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59화 (159/275)

반석 (2)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다. 백무량의 시선이 아미복호검으로 향했다.

‘사실은 내가 먼저 정혜 신니에게 양해를 구했어야 할 일인데.’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 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있나.

백무량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무언가, 판에 박힌 말이라도 건넬 작정이었다.

한데 정혜 신니가 먼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죄송하지만, 소협. 제자들을 돌봐야 하는 입장인지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도 괜찮을까요?”

“비급을 먼저 보고 있어도 괜찮다면요.”

“그거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혜 신니는 백무량에게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신뢰의 감정이 맺힌 눈이었다.

“본 문의 비급을 칠 년 동안 보관해 주신 소협에겐 신의가 있으니까요.”

“……그렇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먹을 얻어맞은 기분이다. 백무량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에 심천검이 심술궂은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네가 이상한 거다. 아무리 검해를 이었다고 한들, 아미파의 옛 무공은 무인이라면 욕심이 날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네 심성이 악했다면 지금 아미파가 어떻게 되었겠느냐?]

백무량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십 년 동안의 봉문, 어려진 제자들과 장문인, 옛 무공.

지금 아미파의 여승을 해친다고 한들 뒤탈은 거의 전무하다.

게다가 곤륜파는 최근 강서 무림의 핵심으로 자리했다.

사천당가에게 조금 나눈다면 끝날 일.

백무량은 인상을 한가득 쓰며 불쾌함을 표했다.

“선배, 그게 무슨…….”

[네가 아니라 청성파였다면 어땠을까?]

“…….”

하려던 말이 뚝 끊겼다.

백무량이 본 청성파라면 아미파의 약점을 그대로 관망하고만 있지 않았을 터였다.

문파가 상대를 어떻게 굴복시키느냐.

그 광경은 칠십여 년 전에 우연히 보았다.

무학은 그대로 구파일방에 흡수되고, 고수는 지하 어딘가에 결박당하여 구결을 암송하는 인형으로 자리한다.

그런 놈들과 자신을 비교하다니, 백무량은 심천검에게 실망감을 표했다.

“제가 아무리 선배한테 농담을 자주 던졌다고 해도 그렇지, 그런 질 낮은 것들과 비교한단 말입니까?”

[도문의 제자라고 하여 누구든 심성이 올곧더냐? 아마 저 여승은 그걸 감사히 여겼을 것이다. 너한테든, 너를 이곳에 인도한 하늘에게든.]

“……허.”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도사가 도사답게 행동하는 것이 어찌 감사할 일이 되었단 말인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허탈한 웃음이 입가에 배었다.

칠십여 년 전, 구천검으로 불릴 때만 해도 백무량은 도사답지 않은 놈이란 소문이 자자했다.

실제로 그러했다.

백련교의 난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백련교주에게 죽고, 되살아나서, 사형의 안배를 하나둘씩 찾으면서 변했을 뿐이다.

그 변화가 백무량에게는 몹시 생경했다.

아주 예전이었다면 심천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네요. 왜 아미복호검을 몰래 익힐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제 와서 허튼 짓거리를 하겠다면…….]

“장난 좀 쳐 봤습니다. 곤륜도로서 곤륜의 명예를 실추시킬 생각 따윈 없습니다.”

하물며, 백무량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의 심상에 검해가 자리하고 있다면, 곤륜파의 역사가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선배 말고도 다른 도사가 있을지도 모르고요.”

[……뭐,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만.]

“안 합니다. 그냥, 선배가 생각보다 비열한 사람인가 싶어서 조금 놀랐습니다.”

[허, 놈!]

심천검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었다.

[그나저나 아미파의 장문인은 너의 멍청한 말에서도 깨달음을 얻는데, 너는…….]

“뭐요, 뭐가요.”

[에잉, 쯧.]

심천검의 혀 차는 소리에 백무량은 피식 웃었다.

처음엔 참 시끄럽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정이 붙었다.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텐데.’

백무량의 손가락이 갈 곳을 잃고 방황하다가 아미복호검으로 향했다.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혜 신니가 돌아오기 전에 요체를 찾아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먼저 찾으면, 뭐, 칭찬하기로 하지요.”

[실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얼른 펴 보기나 해라.]

심천검의 말에 백무량은 태청신공을 운용했다.

콰르르…….

여러 경락을 거친 공력이 수태음폐경을 통해 실낱처럼 새어 나왔다.

그것은 곧 청운으로 유형화하여 아미복호검을 감쌌다. 아기를 감싼 보를 매만지듯이, 정성스러운 손길이었다.

“후우…….”

[조금만 지분거리면 먼지가 될 비급이니, 조심하여라.]

심천검의 경고에 따라 백무량은 의념을 집중했다.

한 쪽을 넘기는 것만으로 정신이 사그라지는 듯했지만, 일종의 수련과 같았다.

‘섬세하게, 조금씩.’

글씨의 먼지를 걷어내는 행동조차 성을 다해야 한다.

백무량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머지않은 여름이 자신에게만 찾아온 것 같았다.

[으음.]

백무량의 도움으로 아미복호검의 구결과 초식의 형세를 살펴보던 심천검이 놀라움을 표했다.

[이건…… 평범한 무공이 아니구나.]

“……?”

[사람을 상대하는 무학이 아니다. 마치 불을 다루는 거인을 상대로 몸을 보호하는 듯한…… 그런 무공이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편 곳을 잘 봐라.]

심천검의 말에 백무량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확실히, 검세를 취하는 그림이 범상치 않았다.

팔 척의 체구를 가진 거인과 물처럼 흐르는 불을 상대로 몸을 보호하고 되받아치는 구결.

그 아래에 조그마하게 적힌 단어가 있었다.

“화(火)?”

불을 그려 놓고 불을 써 놓은 이유가 무엇일까?

백무량은 이마에 맺힌 땀을 왼팔로 닦으며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소협?”

옆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니 정혜 신니가 마주앉아 있었다.

“내공의 수발이 어쩜 그리 자연스러운지, 대단하네.”

정혜 신니의 순수한 감탄에 백무량은 담담하게 받아쳤다.

“별것 아닌 재주입니다. 그것보다 아미복호검에 적힌 구결을 함께 봐 주셨으면 합니다.”

“아, 그러지.”

정혜 신니가 무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공력을 자유자재로 유형화시키는 것으로 모자라, 저렇게까지 세밀하게 움직이다니.

보통 수련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수십 년을 고행한 노승, 혹은 심상을 갈고닦은 노도사만이 가능한 경지였다.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장문인.”

백무량의 나직한 목소리에 정혜 신니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칠성교주에게 시간, 세월을 빼앗기면서 장문인다운 무게감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지금이 몹시나 창피했다.

“음, 그래, 집중하겠네.”

그저 아미파의 장문인이라는 위치가 자신을 지탱하고 있을 뿐.

정혜신니는 백무량의 성취, 운해를 힐끗 곁눈질하다가 아미복호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건…….”

“뭔가 아시는 게 있습니까?”

“성화교야.”

성화교라, 백무량은 눈을 끔뻑거렸다.

언젠가 듣거나 본 적이 있는 낱말이었다.

“마교입니까?”

“그래. 아주 오래전, 칠성교 이전에 있었던 마교지.”

정혜 신니는 머릿속에 새겨 둔 아미파의 역사를 들췄다.

“사실, 불가에서 파생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성신(聖身).”

백무량의 외마디에 정혜 신니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걸 소협이 어떻게 아는가?”

“선대가 남긴 책에 적혀 있었습니다.”

백무량은 주백천이 남긴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성화교.

-특이하게도 성화교는 교주를 성화를 품은 자, 성신(聖身)으로 칭한다. 성화를 통해서 세상을 정화한다는 위험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다. 고대의 칠성교나 세외에서 온 천마신교와는 다르게 성화교는 무림 내에서 생긴 마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공조차 쓰지 않는다.

칠성교나 천마신교와는 다르다. 굳이 비교하자면 백련교에 가까웠다.

알아볼 수 있는 수단이라고는 오로지 싸움뿐.

겉보기에는 다른 무인이나 다를 바 없기에 위험했다.

“무림에 암약하고 있는 마인이 있다면, 아마 성화교겠지요.”

백무량의 중얼거림에 심천검이 맞받아쳤다.

[내가 전에 말했지만, 칠성교주는 무림에 네 마교가 있다고 했다.]

만에 하나 진실이라면, 백무량의 눈이 번쩍 뜨였다.

‘사형의 책에 적힌 마교가 넷…… 이게 과연 우연일까?’

백련교, 칠성교, 성화교, 천마신교.

백무량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굳었다.

“마교로 인해 강호가 혼란한데, 이 책이 아미파에 돌아온 것이 과연 우연일꼬.”

정혜 신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백무량으로선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아미파 역시 곤륜파처럼 마교와 싸웠던 과거가 있다면, 든든한 우군이 되어 줄 텐데.’

그러나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백무량의 시선이 부쩍 어두워진 아미파 내부로 향했다.

아혈을 점혈당한 제자들.

그들을 돌봐야 할 정혜 신니에게 함께 마교에 대항하자고 할 수 있을까?

‘지금도 아미파의 상황을 감추기 위해서 아혈을 항상 짚어 두고 있거늘…….’

백무량의 시선을 좇은 정혜신니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소협의 소문은 항상 듣고 있네. 마교와 항상 싸우고 있다고 말이야.”

“…….”

“나도 도우고 싶다네. 하지만 제자들을 저렇게 둔 채로 바깥으로 나갈 수 없지 않나.”

정혜 신니의 눈가가 떨렸다.

반석을 다시 세우는 것과는 아예 다른 문제였다.

칠성교주에 의해 무력화한 아미파.

그녀들이 다시 강호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고수를 배출하려면 십 년이 걸릴지도 몰랐다.

그동안에 마교와 싸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정혜 신니가 백무량의 시선을 피했다.

“미안하지만, 정말로, 할 말이 없지만.”

“도와 달란 말은 아직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백무량은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약하다고 하여 미안할 일도 아니고요.”

바야흐로 칠 년 전.

현노윤과 현종휘는 약자의 굴레에 갇혀 있었다. 잘못하지 않았어도 늘 사죄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굴레를 타파한 것이 바로 백무량.

그렇다고 하여 청해성은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주인이 운산보에서 곤륜파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간단한 일이다.

“내가 칠성교주를 베면 될 일입니다. 사죄든 사례든 그 후에 이야기하지요.”

강자존을 타파하겠다.

이런 헛소리는 애초에 꺼내지도 않았다. 그건 이상에 불과했고, 백무량 혼자서 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저 칠성교주를 베면 해결된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백무량의 시선이 아미복호검으로 향했다.

“그 전까지만 아미복호검을 빌려 가도 되겠는지요? 성과가 있다면 나중에 공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협.”

정혜 신니는 낮은 목소리로 흐느꼈다. 백무량에게 자연스레 품은 존경심이 존댓말로 화했다.

참으로, 백무량에겐 많은 것을 빚졌다.

그 빚을 갚고, 돕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더.

“아미파의 서고를 개방하겠습니다. 그곳이라면 아미복호검을 해석하고 구결을 풀이할 때 도움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장문인.”

백무량은 예를 표하며 아미복호검에서 보았던 구결을 떠올렸다.

공동파의 경파, 화산파의 화검, 보타문의 금강.

각 문파에 존재하는 요체들 사이에서 아미복호검은 참으로 신기한 구석이 많았다.

[아미복호검에 적혀 있던 수경(水經)과 팔첨(八尖)의 초식을 익힌다면, 네 청운이 보다 정심해지겠구나.]

‘선배도 알아차렸군.’

이번 아미행에서 많은 것을 얻어 가게 되리라.

백무량은 칠성교주와 백련교주에게 점차 대등해져 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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