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137화 (137/275)

도원 (1)

마기에 강하게 반응하고, 선기를 담았다가 썼던 기억.

만능인 것 같아도 백련교주 앞에서 사그라들던 빛이다.

‘그 경우엔 백련교주가 특이하다고 봐도 되겠지.’

백무량은 손등을 들여다보았다.

운룡의 문양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저 해야 할 행동을 했다는 듯, 운룡의 두 눈이 백무량을 응시했다.

정확하게는 백무량이 그렇게 느꼈다.

그 변화는 곧바로 나타났다.

“어라, 뭔가 어깨가 가벼워진 것 같아요!”

유성한에게 느껴지던 시커먼 검댕, 살기와 귀기 같은 것이 완전히 일소됐다.

백무량은 유성한의 눈동자에서 활기를 읽었다.

과거의 기억이나 학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억눌림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얼 하고 싶더냐?”

그 모습을 보고, 문득 떠오른 물음을 내뱉었다.

유성한은 고민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입꼬리를 축 늘어트리거나 눈을 끔뻑거린다. 잠깐씩 드러나는 눈동자가 고통과 복수심을 내비쳤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노력은 가상하지만, 백무량에게 있어 타인의 표정을 읽는다는 건 제법 쉬운 일이다.

백무량은 유성한을 재촉하는 일 없이, 딴 곳을 보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봄은 봄이군.’

따스한 바람이 솜털을 간질인다. 마교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상황과는 대조적인 날씨였다.

‘모든 일이 끝나면 유람이나 다닐까?’

단명하기 딱 좋은 넋두리다.

백무량은 속으로 쓴웃음을 욱여넣었다.

어느새 대답을 정한 건지, 그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있었다.

“뜻은 정했느냐?”

“…….”

백무량의 물음에 유성한이 입술을 어물거렸다.

답은 정했지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 부분에서 백무량은 성질이 급한 편이었다.

“힘을 기르고, 나중에 다 죽이고 싶더냐?”

“아니요, 그것까진 아니에요.”

화들짝 놀라면서 대답하는 유성한.

백무량은 그 말로 유성한의 뜻을 알아차렸다.

“역시 잊지는 못하겠다는 거구나.”

“……예. 사부님이 보기엔 도량이 좁아 보이겠지요.”

“뭐가.”

“네?”

“아니, 애초에 네 사부님인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부처가 아닌 이상 사람이 어찌 모든 걸 잊을 수 있겠어? 다 그런 거지.”

다른 도사가 듣는다면 기함을 토할 말이지만, 적어도 백무량은 그랬다.

당하면 잊지 않고 반드시 갚는다.

도가의 가르침조차 백무량의 성질을 꺾진 못했다.

그런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을 가르치듯이, 용서를 강요하겠는가.

‘나 말고 종휘에게 맡긴다면 차차 달라지겠지.’

백무량은 현종휘와 유성한의 만남을 상상했다.

둘 다 엄청난 재목이니, 서로 절차탁마하여 실력을 기른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요컨대 오행의 상생.

현종휘가 목(木)이라면, 유성한은 화(火).

목생화의 조합은 차기 곤륜파의 기둥으로 자라날 터였다.

백무량의 시선이 유성한에게 향했다.

“곤륜파에 입문하겠느냐?”

“……!”

백무량의 말에 유성한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뒤이어 시선을 잠깐 피했다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가 생각보다 배움이 느릴지도 모르는데요?”

“상관없어.”

백무량은 진짜로 상관이 없었다.

보타문의 비구니가 내건 조건은 유성한을 도사로 만들라는 거였으니까.

‘방금 본 주먹질도 괜찮았고.’

유성한이 백무량의 속마음을 보았다면 분통을 터트렸을 터였다.

하나 현재의 유성한은 백무량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모른다.

그렇기에 유성한의 눈동자가 젖어 갔다.

“전, 전 언제나 호되게 욕만 먹어 와서…….”

“사내가 되어서 눈물을 쉽게 보여서 되겠느냐?”

백무량은 질질 짜지 마라며 중얼거리고는 피식 웃었다.

“네가 어떤 놈한테 배웠는지 몰라도, 곤륜파가 가진 명문의 가르침과는 궤가 다를 것이다.”

그 말에 유성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전무공은…… 잊을까요?”

“뭐 하러 잊어, 아깝게.”

“하지만 곤륜파에 입문하면 곤륜파의 무공을 익혀야 하는 게 아닌가요?”

솔직하게 말하면, 천무검성의 무학을 버리기가 너무 아깝다.

‘지금 그렇게 말하면…… 저주받겠지?’

백무량은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우회적으로 돌렸다.

“네 기틀을 만든 무공이 바로 가전무공 아니냐? 대사형인 내가 용인해 줄 테니, 너는 그것을 우화시키는 걸 목표로 하면 된다.”

“사부님이 직접 가르쳐 주시나요?”

“사부님은 무슨, 너에게 딱 맞는 제자가 있으니까 나중에 직접 만나 보거라.”

“혹시 누구신지 알 수 있을까요?”

그 말에 백무량이 허허 웃었다.

보통이라면 ‘네.’ 하고 말 텐데 유성한은 집요한 성격 탓에 꼬치꼬치 캐물어 오는 것이다.

‘종휘랑 친해지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어.’

옆에서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리라.

백무량은 빙긋 웃었다.

“청운검협 현종휘라고 아느냐?”

“아! 들었어요!”

유성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호광성에서 벌어졌던 연속 비무.

현종휘에게 청운검협이라는 별호를 안겨다 준 사건은 보타문에서도 제법 화젯거리가 된 듯했다.

백무량은 유성한의 순수한 반응에 한 가지를 더 말해 주었다.

“선풍도인도 아느냐?”

“당연히 알고 있죠. 곤륜파의 장문인이시잖아요.”

“…….”

뭔가 담백한 반응에 백무량이 혀를 가볍게 찼다.

아무래도 애다 보니 무공 외엔 관심이 크게 없는 듯했다.

백무량은 유성한의 팔을 잡았다.

“자, 그럼 보타문으로 가자꾸나.”

“왜요?”

“네 몸이 나아진 걸 말해 줘야 하지 않겠느냐?”

“……아!”

그 말을 들은 유성한이 앞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

“세상에, 어떻게……!”

유성한의 용태를 보고 깜짝 놀란 비구니가 백무량에게 불쑥 다가갔다.

“어떻게 주술을 푸신 건가요?”

“아, 그게.”

“과연 곤륜신성이라더니 인품과 설법 또한 익히 알려진 무공만큼 뛰어나셨군요!”

무언가 큰 오해를 하고 있는 듯한 비구니.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겠지.’

백무량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곤륜파로 입문시키기로 했습니다.”

“역시 인연이 그렇게 닿았군요.”

백무량이라면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 비구니가 제자리에서 쭈그려 앉았다.

비구니의 시선이 유성한에게 향했다.

“네 뜻으로 정했니?”

“네.”

유성한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 비구니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랫동안 유성한을 보살폈기에 드러나는 아쉬움인가, 온기인가.

백무량은 둘 다라고 생각했다.

“한데, 죄송하지만 아직도 성함을 여쭤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목락윤이라고 합니다.”

목락윤이라.

백무량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보타문주셨군요.”

“허명만 높은 이름이지요. 애 하나 보살피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너희들이 보기엔 어떠하더냐?”

목락윤의 말에 여승들이 백무량의 인품과 깨달음을 극찬했다.

“칠성교의 마성도 곤륜신성에겐 장애물이 되지 못했단 거지요!”

“뭍에서 흘러오는 소문 중 칠 할이 거짓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부끄러운 일이었다.

유성한의 반점을 없앤 건 운룡의 문양인데, 자신의 업적처럼 칭송되다니.

백무량은 솟구치는 머쓱함을 이기지 못하고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저한텐 너무 과합니다.”

“모두가 성한이에게 정을 주고 있었으니까요. 저 아이의 괴로움을 없애 준 소협께 고마워하는 건 당연하지요.”

목락윤이 백무량의 손목을 잡았다.

“예전에 방문한 도사님의 자취를 찾으러 오셨다고 했지요?”

“……네.”

부끄러워하던 것도 잠시.

백무량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 모습을 본 목락윤의 눈동자에 깊은 파문이 일었다.

감정을 갈무리하는 솜씨가 약관답지 않게 능수능란했으니까.

“소협은 소문보다 더 뛰어난 감이 있군요.”

“……?”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목락윤이 앞서 걸어가자 백무량이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다 문득.

백무량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딜 가냐고, 유성한의 시선이 묻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 곧 돌아올 테니까.”

백무량이 손을 가볍게 흔들자 유성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모로 챙길 구석이 많은 아이였다.

***

“여기입니다.”

목락윤이 멈춰 서자 백무량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끼가 잔뜩 낀 해안의 절벽.

지금까지 마주했던 사대사행이나 매화비원처럼 대단한 영기나 선기는 없었다.

무엇보다 사형이 남긴 듯한 언문이 없지 않나.

백무량의 눈빛에 실망감이 감돌았다.

‘송 노야가 잘못 알고 있는 걸까?’

송우현이 말하기를, 사형의 안배가 무당과 보타암에 남아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백무량의 표정을 본 목락윤이 갑자기 손목을 잡아끌었다.

“……!”

손목을 파고드는 목락윤의 내공에 백무량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찰나에 불과하지만, 자소단을 소화한 태청신공은 불청객을 반탄시키기에 충분했다.

쿵!

가죽 북을 두드리는 듯한 소음이 허공을 찢었다.

백무량의 눈은 이미 차분하게 식어 있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가 설명이 늦었군요. 아니, 소협의 경지가 제 생각보다 위였다고 보는 게 맞겠어요.”

“제대로 말씀하십시오.”

“제 내공을 받아들여야 들어설 수 있습니다.”

‘보타문이라고 해도 무인은 무인이라는 건가?’

백무량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의도야 좋지만, 먼저 알려 주지 않았다는 건 자신을 시험했다는 뜻이니까.

그걸 본 목락윤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하지만, 소협의 내공 수위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어요.”

“……?”

“소협께서 사대사행을 통과하셨다는 말은 들었지만, 보타문의 성지는 이야기가 다르니까요.”

그 말에 백무량의 눈빛이 달라졌다.

세대마다 검후를 배출한 신비 문파, 보타문.

그곳의 성지라면 어떤 가르침을 품고 있을지 궁금함이 컸다.

하물며 거기에 사형의 안배가 있다면, 조금 전의 무례쯤은 눈감아 줄 수 있다.

‘그래도 마음이 상한 척 티는 내야지.’

백무량은 헛기침하면서 가늘게 뜬 눈으로 목락윤을 흘겼다.

“다음부터는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죄송해요, 소협.”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인 목락윤이었지만 내심 백무량의 경지를 알고는 깜짝 놀라고 있었다.

내공의 양도 양이지만 태청신공은 청아하기 그지없었다.

목락윤의 내공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목락윤은 마음을 갈무리하고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저곳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백무량의 시선이 목락윤의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입구로 보이지 않는 절벽 중앙.

기문둔갑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지만, 백무량은 망설임 없이 운중용형보를 펼쳤다.

쩌적, 쿵!

단 두 걸음.

그것만으로 백무량의 신형이 절벽 중앙에 다다랐다.

그러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력(引力)이 백무량을 끌어 들였다.

“……허!”

절벽의 안쪽.

영험한 영기로 가득한 무릉도원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사대사행이 가지고 있던 선기, 매화비원의 영기가 동시에 펼쳐진 듯했다.

‘이런 곳이 보타문에 있었다니!’

그렇게 백무량이 두 눈을 의심하던 그때.

투둑, 투두두둑……!

백무량의 행낭 안쪽.

조원양이 가짜라고 말한 영약이 든 목함이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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