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 (1)
그날로부터 열흘이 지났다.
칠성교주와 청노가 추격대를 보낼지도 모른단 예감에 백무량의 걸음이 자연히 느려졌다.
그동안 백무량은 심천검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예전에는 어땠습니까?”
[그게…….]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를 사람을 대하듯이, 심천검의 과거와 경험을 계속해서 물었다.
특히 저번에 마주친 칠성교주에 관한 질문이 많아졌다.
“선배님을 알아보지는 않았습니까? 그, 왜, 예전에 자주 싸우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상하긴 했지. 혼을 보는 녀석이 나를 못 알아본다는 게 말이야.]
“그때와는 다른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아니, 확실하다. 그놈의 존재감을 내가 어찌 잊겠느냐?]
다만……이라며 말을 덧붙인 심천검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어렸다.
[내 검격을 보고는 아주 크게 당황해서는, 모르는 척 넘어갔을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혹시 도망치셨는데 저한테 허세 부리신 것 아닙니까?”
[요놈이, 어디 감히 하늘 같은 선대 장문인께!]
장난이 뒤섞인 말들 안에 고개 숙인 불안이 있었다.
백무량과 심천검은 그것을 알면서도 서로 꺼내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의 일만을 이야기했다.
[그나저나 아미파에는 무슨 일로 가는 것이더냐?]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음, 그게…….”
백무량은 정혜 신니와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말했다.
사실 지금까지도 의문이다.
아미파가 칠성교에게 해코지를 당했을지언정, 가히 십 년에 가까울 정도로 침묵할 이유가 없으니까.
하물며 그녀는 아미복호검을 받지도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심천검이 장고를 거치고는 한마디를 툭 던졌다.
[심상치 않구나. 중간에 마교를 만나는 한이 있더라도 빨리 가는 편이 낫겠어.]
“뭔가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내 예감이 틀리지 않는다면…… 칠성교주와 싸운 게 분명해.]
심천검의 확신에 백무량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
“후우…….”
백무량은 고개를 들어 아미파의 현판을 보았다.
여전했다. 먼지 쌓인 나무틀과 굳게 닫힌 대문.
누군가 한 번은 나왔을 법도 한데, 그러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허, 아미파라면 괄괄한 여협이 많은 문파가 아니었던가.]
심천검이 복잡한 심경을 내비쳤다.
백무량도 마찬가지였다.
‘그 아미파가 이렇게까지 영락할 줄이야.’
백무량은 대문에 손바닥을 대었다. 숨을 한가득 내쉬고는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정혜 신니를 불러낼 수 있을까?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대문 너머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이후로 사 년 만이던가?”
“장문인이시군요.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얼굴을 보이지 않고 대화함이 너무나도 미안하네.”
옷감과 살갗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정혜 신니가 예를 취하는 것 같아, 백무량도 대문을 향해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참으로 우스운 꼴에 심천검이 가볍게 혀를 찼다.
검지로 입술을 두드린 백무량은 아미파에 온 용건을 꺼냈다.
“전에 드리지 못한 아미복호검과, 보타문주가 전해 달라고 한 물품이 있습니다.”
“보타문주가?”
다소 의외라는 듯한 음성.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이 보았던 보타문주는 깜짝 선물을 줄 사람이 아니었다.
“전서구나 전령이 오지 않았습니까?”
“여러 사람이 오가기는 했지만, 보타문주가 보낸 사람은 소협이 처음이네.”
[중간에 끊겼군.]
심천검의 말에 백무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동안이나 아미파가 봉문하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뒤, 정혜 신니에게 물었다.
“긴히 말씀드릴 것도 있고, 던져서 드리기엔 비급이 너무 낡았습니다. 오늘은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소협이 그렇게 말하니 아미파의 봉문을 풀 때가 된 모양이야.”
“강호가 아미파의 복귀를 반길 겁니다.”
백무량의 말에 정혜 신니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못 볼 꼴을 보여도 겉으로 드러내지 말아 주게.”
끼익, 끼이이…….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무림맹주가 그토록 열어 보고자 했던 아미파의 안쪽이 백무량에 의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한데 그 모습이 백무량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자, 어떤가, 아미파가 왜 봉문한 줄 알겠나?”
“……이건.”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백무량마저 할 말을 잃었다.
아미파가 이렇게 된 연유는 심천검이 알고 있을 터.
백무량은 상단전을 뒤흔들기 시작한 심천검의 말을 떠듬떠듬 꺼냈다.
“칠성교주에게 당하신 겁니까?”
“그와 싸우고도 아무것도 잃지 않다니, 대단하군.”
정혜신니가 흙투성이가 된 밑단을 접었다.
백무량은 그 모습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칠성교주에게 세월을 빼앗겼을 줄은.]
심천검의 한탄에 백무량은 아미파 전체를 보았다.
본래 지천명의 나이였을 정혜 신니가 이제 막 약관에 이른 듯했고, 다른 제자들은 아혈을 짚힌 아이가 되어 뛰놀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필사적으로 봉문했던 거구나.’
하물며 아미복호검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장문인인 정혜 신니를 비롯해 다른 제자들이 죄다 어려졌으니…… 문외인인 백무량에게 보일 수 없는 풍경이었을 터.
백무량이 가만히 침묵하고 있으니, 정혜 신니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소협, 이건 반드시 비밀로…….”
“당연하지요. 이게 바깥에 밝혀졌다가는, 사천당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백무량의 말에 정혜 신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당가는 곤륜파와 친애가 있지 않았나?”
“그쪽이 어떤 성정인지는 신니께서 잘 아시겠지요.”
“…….”
정혜신니가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지금까지 아미파를 두고 본 것 자체가 기이한 일이긴 했다.
그 이유를 백무량은 알고 있었다.
‘가주인 당호가 마인을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당문천이 아미파의 이상을 파헤쳤겠지.’
바야흐로 칠 년 전.
당문영이 곤륜파를 찾아와, 당가의 존립을 위해 도와 달라고 했던 과거.
그때로부터 현재까지 당문천은 당문영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당호의 팔과 다리였던 분가를 지우고 있었다.
‘모든 게 정리되면 아마…… 시선이 아미파로 가겠지.’
당가와 여러모로 인연을 맺긴 했지만, 여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운 사이.
백무량의 입가에서 한숨이 나왔다.
“보타문주께서 보낸 물품이 있긴 합니다만, 그게.”
“……?”
“그게, 참.”
백무량은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부서진 목함을 내밀었다.
그 안에 이리저리 긁힌 목패가 있었다.
정혜신니의 표정이 자연히 일그러졌다.
“이게?”
“그게, 어찌 된 영문이냐 하면은.”
백무량은 칠성교주와 싸웠던 일을 떠듬떠듬 이야기했다.
그제야 정혜 신니의 인상이 풀렸다.
칠성교주의 강함은 그녀도 익히 알고 있었다.
단신으로 일문을 멸할 수 있는 힘, 혹은 능력.
그야말로 강호십대고수보다 우위라고 볼 수 있다.
만나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한숨을 내쉰 정혜신니가 목패를 쥐었다.
“보타문주는 아미파의 상황을 알고 있었네. 도움이 될 물품을 준다고 한 게 일 년 전이었지. 그다음에 소협이 왔고.”
정혜 신니의 시선이 백무량에게 향했다.
“보타문주가 왜 이걸 보냈는지 아나?”
그 말에 백무량은 심천검과 미리 알아본 내용을 말했다.
“지금은 흩어졌지만, 본래 선기가 담겨 있는 목패였습니다. 그거라면 마기를 억누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셨겠지요.”
“……셨겠지요? 소협의 생각은 다른가?”
“별 의미는 없었을 겁니다.”
백무량의 대답에 정혜 신니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제는 방도가 없다고 느낀 건지, 한숨조차 쉬지 않았다.
“방도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더냐?”
“칠성교주를 죽이면 됩니다.”
정혜신니가 힘없이 웃었다.
“소협은 싸워 보지 않았나? 그자를 어떻게 이길 수 있을지, 솔직히 나는 모르겠네.”
“…….”
“하물며 본 문은 이미 많은 것을 빼앗겼네. 지금까지 쌓아 온 반석이 무너지고 내공과 기억마저 잃었지.”
[역시.]
심천검이 작게 중얼거렸다.
백무량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세월을 빼앗긴다.
언뜻 들으면 아리송한 말이지만, 칠성교주가 빼앗은 시간만큼 쌓은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기억과 공력, 심지어 깨달음까지.
남은 것은 칠성교주와 싸우기 직전의 기억뿐.
한번 싸우고 나면 공포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제자들이 이렇게 된 이상, 아미파는 구파일방으로서 자립할 힘을 잃었네. 칠성교주와 싸운다는 건 더 말이 안 되지.”
아미파 장문인으로서의 책임감이 정혜 신니의 어조에서 묻어 나왔다.
그 안에 체념과 울분도 담겨 있었다.
그것을 모두 지켜본 백무량은 아미복호검을 마루에 놓았다.
“한 가지 이야기를 들어 보시겠습니까?”
“칠성교주와 싸우자는 말이라면 사양하겠네.”
“아닙니다. 터무니없이 황당하고, 기이한 이야기입니다. 저잣거리에 나도는 기담(奇談)으로 들으셔도 됩니다.”
백무량의 말에 정혜 신니는 한적한 자리에 앉았다.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괜한 이야기를 들어서 마음이 바뀌면 어떡하냐는 생각과, 무인이라면 달아나선 안 된다는 호승심.
그 외에도 책임감, 체념, 울분 따위가 머릿속을 핑 돌았다.
‘내가 저렇게 어린 소협에게 무슨 기대를 하고 있는 건지.’
하루 종일 제자들을 돌보아도 시간이 모자른 판국일진대.
정혜 신니가 우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차였다.
“칠십여 년 전에 죽은 도사가 있었습니다.”
“…….”
움직임을 돌연 멈췄다. 정혜 신니의 시선이 백무량에게 향했다.
먼 과거를 헤매는 듯한 눈동자, 그 안에 담긴 여러 감정들.
약관의 도사가 품을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겨우 두 번의 만남밖에 없었지만 특별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즉석에서 꾸며낸 것 같은 이야기지만.’
칠십여 년 전에 죽은 도사라.
정혜 신니는 다리를 모으며 백무량의 기담을 경청했다.
참으로 신묘하지만, 인간의 정이 담긴 이야기였다.
‘마교와 싸우다 죽은 도사가 다시 사문을 위해 검을 드는 이야기.’
죽은 것을 제외하면 묘하게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반석을 다시 쌓는다거나, 어려졌다거나.
정혜 신니는 백무량에게 재담꾼의 재주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물었다.
“그 도사는 포기하지 않겠나?”
“예?”
“뼈를 깎으면서 배웠던 것을 다시 갈고닦는다는 게 쉽지 않잖나. 하물며 마교는 평범한 무공으론 절대 대적할 수 없지.”
그 말에 백무량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어려진 것은 불운, 하지만 다시 반석을 쌓을 수 있음은 행운. 그 도사는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한낱 이야기라지만, 나는 그 도사만 못하구나.”
정혜 신니는 백무량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았다.
칠성교주에게 처참하게 패배하였으니 다시 도전해도 똑같으리란 체념.
그 체념은 아이가 된 제자들을 돌봐 줘야 한다는 변명에 뒤덮였다.
애초에 반석을 다시 세울 생각조차 안 하고 있던 것이다.
“소협 덕분에 볼 수 있었네.”
“무엇을 말입니까?”
“내가 보지 않으려고 하였던 나약함을.”
정혜 신니의 시선이 아미복호검으로 향했다.
어쩌면 자신이 익힌 것보다 더욱 단단할지도 모를 반석.
“여기 있으면서…… 아미복호검을 같이 궁리해 줄 수 있겠나?”
백무량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