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 (8)
무명과 백무량은 한없이 걸었다.
마치 검해의 끝을 향하려는 것처럼 한 방향으로만 향했다.
“어디까지 가려는 겁니까?”
백무량의 물음에 무명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시가 아닌,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언가 생각이 있는 건가?’
잠시 생각을 거두고서 따라가기를 어언 세 시진.
소리는 오직 검해를 두드리는 첨벙 소리만이 있었다. 대화는 일절 없이, 무명은 앞을 향해 걸었다.
그 모습이 마치 수도승을 방불케 하여,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그가 아미의 무공을 익혔다는 것을 새삼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이 하루가 되었을 때.
백무량의 인내심이 조금씩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선배!”
“…….”
무명이 잠시 고개를 돌려 백무량을 보았다.
아직 느끼는 것이 없냐는 표정.
약간의 실망감 혹은 안타까움.
백무량은 무명에게 처음 보았던 유쾌함이 어느새 사라졌음을 느꼈다.
그의 눈동자에 들어 있는 대상이 달랐다.
‘그때는 후배, 지금은 제자라 이거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무명은 한없이 걷기만 하리라.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린 백무량은 무명의 전신을 살폈다.
이때가 무명을 따라 걷기 시작한 지 하루 하고도 세 시진.
‘걸음인가? 아니야…… 규칙적인 걸음에서 오는 차이가 아니야. 그렇다고 비골근의 움직임이 특이한 것도 아니고.’
대체 무엇일까?
무명에게 직접 묻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차마 묻지 않았다. 말하려면 진즉 수십 번은 말했을 터였다.
무명은 실로 백무량에게 시험지를 던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알아차릴 수 있겠느냐?
시선으로 던진 물음과 스승으로서의 시험, 호기심과 엄격함.
그의 엄격함은 유성백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도리어 외골수적인 측면이 강했다.
‘유 선배는 답답하면 아예 말을 해 주었는데, 이 선배는 참…….’
제자가 깨달을 때까지 절대 말하지 않는다.
한껏 자유로운 낭인인 줄 알았던 무명이 사실 옛 선사처럼 행동하니.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해답이나 질문을 여러 번 던졌지만, 가끔 시선을 던질 뿐 속 시원하게 답을 말해 주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으나.
‘대체 뭐지?’
백무량은 도통 감을 잡지 못했다. 인생 처음으로 겪는 무력감이었다.
모든 무학과 무공을 손쉽게 익혀 온 백무량이었기에 이러한 시련은 더더욱 죽을 맛이었다.
그러나 먼저 묻지는 않았다.
‘이게 저 선배의 방식이라면, 내가 따라가는 수밖에.’
그때부터 백무량의 오감은 전보다 더 집요해졌다.
걸음과 호흡, 근육의 움직임과 시선이 향하는 곳까지.
무명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했다.
단서가 없다면 불가능할 일이었으나, 다행히도 무명이 무엇을 가르치기 위해 자신을 제자로 받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미복호검의 수경과 팔첨을 파(破)한다.’
한두 번 보았을 뿐이지만 백무량의 영민한 머리는 아미복호검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몸을 엎드렸던 호랑이가 상대를 물 흐르듯 덮친다고 하여, 수경(水經).
사냥하는 순간 드러내는 여덟 방위의 공격이 바로 팔첨(八尖)이라고 하였다.
백무량은 아미복호검에 적힌 것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 비급에 초식의 형상이 그려져 있진 않았지.’
기실, 일인전승이 아니고서야 웬만한 비급에는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이 있기 마련.
하지만 아미복호검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나 나름대로 해석하여 펼쳤던 것이 사실 틀렸다면?’
아미복호검을 제대로 익힌 게 아니라, 여태껏 자기 멋대로 펼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무명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야 당연하다.
애초에 무지(無知)하였으니까.
“……!”
백무량은 상식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검해 위에 둥둥 떠 있던 연꽃 하나가 재가 되어 흩날리는 광경이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무명의 걸음이 멈춘 것도 그 순간이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백무량에게 물었다.
“드디어 입문에 달했는가?”
백무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피함과 기대감이 동시에 솟구쳤다.
자신의 무지를 모르고 아는 체하였기에 창피했고, 앞으로 무명에게 배울 아미복호검의 진수가 기대됐다.
그 마음이 들리기라도 한 걸까?
무명은 그제야 등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와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었다.
“이제야 후배가 아니라 제자라고 부를 수 있겠어. 혼자서라도 깨달으리라 믿으면서, 시간을 주고자 했네. 불쾌했다면 사과하지.”
“아닙니다. 그냥 좀…… 당황했을 뿐입니다.”
“그야 그렇지. 내가 사람과 제자를 대하는 태도가 확 달라져서 말이야.”
열흘 하고도 하루.
제자를 거둔 무명이 처음으로 웃음을 터트린 날이었다.
***
“왜 비급에 형의(形意)만 있었습니까?”
백무량은 줄곧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사실 아미복호검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많았다.
어디로 향하면 될지 방향만 적혀 있을 뿐, 길이 하나도 없었다.
도가와 불가의 무공이 비교적 불친절한 걸 알지만 아미복호검의 비급은 정도를 넘어선 지경에 있었다.
하지만 무명은 당연하다는 듯, 막힘없이 대답했다.
“애초에 수경(水經)이란 무엇이냐? 호랑이가 물에 살더냐?”
“……예?”
“팔첨은 또 어떻고? 호랑이가 양팔을 휘두르거나, 한쪽 팔로만 공격하더냐?”
“아니, 그거야…….”
백무량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무명의 말은 무공 전부를 난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면 태산압정은 태산으로 머리를 짓누르고, 선인지로는 진짜로 선인이 길을 가리키기라도 합니까? 당연히 초식이 목표하는 바를 적어 놓은 거로 생각하지요!”
“제자가 본 유성백의 태산압정과 선인지로는 어땠지?”
그 말에 백무량은 짧지만 강렬했던 비무를 떠올렸다.
유성백이 마지막에 펼친 일 초식.
그것이 삼재검법인지 육합검법인지도 몰랐다. 극에 다다른 검은 무공의 수준을 가리지 않았다.
무명의 질문은 그 점을 꼬집고 있었다.
백무량은 잠시 숙고하다가 대답했다.
“강했지만, 감히 태산이라고 말하긴 어려웠습니다.”
그의 초식이 정녕 태산이고 선인(仙人)이었다면 천주무극세로 이길 수 없었으리라.
백무량의 진지한 대답에 무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네 말대로 이름은 초식이 다다를 형의에 가깝다. 그 초식의 목표대로 삼라만상을 이기지는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야.”
대부분?
백무량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명의 말대로라면 어떤 무공은 형의를 현실에 이루었다는 뜻일 터.
그 표정을 본 무명이 말없이 손을 들어, 아래로 휘둘렀다.
“……!”
백무량은 순간 자신의 감각을 의심했다.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단련해 왔음에도 그러했다.
‘들리지 않았다.’
팔을 휘두르면 당연히 움직일 관절의 삐걱거림, 고수이기에 들을 수 있는 근육의 수축과 팽창.
‘그게 없었어.’
백무량은 무명의 손끝을 노려보았다. 상식에서 벗어난 것, 불가해한 것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이에 무명이 확신하듯 목에 힘주어 말했다.
“수경과 팔첨은 가능하다. 복호(伏虎)란, 단순히 엎드린 호랑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궁리하란 뜻이었다.”
“방금, 그건 어떻게 하는 겁니까?”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 걸었고, 지금 보여 줬잖느냐!”
무명이 제자를 강하게 꾸짖듯이 말했다. 방금 보였던 웃음은 아예 잃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제야 백무량은 알아차렸다.
‘다음 미소를 보는 날은 내가 수경과 팔첨을 완전히 익혔을 때겠구나.’
한없이 냉정하게 보였던 유성백은 부드러웠고, 유쾌하게 보였던 무명은 엄정하기가 무서울 정도라.
백무량은 그 간극에 피식 웃고 말았다.
“수련하지 않고 왜 웃고 있느냐!”
“지금 합니다, 해요.”
무명의 꾸중을 한쪽 귀로 흘린 백무량은 방금 본 수경을 떠올렸다.
찰나였지만, 본 것이 하나 있었다.
‘요체는 탈력(脫力)인가?’
단순히 힘을 빼 능수능란하게 강검과 유검을 바꾸는 잔재주가 아니라, 극점에 이른 솜씨였다.
유성백과는 다른 길이지만 어쩐지 익숙한 일 검.
‘만류귀종이라고 하였지.’
무명에게 받을 가르침이 끝나면 유성백의 일 초식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백무량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내가 유성백을 이긴 건, 신공절학에서 비롯된 강함 때문이지, 순수하게 경지로만 따지자면 아직 부족해.’
만일 삼재검법으로만 겨뤘다면 이길 수 있었을까?
절대 그렇지 않았다. 일 초식을 겨루기 전에 유성백에게 무너졌을 터였다.
그만큼 기본기가 부족했다. 백무량이 쌓은 무학의 탑이란, 유성백이 보기에 균열투성이였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유성백은 말했다.
-네가 이룰 무학은 나와 다르다.
유성백에게는 기본밖에 없었다. 하지만 백무량은 다르다.
신공절학을 익혔고, 여러 기연이 있었다.
이걸 모두 버리고 다시 기본부터 쌓는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그래서 유 선배는 나한테 뿌리를 정돈하고, 덧붙이는 법을 알려 줬고.’
그 결과물이 바로 천주였고, 천주무극세가 되었다.
쿠르르.
백무량은 삼단전이 합일을 이룬 존재감을 느꼈다. 유성백이 자신에게 남긴 유산이자 가르침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고, 저번에 보지 못한 것을 본다.’
무명의 가르침을 끝내고 나면, 그때 보지 못했던 유성백의 일 초식을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
백무량은 천천히 삼단전 천주에서 내공을 거두었다.
이어 고개를 조금만 숙여도 침이 떨어질 것처럼 힘을 뺐다.
“……허.”
옆에서 뜻 모를 소리가 들려왔다.
보나 마나 무명일 테지만, 확인하지는 않았다. 그러는 것조차 힘의 낭비였고, 탈력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천천히.
백무량은 손가락 끝을 까딱거렸다.
힘을 뺐으나 움직이는 것.
모순이라고 여겼으나 가능한 일이었다.
피부 아래에 존재하는 줄기 다발 같은 것이 느껴졌고, 강렬한 의념에 따라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된다!’
백무량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물론 무명처럼 완전히 팔을 들었다가 휘두르는 일은 아직 불가능했다.
하지만 손가락 끝이라도 가능하단 건, 조금씩 범위를 넓혀 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래서 열흘 동안 걷기만 했구나.’
왜 무명은 백무량을 대동한 채 걷기만 하였는가.
궁리의 시간을 주는 것과 동시에 탈력의 첫 단계를 알려 주고자 함이었으니.
백무량은 무명의 진의를 깨닫고는 속으로 히죽 웃었다.
‘이제 조금 더 넓혀 보자.’
그렇게 한 시진.
미약하게 움직이던 손가락 끝이 한 마디만큼 넓어졌다.
나름대로 요령을 깨닫고, 수경(水經)이라는 이름이 이해되는 시기였다.
‘의념을 상단전에서 길어 온 물처럼 여기고, 그것을 흘려보내 몸을 움직이니…….’
물이 관절과 근육의 움직임과 소리를 대신한다.
그러니 무명이 눈앞에서 팔을 휘둘렀음에도 들리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백무량이 수경의 요체에 가까워지려는 그때.
“불합리…… 참으로 불합리하도다.”
무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경에 어느 정도 적응하니 눈동자를 굴릴 여유가 나와서, 백무량이 눈웃음 지었다.
그 웃음과 마주한 무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천의를 이은 도사답게 재능이 뛰어나다. 약이 오를 정도야. 누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했는데 말이지.”
“……하하.”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상하는군. 유 씨에게 배울 땐 시간이 한참 걸리지 않았나?”
그 말에 왠지 모를 위기감을 느낀 백무량은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 선배의 수련을 따라 하지 않았습니까? 금방 따라갔지요! 수경이 더 어려웠습니다!”
“걷는 게 오래 걸렸지, 수경은 보자마자 따라 했고…….”
느릿한 어조로 말하던 무명이 다짜고짜 팔을 휘둘렀다.
쩌억!
백무량의 팔뚝에 손바닥 자국이 빨갛게 남았다. 내공은 담지 않았으나, 탈력의 묘리가 담긴 일격이었다.
이에 백무량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수경이 그렇게 한참 동안 걸려서야, 어찌 적이 기다려 주겠느냐? 곧바로 대응하고 움직여야지.”
무명은 한 손을 가볍게 털며 말을 이었다.
“타격은 눈이나 국부를 가리지 않을 거다. 수경을 막으려면 수경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야.”
“……뭐, 이런!”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현종휘에게 미안해졌다.
먼 옛날, 자신에게 맞았던 아이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
자그마한 반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