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 (1)
따스했던 정오의 봄볕이 무색하게도, 해안가에 차가운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겨울의 한기와도 같았다.
완연한 봄이 오지 않은 까닭인가, 아니면 청가면의 마인이 내뿜는 살기 때문인가.
“하하하……….”
“킬킬.”
마인들의 지저분한 웃음소리가 여승들의 마음을 억죈다.
백련교의 난 이래로 칠십여 년, 오랜 시간 동안 머물러 있던 평화가 보타문의 칼날을 무디게 만들었다.
이 또한 봄볕과 비슷한 것이리라.
목락윤은 숨 죽여 떨고 있는 여승들을 훑었다.
보타문주로서 한 판단은 오직 하나.
저벅.
앞으로 걸어 나가서, 오연한 눈빛으로 마인들을 바라본다.
해안가 절벽에서 사라진 백무량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많은 것을 담은 채 싸우기에는 쉽지 않은 상대니까.
불퇴(不退). 그 목표만을 담고서.
“이대로 물러난다면 그대들의 무례를 용서하지요.”
“자비를 구하는 건가……?”
청가면의 마인이 짙은 웃음을 흘렸다.
“본 교는 불법을 알지 못한다…….”
상대는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물러설 생각은 당연히 없다.
목락윤은 잠시 고개를 돌렸다.
해안가의 절벽 위, 그곳에 위치한 석불.
세월의 풍파에 몹시 깎여 나가서, 남아 있는 건 시무외인을 취하고 있던 자세밖에 없는 불상.
‘참으로 오래되었구나.’
처음 보타문에 입문하였을 때는 추레하다고 생각했거늘.
목락윤의 눈동자가 깊어진다. 수많은 세월, 만남과 인연을 돌이키는 찰나가 지나갔다.
남은 것은 시무외인을 취한 불상.
-시무외인이란 중생에게 무외(無畏)를 베풀어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우환과 고난을 해소시키는 대자의 덕이니라.
누구에게 들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오랜 일.
목락윤은 관음처럼 웃었다.
‘보타문주인 자신조차 생에 집착하고, 생에 얽힌 이야기를 돌이키는데, 어린 제자들은 얼마나 두려울꼬.’
마인과 수없이 대적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백무량이 이상한 것이다.
목락윤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것만으로 여승들의 떨림이 가라앉았다.
자기 자신을 수없이 관조하면서 쌓은 불기(佛氣).
항마의 힘을 가진 내공이 해안가를 뒤덮었다. 잔잔히 차오르던 밀물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걸 본 청가면의 마인은 품에서 혁대를 꺼냈다.
“……!”
목락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마인이 든 혁대에는 수많은 단도들이 매달려 있었다.
날의 형상은 제각기 다르다. 한 단도는 톱니처럼 수십 개의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고, 하나는 갈고리와 같았다.
청가면의 마인은 목락윤의 시선을 음미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다룰까?”
쇳소리가 뒤섞인 목소리가 목락윤의 청심(淸心)을 흩뜨리는 듯했다.
선수(先手)는 한순간.
청가면 마인의 어깨가 뒤로 꺾였다가, 세차게 맥동했다.
쐐액!
마인이 내던진 단도가 차가운 바람을 갈랐다.
별다를 것 없는 투척술이었으나 목락윤의 급소를 노리는 속도만큼은 일절이었다.
다만 거기에 그칠 뿐.
투둑.
목락윤의 급소를 탐하지는 못했다.
힘없이 떨어진 단도와 목락윤의 자애로운 웃음.
청가면의 마인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덤덤하게 움직였다.
‘……달라졌나?’
목락윤은 수다스럽던 마인이 갑자기 침묵에 빠졌음을 이상하게 여겼다.
뒤이어 한 가지를 직감했다.
칠성교의 가면.
그 아래에 담겨 있는 악신이나 요신이 마인에게 힘을 빌려주었다는 것을.
쐐액!
청가면의 마인이 두 걸음을 내디디면서 쌍수를 휘둘렀다.
단도는 총 두 개. 목락윤의 목덜미와 허벅지를 노린 일격이었다.
분명히 그랬을 터인데.
‘휘어진다!’
허벅지를 노리던 단도가 갑작스레 방향을 바꿨다.
이십 년 공력에 맞먹는 마기가 담긴 공격이 젊은 여승에게 향한 것이다.
목락윤은 목덜미를 노리던 단도를 철산고로 튕겨 내면서 신법을 펼쳤다. 반쯤 검을 내던지듯이 단도를 막아 냈다.
“허억!”
젊은 여승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목락윤이 조금만 늦었다면 목숨이 달아났을 터였다.
그걸 본 목락윤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검진을 펼쳐 마인들에게 대항해라!”
“예!”
여승들이 검진의 자리를 찾아가는 동안에도 청가면의 마인은 투척을 멈추지 않았다.
쐐액!
때로는 교묘했고, 때로는 강맹했다. 목락윤이 신경 쓰지 못했던 맹점을 꾸준히 노렸다.
수다스러웠던 청가면의 마인은 입을 꾹 다문 채 목락윤의 움직임을 탐색하고 있었다.
청가면의 마인에게 있어 전투는 일종의 작업이었다.
-잊지 마라. 너는 무인이 아니다.
칠성교주의 냉정한 가르침에 따라, 청가면의 마인은 늘 순서를 지켰다.
‘유연하지만, 강맹함을 동시에 펼칠 수는 없다.’
급소를 노리는 단도는 상대의 능력을 재는 수단이다.
첫 번째 단도가 막히는 걸 통해 목락윤의 운동성을 재고, 두 번째 공격으로 목락윤의 우선이 무엇인지를 확인한다.
그 이후로 청가면의 마인은 때때로 여승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유지하는 거리는 항상 십 보.
검으로는 절대 닿지 않는 간격을 유지하면서, 청가면의 마인은 목락윤의 능력을 추정했다.
‘일격으로 쓰러트릴 수 없다면, 일격에 쓰러질 위치까지 몰아넣는다.’
내공이 심후하다고 하나 체력이 무한한 것은 아니다.
청가면의 마인은 그 점을 노렸다. 목락윤이 최대한 움직이게 만들면서, 조금씩 숨통을 조였다.
‘이쯤이면 내 공격 수단이 단도밖에 없다고 생각하겠지.’
청가면의 마인은 속으로 기쁨을 숨겼다.
총 스물두 개의 단도를 쓴 까닭은 바로 착각을 일으키는 데에 있었다.
‘다가갈 수만 있다면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닐까?’ 하는 착각.
하지만 청가면에게 있어 단도는 목락윤을 죽일 포석에 불과했다.
“비겁한 놈!”
목락윤의 외침에 청가면의 마인은 기쁜 듯이 웃었다.
물론 상대를 도발하기 위한 연기에 불과했다.
이제는 방심한 척 거리를 허용할 때다. 청가면의 마인이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디며 생각했다.
‘나름대로 괜찮은 경험이었다.’
칠성교에 입문한 이후로 서른 개의 단도를 사용한 적은 처음이다.
목락윤의 능력을 잰다고 썼지만, 모든 단도를 급소로 투척했다.
목락윤은 그걸 견뎌 내며 거리를 좁혔다. 드디어 검이 닿는 거리까지 도달한 것이다.
청가면의 마인은 목락윤에게 경탄했다.
다만, 그것이 전부이겠지만.
“이놈!”
목락윤이 노도와 같은 기세로 검을 내질렀다. 불기가 한껏 담긴 일 검엔 필살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청가면의 마인은 기껍다는 듯 웃고는 안으로 파고들었다.
흑심무영(黑心無影).
삼 보 안에서는 누구도 접근을 알아차릴 수 없는 극단의 보법.
청가면의 마인이 눈앞까지 파고들자 목락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미 휘두른 검은 회수할 방도가 없었다. 남은 것은 이제 목숨을 취하는 것뿐.
‘꼬맹이만 찾으면 되겠군.’
목락윤의 왼쪽 가슴을 향해 마인이 팔꿈치를 휘두르던 그때였다.
휘르르…….
땅바닥의 먼지가 위로 붕 떠올랐다. 바람이 급격히 차가워지며 가면 안쪽에 맺혀 있던 땀이 얼어붙었다.
팔꿈치 또한 순간적으로 멈췄다.
청가면의 마인은 이상을 느꼈다. 상정하지 않았던 적의 출현에 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강소성에서 왔느냐?”
어린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중후함은 내공의 깊이 때문인가.
청가면의 마인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목락윤의 목숨을 빼앗고 죽으면 그만이다.
멈칫거렸던 몸을 다시 움직이려던 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물었지 않느냐.”
스겅!
칼날이 어깻죽지를 갈랐다.
주인을 잃은 팔이 해안가를 툭툭 굴러다녔다.
가슴속에 살얼음이 낀 듯한 감각이 청가면의 마인을 헤집었다.
청가면의 마인은 잔뜩 쉰 목소리로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보타문의 빈객이시다.”
“이런……. 시간이 조금만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야속하다는 듯, 고개를 작게 내저은 청가면의 마인이 뒤로 한두 걸음 물러섰다.
그것이 전부였다.
쩌적!
청운에 휩쓸린 청가면이 순식간에 박살 났다. 마인 또한 순식간에 난도질당한 채 쓰러졌다.
칼의 주인을 본 목락윤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백 소협!”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칠성교가 공격해 왔습니다! 성한이를 노린다더군요.”
“……!”
백무량은 여승들과 싸우고 있는 마인들을 노려보았다.
[뻔하지 않느냐, 마인이 보타문을 노린 것이지. 성한이란 아이는 강제로 입교시킬 테고 말이다.]
허리띠에 맨 주머니 속 영단에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백무량은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것만으로 의사가 전달이 된 건지, 영단에서 후배의 부덕함을 탓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난들 알겠느냐?]
영단, 아니 심천검의 웃음소리가 백무량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고통스러웠다. 말이 머리지 상단전을 어지럽히는 잡음처럼 들려왔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은 익숙해졌다.
‘태청신공을 제대로 수련한 덕택이겠지만.’
앞으로 까마득한 선배와 생각을 공유해야 한단 말인가?
그 생각에 백무량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집중할 때가 아니었다.
[자, 네 실력을 보여 주어라.]
심천검의 목소리에 은근한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내가 알려 준 초식이 있지 않느냐?]
‘한번 보여 줬다고 제가 그대로 펼칠 수 있으면 천재겠지요.’
[내가 보기엔 가능해. 믿고 써 봐라.]
심천검의 확신에 백무량은 운중용형보로 거리를 좁혔다.
뒤이어 균천관일의 검로에 따라 백선신검을 휘두르니.
콰아앙!
보타문의 성지에서 펼쳤었던 균천관일이 그대로 마인들을 향해 쇄도했다.
일격에 네다섯의 마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위력에는 백무량도 섬찟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수가……!”
심천검과의 비무로 얼마나 큰 발전이 있었던 건가.
백무량이 잠시 감탄하는 사이, 심천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무얼 하느냐! 마인은 아직도 남아 있거늘!]
마인에 대한 증오가 머리를 뒤흔들었다.
한쪽 인상을 찌푸린 백무량이 연이어 구천화우검을 펼치며 전진했다.
이에 마인들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한 줌의 피로 화했다.
보타문주인 목락윤조차 감탄할 수밖에 없는 무예였다.
“크윽……!”
“칠성교주께서 너를 단죄하실 것이다!”
“신께서 너에게 벌을 내리시리라!”
마인들은 죽어 가면서도 백무량에 대한 저주를 쏟아 냈다.
하지만 백무량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런 게 있었다면 칠성교가 왜 강호에 패했겠느냐?”
“……놈!”
“결국 그렇게 말하는 것이 너희의 한계겠지.”
칠성교의 술법이 기괴하다고는 하나 불완전하다.
말만 신이지 결국 잡신이나 요신, 악신에 불과한 것이다.
백무량은 마인을 베어 내면서 위기에 빠진 여승들을 구했다.
“감사합니다, 대협!”
“아무것도 아닙니다.”
백무량이 겸양으로 대답할 때마다, 심천검이 자꾸만 구시렁거렸다.
[보타문도 쇠퇴했구나, 이런 일로 감사하기는.]
[아무것도 아니기는? 속으로 웃고 있는 것 아니더냐?]
백무량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옛 선배라고 하여 모두 존경할 만한 사람은 아니구나.’
그것이 자신한테도 해당된다는 것을 모르는 백무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