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 (3)
다음 날.
백무량은 적당한 양의 건식을 행낭에 챙겼다.
유성한과 동행하기로 한 이상, 혼자서 자유롭게 다닐 상황은 아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보타문의 성지에서 새롭게 깨친 무학과 초식의 변용은 그야말로 훌륭했다.
심천검의 무공은 옛 곤륜파의 것 그 자체였다.
한데 조원양에게서 얻은 영단에 심천검이 스며들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하물며 성지에 있던 영기까지 모두 흡수했음에야, 보타문주에게 할 말이 없었다.
이를 알아차린 목락윤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예?”
“소협이 아니었다면 보타문은 명맥을 잇지 못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제가 성지를 망친 셈이지 않습니까?”
“소협께서는 한 아이의 생을 구하셨지요.”
자애가 한껏 담긴 미소.
백무량은 목락윤에게서 언뜻 관음을 본 것 같았다. 저절로 두 손을 모아 올리며 예를 취했다.
진정으로 존경할 수밖에 없는 선배였다.
……누구와는 다르게.
[나를 말하는 것이냐?]
‘설마요.’
심천검의 물음에 아무렇게나 대답한 백무량은 차를 홀짝거렸다.
“어제 이곳을 습격했던 마인은 아마 강소성에서 왔을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잠시 호광성의 만금상단에 머무른 적이 있었습니다.”
백무량은 만금상단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그것을 끝까지 경청한 목락윤이 고개를 살포시 끄덕였다.
“강소성 쪽을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요…….”
“어제 말씀드렸지만, 무림맹에게는 제 이야기는 빼 주십시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락윤의 눈가가 둥글게 휘었다.
“무림맹주라면 소협의 행적을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요? 사 년 전에 연을 깊게 맺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에 백무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야 뭐, 어쩔 수 없지요.”
무림맹주 남궁진.
그와의 인연은 연무지회 이래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방적인 연락이라고 봐도 좋았다.
-언제까지 은둔할 생각인가?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얼굴이나 한번 비치게.
-선배의 간곡한 언문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건가?
대답은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
대응하는 순간 무림맹과 단단히 엮일 게 분명했으니까.
‘최대한 모습을 숨긴 채 나오긴 했지만, 절강성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지.’
만금상단에서 있었던 일.
칠성교와의 싸움이 지금쯤이면 강호 전역에 퍼졌을 것이다.
백무량은 남궁진의 면면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문주님께서 제 존재를 부인하신다면 끝까지 따지지는 못하겠지요.”
“예, 숙지하겠습니다.”
부드럽게 웃은 목락윤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너희도 들었겠지?”
“예! 문주님!”
어린 여승의 까르르거리는 웃음소리가 대답에 뒤섞였다.
‘신뢰도가 확 깎이는구만.’
백무량은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채 옆을 돌아보았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유성한이 자기 옷깃을 신기하다는 듯이 매만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백무량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제 저흰 뭍으로 가는 거예요?”
“그래.”
“건너편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진 않겠죠?”
지난밤, 칠성교의 마인들을 멀리서 지켜보기라도 한 걸까?
유성한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서늘함과 공포가 배어 있었다.
백무량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태청신공 또한 유성한을 감쌌다.
“그런 놈들쯤, 수십 명이 와도 내가 이길 수 있어.”
“백 명은요?”
“어렵지만…… 뭐, 네가 잘 숨어 있는다면 가능하지.”
뻔뻔한 허세는 부리지 않았다.
백무량의 담백한 대답에 유성한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무엇보다 태청심결을 익혔기에 태청신공과 강하게 감응하는 듯했다.
아직 무공을 가르치지 않았을 뿐.
유성한의 심기체는 곤륜도에 가까워진 지 오래였다.
“자, 이만 가자꾸나.”
“네!”
힘차게 대답한 유성한이 백무량을 뒤따라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무쌍과 같은 기세로 걷던 유성한이 우두커니 멈춰 섰다.
그걸 알아차린 백무량은 피식 웃었다. 왜인지 묻지 않아도 알았다.
“다녀와라.”
“……네.”
무거운 음색으로 대답한 유성한이 돌연 몸을 뒤로 돌려서는, 우다다 뛰었다.
자기를 자애로운 시선으로 지켜보던 목락윤과 여승들이 있는 방향으로.
“저기, 저, 그동안……!”
늘 불량아처럼 굴던 녀석이 지금은 왜 소심하게 구는 건지.
백무량은 유성한에게 전음 한마디를 보냈다.
[지금이 가장 솔직해야 할 때가 아니냐?]
그 전음에 눈동자가 커진 유성한이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목락윤의 품에 안기면서 외쳤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유성한이 보타문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지냈을진 모른다.
다만 그동안 유성한에게 쌓인 정은 가볍지 않을 터였다.
실제로 유성한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흐르고 있지 않나.
‘녀석, 애는 애네.’
그 모습이 겸연쩍게 보인 백무량은 등을 돌렸다.
목락윤과 여승들, 유성한과의 대화는 자신이 관여해선 안 될 것이라고 느꼈다.
바로 그때.
[이 아이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소협.]
목락윤의 전음에 백무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어깨가 무거웠다.
***
“전멸을 했다?”
괴성은 미간을 강하게 찌푸렸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지러운 정신을 한곳에 모을 수가 없었다.
“그래, 흉수는 누구더냐?”
“저, 적어도 낙매신검은 아니었습니다.”
반가면을 쓴 마인이 몸을 벌벌 떨었다.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마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천무검성 유성백의 자손.
유성한을 납치하여 새로운 삼존으로 만들겠다는 괴성의 목적이 완전히 날아간 셈이었다.
실패에 죄를 묻는다면 마인의 목숨은 날아간다.
마인을 내려보던 괴성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랬겠지. 그는 계속 화산파에 있었으니 말이다.”
괴성의 살기가 한 올 한 올 유형화했다.
하나하나가 피부를 찢고, 심상을 어지럽힐 만큼 정교하다.
마인은 자신이 한 줌의 핏물로 화하는 걸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제……제가 알아 오겠습니다!”
말보다는 비명에 가까운 외침.
마인의 외침에 괴성이 잠시 침묵했다.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는 알지 못한다. 마인은 그저 참형을 받는 죄수처럼 벌벌 떨며 뒷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래.”
괴성의 목소리가 다소 엷어졌다. 감정이 진정되면서 가면이 괴성 내면에 있는 신을 내리눌렀다는 뜻이었다.
‘다, 다행이다!’
만일 가면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면 곧바로 목이 날아갔을 터.
마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마인의 마지막 행동이었다.
서걱!
괴성이 가볍게 손을 휘두른 것만으로 마인의 신형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내공이나 마기의 잔재는 아예 없었다.
괴성이 담고 있는 신.
그가 숨을 내쉬는 것만으로 인간의 목숨은 손쉽게 사그러진다.
“네놈 말고 다른 교인을 시키도록 하지.”
괴성은 마인의 몸에서 흐르는 핏물을 망연히 지켜보다가,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대적자는 낙매신검이 아니었던 걸까?”
화산파에서 나타났던 백련교주 이래로, 괴성과 청노는 낙매신검을 대적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 년.
그 시간 동안 괴성은 각고의 노력 끝에 낙매신검을 깎아내렸다. 다시는 강호십대고수라고 불릴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가 대적자가 아니었다면?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괴성은 까끌까끌한 턱을 매만졌다.
신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건, 가면이 어느새 수명을 다해 간다는 뜻이었다.
새로이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재료는 인골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괴성이 손뼉을 쳤다. 그러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칠성교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청노에게 이런 일의 전말에 대해 전하거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가볍게 까딱인 괴성은 마인의 시신을 내려보다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나는 강호로 가겠다.”
***
보타암에서 빠져나온 직후.
백무량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공무가 다망하시지 않습니까?”
“사 년 만에 강호에 왔는데 나한테 얼굴 한번 비치지 않을 생각이었나?”
불청객, 남궁진이 하얀 이를 드러냈다.
가만히 보면 유쾌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에 구렁이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 남자였다.
백무량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가운데, 유성한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이 아저씨는 누구인가요?”
경계심이 가득한 낱말에 남궁진의 시선이 유성한에게로 돌아갔다.
“무림맹주 남궁진이라고 한단다.”
[저게?]
남궁진의 경지를 한눈에 알아본 심천검이 핀잔을 던졌다.
그걸 들은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맹주다운 사람이 아니긴 하지요.’
[칠성교가 나타났다기에 뛰어난 맹주를 기대했건만, 쯧. 호걸은 아닌 모양이구나!]
‘지금 같은 상황엔 호걸보단 뱀이 낫지요.’
백무량은 심천검에게 과거와 현재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심천검이 말하는 과거는 정교맹.
정파와 사파가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이전의 이야기니,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대였다.
그 설명에 심천검이 가볍게 혀를 찼다.
[지금은 호걸의 심지보다 뱀의 혀가 낫다는 소리구나.]
‘예, 뭐, 지금은.’
백무량은 유성한을 흘낏 쳐다보았다.
무림맹주라는 호칭 하나에 잔뜩 신나서는, 악인을 반드시 벌해 달라는 말을 연거푸 하고 있었다.
그러다 남궁진이 지쳤는지 백무량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아이는 누구인가?”
“곤륜의 새로운 적전제자가 될 겁니다.”
“적전제자라.”
남궁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람을 품평하는 듯한 시선에 유성한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백무량은 자연스럽게 남궁진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자, 그쯤 하시지요. 슬슬 저희도 여독을 풀어야 하니 말입니다.”
“……그래, 자네를 위해 준비해 둔 숙소가 있네. 따라오게.”
그 말 끝에 남궁진의 전음이 뒤이어졌다.
[근골이 뛰어난 아이로군. 명가의 아이인가?]
[곤륜도에게 너무 큰 관심은 주지 마십시오.]
[자네도 참…….]
남궁진의 전음이 뒤이어지기 전에 백무량이 분노를 담아 쏘아보았다.
그러자 남궁진도 알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성격은 여전하구만.”
“그 성격을 시험하는 맹주께서도 마찬가지고요.”
남궁진은 백무량과 시선을 마주하다가 피식 웃었다.
“자네, 달라졌군.”
“……?”
“아무것도 아니네.”
의아한 표정을 짓는 백무량에게 남궁진은 소소한 재미를 느꼈다.
무시무시한 경지에 비해 아직 말이나 심리는 부족한 면이 있었으니까.
하물며 상대를 얕잡아 보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면 또한 존재했는데…… 사 년 만에 만난 백무량은 전과 달랐다.
‘무력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방법만이 아니라, 마음을 사는 방법까지 알게 되지 않았나.’
남궁진의 시선이 유성한에게로 향했다.
호의를 담아 자신을 바라보던 유성한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