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거삼득 (1)
“정말? 아니, 장문인이 아니라 왜 네가 정하는데?”
‘애라고 무시하고 있었더니…….’
이상한 곳에서 날카롭다.
당문영의 말에 백무량은 순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도리어 뻔뻔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전해 드리면 되지.”
“확약을 받아야겠어.”
“그거야 어렵지 않아, 어렵지 않은데…….”
자기를 놀리는 것처럼 보였던 것일까?
백무량이 말을 질질 끌자 당문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아까부터 말이 너무 짧아서 말이야.”
“……뭐가?”
“내가 곤륜신성인 걸 이미 알고 있었다면 나이도 알고 있지 않아?”
그 말에 당문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나이답지 않은 과단성과 독기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백무량은 그녀에게서 당가의 자존심을 느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을 테지.’
겨우 두 살 차이. 곤륜산이라는 벽지에서 자란 어린 도사 따위, 자신이라면 쉬이 구슬릴 수 있다고 여겼을 테니까.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다.
상대가 백련교의 난을 겪은 영웅, 백무량이라면 당문영을 지지하는 장로가 왔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놀아나는 기분이야.”
당문영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백무량은 그것을 보며 히죽 웃었다.
“뭐, 편하면 그대로 해도 되고.”
“그렇게 하면 욕을 제가 들어 먹지 않겠어요?”
패배 선언과 같은 말을 하면서, 당문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만 가서 쉴래요.”
“가서 쉬어. 다시 불러서 미안했다.”
백무량이 손을 흔들자, 당문영이 건물 바깥으로 나가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너무 얄미운 사람이라고.
***
“철유야, 내가 시킨 일은 잘하고 있었느냐?”
백무량의 말에 철유가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어린 사형의 명령이라 불만이 생길 법도 한데, 철유에게선 조금의 불온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백무량은 그것이 무척이나 흡족했고, 양심이 쓰렸다.
‘여자애 앞에서 이런 제자가 사제라고 으쓱였으니…….’
목적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겸연쩍다.
한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인 백무량이 작은 목소리로 주절거렸다.
“커흠, 흠. 이번 일만 정리되면 내가 직접 무공이라도 알려 주마.”
“감사합니다, 사형.”
고개를 꾸벅 숙인 철유가 품에서 문서를 하나 꺼냈다.
이번에 입문한 제자 서른여섯의 이름이 적힌 문서.
백무량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저것을 펼치면 세작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터였다.
“서른여섯 명 중에 몇이나 되더냐?”
“두 명이었습니다. 서로를 감시하는 게 보이더군요.”
철유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조금씩 불티를 드러내고 있었다.
“밤마다 숙소에서 나와 전서구를 보내고, 상대도 보내는지 말입니다.”
“역시.”
“사형께선 그놈들이 그럴 줄 아셨습니까?”
“운산보와 연관이 깊은 놈들이다.”
그 말에 철유가 내심 쌓여 있던 분노를 터트렸다.
“어떤 개잡놈들입니까!”
“송 노야를 불러서 확인해야겠지만…… 청성일 것이다.”
“……청성파요?”
철유가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백무량을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없다는 불신의 시선.
그것과 마주한 백무량은 주겸을 통해서 미리 알아 두었던 청성파의 행적을 되짚었다.
“청해 외곽에서 선행을 베풀었던 청성이 왜 그랬는지 의아하겠지?”
“맞습니다. 사형께서 잘못 아신 게…….”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야. 청성은 운산보를 이용해서 청해를 지배하려고 했다. 청룡대가 사천에 간 까닭도 거기에 있고.”
백무량이 확고부동한 태도를 보이자 철유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배신감이 어찌나 큰지, 그의 손가락이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백무량은 철유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고는 하려던 말을 이었다.
“그 둘은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청성이 보낸 세작일 거야.”
“지금 바로 잡아 오면 되겠습니까?”
철유의 기세에 서릿발 같은 한기가 어렸다.
백무량은 속으로 웃음 지었다. 곤륜에 입적한 뒤로는 내내 맹한 모습을 보이더니, 처음 마주했을 적에 느낀 기세는 여전했다.
“그럴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하면 어찌…….”
“우리는 그 둘을 이용한다. 아이 둘, 학도사 하나, 이제 막 입문한 청년. 군소 문파만도 못한 곤륜의 상황 또한 이용할 것이다.”
그 말에 철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건…….”
철유에게 계획을 이야기해도 좋은 걸까?
‘게다가 아직 구체화하지 못했는데.’
백무량이 잠시 머뭇거리던 그때였다.
“그 여아와는 이야기가 끝난 모양이구나.”
송우현과 현노윤이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자리 좀 비켜 주겠느냐?”
현노윤의 말에 철유가 군말 없이 문서를 백무량에게 넘기고는 응접실에서 떠났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걸 깨닫고 나서야 송우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만에 하나, 저놈이 세작이면 어떻게 하려고?”
“세작이었다면 운산보 때부터 기미를 보였겠지요.”
“거참. 사람은 기가 막히게 믿는구나.”
하기야, 저 기질 때문에 백무량을 믿기 시작하지 않았던가.
괜히 겸연쩍어진 송우현은 헛기침하고는 현노윤의 눈치를 살폈다.
“혹여 장문인께서 불쾌하셨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아니라고 하긴 그렇군요.”
그렇게 말하는 현노윤의 목소리가 사뭇 차가웠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에 들인 제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백무량이 천거한 철유까지 싸잡아서 세작으로 생각하다니.
게다가 백무량을 푼수처럼 대하지 않았던가.
현노윤이 성을 내기 전에, 백무량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역시 서른여섯 명 중에 세작이 있었습니다. 이놈이 어디의 세작인지는 송 노야가 아시겠지요?”
“청성이지.”
“예, 뭐, 그럴 줄 알았습니다.”
백무량은 가볍게 씩 웃고는 철유가 주었던 문서를 펼쳤다.
이번에 입적한 제자 서른여섯 중 두 명.
생각보다는 적은 숫자였지만 정보가 샌다는 점에선 치명적인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샐 정보를 선택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백무량은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두 노인을 바라보았다.
“제가 사천으로 가 볼 생각입니다.”
쇳소리를 들을 각오로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송우현과 현노윤 모두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것처럼.
그것을 본 백무량은 실소를 터트렸다.
“오늘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목이 아팠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니 좋습니다.”
“언제 출발할 생각이더냐?”
현노윤의 물음에 백무량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오늘요.”
***
이튿날, 청성파.
“장문인께서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에 청성파의 장문인, 유연걸은 근엄한 표정으로 이대제자 셋을 내려다보았다.
청해에서 사라진 등자평보다 경지가 높은 무인들.
속가 출신의 묵심검(黙沁劍) 주비창과 편수쌍섬(片手雙閃) 묵환, 적전 제자인 풍뢰검(風雷劍) 양소천까지!
하나같이 청성파의 뛰어난 후기지수였다.
“내 너희들을 부른 까닭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대의를 위함이다.”
유연걸은 자신의 말에 심취한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를 쳐다보는 세 후기지수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눈이 있고 귀가 달렸다면 알 것이다. 사천에 무림맹의 청룡대가 주둔했다는 것을 말이다.”
“설마 그들을 공격하란 말씀은 아니겠지요?”
“하! 그렇게 생각이 짧아서야 어찌 청성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후기지수들을 꾸짖은 유연걸은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걸 본 양소천이 두 눈을 끔뻑였다. 이는 다른 두 제자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였다면 일식경은 더 꾸짖었을 텐데, 오늘따라 그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면…… 장문인께서 떠올리신 대의가 무엇입니까?”
“아침에 곤륜에서 전서구가 왔다.”
“곤륜에서요?”
“그래. 본문의 제자가 보낸 것이다.”
유연걸이 품에서 전서를 꺼내서 흔들자, 세 후기지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과연 저 전서에 무엇이 적혀 있을 것인가.
그 궁금증이 턱 끝까지 차오르려던 차에 유연걸이 입술을 달싹였다.
“어젯밤, 곤륜신성이 하산했다고 한다. 청룡대에 부정한 물건을 건네러 말이다.”
“……운산보주가 남긴 기록 말입니까?”
“아주 소중히 끌어안고 갔다고 하니 그게 맞을 것이다.”
유연걸은 세 후기지수와 각각 시선을 마주했다.
“할 수 있겠느냐?”
“하겠습니다. 다만…… 이 녀석은 없어도 되지 않습니까?”
양소천의 시선이 옆에 있는 묵환에게 향했다.
외팔이 검수인 그가 이번 일에 도움이 되겠냐는 비아냥거림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유연걸의 생각은 달랐다.
“네 이놈! 동문에게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다니! 애초에 팔만 멀쩡했어도 너는 일초지적도 못 됐을 것이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묵환이 고개를 깊게 숙이자, 양소천이 한쪽 입술을 씰룩였다.
그걸 보니 유연걸의 기분이 조금씩 지저분해지기 시작했다.
“특명을 내리는 까닭은 알고 있겠지?”
“청룡대와 다른 문파가 지켜보고 있으니,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저희가 나서야 합니다.”
주비창의 대답에 유연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해라! 너희의 손에 청성의 명예가 달려 있다는 것을!”
그 말에 세 후기지수가 두 손을 모아 올렸다.
그들이 청성산에서 하산했을 때, 백무량은…….
***
“꺼억!”
백무량이 부푼 배를 문지르자, 송우현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귀라도 들렸더냐?”
“제가 얼마나 할 짓이 없으면 여기서 밥이나 축내고 있겠습니까?”
“밥만 축내면 다행이지. 고기까지 탐을 내면서.”
송우현의 타박에 백무량은 뻔뻔하게 웃었다.
“이게 다 몸을 강건하게 키우려고 하는 일 아닙니까.”
“……어휴.”
고개를 내저은 송우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언제 출발할 작정이냐?”
“슬슬 전서구도 받았을 테니까…… 소화나 할 겸 걸어가야지요.”
“굳이 그놈들과 싸워야겠느냐? 마주치지 않고 흘러가도 되잖느냐?”
“세상일 모두 겸사겸사지요.”
그 말에 송우현이 백무량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가에 빚을 지우고, 청성파의 눈을 흐리고, 무림맹과 연을 맺는다.
한 걸음에 세 가지 이득을 취할 수 있으니 송우현으로선 말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아직 볼에 젖살도 빠지지 않은 애인데.’
싸움을 아무리 잘해도 성년도 되지 못한 백무량이다.
하물며 은인, 주백천과 관련이 있는 사람을 잃으면 살아갈 동력을 잃는다.
송우현이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자, 백무량은 어깨를 으쓱였다.
“장문인도 그렇고, 송 노야도 나이가 있으니까 걱정이 팔자입니다.”
“어른한테 말버릇하고는…….”
“제가 움직이지 않으면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
송우현의 말문이 턱 막혔다.
지금 이때, 백무량이 무리해서 움직이지 않으면 곤륜파가 강서 무림의 핵심으로 들어설 기회를 잃는 셈이었다.
다음이 언제 올지 모른다.
“나는 곤륜파의 도맥을 이은 도사요, 백련교와 같은 하늘 아래에 있을 수 없는 원한을 가진 무인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은 주백천에게 말했다.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겠다고.’
백무량은 고개를 들었다.
“곤륜의 검은 바다와 같다는 것을 사천의 무인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