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14화 (214/275)

망검 (2)

심천검이 갑자기 끼어든 것이 못마땅하였는지, 무명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보게, 저 후배에게 아미복호검을 가르치는 건 나네!”

“모름지기 선배라면 후배에게 본을 보이는 것이야 당연하지!”

심천검은 히죽 웃고는 백무량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설마 비급 하나 던져 주고 알아서 독학하라, 그걸로 끝내려고 했나? 스승으로서, 자기를 대신할 무인으로 키워 내려거든 책임감을 가져야지!”

“……자네는 저 후배에게 너무 호의적이군.”

무명은 백무량의 얼굴을 슥 쳐다보고는 심천검에게 말했다.

“내가 백 후배에게 악감정이 있어서 비급만 주었겠는가? 팔첨은 옆에서 두고서 가르친다고 크게 나아지는 것이 없네.”

“허어, 그래도 스승이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

무명의 시선이 백무량에게 멈춰 있으니, 심천검도 자연히 말을 멈추었다.

이어 백무량의 모습을 보았다.

“……허.”

자신이 무명에게 한마디를 할 땐 되게 통쾌해하더니.

백무량은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아, 팔첨의 비급을 탐독하고 있었다.

천의를 이은 도사.

사교, 마물과 싸워야 한다는 무게를 그대로 짊어진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무언가 심경이 달라지기라도 한 것일까?

무명이 입술을 달싹였다.

[저 아이가 팔첨을 어느 정도 익히게 되면 봐주겠네. 그때 자네도 같이 도와주길 바라네.]

[……그러지.]

심천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

팔첨이란 수경의 심화.

자기 자신이 궁구하며 익힌 무학들을 뇌리에 떠올리고서, 상대를 죽이기 위해 쏟아 내는 살초이자 상단전의 심결(心訣).

어찌 보면 천주무극세와 비슷했다. 무학의 총체를 다루고, 그것을 단번에 쏟아 낸다는 점에서는 그러했다.

하지만 각자 장단점이 있다.

‘팔첨은 여러 초식을 한번에 펼치지만, 천주무극세는 하나의 초식에 한정된다.’

베기라면 베기, 찌르기라면 찌르기.

천주무극세는 수백의 초식을 하나로 응집하여 쏟아 낸다. 유성백의 일 초식을 한순간 앞지른 이유가 그것에 있었다.

상단전.

선도의 수련에서는 연신환허(鍊神還虛)라고 불리는 것.

정기신 중 신(神).

유성백의 초식은 분명히 백무량을 아득히 앞질렀다. 환영진에 나온 지금도 무엇을 펼쳤는지 불분명했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유 선배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천주는 불균형하다는 것을…….’

삼단전을 한데 모아 천주를 이루고, 부동세를 통해 외력과 내력 모두를 온전히 다스리니 무적(無敵).

그것이야말로 천주의 완성이었다.

그러나 유성백은 수십 년도 전에 백련교주에게 죽은 인물.

상단전을 단련하고 싶어도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기에 백무량을 흔쾌히 제자로 받아들인 것이다.

자기가 이루지 못한 극점에 도달하길 바라면서.

‘유 선배의 유지를 이음으로써 팔첨과 천주무극세, 두 무학의 완성을 꾀한다.’

팔첨은 여러 마인을 상대함에 있어 용이하다.

천주무극세는 백련교주나 칠성교주 같은 마도 고수에게 통용되고도 남을 초식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정리다.’

지금까지 배운 무학에 대한 정리.

백무량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처음 품은 감정은 감사였다.

맨 처음, 고아였던 자신에게 무학의 은혜를 베풀어 준 주자령에 대한 감사.

공동파의 경파를 가르쳐 준 고성진에 대한 감사.

‘나 혼자만 잘났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겠지.’

오만을 조금씩 버렸다.

아주 먼 옛날, 걸음걸이를 시작하던 그때부터 행적을 밟아 갔다.

백련교의 난을 지나…… 되살아난 순간을 회고했다.

그때엔 하늘을 원망하고, 혼자 세상에 동떨어졌다는 감정을 품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하루를 보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내가 행하는 길, 숨 쉬는 지금도 하늘의 은혜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의 뜻이 있었음을.’

백무량은 지그시 감았던 눈을 떴다.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는 네 도사가 있었다.

그들 중 주백천과 시선이 마주쳤다.

-할 수 있단다.

주백천의 입술이 그렇게 움직였다. 백무량에겐 감사한 일이었다.

뜻 없고 철없던 백무량에게 처음으로 꿈을 주었다.

그것이 주백천이 천문을 읽고 나서 이끈 것이래도 상관없다.

그 기억이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었으니까.

‘하나하나 떠올려 보자.’

백무량은 다시금 눈을 감았다.

검해라는 심상 속에서 다시 그 안으로.

심상의 저변으로.

백노가 새하얀 도화지 같은 환영진을 그렸다면, 백무량은…….

***

“곤륜? 다 무너져 가는 문파가 자존심은…… 쯧쯧!”

염소수염의 도사가 버릇없이 주절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허리띠를 매만졌다.

백선신검. 사문의 보검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뜬금없는 것이 나왔다.

‘……이게 뭐야?’

어린아이의 장난감.

나무로 만든 말 따위가 손아귀에 잡혔다. 한데 그 손아귀도 무척이나 작았다.

굳은살 하나 없는 손가락, 상처 하나 없는 매끈함.

백무량은 뒤늦게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소동(小童)이나 입을 법한 형형색색의 복식이었다.

“난 분명…… 무학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어리디어린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눈앞에서 곤륜파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염소수염을 그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봐!”

백무량은 잰걸음으로 도사에게 다가갔다.

‘푸하’ 하는 웃음소리를 터트린 그는 금세 재가 되어 사라졌다.

백무량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

‘심마인가? 설마……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분심조화결에 이어서 수경.

상단전의 단련을 한계까지 행했다.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지 못했을 뿐, 감히 연신환허의 막바지에 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백무량이 심마에 걸렸다면 이상한 일이다.

작디작은 손으로 턱을 매만지고 있자니,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예로부터 우리는 무림의 방벽이었다.”

평온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세파에 시달려 연로해진 지금과는 달리,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과 같던 때였다.

“사형!”

백무량은 주백천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청년의 주백천은 옛 기억처럼 따사롭게 웃었다.

“뭐가 그리 급하느냐? 오늘도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왔느냐?”

“……이야기요?”

“네가 늘 듣고 싶어 하지 않았느냐. 곤륜이 배출한 협객과 옛 영웅담, 역대 장문인의 협행을 말이다.”

“……아!”

백무량은 그제야 깨달았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구나.’

정확하게는 곤륜파를 찾아온 다른 문파의 도사가 악담을 퍼부은 날.

백무량이 처음으로 영웅담을 듣기 싫어하고, 의로움을 부정했던 때였다.

‘……내가 후회하던 때를 왜 굳이 지금?’

백무량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설마 무명이나 망검이 자신을 이런 상황에 빠뜨린 게 아닐까 싶었다.

이에 주백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더냐?”

“아…… 아니에요. 들려주세요.”

“오늘따라 차분한 것이, 너답지가 않구나.”

주백천은 피식 웃고서 옛이야기를 꺼냈다.

한데 그 이야기가 낯설지가 않았다.

‘심천검과 백노에 대해서 사형은 이미 알고 있었구나.’

우연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주백천은 어렸을 때부터 천문에 능했다고 하니,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말해 주고 싶었을 터였다.

그저 자신의 기억력이 부족했을 뿐이다.

‘……좀 부끄러운데.’

백무량은 자신의 뺨을 툭툭 치며 주백천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것이 대략 한 식경쯤 되었을까?

주백천이 이야기를 마치고 백무량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질문이 없구나?”

“그게요…….”

“사문에 찾아온 손님을 보고 싶다고 뛰쳐나가더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

백무량은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누가 알아나 준답니까? 모두가 의로움을 알아주진 않잖아요! 저, 저는…… 알아주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리진 않을 거예요.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 거고요.

이날, 백무량은 주백천의 영웅담을 부정했다.

의롭게 살지 않겠다고 반항했고, 세월의 낭비로 이어졌다.

백련교의 난이 일어나던 시기까지 강호를 쏘다녔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주백천의 마음은 어땠을까?

하물며 지금 이 기억을 보는 자신의 기분 또한 편치 않았다.

‘이게 나에게 남아 있던 후회구나.’

백무량은 이곳이 심상의 저변임을 깨달았다.

검해가 옛 기억을 불러온 까닭 또한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이걸 계속 안고 있다가는 언젠가 심마에 빠지리란 걸, 검해가 경고하는 거야.’

백무량의 표정이 굳었다.

결국은 이 기억마저 지나간 과거임을 알았다.

여기서 어떤 대답을 한다고 해도, 과거를 바꿀 순 없었다.

단순한 위안.

그저 그것뿐이겠지만, 백무량은 어깨를 폈다.

조금씩 눈웃음 지으면서 백무량다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일은 무슨 일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러면 왜 표정이 편치 않았느냐?”

“그냥…… 저라면 옛 선배들처럼 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

주백천이 입을 꾹 닫았다.

어린 시절의 백무량이었다면 왜 저러는지 몰랐겠지만, 지금의 백무량은 알았다.

‘사형이 본 천문대로라면…… 난 천의를 이을 도사였으니까.’

저 어린것이 앞으로 겪을 고통과 시련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영웅담을 말해 주고, 그렇게 되길 원하면서도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백무량은 피식 웃었다.

“될 거예요.”

“……응?”

“영웅담의 주인공요.”

백무량은 어린 시절의 후회를 없애기 위해 입을 열었다.

“주변에선 나의 어려움과 의로움을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어요.”

실제로, 백련교의 난 이후로 곤륜파는 멸문했었다.

의로움을 모두가 알아주진 않았다.

하지만 무림맹은 의로움을 기억하고 있었다. 곤륜파의 부흥을 보고 기뻐하는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

백무량은 그것을 떠올리고서 빙긋 웃었다.

“물론 힘들겠죠. 어렵기도 하고, 상처도 자주 입을 것 같아요. 사형이 말해 준 영웅담의 인물이 그러했듯이요.”

“…….”

“그래도 그것이 옳은 일이라면,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면…….”

천의를 이은 도사가 말했다.

“내가 할게요.”

***

백무량은 눈을 떴다.

심상의 저변이 무너지는 광경은 보지 못했다.

방금 있었던 일이 잠깐의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무언가 달라진 것이 있을까?’

백무량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렇게나 팔을 휘둘렀다.

별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저 뻐근한 기운을 몰아내기 위함이었다.

한데 그 여파는 크게 다가왔다.

콰르르……!

검해 전체가 크게 울리며 먼 곳에서부터 파도가 밀려왔다.

그 광경을 본 심천검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건…… 망검이 언젠가 보여 줬던…….”

심천검을 포함한 망령 모두가 파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니, 모두는 아니었다.

단 한 명.

묵상하고 있던 망검이 꼿꼿이 선 채 백무량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