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2)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그것을 알아차린 자는 몇 되지 않았다.
심지어 아미파의 장문인인 정혜 신니조차도 고등한 무학의 잔재를 어렴풋이 보았을 뿐이다.
“하나.”
백무량은 첫 숫자를 입에 담았다.
마인들은 어깨가 순간 움츠러들었으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들 중 하나가 싸우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는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노야께서 너의 죽음을 명하셨다.”
“……둘.”
백무량의 전신에서 공력이 꽃폈다.
이제는 청운으로 유형화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숨 쉬듯 자연스러운 운용.
겁을 한껏 집어먹었던 아미파 제자의 호흡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태청신공이 원숙해지며 자연스레 따라온 공능이었다.
그 순간 흐름이 바뀌었다. 아미파에 감돌았던 암운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변하였다.
꽈아악……!
마인들이 제각기 애병을 쥐었다. 촌각 뒤에 일어날 일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늦었음을 깨달았다.
운명이란 항상 그러했다.
“셋.”
청운을 일으킨 백무량은 마인들 사이로 내달렸다.
이에 철혈공으로 시뻘겋게 물든 열일곱의 마인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모습이 마치 붉은 한지 위에 시퍼런 실선이 그어지는 것과 같으나, 색이 점차 번지기 시작한다.
서걱!
청색의 염료, 청운이 깃든 칼날이 마인을 베고 또 베었다.
마치 소나 돼지를 도축하듯이 무감정한 움직임.
철혈공을 익혔다고 한들 백무량의 일 수를 버틸 순 없었다. 한 번의 휘두름에 천산(穿山)의 힘이 담겼다.
그렇게 반수를 베었을 때쯤 백무량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제야 칠십여 년 전의 나를 넘어섰구나.’
서른넷에 이루었던 경지를 약관에 넘었다.
하물며 백무량의 진신무학은 그때보다 훨씬 진보했다.
그것을 누가 도왔던가?
그걸 생각하면 속이 쓰리고, 눈앞이 저절로 흐려진다.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인연에 애통해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 마음은 검으로 표출되어 마인에게 향하니.
“커헉!”
일 검에 일살.
정교한 초식이 마인의 목을 집요하게 노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정혜 신니는 백무량에게서 균열을 느꼈다.
칠성교주에게 혼을 빼앗겼다고 한들 아미파의 장문인.
어렴풋이 남아 있는 세월과 경험은 백무량의 이상을 감지했다.
내딛는 걸음, 휘두르는 검, 굳건한 마음.
그 모든 것이 완벽할진대 어쩐지 균열이 느껴졌다. 뭔가 말로 간단히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대협…….”
정혜 신가 낮게 중얼거리니 백무량이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
모든 마인을 격멸했음에도 기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쪽을 걱정하고 있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대협이 나서 주신 덕분에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백무량은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등 뒤에 마인들의 시신이 가득했다.
“먼 곳에 가서 태워야 할 겁니다. 저놈들의 신체에 쌓인 마기가 주변을 어지럽힐 테니.”
“명심하겠습니다.”
정혜 신니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백무량은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두려움보다는 걱정.
아이답지 않은 담대함이 있었다. 단순히 어려졌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대협이야말로 괜찮으세요?”
한 제자가 묻기에, 백무량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심천검이 사라졌다는 상실감에 냉정을 잃었고 번민이 많아졌다.
만일 칠성교주와 마주했다면 죽는 걸 상정하고 덤볐을 터였다.
그때 제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괜찮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요.”
백무량은 그 제자를 보았다.
정확하게는 그 제자의 눈에 비친 피범벅인 백무량 자신을.
그 모습이 무척 쓸쓸하고, 황량했다. 제자가 자신을 걱정하는 이유가 그럴듯했다.
하물며 정혜 신니는 어떠한가.
마인이 부순 잔해를 정리하면서도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쓴웃음이 얼굴에 배었다.
‘나는 정말로, 선배한테 많은 걸 의지하고 있었어.’
심천검의 부재가 참으로 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
아미복호검을 아미파에 전하고 나면 곤륜산으로 돌아가, 수양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닐까?
백무량은 까닭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밤하늘에 걸린 달이 오늘따라 색이 바랜 것처럼 보였다.
***
“알아서 잘하겠지, 그놈.”
백무량이 떠나간 검해의 심상.
그곳에 심천검은 완전히 녹아들고 있었다. 이별이 아쉽기는 했지만, 더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우연에 가까운 만남이었으니까.
‘짐을 많이 털어 내고 가는구나.’
실전된 무학을 백무량에게 온전히 계승시켰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유실되었을 역사나 깨달음 또한 마찬가지.
생전에 많은 제자를 두었지만, 백무량에게 쏟은 정은 그들 중에서도 각별했다.
죽도 제법 맞았다. 짓누르면 튕겨 나오는 성격인지라 놀리는 맛도 쏠쏠했다.
‘남은 것은 후배에게 맡기고 떠나면 되는 거야.’
오래전에 죽은 선배가 남아 봐야 미망에 빠져서 허덕일 뿐이다. 추해지지 않았을 때 떠나 주는 것이 상책이다.
분명히 그랬을 터인데.
쏴아아……!
한 줄기 빛이 심천검에게 다가왔다.
의식이 흐려지고, 눈앞이 시꺼메짐에도 존재감이 확연하게 느껴지는 빛이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혜광심어보다 더 고등한 수준의 전음이 심천검의 상단전을 울렸다.
검해의 심상이 곁에 있지 않았다면 혼백마저 으스러졌을 강대함.
심천검은 본능적으로 목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하지만 입으로 담거나, 생각으로 떠올리지도 않았다.
단지 한 가지를 물었다.
“내가 후배의 곁에 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나?”
[계획에 네가 있었다.]
“하면 아직이란 건 무슨 뜻이냐? 내가 했던 것은 뭐지?”
[어긋날 뻔한 천명을 네가 막았다.]
심천검은 칠성교주와의 싸움을 떠올렸다.
만일 자신이 그곳에 없었더라면, 백무량은 반드시 죽었을 터였다.
그러나 의문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백무량의 특이성은 그보다 이전에 있었다.
“후배를 대신하여 묻겠다. 왜 그 아이는 칠십여 년 전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살아난 것이냐?”
[…….]
빛은 몸을 꿈틀거렸다.
대답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듯한 행동에 심천검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말하지 않겠다?”
[검해를 이은 자에게 그대로 말할 것이라면, 말해 주지 않겠다.]
“허.”
무언가 뒷배경이 있는 듯한 모습.
심천검은 빛을 한껏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나에게 무엇을 바라느냐?”
[천명을 이룰 도사를 도우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빛이 광대한 힘을 흩뿌렸다.
***
아미파에서 나온 백무량은 사천 성도로 향했다.
‘평소라면 곧바로 사문으로 돌아가겠지만.’
이만한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조용한 사천당가가 기이하게 느껴졌다.
섣부른 행동이라고 해도 좋았다.
아미파의 속가제자, 화은열이 허무하게 죽은 이후로 부채 의식이 있었다.
‘뭣보다, 사천당가라면 약해진 아미파를 그냥 두고 보진 않겠지.’
괜히 당가의 독보다 입을 조심하라고 하겠는가?
그들의 권모술수는 정파보다는 흑도에 가까웠다.
어쩌면 아미파의 무학과 전통성을 그대로 흡수하려는 계책을 꾸미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예상은 조금도 틀리지 않아.
“그게 뭐 잘못된 행동인가?”
사천당가의 임시 가주.
구환신수 당문천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같은 정파로서 아미파를 도우고, 함께 마교에 대항하려는 것이 문제로 보이나?”
“석두와 요안의 남자를 상대할 때 서로를 충분히 알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르신.”
백무량은 낮지만 분명한 어조로 당문천을 압박했다.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한 당문천이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안 본 사이에 무공이 훨씬 진일보했군. 약관의 나이에 얼마나 높은 경지에 오른 것이냐?”
“알려 드릴 의리는 아직 없다고 생각합니다.”
“허! 네가 말하지 않았더냐? 석두와 요안의 남자를 상대할 때 서로를 충분히 알았노라고!”
“말장난하기엔 시간이 아쉽지 않습니까?”
백무량의 짜증에 벽 뒤에서 작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뻔하다. 사천당가 특유의 기관진식 안에 사람을 숨겨 둔 게 분명했다.
툭, 툭.
백무량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 번 두드렸다.
당문천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기감도 아주 훌륭하군.”
“어르신께 인정을 받고자 찾아온 게 아닙니다.”
“하면…… 확답이 필요한가? 아미파를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잘 아시는군요. 아, 지원도 필요합니다.”
백무량의 말에 당문천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역시, 약관은 약관인가.’
세상에는 직접 마주하지 않고도 부릴 수 있는 꾀가 너무나도 많았다.
아미파를 돕기 위해 찾아갈 여승 혹은 상인.
그 사이에 사천당가와 인연이 있는 재원을 끼워 넣으면 그만이다.
당문천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알겠네. 자네를 보아, 아미파를 건드리지 않고…….”
“만금상단을 통하여 아미파를 돕는 방식은 어떻겠습니까?”
여유 만만하던 당문천의 인상이 구겨졌다.
만금상단.
천하의 반을 논한다는 상단에게 장난질을 칠 순 없었다.
하물며 이제 막 약관인 백무량이 거론하기엔 너무나도 거물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사천 땅에서 만금상단이라니!”
“그곳의 상단주와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그런 말은…….”
“예, 하지 않았지요. 전에는 사정이 있어서 말할 수 없었습니다.”
백무량은 당문천의 말을 중도에 끊으며 우위를 점했다.
사천당가를 압박하려거든 확실하게.
어쭙잖은 꾀조차 쓰지 못하도록 한 번에 잡는 것이 우선이었다.
“앞으로는 제가 아니라, 송 노야나 조윤과 상의하면 될 겁니다.”
“……!”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나 보지요. 곧 무림맹에서 곤륜파를 찾아올 예정인지라.”
처음부터 끝까지, 당문천의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도록.
백무량은 송우현과 조윤이 말했던 조언대로 말을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나저나…… 임시에선 언제 물러나실 겁니까?”
“얼른 문영이에게 넘기라는 건가?”
“예, 이제 그 아이도 성년이지 않습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당문천보다 당문영이 훨씬 상대하기가 편하다.
자신의 의도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건지 당문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의 그릇은 청해성에서 끝나지 않을 모양이군.”
그 말에 백무량은 껄껄 웃었다.
모욕이라고 느낀 당문천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하지만 백무량의 웃음은 한참이나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일다경이 흐르고 나서야 백무량은 뒷말을 이었다.
“그릇이니, 야망이니, 임시 가주께서는 그런 것으로 저를 재 왔던 겁니까?”
“아니라는 말이냐?”
“세상에. 세상에 귀를 열어 두셨다면, 제 행적을 아시지 않습니까!”
“……마인과 싸웠던 건 전공을 세우고 명예를 높이는 과정이 아니었느냐?”
당문천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도리어 백무량은 그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세상이 마교에 의해 혼란해지고, 삿된 교리로 망가진다면 가문의 위상이나 권력 따위가 무에 의미가 있겠습니까?”
“…….”
당문천은 고개를 쓱 돌렸다. 분노로 달아올랐던 얼굴이 이제는 창피로 뒤덮였다.
무엇보다, 이제는 시선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백무량의 이상과 목표가 자신을 타락한 노물(老物)로 보이게 만드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달그락.
백무량의 허리띠에 묶인 상자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