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89화 (189/275)

복원 (5)

‘어린 도사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조금 찔리기는 해도, 마교가 나를 노리는 상황이니까.’

속으로 거짓말을 합리화한 백무량은 걸음을 내디뎠다.

여름의 무덥고 느슨한 바람이 앞머리를 쓸어 내니.

시선은 자연히 위로, 무당산의 등산로를 향했다.

‘……뭔가.’

묘하다.

백무량의 눈가가 좁혀졌다.

무언가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애매한 기시감이 있었다.

‘왜지? 산을 한두 번 타는 것도 아니고, 왜?’

백무량은 조금은 긴장되는 걸음으로 등산로로 진입했다.

무성한 수목(樹木), 대지 위로 도드라진 나무뿌리.

새벽녘에 머금은 이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짙푸른 색을 가지고 있었다.

발로 툭 건드려 보니 뿌리의 껍질이 메마르지 않은 채였다.

신비롭다, 아니 정확하게는 기이하다.

‘내가 느낀 기시감이 이거였나?’

백무량이 서두를 떼니, 심천검이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신묘해. 마치 성지를 보는 듯하구나.]

성지.

특수한 영성(靈性)을 지닌 공간.

그곳은 매화비원처럼 신묘한 심상을 비추기도, 사대사행처럼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지형을 형성하기도 했다.

한데 무당산의 등산로도 어느 정도는 비슷했다.

‘보통은 사람의 발길이 자주 드나들다 보면, 길 주위의 초목은 죽거나 메마르기 마련인데…….’

사람의 발길에도 깨지지 않는 자연의 조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사소하지만, 백무량에게 있어 신기할 따름이었다.

등산로를 오르는 백무량의 눈동자에 이채가 더해졌다.

‘보십시오. 사람이 손으로 직접 가꾼 길이 아닙니다.’

[……스스로 길을 내어 준 것 같다, 이런 의미더냐?]

‘선배도 알잖습니까, 화산과 곤륜, 하물며 숭산일지라도 길을 내는 건 사람의 힘인 것을요.’

무인만 다닌다면 몰라도, 구파일방엔 상인이나 호사가의 방문도 적지 않았다.

편안하고 짧은 길이야 불가결.

하물며 무당파는 진무대제를 모심으로써 관과 친교를 맺지 않았던가?

‘길을 더욱 크게 내도 이상하지 않을진대, 인부가 만든 것처럼 보이지 않은 등산로가 있으니 신기합니다.’

[그렇게 들으니 나도 궁금해지는구나, 무당파가 어떤 조화를 부려서 길을 이렇게 내었는지.]

‘선배, 무당파가 개파할 시절에 활동하셨다고 하지…….’

심천검이 중간에 말을 끊었다.

[에잉, 쯧. 후배란 녀석이 눈치가 그리 없어서야!]

사정이야 아까 말했으니 알아서 넘어가라는 걸까?

곯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쏘아붙였다가는 열흘 동안은 토라질 것 같았다.

백무량은 피식 웃고는 등산로를 구경했다.

걸음마다 핀 야생화와 초목이 조금씩 다른 광경인지라, 구경하는 맛이 쏠쏠했다. 가능하다면 떼다가 곤륜에 그대로 갖다 붙이고 싶었다.

‘무당파의 무학이 태극의 조화라고 하던데, 어째 그 무학이 산길에도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나 말이다.]

백무량의 감탄에도 심천검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하여, 백무량은 조심스럽게 옛 선배를 비판했다.

‘풍류와 산수(山水)를 모르는 칼잡이…….’

[나 말이냐?]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에 만난 남천이 떠올랐습니다. 워낙 입이 싸서 만나면 패 버리고 싶네요.’

[허, 그놈, 참.]

남천과 그 중 누구에게 말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미 할 말은 다 했으니.

백무량은 속으로 키득거리다가, 문득 깜짝 놀랐다.

‘……방금.’

[뭐가?]

‘선배께서 ‘나 말이냐?’라고 하셨지요? 제 생각이 제대로 안 들린 겁니까?’

[…….]

침묵 속에 심천검의 당황과 짜증이 느껴졌다.

조금은 미안했다. 눈치가 제법 빠른 후배라서, 알아 버렸다.

백무량은 은근한 목소리로 서두를 뗐다.

‘상단전을 다루는 심공, 분심조화결이 대성에 이르니…… 선배께서도 제 마음을 쉬이 읽기가 어려우신 모양입니다?’

[대성은 무슨! 아직 한참 남았으니 정진해야지!]

‘어찌 됐든 제가 발전했다는 건 사실이지요.’

잠깐의 침묵 끝에.

[……후배의 발전이 이렇게 아니꼬운 적은 처음이야.]

심천검이 진실을 토했다.

매화비원에서 있었던 높은 경지로의 도약.

백무량의 심공이 천애에 닿으니 상단전에 기거하는 심천검도 분심(分心)의 일면만 읽을 수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백무량은 자연스레 손뼉을 치더니.

‘클클클.’

마두 같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심천검에게 엄포를 놓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참, 재밌겠습니다. 은근히 제 사생활을 읽히는 것 같아 불안하기도 했는데…… 클클.’

[네가 왜 선자(仙子)고 검선이냐? 지금의 민낯을 천하에 까발려야 하건만.]

그렇게 심천검과 짓궂은 대화를 하다 보니 무당산 중턱에 도착했다.

평범한 사람을 위한 휴식처.

곤륜산에도 그렇듯이 암자 한 채와 공터가 전부이리라고 생각했건만, 백무량의 시야에 온갖 것이 가득했다.

“뭐야?”

저잣거리에 많이 보였던 상인, 호사가, 무인.

심지어 간식거리까지 짊어지고 온 보따리 상인까지!

영산으로 불리는 무당산 중턱이 시장 바닥이 되었다.

장문인이 본다면 분루(憤淚)를 흘리리라 생각했지만, 예상 외로 무당산의 도사들이 그것을 방치하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백무량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헛웃음을 짓던 차에 도사 한 명이 다가왔다.

“백 대협, 무당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찌 알았나?”

“해검지에서 올라오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보내는 전서구가 있습니다.”

“……아.”

탄성을 터트린 백무량은 곧바로 떠오른 호기심을 표했다.

“하면 여기 있는 보따리 상인은 왜 두는 건가?”

“해검지에 무기를 내려놓고 왔으니 무당파의 법도는 지킨 셈이지요.”

“저들이 대놓고 장사를 해도 괜찮다?”

“최근 무당산에 사람이 많이 찾아옵니다. 그러니 이곳에 상인이 올 수밖에 없는데, 억지로 밀어내서야 무당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지요.”

그 말에 백무량은 한 가지를 떠올렸다.

“태극의 순행?”

“비슷합니다.”

도사의 웃음에 무당파라는 자부심이 엿보였다.

하나 백무량으로선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것이다.

“이곳은 귀 문파의 영역인데, 무당파와 왕래가 잦은 상단에게 이 자리를 맡기면 되는 일이지 않나?”

“……예?”

도사가 순간 아연실색하여 되물었다.

현재 곤륜검선이라 불리는 백무량이 저런 말을 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단 표정에, 백무량은 자연스레 남의 이름을 팔았다.

“내가 아는 상인 중에 송 노야라고 있네. 그분이라면 이렇게 생각하겠다…… 떠올린 거지.”

“아, 그렇군요.”

어딘가 찝찝하지만 납득했다는 표정.

백무량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맞춰 주고 싶지 않았는데, 저놈의 표정이.’

[장사꾼과 자주 있으면 생각이 옮는 법이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곤륜파는 지금까지 기둥 하나 겨우 세웠을 겁니다.’

[……에잉, 쯧.]

심천검이 딴청을 피우는 사이.

도사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어왔다.

“한데, 대협께서 사실은 구천검 선배라는 소문이 있던데…….”

“소문이 아니야, 실제로 그러하지.”

“그, 그렇습니까?”

도사의 표정에 신뢰하는 기색은 없었다.

한데 그것이 불쾌하진 않았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무슨 개소리를 하나 싶었을 테니까.

백무량은 피식 웃으며 도사의 속내를 꿰뚫었다.

“솔직히,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조금은 들었지?”

“……아, 아닙니다.”

“근데 그 사실을 강호에 밝힌 것이 화산파의 장문인인 칠지검협이고, 장로인 낙매신검이다.”

“그, 그랬습니까?”

“그 사람들보다 항렬 높으면 무시해도 되고.”

“…….”

도사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화산파의 두 고수가 동시에 미치진 않았으리라.

그런 생각이 뻔히 보이는 듯해, 백무량은 도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앞으로 내가 행동으로 증명할 터이니, 지금 당장은 믿지 않아도 된다.”

“아, 아닙니다. 제가 어느 안전이라고…….”

‘생각보다 놀리는 재미가 있는데?’

그러다 백무량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도사와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 인파가 이쪽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모두 자신을 알아본 것이다.

‘허, 이놈의 명성이란…….’

[에이잉!]

백무량은 심천검의 야유를 반주 삼아 경신법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도사에게 짧은 전음을 보냈다.

[다음에 만나지, 후배.]

그 전음에 도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에 백무량의 시선이 잠시 뒤로 향했다.

‘돌아가서 꾸짖어 볼까요?’

[네 항렬에 그런 장난이면 살인과 다를 바 없음을 모르느냐?]

‘……아쉽.’

백무량은 도사의 얼굴을 기억해 두고는 무당파를 향해 달렸다.

***

정문에 다다르는 동안, 어렴풋이 깨달은 바가 있었다.

길을 보면 그 끝에 자리한 것이 보이기 마련이라.

화산의 잔도는 화산파의 냉엄함을 증명하고, 곤륜의 등정로는 점점 올라갈수록 운해의 깊이를 알게 된다.

반면 무당산은 어떠한가?

‘본질에 비하면 사소하겠지만, 태극의 순행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보이는구나.’

주먹이나 칼질 한번 보지 않았지만, 무당파가 어떠한 기치(旗幟)를 가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자연스레 무극진인이 지닌 품행이나 무위가 궁금해졌다.

백무량은 설레는 마음을 안고서 정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누구시오?”

모범적인 차림새를 한 도사가 신분을 물어 오니, 백무량도 시원하게 대답했다.

“근래 곤륜검선이라 불리기 시작한 백무량이라고 하오.”

“……아!”

“과거 구천검이라고 불렸었지.”

“…….”

도사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째 만나는 사람마다 의구심을 품는 걸까?

‘하기야, 죽은 사람이 어떻게 되살아나냐.’

이해는 하지만 그것이 두 번째가 되니 짜증이 솔솔 올라왔다.

“안 믿어도 되니까! 이 문 열 건가, 말 건가?”

“아, 죄송합니다, 대협.”

사죄를 표한 도사가 허겁지겁 정문을 열었다.

한데 문 너머로 보인 광경이 중턱에서 본 것보다 더욱 가관이다.

‘인파가 무슨…….’

백무량은 제 눈이 믿기질 않아서, 도사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딘가?”

“가끔은 저도 믿기지 않습니다만…… 무당파 본산이 맞습니다.”

“돌림병이라도 돌면 한 번에 수백은 죽겠는데?”

그 말에 도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백무량을 흘겨보았다.

“갑자기 왜 재수 없는 소릴 하십니까?”

“그냥, 갑자기 떠오를 수도 있지.”

백무량은 도사의 시선을 가볍게 흘렸다.

심천검의 혀 차는 소리에 비하면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묘하게 기분 나쁜 생각이 아니더냐?]

‘다 선배의 업보입니다. 달게 받으십시오.’

백무량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정문 안으로 향했다.

그러자 백여 쌍의 시선이 백무량에게 꽂혔다.

순간, 뒤로 천천히 걸어 나갈까 하는 고민이 들 정도.

과반수의 눈빛을 이기지 못한 백무량이 먼저 입을 열었다.

“비슷하게 생겼을 뿐, 나는 백무량이 아니오.”

“…….”

그 말에 호사가 몇몇이 초상화를 뒤적거렸다.

개중에 눈 빠른 사람이 백무량에게 웃음을 드러냈다.

“코 옆의 점이 일치하오만.”

“……으휴.”

한숨을 내쉰 백무량이 두 손을 들었다.

겉으로는 그래도, 내심 반가웠다.

‘여기서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간다.’

구천검 백무량의 귀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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