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 (10)
두 남자.
천애의 경지에 가까운 고수, 백무량과 무명.
그들의 권과 각, 퇴(腿 : 정강이)와 조(爪)가 천중수의 폭포 아래에서 어우러졌다.
둘 중에서 부족한 무인은 누구인가?
“……크읍!”
백무량의 입가에서 핏물이 배어 나왔다.
천중수가 전신을 세차게 내리쳐 피부 안쪽에서 내출혈이 일어났지만,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통증을 연료로 삼듯 더욱더 거칠어지나.
“처음의 주먹질은 운에 불과했느냐?”
무명에게 손끝 하나 닿지 않는다.
침착함을 잃지 않은 무명의 움직임엔 낭비가 없었다.
정신을 쪼개어 이분, 삼분.
의념으로 천중수를 막아 내면서 백무량의 권로를 읽고, 쳐 내어 반격하기까지.
무명은 모든 것을 동시에 해냈다.
“조금 더 힘을 내 보아라. 시간이 없다고 한 것은 제자, 네가 아니었더냐?”
“시끄, 럽소.”
백무량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서 감돌았으나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극한의 환경.
전신의 뼈가 조금씩 천중수 때문에 금이 가고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통증이 일었다. 기절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무지에서 비롯된 공포 때문이었다.
‘검해는 심상이고, 심상은 정신의 영역인데…….’
정신을 잃는 순간 현세로 추방당할지도 모른다.
그 무지가 백무량의 정신을 꽉 부여잡았다.
불합리한 수련, 빌어먹을 무명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었지만 애써 참았다.
유성백이 그러했듯 무명에게도 무언가 뜻이 있으리라 여겼으니까.
하지만 무명은 제자에게 조금도 상냥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천중수에 얻어맞을 생각이냐? 수련 중에 고깃덩이라도 될 테냐?”
“……크으으.”
백무량은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무명을 노려보았다.
이제는 스승이 아니라 원수처럼 보일 정도였다.
무인 중에는 제자를 사지에 떨어트려서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무명은 그 선을 훨씬 넘은 듯했다.
‘아니, 어쩌면은…….’
유성백이 말하지 않았던가.
-검해에 오래 남아 있을 정도로 지독한 망령이라면 인간적인 감정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내가 착한 스승인 거야.
그 말이 정녕 사실일 줄은 몰랐다.
백무량은 입술을 씰룩였다. 분노로 가득한 고함을 내지르고 싶었지만, 괜히 힘을 빼서는 안 됐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조건 한 대 먹인다.’
불과 조금 전, 무명의 복부를 후려쳤던 순간.
그것이 어쩌다 찾아온 우연이나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명과 수련 끝에 찾아온 한 가닥의 실낱.
깨달음의 편린을 다시 붙잡기 위해서는 많은 시도와 실패가 필요하겠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백무량의 눈동자가 숙련된 사냥꾼처럼 차가운 빛을 머금었다.
쏴아아…….
세차게 쏟아지는 천중수 사이에서 무명의 신형이 이리저리 굴절됐다. 가끔씩 몸 전체가 작아지고, 주먹이 커지기도 했다.
‘치사한 스승이야. 존댓말이 아까워.’
천중수에서의 다툼이 무척 익숙하지 않나.
백무량은 무명의 심보에 속으로 짜증을 내며 한 손을 뻗었다. 그 즉시 한 대를 얻어맞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것으로 거리를 확실하게 가늠했다.
‘일 보에서 이 보 사이, 오차는 세 치.’
천중수만 아니었다면 손쉽게 주먹을 꽂아 넣을 간격.
거리를 가늠한 백무량이 잠시 숨을 머금었다. 광배근이 부풀고 지실혈의 존재감이 뚜렷해졌다.
그곳에 남은 용력을 담았다.
‘용천혈에서 힘을 길어 올 수 있다면, 그 반대로도 행할 수 있겠지.’
천주를 통해 체내의 힘을 바깥으로 토한다.
백무량의 오른발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진각으로 보기도 힘들다. 초식의 투박함이 시정잡배만도 못했다.
하지만 그 투박함은 천중수에 균열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으니.
촤악!
물방울이 튀며 바닥에 고인 천중수에 파문이 일어났다.
기력을 잃어 가던 백무량의 오감이 단숨에 치솟았다.
고통마저 한순간 잊을 정도로 선명한 공감각이 무뎌졌던 시야와 육감을 되살렸다.
촤르르…….
미약하게 일어난 파문이 중간에 멈춘 것을 느꼈다.
“여기구나!”
백무량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드니 무명은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이 무슨……!”
수경을 가르치려던 자리가 이상하게 변화해 간다.
분위기가 달라지는 순간, 백무량의 주먹이 천중수의 폭포수를 꿰뚫었다.
그 와중에 힘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
무명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백무량에게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아미복호검의 수경과 팔첨, 그 이전에 존재하는 원초.
그것이 백무량의 주먹질에 있었다.
이에 무명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운 감정이 잠시 물밀듯 찾아온 탓이다.
하지만 정념에 사로잡히지는 않았다.
[수경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으면서 발칙하게 그 앞을 넘어다보려느냐?]
흔들릴 뻔한 목소리를 전음으로 숨겼다.
무명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백무량의 팔뚝을 옆으로 쳐 냈다.
아니, 정확하게는 쳐 내려고 했다.
[유 선배가 나한테 하나 가르쳐 준 게 있지.]
백무량의 전음에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기습은 두 번째부터 효용을 발휘한다고 말이야.]
백무량의 왼발이 앞으로 내질러졌다.
쐐액!
천중수가 양옆으로 갈라졌다.
무명은 그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백무량의 주먹질을 보고 동요했던 것이 크나큰 패착으로 돌아왔다.
하물며, 백무량의 수경이 예사롭지가 않다.
“이런……!”
무명이 처음으로 낭패 섞인 말을 내뱉었으나, 백무량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쩌억!
비수와도 같은 일격이 무명의 무릎을 강타했다.
단지 뒤로 꺾이지만 않았을 뿐, 균형은 완전히 무너졌다.
이어 무명이 크게 휘청거리자 백무량은 머금었던 숨을 전신에 휘돌렸다.
‘의념이 물처럼 흘러 전신을 활보하니, 수경(水經).’
무명이 가르친 무론을 따라서.
백무량의 집념이 천주를 질주했다. 눈 한 번 깜빡이지도 못할 시간 동안 백무량은 마음속에서 열두 요혈을 겨냥했다.
수경을 펼치면서 고양된 의념이 천주를 감쌌다.
무명이 아직 가르쳐 주지 않은 팔첨을, 백무량이 본능적으로 펼치려 했다.
‘동시에 겨냥하여 한 번에 쏟아 낸다.’
주먹, 장심, 손가락, 손톱.
네 손가락을 구부려서 파자권, 안쪽으로 파고들어 팔꿈치를 휘두르면 주법(肘法).
팔이 내포하고 있는 모든 흉기를 가늠한다. 수경이 팔첨이라는 살초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숙련된 사냥꾼처럼 차가운 빛을 머금던 백무량의 눈동자가 열기를 품었다.
“이곳에 계신 선배께선 육신이 없으니,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닐 테지. 맞소?”
“그것은…….”
무명이 대답을 꺼내기도 전에 백무량이 먼저 움직였다.
쩌억!
백무량의 손가락이 갈빗대를 부러뜨리고 형태를 달리했다.
파자권.
네 손가락을 구부려 단창(短槍)처럼 만든 오른손이 무명의 목울대를 때렸다.
‘윽’ 하는 소리가 무명의 입가에서 새었다.
무너진 균형에 흐트러진 호흡이라.
백무량은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무명의 호흡이 피부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 힘을 의념으로써 팔꿈치에 집중하여 휘두르니.
“크윽……!”
폐부에서 바람이 새는 소리가 들렸다.
손가락으로 헤집은 자리에 주법을 때려 박았으니, 고통이 상상 이상일 터였다.
하지만 무명은 인상을 찡그릴 뿐 물러나지 않았다.
“겨우, 이것이 전부냐!”
외치는 목소리에 인간다운 감정이 없었다.
오랫동안 아집과 후회에 빠진 망령의 공허한 울림이었다.
백무량은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럴 리가!”
처음으로 우세를 잡아서 있는 힘껏 때렸으나,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이래서야 무명에게 완전히 승리한 것이 아니다.
수경과 팔첨을 제대로 배워서 때려눕히는 결과야말로 백무량이 원하는 성장이자 속 좁은 복수였다.
“선배.”
백무량은 공세를 멈추고서 직립했다.
주르륵…….
한 번의 깨달음, 깨달음의 체화.
그 과정을 거치니 천중수는 백무량의 몸을 건드리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무슨 생각으로 허점을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수습하시오. 전력을 다하시오. 그래야 나도 전부를 보일 것 아니오?”
“……내가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 같으냐?”
무명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에 백무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 선배처럼 스승도 나한테 아직 드러내지 않은 재간이 있으리라 생각하오.”
“흥, 그런 게 있었다면 내가 뭐 하러 이곳까지 데려와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겠느냐?”
현묘한 무학과 순수한 기량은 별개의 문제다.
무명은 그 사실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수경과 팔첨으로 기량의 차이를 간신히 메꾸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보다 유성백이 강하고, 심천검과 망검은 그보다 더 강할 것이다. 네가 백노의 도움을 받아 구파의 도가에서 배운 무학을 완성한다면 또 달라지겠지.”
“…….”
백무량은 말없이 긍정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신은 천주를 배움으로써 더 강해졌고, 수경을 어렴풋이 이해하면서 시야가 넓어졌다.
그러다 전신이 걸레짝이 된 무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습군.’
연타를 먹이기 전에는 무명을 단숨에 때려눕히고 싶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며 멱살을 잡아 비틀고 비파골을 후비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들끓던 분노와 짜증이 사라졌다.
수경을 자유자재로 펼치며 이해했다.
‘이만큼 위험한 환경이 아니었다면 익히는 데 한참 걸렸을 거야.’
무명의 방식이 잔인한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을 아꼈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백무량은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천중수 사이에서 무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싸우기 전에는 물줄기에 시야가 굴절되어 그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지금은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더 시험하겠소, 아니면 팔첨으로 넘어가시겠소?”
“한데 아까부터 말투가 달라졌구나?”
“여기서 이런 일을 겪으면 대라신선도 악귀가 될 거요.”
“……부정하진 않으마.”
무명은 자신의 방식이 독선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수경과 팔첨을 빠르게, 그리고 익숙하게 가르칠 수 있다면 어떠한 원망을 받아도 좋다고 여겼다.
하면 지금은 어떠한가?
무명의 입가가 자그맣게 달싹였다.
“네가 배우는 속도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빠르니, 더 혹독하게 가르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미친.”
백무량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전신의 뼈와 핏줄이 부러지거나 끊기는 고통보다 더욱 혹독하다면…… 그게 대체.’
여기서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 버려야 하나.
그걸 진지하게 고민하려던 차에 무명이 재차 입을 열었다.
“팔첨은 나중에 가르쳐 주겠다.”
“……?”
“잠시나마 느꼈겠지만, 팔첨은 각기 다른 방식의 공격을 동시에 발하는 무학이다. 지금 가르쳐 봐야 기본기를 닦는 정도에 지나지 않아. 그건 네가 원하지 않을 거다.”
그 말에 백무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명이 무엇을 말하려는지도 곧바로 알아차렸다.
“내가 다른 무학을 완벽하게 익히고 나면, 그때 알려 주겠단 거요? 그때 팔첨을 배운다면 상승의 무학을 묶는 방점이 될 테니까?”
“이해가 빨라서 좋군.”
무명은 턱을 매만졌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팔첨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도 고민을 해야겠다. 천중수의 수련을 반나절 안에 끝낼 줄 누가 알았겠느냐?”
“누가 들으면 되게 쉬운 수련인 줄 알겠소. 진짜로 살의가 들 정도였는데.”
“전력을 다해야 했다면, 좋은 수련 장소라는 뜻이지.”
“…….”
상식이 통하질 않는다.
백무량이 침묵하는 와중에 무명은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시선을 그에게 드러내면 무엇인가 읽힐 것 같았다.
“다른 무학을 익히는 도중에 막힌다면 이번 수련을 떠올려라. 내공 없이 맨몸으로 천중수를 갈랐던 순간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땐 내가 무아지경이었던 것 같은데…… 쩝. 하여튼 알겠소.”
백무량은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 다시 팔첨을 배우러 온다.
그걸 완벽하게 익히고 나면 속에 담아 둔 감정을 풀어낼 수 있는 순간이 올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