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13화 (213/275)

망검 (1)

유유무극검.

초식명으로만 들었을 땐 천주무극세와 비슷한 울림이었다.

따라서 백무량의 흥미를 끌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초식입니까?”

“나의 성명절기다.”

“성명절기?”

백무량은 귓가가 솔깃해졌다.

저만한 경지를 이룬 고수의 성명절기라면 언젠가 필시 도움이 될 터.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선배.”

백무량이 재빨리 예를 취하자, 진무월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 허허…….”

자기가 아는 곤륜도와는 완전히 다른 후배였다.

체감상 한 달 뒤.

유유무극검을 터득한 백무량은 진무월을 비롯해 환영으로 빚어진 보타문주와 무극진인에게 승리했다.

‘극에 이르면 하나로 통한다더니.’

유성백과 무명, 진무월에게 배운 무학과 다른 무학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백무량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경험뿐.

환영진이 보여 준 보타문과 무당파의 무학을 겪어 보니 자연스레 익힐 수 있게 되었다.

가장 큰 소득은 유유무극검.

화검에 대해서도 남의 기억이 아니라 본신(本身)으로 만난다면 가르쳐 줄 수 있을 거라며, 진무월은 후일을 기약했다.

‘매화비원으로 오라고 했지.’

그러나 지금 당장은 검해의 가르침에 집중해야 할 때.

백무량은 진무월의 말을 머릿속에 기억해 놓은 채 다음 스승을 떠올렸다.

“이제 무명 선배에게 팔첨을 배울 때가 됐어.”

아미복호검을 가르쳐 주던 무명.

그에게 팔첨을 배우면서 과거의 굴욕을 갚을 생각을 하니 벌써 마음이 들떴다.

이에 백무량은 고개를 쳐들고 외쳤다.

“환영진에서 내보내 주십시오!”

자신의 말이 과연 닿았을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이만한 환영진을 구성한 도사가 놓쳤을 리가 없었다.

백무량은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순간.

“돌아온 것을 환영하네.”

백노의 목소리가 귓전을 스치고, 커다란 손바닥이 백무량의 등을 때렸다.

“아!”

통증을 느낀 백무량은 곧바로 눈을 흘겼다.

손바닥의 정체야 뻔했다.

“대체 언제까지 있나 했다!”

눈가가 시커멓게 물든 심천검이 다시금 백무량의 등짝을 두들겼다.

척 봐도 엄청난 양의 내력을 소모한 듯해, 평범한 사람이라면 불만을 토로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하지만 백무량은 가능했다.

“수련을 마치고 온 후배에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허, 후배가 후배다워야지! 선배에게 존경심 한번 보인 적이 있더냐?”

“물론이지요. 환영진에서 여러 선배에게…….”

백무량이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려는 찰나에 심천검이 씩 웃었다.

“우리가 지켜보고 있었다.”

“…….”

“그 진무월에게 쓸모없다고 한 놈은 네가 처음일 거다. 게다가 뭐? 보타문주와 무극진인에겐 배울 것이 없다고 비웃음을…….”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백무량의 발뺌에 심천검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 방향에 무심한 표정의 주백천이 있었다.

“무량아.”

단 세 음절.

짧디짧은 한마디에 백무량은 주백천의 시선을 슬쩍 피하면서 백노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보시오, 선배! 처음부터 밖에서 볼 수 있다고 말씀을 해 주셨어야죠!]

[내가 왜?]

백노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참에 후배의 성품이 어떠한지 잘 보았네.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겠다더니 성격은 그렇지 않더군.]

[아니, 그게…… 어차피 환영…….]

[매화동인 진무월은 자의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던가?]

[…….]

백무량은 자연스럽게 동굴 밖으로 걸음을 옮기며 입술을 달싹였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더냐?”

주백천이 낮은 목소리로 꾸짖자, 백무량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겉으로 내색하는 일은 없었다.

“잘못했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해야 내가 아는 무량이지.”

주백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내면까지 부드럽지는 않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문을 보았고, 백무량의 어린 시절부터 보아 온 사형이다.

백무량의 눈살 하나만 봐도 어렴풋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았다.

주백천의 입술이 떼어졌다.

“하지만 그게 진심처럼 들리지는 않는구나.”

“……아닙니다.”

“제천대성도 부처님의 손바닥 위에서는 미물에 불과했거늘, 네가 나를 속이려고 드느냐?”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강하게 압박해 오는 주백천.

그 시선에 백무량은 내심 아찔해졌다.

예전부터 주백천은 자신의 마음을 손쉽게 꿰뚫어 보곤 했으니까.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백무량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나서야 주백천은 진심을 토로했다.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환영진에서 있던 일을 누가 진심으로 꾸짖겠느냐?”

“하면…….”

“어깨의 짐이 무겁다는 것을 안다. 가면을 쓴 마인이 네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고, 사람을 가려서 사귀어야 했겠지. 하지만 그게 언젠가는 눈을 어둡게 물들일 거다.”

그 말에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옛일을 떠올렸다.

목허도장을 보고서 단순히 속 좁은 사람으로 생각했던 일.

연무지회 때 그렇게 판단했지만, 화산파에서 다시 마주했을 땐 구파일방의 장로다운 모범을 보였었다.

‘앞으로도 내가 무공의 고하와 첫인상으로만 사람을 사귄다면.’

언젠가 귀인을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

백무량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마교를 경계하다가 저도 모르게 사람을 보는 시선이 편협해졌던 게 아닌가, 반성이 들었다.

“조심하겠습니다.”

“내 뜻을 이해하였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사실, 네가 어떻게 대답하든 존중할 생각이었다.”

검해에서 아무리 선량함을 강조해도 직접 발 벗고 나서는 건 백무량이요, 혼란한 강호에선 탁상공론에 불과하니.

주백천의 한계도 거기에 있었다.

좌도방에 입문하기로 하였다면 모든 수단을 마련했어야 했다며.

주백천은 백무량에게 무덤덤한 목소리로 실패담을 이야기했다.

이에 백무량이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하기를.

“내가 그래서 파락호처럼 행동하지 않습니까?”

“……뭐?”

“사형이 말씀하셨다시피 강호는 선량하다고 밥을 먹여 주진 않습니다. 저처럼 적당히 때도 타고, 천지 분간 못 하는 놈이 설쳐야 규합되는 곳이 바로 강호지요.”

그러다 여러 도사와 만나면서 조금씩 선량해지긴 했지만, 근본은 달라지지 않았노라고.

백무량은 농담을 섞으면서 주백천을 안심시켰다.

“내가 있는 이상, 마교에게 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기다리라니?”

“검해가 천의를 잇기 위해 만들어진 심상이라면…… 나중에 꺼낼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백무량의 얼굴에 악동 같은 미소가 맺혔다.

“요컨대, 사교들과 마물을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린다면 말입니다.”

“……그건.”

“확신할 수 없겠지요. 그러면 물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백무량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이곳에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 멀리 묵상하고 있는 망검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이곳에 있는 망령들이 추측하기를, 곤륜파의 개파조사.

그라면 검해의 근원부터 시작하여 주백천과 같은 망령을 성불시키거나 꺼낼 방법을 알고 있을 터였다.

“승부는 내가 내겠습니다.”

***

망검은 검해의 심상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존재했다.

이를테면 촌락 입구에 심어진 느티나무 같은 처지였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도 못했다.

‘아직도, 나만 이렇게.’

청성파의 사대사행엔 본래 용이 존재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사라졌다. 천상으로 승천했으리라 예상할 뿐이었다.

다른 곳은 어떠한가?

화산파의 매화비원엔 진무월이 있었다.

절대로 꺾이지 않는 고목(古木)으로 존재하겠다던 그는 세월의 무료함을 이기지 못했다.

보타암엔, 무당산엔, 남만에는.

각각 성지가 있었다.

사교와 마물에게 대적하겠다고 결의한 고수와 영물이 있었다.

본래는 그러했다.

‘모두가 대의를 품고서 미래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때가 있었거늘.’

고수와 영물이 사라져도 성지는 여전히 신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성지가 존재하는 이유.

그것을 기억하는 이가 없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망검이 보기에 검해를 제외한 모든 성지는 무의미했다.

달리 말하면, 이제 자신밖에 남지 않았다.

‘대체 언제까지…….’

연약한 감정이 은연중에 샜다. 천년 고목, 바위와 같은 얼굴에 조금씩 균열이 생겼다.

백무량 때문이다.

이 지긋지긋한 운명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마음.

처음으로 검해에 출입한 도사 때문에 희망이 생겼다. 그러자 평소 하지 않던 인간적인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옳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선대가 이루지 못한 숙제를 후대에 떠넘긴다.

그것이 설령 수많은 후배를 죽음으로 내모는 길일지라도, 대의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행했다.

그것이 망검이라는 존재가 행하는 의무였다.

‘이제 와서 고민해서 무슨 소용이더냐? 지금까지 대의를 위해 죽어 간 후배에게 연민이라도 든 것이냐?’

천의와 대의를 위해서 인간적인 마음을 버렸다고 생각했거늘.

혐오감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나 가늠하니, 백노의 환영진에 기억을 불어 넣을 때였다.

‘빌어먹을.’

기억을 불어 넣다 잊고 있던 놈을 떠올리고 말았다.

매화동인 진무월.

그놈이 거세했던 감정을 떠올리게 했다.

자기는 화산에서 놀기만 하다가 곤륜으로 제자를 보내겠다던 뻔뻔한 놈이었다.

‘그놈은 의무를 버리고 편해졌지만, 나는 달라.’

곤륜의 후인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당장 주백천이나 백무량이나 남들보다 오랜 세월을 살며 고통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없었다면 사교가 이미 천하를 지배했을 것이다. 마물을 부활시키기 위해 인신 공양을 했을 터였다.

‘연약함을…… 지워야 한다. 소임은 끝나지 않아.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도.’

망검은 묵상을 이어 갔다.

잔뜩 찌푸렸던 인상이 점차 편해졌다. 무덤덤하고 냉정한 얼굴이 점차 퍼졌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의무를 다시 영혼에 새겨 넣었다.

***

“내가 돌아왔소, 선배!”

백무량은 무명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환영진에서 터득한 무학을 전부 쏟아 내리란 집념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무명의 안색은 평온하기만 했다.

“백노가 마련한 수련은 마쳤는가?”

“예, 무학 모두 완성하였습니다.”

“하면 이걸 가져가게.”

무명이 품에서 서책 하나를 꺼냈다.

팔첨 총결.

간략하기 그지없는 제목이었다.

백무량은 잠시 그것을 쳐다보았다가, 시선을 무명에게 돌렸다.

“이게 무엇입니까?”

“보면 모르나? 자네가 환영진에 있는 동안 기록한 것이네. 그것만 보면 환영진에서 배운 무학을 팔첨으로 총결할 수 있을 거야.”

“…….”

백무량은 무명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속으로 욱여넣었다.

당장 등 뒤에 심천검과 주백천이 있었으니까.

그 대신에 전음을 쉴 새 없이 쏟아 냈다.

[직접 알려 주는 것이 상식 아닙니까? 어찌 비급만 보고 형의를 배우고 구결을 이해하겠습니까?]

[서책을 보고 막히는 점이 있으면 그때 말하게.]

[아니, 이렇게 되는 수련이었다면 왜 수경은 천중수 아래에서 배우게 한 겁니까?]

[그야 수경을 익히는 덴 그것이 제일이니까.]

무명의 막힘없는 대답에 백무량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했다.

‘이러려고 환영진에서 즐겁게 수련한 것이 아닌데.’

무명에게 팔첨을 배우면서 온갖 무학을 시험하려던 계획이 이대로 물거품이 되려는가?

백무량이 한숨을 내쉬려던 그때.

심천검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무공을 어찌 글로 배우겠나? 자네가 한 수 알려 주게.”

“……역시 선배님이십니다.”

백무량은 곧바로 맞장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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