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3)
“이게 무슨 소리지?”
당문천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 동안, 백무량은 엄청난 양의 영기를 느꼈다.
정확하게는 심천검이 기거하고 있던 금색의 영단.
그 안쪽에서 폭발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열어 보고 싶지만…….’
구환신수 당문천은 조금도 신뢰할 수 없는 인물.
백무량은 입가를 매만졌다.
당문천 앞에서는 행동거지뿐만 아니라, 얼굴의 주름 하나까지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가진 인연을 잘 활용한다면, 사천당가를 매로 다스릴 수 있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중요한 것은 마교의 멸절.
그 후에 사천당가의 버릇을 고쳐 주어도 늦지 않다.
백무량은 온화한 미소로 당문천을 압박했다.
“제가 괜히 훈계질을 한 게 아닌가 걱정스럽군요.”
“허, 아니네. 자네의 말을 듣고 나니 내가 노욕을 부린 것 같아서 많이 민망했다네.”
‘잘 알고 있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하기에, 백무량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무림맹주인 남궁진도 마교라는 대적 때문에 야욕을 숨기고 있거늘.
어디 사천당가의 장로가 삿된 욕심을 부린단 말인가?
의도적으로 침묵을 흘린 뒤, 백무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곳에서 하루 묵어도 괜찮을지요?”
“시비를 붙여 주겠네.”
“겨우 하룻밤입니다. 사람을 붙여 봐야 거치적거릴 뿐이니, 얌전히 잠이나 자고 떠나지요.”
백무량은 당문천의 호의를 완강히 거절하고는 가주실에서 나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당문천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참으로 욕심이 난단 말이지.”
만일 당문영이 백무량을 정인으로 삼는다면, 큰 노력을 하지 않고도 강서 무림을 제패하는 셈이나.
백무량은 당문천의 생각을 일찍이 꿰뚫고 있었다.
‘계속 헛된 생각을 이어 간다면…… 그만두도록 하는 수밖에.’
***
드륵, 탁.
객실에 도착한 백무량은 한가롭게 드러눕는 척하며 공력을 일으켰다.
스으으…….
대맥을 타고 흐른 내공이 전신을 휘돈다. 노곤함으로 풀어져 있던 오감에 차가운 기운이 뒤엉켰다.
그것이 곧 기감으로 승화하니.
“역시, 한번 들키고도 다시 시도할 만큼 멍청하진 않아.”
이번에도 벽 뒤에 무인을 숨겨 놓았다면 그것을 구실로 삼았으리라.
사천당가와 친교를 맺었다는 소문을 일소할 구실.
‘검은 기껏해야 수십을 베나, 입은 수백을 죽이고도 남는다던가.’
가끔 송우현을 마주할 때마다 행동거지를 조심해라, 가슴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라는 잔소리를 듣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당문천은 선을 넘으려고 했다.
마교의 절멸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않았으면서, 아미파의 영역과 무학에 손을 내미는 욕심.
백무량은 송우현의 독심(毒心) 어린 조언을 떠올렸다.
-네가 마교를 다 잡아 죽였다고 치자, 그때를 노리고 덤벼들 승냥이는 없다고 생각하느냐?
-뜻이 가상할수록 벌레는 꼬이기 마련이야. 그놈들은 곡식을 파먹고, 뿌리를 좀먹을 것이다. 너와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압박이 될 수도 있겠지.
모든 벌레를 치울 수 없을지언정, 본보기는 보여라.
백무량은 송우현의 충고를 떠올리며 숙고했다.
‘아직 네 마교 중 하나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였는데, 섣불리 사천당가를 건드리면 타초경사가 아닐까?’
고민을 거듭해도 묘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백무량은 허리띠에 묶어 놓은 목함을 꺼냈다.
심천검이 사라진 이후에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가지고 있던 물품.
그 안에서 신묘한 영기가 흐르고 있었다. 보타문의 성지에서 느꼈던 기운이었다.
강호의 어떤 무인이라도 당장 취하고 싶어 안달이 날 영단이었으나, 백무량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취하면 독이 될 뿐이야.”
저만한 영기가 갈무리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영단이 무르익지 않았다는 뜻.
섣불리 취했다가는 체내의 내공과 어긋날 가능성이 컸다.
하물며 자신에게는 엄청난 양의 선기가 있지 않던가?
과거였다면 성급하게 움직였겠지만, 지금의 백무량에게는 생사를 넘나들면서 생긴 직감이 존재했다.
당장 오늘만 해도 두 번째.
당문천을 그 자리에서 벌하지 않았으며, 영단을 곧바로 취하지 않았다.
단순한 직감에 불과하나 맞아떨어질 때가 많았다.
바로 지금처럼.
“안으로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여인의 낭랑한 목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왔다.
목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린 백무량은 피식 웃었다.
목함은 자연스럽게 이부자리 아래로 감추었다.
“나이를 먹으니 예의를 깨달았구나.”
“그야, 대협께서 항상 꾸짖고 그랬으니까요.”
드르륵.
열리는 문 사이로 청초한 얼굴이 보였다.
사천성에서 가장 귀히 여겨지는 여식이자, 여러 별호로 떠받들어지는 당가의 금지옥엽.
올해로 열여덟 살이 된 당문영이 새하얀 웃음을 머금었다.
“장로님을 만나셨다고 들었어요.”
“장로? 임시라고 한들 당가의 가주님이 아니냐?”
그 말에 당문영이 호호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 마음은 철저하게 감추려는 모습은 여전했다.
백무량의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좋지 않은 버릇이라고 경고했던 게 몇 해 전이더라?”
“사람을 속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지요.”
“알면서도 그러겠다?”
“제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다 알아채실 거잖아요.”
당문영이 가까이 다가왔다. 귀한 향내가 방 전체를 물들이는 듯했다.
백무량의 입가에서 짜증 섞인 한숨이 새었다.
“임시 가주가 보낸 것 같지는 않고, 본론부터 말하지 그러냐?”
“저를 도와주면 귀찮게 굴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가주 후보가 아니라 직접 가주가 되고 싶다?”
“…….”
백무량의 직언에 당문영이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가문의 혈육을 치워 달라는 소리를 외인에게 했으니,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백무량에게는 좋은 제안이었다.
‘등을 조금 밀어주는 것만으로 당문천의 헛짓을 막을 수 있으니…….’
송우현이라면 저들끼리 부딪치다가 죽는 것까지 바랄 테지만, 사천당가가 가진 저력까지 없애고 싶진 않았다.
생각을 정리한 백무량은 당문영에게 전음을 보냈다.
[내가 바라는 것을 들어줄 수 있다면.]
[아미파를 도와주고, 마교와 싸울 때 눈 돌리지 말라는 거지요?]
어떻게 알았느냐, 그런 소리는 할 필요가 없었다.
당문천과 대화할 때 기감으로 알아차렸던 두 무인.
필시 그들 중 당문영의 세작이 있었을 터.
백무량은 혀를 가볍게 찼다.
[하나로 뭉쳐도 모자랄 판국에 둘로 나뉘어 있으니, 사천당가도 예전 같지 않구나.]
[그러니까 대협, 아니 오라버니께서 저를 도우셔야지요. 옛 인연도 있잖아요.]
인연이라.
백무량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당문영에게는 인연일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유쾌하지 않은 만남이었다.
그도 그럴 게, 곤륜파를 속이기 위해 찾아온 꼬마이지 않았던가?
영민하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당문영에게 휘둘렸을지도 모르는 일.
그 사실이 백무량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미안하지만 인연보다는 확실한 걸 논하는 게 나을 거야.]
[곤륜신성이 선(仙)의 경지에 올랐다더니, 입담은 상인 못지않네요.]
당문영이 눈가를 샐쭉하고 웃었다.
그녀를 오래 본 백무량은 일종의 패배 선언임을 알아차렸다.
[천하가 안정을 찾으면 사천당가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건 미리 말해 두지.]
[전부터 느꼈지만, 참 마교를 없애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으신 것 같아요.]
[하면 도사가 마인을 인정하리?]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니었어요. 단지, 그냥, 뭐.]
말꼬리를 흐린 당문영이 창밖의 달을 보고는 황급히 화제를 바꿨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그래, 가서 자라.”
백무량의 말에 당문영이 예를 표하고는 객실에서 떠났다.
홀로 남은 백무량은 다시금 목함을 열었다.
전보다는 덜해도 아직 영기가 바깥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기가 당가라서 다행이야.’
선도의 내공심법을 배우는 공동파나 무당파였다면 영기를 알아차렸을 터.
백무량은 목함을 닫고는 조용히 묵상했다.
심천검이 사라진 지도 어언 닷새.
그의 무학과 무론을 갈무리하는 것이 하루의 마무리처럼 행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운검묘에서 제를 크게 치렀어야 했거늘.
백무량은 아쉬움을 뒤로했다. 이제는 떠난 사람을 가지고 후회해 봐야 남는 것은 없었다.
‘선배, 내세에서는 행복하게 사시오.’
진지하게 염하고는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여기가 내세더냐?]
반가운 목소리가 상단전을 울림에 백무량은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미쳤나. 사라진 지 닷새가 넘은 사람을…….”
[닷새? 허,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단 말이냐.]
“……환청이 심하군.”
일단은 누워서 잠을 청해 보자.
그 일념으로 이부자리에 누웠으나, 상단전 전체에 커다란 괴성이 울려 퍼졌다.
[감히 선배를 잡귀 취급을 하려고 드느냐!]
“크윽.”
머리가 쪼개질 듯한 고음에 백무량은 두 귀를 막았다.
한데 웃음이 나왔다.
‘정말 선배입니까?’
[그래, 네 생각도 훤히 잘 들린다.]
확실했다. 심천검의 목소리였다.
백무량은 반가운 마음을 애써 숨기고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뭐 하다가 이제 나타난 겁니까? 아미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허, 안 본 사이에 기강이 해이해졌구나. 내가 다시 잡아 주랴?]
‘마지막까지 갔다면 제가 이겼겠지요.’
[우스운 소리를.]
혀를 가볍게 찬 심천검은 백무량의 무공에 진전이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전보다 더욱 단단해진 혈도와 대맥.
하단전에 굳건히 자리 잡힌 내공.
무엇보다 심천검의 이목을 잡아끈 것은…… 바로 상단전.
[그릇이 커졌구나.]
검해의 파도 일부를 담는 것도 힘겨워하던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것이 겨우 백 일도 채 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더더욱 놀라운 일이다.
심천검은 진지한 어조로 백무량에게 과거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이제부터는 상단전의 단련도 중요시해야 할 것이다.]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나를 어디서 처음 만났더냐?]
‘검해지요.’
[하면 다른 선인(先人)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
‘……!’
그저 심상을 단단하게 구축하라는 말인 줄 알았거늘.
백무량의 눈이 커졌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검해에서 다른 도사와 마주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 모습을 본 심천검이 피식 웃었다.
[물론 내가 경험해 본 건 아니지만…… 후배는 여러모로 특이한 운명을 타고난 것 같아서 말이다.]
‘예? 그게 무슨…….’
[일단은 내가 어떻게 되돌아왔는지 말해 주마.]
심천검은 ‘빛’과의 만남을 짤막하게 이야기했다.
백무량의 표정이 자연스레 굳었다. 의문은 많이 남았지만,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적어도 제가 사특한 방법으로 되살아난 건 아니겠군요.’
[네 사형이 멀쩡하게 살아 있을 가능성도 커진 셈이지.]
심천검이 의기양양한 어조로 히죽거렸다.
[자, 이제 선배의 위대함을 알겠느냐?]
심천검이 저런 말을 수없이 되풀이하리란 생각에 백무량은 화제를 돌렸다.
‘영단은 완전히 무르익고 있던데, 선배께선 지금 어디 계신 겁니까?’
[네 상단전에 기거한 검해.]
백무량은 앞으로 더 시끄러워질 것을 직감했다.
예전에는 그것이 너무나도 불쾌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앞으로 더 잘해 봅시다, 선배.’
[누가 할 소리를.]
두 도사는 끌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