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 (5)
똑, 똑.
“곤륜의 현종휘라고 합니다. 안에 계세요?”
“…….”
바깥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당문영이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이 사천에서 재녀라고 불린다 한들 이곳은 곤륜이다. 아무리 가면을 써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당문영은 눈을 꾸욱 감고는 맑은 목소리를 꾸며 냈다.
“예. 무슨 일이신지요?”
“백 사형께서 응접실에서 다시 만나고 싶다 하셔서요. 피곤하실 텐데 다시 불러서 죄송하단 말도 덧붙여 달랬어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때 묻지 않은 순수. 당문영은 상대가 자신과 나이가 비슷하다는 걸 알면서도 피식 웃고 말았다.
“뒷말은 왜 알고도 그러셨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 장문인이랑 함께 있더라고요.”
“그래요?”
당문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계획대로였다. 곤륜파 장문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사천에 있는 청룡대에 전서구를 보낼 터였다.
‘만약 전서구가 없다고 하면, 그땐…….’
곤륜산 아래에 전서구를 두고 왔다고 하면 되리라.
더욱 무례를 끼칠까 싶어서 그랬다는 진실과 거짓을 섞은 이유를 대면서. 당문영은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밝아질까 싶어 연거푸 헛기침했다.
그러고 나서야, 처소의 문을 열었다.
드르륵.
열린 문 사이로 자신보다 키가 한 뼘 작은 남자아이가 보였다.
현종휘라고 했던가. 자신을 곤란케 했던 백무량과는 다르게 순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아!”
자신과 눈을 마주치니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진다.
당문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연스럽게 놀리고 싶어지는 아이였다.
“왜 그러시죠?”
“아, 아니요. 제가 소저를 본 게 처음이라…….”
“여길 처음 왔으니까 당연하죠.”
“저랑 나이가 비슷한 여자를 처음 봤다는 말이었어요.”
그 말에 당문영의 입술이 닫혔다. 백무량에게 압도되어서 어두웠던 시야가 양옆으로 밝아졌다.
‘그랬지. 곤륜파는 이제야 재건되기 시작했잖아.’
건물을 짓는 데 쓸 목재와 석재, 철심. 문파보다는 공사장에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하물며 현종휘는 또래 여자아이를 처음 본다고 하지 않았나.
당문영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당가의 여식이라는 자존심이 고개를 드니 백무량에 대한 부아가 치밀었다.
‘자기가 뭔데…….’
백무량이 들었다면 당가가 대단한 걸 네가 왜 자존심을 부리느냐고 받아쳤겠지만, 적어도 이곳엔 없었다.
당문영은 현종휘에게 슬며시 다가갔다.
“안내 좀 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소저.”
커흠, 흠. 현종휘가 목을 가다듬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어른을 따라 하려는 사촌 동생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당문영은 빙긋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백 소협은 어떤 사람인가요?”
현종휘가 즉답했다.
“대단하죠. 저랑은 비교도 안 돼요.”
그 대답이 어찌나 단호한지, 당문영의 보폭이 한순간 흐트러졌다. 그가 은연중에 드러낸 존경심은 개파 조사와 비견될 정도였다.
‘보통 저 나이의 사형제끼리는 사소한 거로 싸우지 않나? 아, 하긴…… 나한테 그럴 정도면.’
당문영은 백무량이 보였던 단호함을 떠올리고는 다시금 물었다.
“소문이 모두 사실인가요?”
“예?”
“운산보주와 홀로 싸워서 이겼다던가, 뭐. 그런 것들요.”
“당연하죠.”
그렇게 말하는 현종휘의 얼굴에 거짓 한 줌 없었다.
도리어 자신에게 왜 그런 걸 의심하냐는 책망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당문영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였다.
‘생각보다 허세가 심하구나.’
아무리 그래도 운산보주를 백무량이 혼자서 이겼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의구심을 품었던 당문영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쉬운 쪽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생각을 접으려고 한 그때였다.
“믿기지 않겠죠. 하기야, 저라도 그랬을 테니까요.”
“직접 보기라도 하셨단 건가요?”
“하하.”
현종휘는 직접 대답하기보다 웃음으로 당문영의 물음을 흘렸다.
그것이 조금은 얄밉게 느껴져서, 당문영이 재차 물으려 입술을 달싹였으나.
“응접실에 도착했네요.”
“네?”
“저는 이만 수련이나 하러 가 봐야겠어요. 다음에 봬요, 당 소저.”
안내는 여기까지라는 듯. 현종휘가 당문영에게 예를 표한 뒤 등을 돌렸다.
당문영은 그의 어깨를 붙잡으려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당가의 여식이 되어서 이런 모습을 보이면 처신이 가벼워 보이잖아.’
“후우.”
호흡을 가다듬은 당문영이 응접실의 문을 붙잡았다.
“들어와.”
미리 기다렸다는 것처럼, 안쪽에서 들려오는 백무량의 목소리에 당문영은 마음속에서 목표를 점검했다.
아까처럼 휘둘리진 않겠다. 당가의 자존심을 지키겠다.
정신적인 무장을 마친 당문영이 문을 여니.
“사제에게 들었겠지만, 다시 불러서 미안해.”
백무량이 미리 빼 놓은 의자를 가리켰다. 그 앞에 놓인 다과가 몹시 달콤해 보였다.
피곤함에 절은 당문영으로선 마음이 크게 동할 수밖에 없었다.
‘달겠다…….’
“저건 대답을 잘해 주면 줄게.”
“뭐?”
여유를 가장하던 당문영의 가면이 한순간 무너졌다. 조금만 더 피곤했다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무량이 짓궂게 웃었다.
“농담이었는데 불쾌하게 들렸다면 미안해.”
“친구처럼 지내자고 했다지만, 무례가 과하잖아.”
한번 가면이 무너지니 당문영의 목에서 날 선 목소리가 그대로 나왔다.
“먼저 연락하지 않고 왔다지만 나는 당가의 사람이야.”
“당가의 사람이지, 사람인데. 왜 네가 온 거야?”
“……응?”
“당가에 그런 사람이 있어서 장문인께 도움을 요청하러 온 거라면 어른이 와야 정상이잖아.”
백무량의 말에 당문영은 미리 준비했던 대답을 꺼냈다.
“당장 내일 다른 어른이 올지도 모르지.”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고, 너 혼자 왔다고?”
백무량의 눈동자에 현묘한 기운이 맺혔다.
그걸 본 당문영은 내심 감탄했다.
‘저게 바로 태청신공인가?’
장로에게 미리 듣지 않았다면 저 기운에 이끌려서 모든 걸 이실직고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당문영은 백무량에게 고개를 슬쩍 돌리고 대답했다.
“물론이지.”
“거짓말이잖아.”
근거 없는 말을 던진다라…….
당문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자꾸 무례하게 구는데, 장문인께 전한 거 맞아?”
“무례한 건 너야, 문영아.”
자리에서 일어난 백무량이 당문영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왜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까?”
한 걸음, 한 걸음. 백무량이 느리게 걷는 것만으로 당문영은 무거운 압박감을 받았다.
그가 의도한 걸까? 그렇다면 당가의 무인으로서 강하게 꾸짖어야 할 텐데. 이상하게 입이 잘 열리지 않았다.
“너, 지금 이거…….”
“백련교야?”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아, 모를 수도 있겠네.”
백무량이 희게 웃었다. 감정이 여럿 담겼으나, 겉만 보아선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흩뿌리는 압박감이나 분위기가 당가의 장로를 방불케 했다.
그제야 당문영은 소문이 진실임을 깨달았다.
‘정말로, 정말…….’
백무량은 운산보주를 상대로 이긴 것이다.
그것도 혼자서.
당문영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당가에서 태어나, 줄곧 지켜 온 자존심이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무사하지 않은 쪽이 누군데 이러실까.”
어느새 백무량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그는 심유한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속내를 완전히 파헤치려는 것처럼, 샅샅이.
당문영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퍼졌지만, 그 덕분에 표정을 숨길 수 있었다.
‘당가의 치부를 외인한테 드러낼 순 없어.’
당문영의 눈에 독기가 바짝 들어갔다.
그 집념이 미처 생각하지 않은 변명을 하나 만들었다.
“그래. 네 말대로 그 이상한 사람이 당가에서 패악을 부르고 있어. 인정할게. 그래서 장문인께 청룡대한테 전서구를 보내길 바랐지.”
“…….”
백무량이 침묵으로 답하자 당문영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그게 뭐? 나도 곤륜파엔 처음이니까 무서워서 다 말하지 않았을 뿐이야. 그게 잘못된 거야? 그래서 이런…….”
“문영아.”
백무량이 당문영과 시선을 마주했다.
“네 욕심도 있었잖아.”
“……!”
그걸 어찌 안단 말인가?
당문영은 제멋대로 떨리려는 걸 내공을 운용해서 붙잡았다.
“그야, 내가 곤륜파에 도움을 요청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사람들이 가주 후보로서 진지하게 생각을 해 줄 거고.”
“그게 아니라니까!”
당문영은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그러자 백무량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단 두 음절.
‘정말’이라는 짧은 말 한마디가 당문영의 폐부에 꽂히는 듯했다. 그때 백무량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풀렸다.
주르륵.
당문영은 눈물이 흐르는 걸 주체할 수 없었다.
그때 백무량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네가 곤륜을 이용하러 왔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런데도 지금까지 봐주고 있던 거야. 네가 어린애니까. 자기 가문을 위해서 왔으니까.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
당문영의 침묵에 백무량이 책상 위에 주먹을 댔다.
무언(無言)의 행동. 내공을 조금도 운용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무거운 일격처럼 느껴졌다.
“말해.”
백무량의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맺혀 있었다.
“이제는 봐주지 않을 거니까.”
***
이거, 생각보다 연기에 너무 심취한 모양이다.
백무량은 울면서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는 당문영을 보며 미안함을 느꼈다.
‘처음에는 분명 적당히 압박감만 흘리다가 숨겨 놓은 이야기를 유도할 생각이었는데…….’
당문영이 보인 독기가 너무 강했던 탓인지 무심코 강하게 나가고 말았다.
‘애한테 참 별짓을 다 했구나.’
그렇다고 못할 짓은 한 건 아니지만, 백무량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찌 됐든 당문영은 자신과 가문을 위해서 곤륜파를 이용하러 온 셈이었다.
단지 그녀가 어렸기에 대화로 풀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무심코 선을 넘을 뻔했다. 그것이 조금 미안할 따름이다.
“일단 눈물부터 닦아.”
“……응.”
당문영이 눈가를 쓱쓱 닦았다. 하지만 한번 터진 눈물이 멈추진 않았다.
저 모습을 보니 새삼 감탄이 나왔다.
‘저 어린 나이에 참 대단하기도 하다.’
당문영이 홀로 곤륜파를 찾아온 목적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송우현이 우려했던 대로, 실제로 당가가 불청객으로 인해 위기를 맞이했다는 점.
둘째는 당문영이 가주 후보 서열에서 현격히 밀렸기에 곤륜파의 지지를 받으려고 했다는 점.
셋째는 한 장로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정말’ 혼자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다.
‘몰래 만든 독으로 감시를 무력화시켰다니, 참.’
당문영이 겨우 열한 살인 걸 고려하면 당가의 무인으로서 아주 대성할 그릇이란 뜻이었다.
당장 자신의 열한 살 시절을 떠올려 보면, 저런 과단성과 독기를 지녀 본 적이 있었던가?
혀를 내두른 백무량은 당문영에게 물었다.
“근데 왜 곤륜이었어? 곤륜파보다는 공동파가 훨씬 영향력이 강하잖아.”
“……그게.”
당문영의 우물쭈물한 모습에 백무량은 저절로 탄식했다.
“곤륜파가 만만했다는 거지?”
“자, 장로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
“나부터 불러낸 건 누구 생각이고?”
“……나랑 나이가 비슷하니까 말이 잘 통할 줄 알았지.”
“손아귀에 쥐고 흔들 생각이었던 건 아니고?”
“…….”
당문영이 입을 꾹 다무는 모습에 백무량은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정보는 모두 얻었다.
‘백련교의 잔당이 당가를 위협하고 있다.’
당가 지하에 스스로 들어갈 정도이니 백련교 내에서 높은 신분일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사천과 청해는 그렇게 멀지 않으니, 운산보의 곤륜 지부에서 만났던 마인에 대해 알아낼 가능성이 컸다.
백무량은 공사가 한창인 창밖과 옆구리에 찬 백선신검을 훑어보았다.
‘곤륜파의 기반을 다지느냐, 백련교의 일에 개입하느냐인데…….’
후자를 택하면 사천당가에 빚을 지울 수 있다.
끼지 않으면 손해인 장사가 아닌가. 백무량이 피식 웃었다.
“뚝 그쳐. 도와줄 테니까.”
“…….”
자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당문영이 눈물을 그쳤다.
그 모습이 과연, 당가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