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3)
전각에 들어선 백무량은 고즈넉한 분위기에 감탄했다.
‘나를 위해서인가?’
급하게 구해 온 듯, 옻칠이 번쩍거리는 도덕천존이 계단 옆에 장식되어 있었다.
또 일 층의 사람은 어떠한가.
“어서 오십시오!”
숙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나와서 백무량과 정우백에게 인사를 올렸다.
백무량은 눈을 슬며시 돌려 정우백의 표정을 살폈다.
기쁜 기색은 전혀 없다. 당연히 이래야 한다는 무덤덤함만이 있었다.
‘부자와 친구가 되면 좋긴 한데, 나랑은 친해지기 어렵겠어.’
정우백이 고개를 돌리자 백무량은 속마음을 없앴다.
송우현처럼 상계에서 오래 구른 상인은 마음을 읽는 재주가 상당했다.
앞으로 더 마주칠진 모르겠지만, 괜히 반감을 사고 싶진 않다.
과연 그 생각이 먹힌 건지, 백무량의 표정을 한차례 살핀 정우백이 계단으로 안내했다.
“이쪽입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곤륜의 소영웅이잖습니까!”
정우백이 환하게 웃으며 백무량을 맨 위층으로 인도했다.
창가에 뻥 뚫린 시야가 제법 괜찮다.
백무량의 표정에서 만족을 읽은 정우백이 뒤로 물러났다.
“편히 쉬십시오!”
“편의를 봐줘서 고맙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끼익, 탁.
문이 닫히자 백무량은 이부자리에 누웠다.
항시 긴장하면서 걷다 보니 피곤함이 온몸에 눌어붙은 것 같았다.
‘사람을 다루는 모습이 좀 그렇긴 해도, 상인으로선 대단하군.’
하루 이틀이라지만 백무량을 위해 손님을 아무도 받지 않다니!
이는 즉 객잔이 본업이 아닌 데다, 타격도 거의 없다는 뜻이었다.
‘근데 나를 왜 이렇게 잘 대해 주는 건지 모르겠군.’
송우현이 만금상단 출신이기는 하나, 지금은 청해성의 상인일 뿐.
만금상단과의 인연만으로 이렇게 극진할 리가 없다.
백무량은 만금상단주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내일 일어나면 한번 물어봐야겠어.’
그 생각을 끝으로 백무량은 수마에 빠져들었다.
***
다음 날.
이부자리에서 일어난 백무량이 눈을 비볐다.
자시에서 한참 이른 시각이었다.
‘잠도 깰 겸 몸이라도 풀까.’
그렇게 일 층으로 내려간 백무량은 뜻밖의 모습을 발견했다.
“일어나셨습니까?”
문서에 수결을 하고 있는 정우백.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리 객잔이래도 자기 공간이 있을 텐데, 일 층에서 이러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나한테 보여 주려는 건가?’
그걸 알아차린 백무량은 일부러 간단하게 대답했다.
“성실하시군요.”
“대협께서는 눈치가 빠르시고요.”
“……어떻게 안 겁니까?”
“대충 보면 압니다. 뭐, 이런 모습으로나마 눈도장을 찍어서 다행입니다.”
“……?”
백무량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상인이 도사에게 눈도장을 찍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다고, 이유가 불분명했다.
이에 정우백이 피식 웃었다.
“상단주께서 곤륜파를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차기 단주를 정하는 시험이라고 내심 예상하고 있지요.”
“……왜입니까?”
“그건 윤이도 모를 겁니다.”
백무량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디서든 대상(大商)이라고 불릴 사람들이 곤륜파를 돕는데, 그 이유가 상단주의 시험이라니.
이 또한 주백천의 안배인 걸까?
알 수 없다. 백무량은 상단주의 신상이 궁금해졌다.
“만금상단주님의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말하지 않는 게 규칙이랍니다.”
“그게 무슨…….”
“지금은 그저 즐기십시오. 천하의 상계를 두고 싸운다는 사람들이 곤륜파를 도우려고 안달이지 않습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부럽습니다. 그것도 아주.”
정우백의 말엔 거짓이 없었다.
사실 그도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번민하고 있었다.
만금상단주 조원양(朝遠洋).
송우현과 막역한 사이로, 황실과 줄을 댄 대상 중 하나.
‘단순히 친분만으로 상단에 지시를 내릴 분이 아닌데.’
왜 곤륜파에게 특별한 모습을 보이는 걸까?
정우백은 고민을 없애고는 백무량에게 활짝 웃었다.
“원래는 대협께 극진한 대접으로 인상이나 콱! 박을까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 처음 말해 준 사람으로 기억해 주십시오.”
“그것으로 만족하십니까?”
백무량의 물음에 정우백이 어깨를 으쓱였다.
“삼 년 동안 윤이와 지내면서 친해지셨을 거 아닙니까. 그놈이 유력한데, 제가 비비면 대단한 거지요.”
“고맙습니다.”
“손해는 아닙니다. 차기 무림대영웅에게 줄을 대는 거니까요.”
정우백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백무량은 대답할 말을 잃고 허허 웃었다.
그러고 나니 어느새 밖이 밝다. 양청교와 마주할 자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뵙지요!”
끼익, 탁.
백무량이 정문을 나가기가 무섭게, 안쪽이 번잡해졌다.
“손님 받을 준비해라!”
“얼른 뛰어!”
백무량은 소리 없이 웃었다.
이마저도 정우백이 자신에게 들려주기 위한 소음일 터였다.
‘곤륜파를 돕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구나.’
지난 역사에서 있었던 불행이 행운으로 돌아온 걸까?
생각해 보면 백무량이 되살아나고 나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백무량은 여러 생각을 품은 채 큰 거리로 향했다.
그곳에는 양청교가 피곤한 기색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아침부터 왜 죽상인가?”
“그게…… 그곳에 갔더니 무공을 봐 달라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말이야.”
말은 곱게 하지만 눈은 욕을 주절거리고 있다.
백무량은 양청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제는 속가제자의 집에 묵어서 좋다더니만, 고생만 실컷 하고 온 것 같았다.
“나는 상인의 집에서 아주 잘 자고 왔네.”
“놀리는 건가?”
“들켰군.”
“으윽…….”
앓는 소리를 중얼거린 양청교가 고개를 늘어뜨렸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피로가 상당한 모양이다.
백무량은 거리 한쪽을 가리켰다.
“어제 봐 두었던 곳이 있는데, 한번 가겠나?”
“어딜?”
“한적한 공터가 하나 있네.”
“……후, 아침부터 비무라고?”
양청교가 한숨을 내쉬자, 백무량은 농담을 던졌다.
“자네가 피곤할 때 이겨 놔야 되지 않겠나.”
“그거야, 그렇지! 곤륜신성의 무공이 궁금하기는 했어.”
그렇게 대답한 양청교가 앞서 걸어갔다.
언제는 피곤하다던 사람이, 비무란 소리에 기운을 차린 듯했다.
백무량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주변을 살폈다.
‘활기가 넘치는군.’
청해성은 팔 만한 것이 많지 않다. 밥을 챙겨 먹을 여유 또한 흔치 않다.
그에 비해 섬서성의 한중은 이른 아침부터 끼니를 챙기고 목청을 다듬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는 연습처럼 보였다.
“괜찮은 동네지?”
앞서 걷던 양청교의 말에 백무량이 대답했다.
“좋군.”
“내가 어제 자기 전에 생각한 건데, 말을 함부로 했네.”
“……?”
“마교가 날뛰면 이런 거리가 피와 울음소리로 가득해질 것 아닌가.”
양청교의 목소리가 낮았다. 마교와의 싸움을 가볍게 여긴 반성으로 가득해 보였다.
백무량은 그것으로 족했다.
한창 혈기가 넘치고 자신만만할 나이에 저런 모습을 보이기란 어려운 법이었다.
백무량이 웃음기를 섞어서 대답했다.
“나라서 다행이지 장로님들 앞에서 그랬으면 석 달은 갇혔을 거야.”
“그랬겠지? 그랬을 거야.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네.”
하하.
백무량과 양청교가 가벼운 담소를 나눴다.
대부분 각 문파에 대한 이야기였고, 특이한 제자를 거론하는 대화였다.
그중 양청교는 현종휘의 이야기에 깜짝 놀랐다.
“허, 네 사제가 그렇게 뛰어나다고!”
“그래, 내가 생각지 않았던 방식으로 펼치더라니까.”
“언제 한번 만나 보면 좋겠는데.”
“자네라면 어려워할 거야. 낯을 많이 가리거든.”
“내가 더 다가가면 되겠지.”
양청교의 말에 백무량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사실상 나이가 그보다 스무 살은 많았지만, 젊은 활기를 마주하니 계속 어려지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걷다가 도착한 곳.
턱.
청송(靑松)과 오래된 우물이 있는 공터.
백무량과 양청교는 마치 약속이라고 한 것처럼 서로 거리를 벌리고 마주 보았다.
스르릉.
두 검이 뽑히고, 두 검객의 호흡이 얽힌다.
백무량은 양청교를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어느 정도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문파는 다르나, 도가의 가르침은 같다.’
사대사행에서 깨달은 교훈이다.
어느 문파이든 도가라면 개파조사께서 남긴 유훈(遺訓)이 있기 마련이다.
그건 현세대의 무인이 약한 것과 관련이 없다.
청성파의 장문인은 터무니없이 약했지만, 사대사행에서 얻은 깨달음은 백무량의 경지를 단숨에 끌어올렸다.
그러니까, 양청교와의 비무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백무량의 감각이 양청교에게 집중되었다. 온 세상이 그에게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칠성교도를 베었을 때 그의 움직임은 확실히 빨랐다.’
고성진이 단단한 바위와 같았다면 양청교는 바람.
같은 문파임에도 확연히 다른 성질을 가졌다.
백무량이 가만히 정검세를 취하자, 양청교가 외쳤다.
“내가 선공을 가져가지!”
땅에 내리깔린 먼지가 위로 떠오른다. 극성에 다다른 선풍인(旋風引)이 양청교의 전신을 앞으로 쏘아 내는 것 같다.
백무량은 두 손으로 백선신검을 쥐었다.
정석으로 쳐 내느냐, 허점을 보여서 방향을 유도하느냐.
그것 외에도 수는 많았다.
하지만 이번 비무는 상대를 죽이거나 이기기 위함이 아니었다.
‘공동파의 무학을 견식하고, 나에게 부족한 것을 배우는 자리라는 걸 일찍 알았다면 고 선배한테도 무언가를 배웠겠지.’
비무에서 상대를 이기려는 마음을 일찍 버렸어야 했는데.
후회를 버린 백무량은 우수를 움직였다.
곤륜파의 분광검. 삼절광식의 일초, 검뢰벽천이 펼쳐진다. 좌에서 우로 휘둘러진 검이 양청교의 허리를 노렸다.
“……하!”
숨을 터트린 양청교가 검을 휘둘렀다.
그걸 본 백무량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쾌검과 산검(散劍), 환검에 이어 난검(亂劍)까지.
양청교의 검은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자칫하면 흘러내릴 것처럼 위태했으나, 그렇기에 완벽하게 보였다.
‘저것이 공동파의 검인가.’
백무량은 고성진의 대주천복마검을 떠올렸다.
그때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양청교의 검 또한 능숙한 움직임이었다.
‘그렇다면 곤륜파의 검은 무엇인가? 호흡? 아니면 운해?’
정의가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백무량은 생각보다 자신이 곤륜파 무공이 정통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역대 마교에게 많은 무공을 잃어서인가.
아니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서인가.
어느 쪽이든 부끄러워할 일이다.
백무량의 마음이 강하게 다잡혔다.
“후우…….”
호흡을 고른 백무량이 검을 휘둘렀다.
폭발적인 힘을 머금은 검기가 양청교의 검을 떨쳐 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달라붙어 왔다.
‘이건 환검.’
백무량은 양청교의 복부를 향해 발을 내질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양청교가 여러 곳을 향해 휘둘렀다.
산검.
백무량의 팔다리 살을 동시에 노리는 모양새다.
비무긴 하지만 상대를 놀려 먹겠다는 의지가 다분하다.
백무량의 입술이 비틀렸다.
‘이걸 당했다가는 화산에 도착할 때까지 놀리겠지.’
백무량은 그대로 몸을 휘돌렸다. 완벽하게 펼쳐진 회천각이 양청교의 검을 쳐 냈다.
“……어떻게!”
불안정한 자세에서 회천각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헛숨을 내뱉은 양청교가 손목의 고통을 참았다.
백무량이 회천각을 펼친 직후를 노린다면 난검에 저항할 수 없다.
양청교의 검이 교묘한 검로를 그렸다.
그때 백무량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등?”
카강!
한 번에 내쳐진 양청교의 검이 땅에 꽂혔다.
백무량은 피식 웃었다.
“뻔해.”
“소문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군!”
양청교가 크게 감탄했다.
장문인이 백무량과 친해지라고 말한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연무지회에서 탄생한 신진고수, 곤륜신성.
그와 다니면 즐거운 일이 생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