것이 있었다.

마물은 무인이 평생 상대해 보지 못한 규격의 괴물.

최대한 삼 층 전각의 규모라면 베는 방법이 다르고, 찌르는 것 또한 달라야 했다.

하물며.

“나에게 천의가 있고, 그것이 태청진기로 청운을 유형화하는 무학으로 인도하는 과정이었다면…… 청운은 마물을 상대할 수 있는 무학이란 거겠지.”

빌어먹을 천의였지만, 하늘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백무량이 지닌 무학은 마물에게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을 전제로 생각하면서 수련하고, 궁리하고, 고찰했다.

궁리와 고찰의 근거는 다른 도문의 무학에서 가져왔다.

‘공동파의 경파는 만상을 부르고, 화산파의 매화는 천변만화하여 헤아릴 수 없는 변화를 가져온다…….’

같은 근간.

그러나 다른 심상.

그 안에서 백무량은 무학의 발전과 또 다른 가능성을 느꼈다.

위문엽이 엉망진창으로 뜯어고친 아미복호검도 마찬가지였다.

‘틀에 가두지 말자. 가두지 말자는 생각 또한, 흘려보내자.’

쉽지 않은 일이다.

저런 고행을 누구나 이룰 수 있었다면 고승이 왜 존경을 받겠는가?

‘나 참, 어느 누구보다 잡생각 많은 내가 선도를 이뤄야 한다니.’

연정화기, 연기화신, 연신환허.

정을 닦아서 기를 깨치고, 기를 닦아서 신을 목도하는 단계까지는 이루고도 남았다.

이제는 환허.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경계를 부술 차례다.

“하나부터, 천천히.”

바깥에 있는 이들을 믿는다.

백무량은 깊게 심호흡하곤 검을 쥐었다.

처음 검을 쥐었을 때, 기쁨으로 씰룩거리던 입꼬리를 떠올렸다.

그 만족감으로 가슴이 쿵쾅거리던 과거로 되돌아갔다.

***

무계봉신술.

하나의 혼을 술법으로 축조한 공간으로 날려 버리는 주술.

청노는 백련교주처럼 백무량한테도 통하리라고 여겼지만, 한 가지를 아예 모르고 있었다.

백무량에게 두 명의 혼백이 따로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은 바로…….

“나도 이런 식으로 당한 적은 없었는데 말이야. 무량이가 무섭게 느껴지긴 했나 봐?”

심천검은 짓궂게 웃으며 어깨를 크게 휘둘렀다.

무계봉신술의 외곽.

주술을 이루는 기둥 근처에 수많은 마수가 존재했다.

혹시 모를 사고.

백무량이 외곽에 도달하는 사고에 대비해서 만들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놈들은 한 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다.

“몸이 있잖아, 몸이.”

심천검은 자신의 몸을 보며 히죽 웃었다.

삼십대 중반, 중년의 몸.

상승의 경지에 올라서 젊어졌을 시절의 육체였다.

이때 주술을 모두 분석한 주백천이 그에게 조언했다.

“아무래도 급하게 만들다 보니 다른 혼백의 힘을 제한하는 술식까진 구축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랬다면 우리가 육신을 가지진 못했겠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될까?”

“이 주술을 구성하는 기둥들. 그걸 하나둘씩 부수면서 무량이를 찾아보지요. 선배가 마수를 제거하면 제가 기둥을 파훼하겠습니다.”

“음.”

주백천의 말을 곱씹던 심천검이 피식 웃었다.

“후배 말대로라면, 백무량 그놈은 이 공간 때문에 힘을 제대로 못 쓰고 있단 거지?”

“예, 제한되는 건 하나의 혼백뿐입니다.”

“……하하! 그거 좋네. 나한테 짜증이나 부리던 후배를 제대로 고육할 수 있겠어.”

심천검은 피식 웃고는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혼백이 기억하는 육신이 있다면, 평생 써 온 검도 남아 있겠지?”

“……!”

주백천이 눈이 크게 떠졌다.

“저건……!”

백무량이 가지고 있는 백선신검과는 무언가 다른, 또 다른 백선신검.

심천검은 혼백에 새겨진 기억만으로 자신이 평생 아꼈던 검을 불러낸 것이다.

“역시 되잖아.”

확신에 가득 차서 내뱉은 한마디.

심천검의 목소리에 강자다운 울림이 있었다.

크아아악!

캬악!

사특한 주술로 만든 마수가 심천검의 기운을 느끼곤 적의를 드러냈다.

추악하기 그지없는 냄새에 주백천이 자연스레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심천검은 달랐다.

“하, 요거 냄새나는 주둥이들.”

백무량이 의심과 궁리로 빚어진 강자라면, 심천검은 태어났을 때부터 가진 재능을 단련한 고수.

마수를 대하는 모습에 품격과 무게가 있었다.

이길 수 있느냐는 의심 하나 없이, 당연하단 확신을 가지고서 말했다.

“한꺼번에 덤벼. 시간이 없어.”

스르릉……!

심천검의 백선신검이 푸르게 울었다.

새하얀 공간, 마기로 이루어진 마수와 기둥.

그 앞에서도 심천검의 기백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오히려 마수들의 기세를 억누를 정도였다.

크륵!

크르르…….

“뭐냐, 안 오는 거면 내가 간다.”

심천검은 가벼운 걸음으로 땅을 박찼다.

단순한 움직임에 삼보와 운룡대팔식의 묘리가 있었다.

그걸 본 주백천은 평생 곤륜파의 무공을 봐 온 무학자로서 깊이 감동했다.

“검해 없이, 저만한 응용을……!”

“하하.”

극찬은 이미 숱하게 들어서 익숙하다.

심천검은 여유가 넘치는 웃음을 드러낸 채 백선신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백무량의 백선신검이 무한한 만상을 정밀하게 그린다면, 그는 공간을 찍어 누르는 층운의 일격.

단번에 두 마수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본능적으로 마공을 운용했음에도 그러했다.

“한 번 더!”

구천화우검의 형을 넘어선 파격.

주백천은 심천검의 검세 하나하나에 평생 동안 축적한 묘리를 보았다.

백무량과 결은 다르지만, 일가의 종사가 되고도 남을 경지였다.

백무량과 함께 성장한 십대고수보다 한층 더 높은 경지에 있다.

주백천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저번처럼, 누군가의 몸에 빙의해서 싸울 수 있었다면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요.”

“내가 무량이의 몸을 잠깐 빌렸을 때처럼?”

“예.”

“그거라면.”

콰직!

마지막 마수까지 모두 정리한 심천검이 숨을 훅 내뱉으며 말했다.

“그건 순전히 우연이었고, 지금은 내가 검해에 묶여 있어서 안 돼. 다만 다른 놈은 가능할지도 모르지.”

“다른 놈이라니요?”

“검해에서 벗어난 놈 중에, 지상의 존재와 인연이 닿아 있는 녀석이라면 한둘 있잖아?”

“……아!”

주백천은 저도 모르게 깨달았다.

무명과 유성백, 진무월.

그들이라면 마교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은 무인들과 끈이 있었다.

그때 심천검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돼. 얼른 시작하자고.”

“알겠습니다.”

주백천은 주술을 이루고 있는 기둥으로 다가갔다.

그러면서 속으로 기원했다.

백무량의 정신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깥에 있을 침투조가 쓰러지지 않기를.

***

“허억, 허억.”

척준환은 제자리에 칼을 꽂았다.

대주천복마검을 연거푸 펼친 탓에 온 반동이 전신을 덜덜 떨리게 했다.

그러나 한껏 뜨거워진 눈빛은 전방의 싸움을 끊임없이 주시했다.

“크윽!”

손가락 두 마디가 잘린 남천, 왼팔이 기이하게 꺾인 위문엽.

현종휘의 상태도 좋진 않았다.

피 칠갑을 한 채로 자신처럼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젠장!”

이를 앙다물고서 애꿎은 허벅지를 때렸다.

그토록 노력하고 수련하였는데, 칠성교주에겐 범접하기 어려웠다.

“뭐야, 이게 전부냐?”

칠성교주의 가면 아래에 흐르는 사이한 청색 기류.

그 기류에 알알이 박힌 별빛마다 만신의 기운이 있었다.

과거 만금상단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요현과 백상, 청요귀까지.

수하의 가면에서 회수한 힘이 그에게 넘실거렸다.

“역시 백무량만 없으면 일이 쉬워지는군. 청노! 어디까지 진행되었나!”

“조금이면 된다.”

청노의 말이 모산 정상에서 들려왔다.

이에 칠성교주가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들었는가? 너희의 노력은 허사였다. 나와 함께 지켜보아라. 우리가 천 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노력한 결과를, 만마(萬魔)의 강림을……!”

“허튼소리!”

정파로가 피를 한 됫박이나 토하며 외쳤다.

“내가 숨이 붙어 있는 한, 절대 용납할 수 없다! 화산은 물러서지 않는다!”

“……과거에 죽이지 않았던 벌레가 아직까지 있었군.”

칠성교주가 진득한 살기를 흘리며 천천히 걸어갔다.

방향은 정파로와 정중산이 있는 곳. 그리고 실신한 상태인 낙매신검이었다.

그것을 본 유성한이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검해도래…….”

백무량을 부르는 암구호.

필사적으로 중얼거렸지만, 풀썩 쓰러진 백무량은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유성한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했다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무릎이라도 꿇고 싶지만…… 그런 기적은 없어. 내가 뒤를 쳐야 해!’

필사적인 염원은 기적을 만들기 마련인가.

툭.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리는 기척에 유성한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 순간에, 눈빛이 소름 돋을 만큼 차가워졌다.

우뚝.

그와 동시에 칠성교주의 발걸음도 멈췄다.

“너는…….”

“더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

유성한, 아니 유성백은 삼단전의 기틀을 완벽하게 정립하고서 말했다.

“그 혀뿌리부터 잘라 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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