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4)
“바로 떠나자.”
백무량의 말에 현종휘가 눈을 끔뻑였다.
아무래도 두 괴한이 눈앞에서 자진한 충격이 큰 듯했다.
‘당장 정신을 차리라고 꾸짖기도 그렇고, 시간이 답인데…….’
이래서 강호에 데리고 나오기가 고민스러웠거늘.
백무량은 착잡한 시선으로 현종휘를 바라보았다.
이에 책임감을 느낀 송우현이 현종휘의 어깨를 붙잡고 질질 끌었다.
“뭘 하느냐? 얼른 가재도!”
“가슴이 너무 빨리 뛰어서 조금만 천천히…….”
현종휘의 안색은 좀체 나아질 길이 없었다.
지금까지 들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머릿속에서 수많은 상상을 했지만, 직접 마주하니 실감이 너무나도 크다.
현종휘의 시야에는 여전히 피가 비산하고 있었다.
백무량은 한참 동안 내공으로 현종휘를 진정시키다가 밖으로 나갔다.
“곤륜신성 대협이 맞으십니까?”
과연 남궁진이 말했던 대로 무림맹의 무인이 시신을 인계하러 왔다.
무림맹이라면 두 시신에서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그렇습니다.”
백무량의 대답에 두 무인이 포대에 시신을 담았다. 조금이라도 썩기 전에 빠르게 옮겨야 한다는 신속함이 눈에 보였다.
그때 느껴진 한 줄기 서늘함.
백무량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저놈도 칠성교인가?’
이십여 장 떨어진 나무 위에 가면을 쓴 남자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함부로 다가가기엔 너무 멀다. 가면을 썼다고 칠성교라 확신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존재감은 한낱 범인(凡人)으로 여길 수 없었다.
백무량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곤륜산으로 갑시다, 지금 당장.”
그 말에 모두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백무량에겐 두 가지 생각이 있었다.
하나는 곤륜산맥이라면 그들이 몰래 침입해 올 수가 없다는 확신이요, 둘은 사문에 있는 운함석으로 운룡대팔식을 대성해야 한다는 목표였다.
‘그때가 되면 전생을 넘었다고 할 수 있겠지.’
백무량은 착실하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보름 뒤.
곤륜산에 도착한 백무량은 현종휘를 들쳐 업었다.
엊그제를 마지막으로 현종휘가 악몽에서 벗어났지만, 심력을 많이 소진해 제 발로 걸을 수가 없었다.
‘네가 진정으로 무인이 되고, 고수가 되려면 견뎌 내어야 한다, 종휘야.’
잔인하지만 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관례.
백무량은 현종휘의 안색을 흘낏 살피고는 곤륜산을 올려다보았다.
참으로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서인지 사문이 새롭게 느껴졌다.
“어째 사람은 많아졌나?”
그 말에 현노윤이 말없이 웃었다. 자신을 놀래려는 모습이 뻔히 보였다.
백무량은 그것을 모르는 체 넘기고는 다른 것을 물었다.
“그나저나 대소사를 누구에게 맡겼다고 했지?”
“삼십 대 제자 철유와 송 노야가 기른 우 총관입니다.”
“철유라…….”
운산보주와 싸우러 갈 때 마주했던 청년, 철유.
삼 년이 흐르고 나니 제법 장성하여 제자를 가르치는 능력이 상당했다. 무공의 고하를 따지지 않는다면 사실 현종휘보다 철유가 더욱 훌륭한 스승이라 볼 수 있었다.
‘나이가 든다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무리겠지.’
백무량은 현종휘의 잠꼬대를 들으며 곤륜산을 올랐다.
곤륜파까지 도착하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음에도 몸은 등산을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등에 업힌 현종휘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정도였다.
“녀석, 좋으냐?”
“으으음…….”
“됐다. 이제 곧이야.”
미끄러지려는 현종휘를 다시 들쳐 업은 백무량이 정문으로 향했다.
돌아온다는 소식을 미리 들었는지 수많은 도사가 기립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철유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돌아오셨습니까?”
“뭘 그러고 있느냐, 괜히 부산스럽게.”
“장문인과 대사형이 돌아오시는데 이 정도 모습을 보여야지요. 무엇보다 대사형께서 구파일방의 인정을 받아 내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것까지 들었느냐?”
“강호의 발 없는 말은 풀 한 포기 없는 오지까지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철유의 말을 듣고 뒤쪽의 도사들을 보는데, 과연 백무량을 존경하는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백련교 좌호법을 이긴 후기지수.
그 명성이 강호를 한차례 휘돌고 사문이 위치한 청해성까지 도달한 것이다.
백무량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고는 등에 업었던 현종휘를 철유에게 건네며 말했다.
“도사가 수양이 중요하지 무슨 무공이 중요하다고 그래?”
백무량을 아는 사람이 듣는다면 포복절도를 할 말이다.
철유는 백무량의 명예를 위해 웃음을 참았다. 도경을 배우는 시간마다 꾸벅꾸벅 졸던 게 불쑥 기억났다.
“그나저나…… 많은 사람이 찾아왔었습니다.”
“누구?”
“청해성의 권문세가들과 상인입니다.”
“으음, 그래?”
백무량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 전까지는 가만히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사람들이 구파일방으로 복귀했단 말에 허겁지겁 달려온 듯했다.
눈치를 살핀 철유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들 중에서 매종도란 사람이 대사형과 송 노야를 아신다고…….”
“매종도?”
백무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운산보와 한패였던 청해성의 관리.
백무량에게 있어 매종도란 겨우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됐어. 그냥 꺼지…….”
“아닙니다, 대협.”
그때 철유 옆에 있던 우상벽이 황급히 백무량을 말렸다.
“마뜩잖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재고하셔야 합니다. 장문인께서도 들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현노윤이 가까이 다가오자 우상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노윤이라면 백무량의 고집을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백무량이 가만히 팔짱을 끼자, 우상벽이 입을 열었다.
“매종도가 부정을 저지르긴 했지만 청해성의 관리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그라면 곤륜파의 난관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난관?”
“예.”
우상벽이 씩 웃었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 둔 수를 꺼내는 기사(棋士)의 표정이었다.
“곤륜파까지의 보급로를 개척할 생각입니다.”
“……그게 말이 되겠는가?”
백무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화산까지는 아니지만 곤륜산 또한 길이 험했다.
게다가 높이는 어떻던가?
괜히 사시사철 운해가 끼는 게 아니다. 그 높이의 길을 개척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인력이 걸릴 터였다.
그것을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우상벽이었다.
“지난 일이 년 동안 인부와 함께 곤륜산맥을 거닐었습니다. 어렵긴 하지만, 가능합니다. 장문인이나 대사형께서 생각하는 어려움은 매종도 관리가 해결해 줄 겁니다.”
“그걸로 빚을 지게 된다면 불편해지지 않겠나?”
현노윤의 말에 우상벽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매종도 관리야말로 우리에게 무엇이든 해 주고 싶어서 미칠 지경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운산보를 돕는 부정을 저질렀잖습니까. 그가 자리를 보존하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지금까지 구축한 인맥 덕분이지요. 앞으로는 곤륜파의 입김이 세질 겁니다.”
매종도와 손을 잡았던 상인과 하급관리가 곤륜파를 찾아온다.
그 사실이 매종도를 항시 압박하고 있었다. 극심한 손해를 보더라도 곤륜파와 친교를 맺고 싶은 게 그의 근황이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관부와 무림은 불가침.
그 기치는 어디까지나 표면일 뿐.
물밑에서는 서로를 돕거나 견제하는 모습이 빈번했다.
특히 강호의 변경인 청해성에서는 관부보다는 권문세가의 입김이 가까웠다. 당장 매종도만 하더라도 청해성의 호족 출신이었다.
설명을 들은 현노윤과 백무량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음.”
솔직하게 말해서 매종도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붙는 모습이 박쥐처럼 느껴진 탓이다.
‘보급로가 생기면 전보다 훨씬 번성해질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으로 매종도를 용서해 줘야 한다면…… 나는 진정으로 그럴 수 있을까?’
백무량은 현노윤을 곁눈질했다.
매종도와 자주 마주했을 현노윤의 결정에 따를 생각이었다.
그렇게 일식경.
한참을 고민한 현노윤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지.”
“역시……!”
“하지만 죄는 죄. 매종도가 운산보와 함께 부정하게 축적한 재산을 모두 풀어야 한다고 말하게.”
“그게, 음,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우상벽이 곤륜파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철유를 곁눈질한 백무량은 현노윤에게 넌지시 물었다.
“매종도 그자를 그렇게 둬도 되겠습니까?”
“대의를 위해서는 잠시 감정을 접어 둬야겠지요. 대가는 나중에 더 치르게 해도 충분합니다.”
현노윤의 얼굴에 수심이 맺혔다.
백련교에 이은 칠성교.
그들의 등장에 현종휘가 깜짝 놀라서 졸도하지 않았나.
그걸 보면 자존심을 잠시 접고, 곤륜파를 성장시켜야 한단 책임감이 불쑥 들었다.
“그렇군요.”
그 결정을 두고 잘했다, 못했다를 따질 순 없었다.
단지 불편할 뿐이다.
운산보 아래서 온갖 부정을 부렸을 그를 잠시나마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매종도가 악인이라고 한들 백련교나 칠성교에 비하면 조족지혈이기는 하지만.’
양민에게는 먼 마교보다 가까운 매종도가 밉지 않겠는가.
백무량은 복잡한 마음을 안쪽으로 숨기고서 철유를 불렀다.
“종휘는 아직까지 자고 있나?”
“예. 사형이 많이 피곤했나 봅니다.”
“가서 이부자리에 누여 줘. 나는 바깥채로 갈 테니까.”
“손님들을 직접 만나 보실 생각입니까?”
“그래.”
철유가 현노윤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백무량 혼자 갔다가는 무언가 사고를 칠 것만 같았다.
“장문인께선 동행하지 않으십니까?”
“여독을 풀어야겠네.”
“……알겠습니다.”
반쯤 체념한 철유가 고개를 풀썩 내렸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은 고성으로 시끌벅적할 듯했다.
***
“청해의 상행은 제가 꽉 잡고 있습니다!”
“청해성에 산다면 본가의 이름 정도는 들어 보았을 걸세. 가능하다면 곤륜파에 무재가 뛰어난 아이를 속가제자로…….”
‘이럴 줄 알았지.’
백무량은 심드렁한 눈으로 자신을 설득하려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어린 외견을 보고 잘 꾀어내면 되겠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들은 몰랐다.
구파일방의 고수들에게 인정받았다는 의미를.
청해성이라는 우물 안에 고여 있으니 천하를 알지 못한다.
오히려 진짜 권문세가는 가만히 백무량을 탐색하고 있었다. 어중이떠중이를 떨칠 수 있는 성격인지 파악하려는 듯했다.
백무량은 그 시선마저도 짜증 났다.
‘자기 그릇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왜 남을 자기 잣대로 판단하려는 걸까?’
권문세가라고 해 봐야 결국 일초지적.
청해성의 대상인이라고 해 봐야 송우현보다 아래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백무량이 송우현의 조언을 떠올렸다.
-고만고만해 보여도 청해성에서는 여포야. 호광성에서 구한 물품을 곤륜파까지 들이는 건 만금상단보다 오히려 저들이 잘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라.
그야말로 청해성 여포라는 뜻이다.
구파일방의 고수와 남궁진의 진면목을 마주했던 백무량에게 있어 저들은 하품밖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저들 중에서 원석을 골라내라는 게 송 노야의 조언인데…….’
너무 귀찮다.
이 시간에 차라리 발을 쭉 뻗고 자는 게 낫지 않을까.
백무량이 의미 없는 대답이나 주절거리고 있을 때, 펑퍼짐한 차림새의 거한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처음 뵙겠소, 백 소협!”
“아, 예.”
“나는 주씨 도사가 보낸…….”
“주씨?”
백무량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거한이 순간 움찔하여 뒤로 물러났다.
“아니, 뭐, 주씨 도사가 말을 하나 전하면 돈을 그쪽에서 줄 거라길래…….”
“어디 문파의 도사라고 했습니까?”
“곤륜도라고 했소. 그게, 이십칠 대 제자 주연호(株然湖)라고 하던데…….”
주연호라면 사형인 주백천의 종질이 아니던가!
백무량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