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파 (1)
‘오직 나만이 가능한 일이야.’
유실된 무공을 되살려 곤륜의 무도를 완성한다.
자신의 사부를 포함하여 곤륜파의 도사라면 누구나 시도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구전으로 내려온 가르침은 잘게 찢어졌고, 비급은 과거에 발호한 마교에게 태워지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백무량은 달랐다.
‘내 심상에 검해가 있으니까.’
곤륜의 실전된 무공이 담긴 검해라면 무도를 완성할 수 있다.
그 사실이 막중한 책임감으로 화했다. 어깨가 뻐근해져도 이상하지 않을 무게였다.
그렇지만 백무량은 웃었다. 진심으로 기뻐서 맺힌 웃음이었다.
‘사부가 이루지 못한 염원을 이룰 수 있다면야, 아무렴.’
하물며 그 길은 가시밭길도 아니었다.
손등의 운룡과 백선신검, 그리고 사형의 안배.
이 모두가 백무량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 주었다.
곤륜파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 당장은 곤륜파가 군소 문파에도 미치지 못한다지만, 언젠가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곤륜의 기상과 의지는 현씨 조손과 자신에게 남아 있었으므로.
‘하자. 해 보는 거다.’
백무량은 호흡을 가다듬고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무공을 떠올렸다.
큰 깨달음이 있었으니 그것을 모두 몸에 녹일 작정이었다.
콰르르…….
백무량의 보보가 움직이면 운해가 맥동하고, 검을 휘두르면 운해가 휘몰아쳤다. 그때마다 태청신공의 공력이 밀물처럼 쏟아졌다.
“……후.”
숨이 차고, 백무량의 뺨에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익숙지 않은 운용법을 연거푸 펼치니 속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강적 앞에서 이런 투정을 부릴 수 없는 법이었다.
‘의식하지 않더라도 펼칠 수 있을 만큼 숙하게 익혀야 해.’
후웅, 훅!
백무량은 끊임없이 운용법을 곱씹으며 수련을 이어 나갔다.
체력이 조금씩 닳아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며칠 전 싸움으로 얻은 심득과 지금의 깨달음이 큰 열의를 불태우게 했다.
청명했던 하늘에 노을이 번질 때까지 백무량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그만하시지요. 그러다 근육이 상할 겁니다.”
중간에 현노윤이 와서 멈추지 않았다면, 그의 말대로 몸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을 터였다.
‘사부가 봤다면 한참을 꾸짖었겠구나. 성강의 고수란 놈이 자기 몸을 이렇게 혹사했으니.’
백무량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그만큼 백무량의 뇌리에는 검해가 안겨다 준 벅찬 감동으로 가득했다.
그 마음을 현노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씻을 물은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고맙다.”
백무량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 주는 현노윤이 고마워서,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시선이 연무장 구석에서 칼끝을 노려보고 있는 철유에게 닿았다.
“저 후배는 어떻더냐?”
“익히는 게 빠르고 몸이 유연합니다.”
“그것뿐이냐?”
“혈기만큼 살기가 너무 강합니다. 그래서 좌선을 시키려고 하였는데, 도저히 못 견디더군요.”
“나도 그랬었지.”
백무량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저 모습을 보자니 과거의 자신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저러다 기운을 못 감춰서 한번 베이면 달라질 거야.”
“…….”
그게 사문의 후배에게 할 말인가 싶어, 현노윤이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문제는 저 말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타고난 기질을 억눌렀다간 오히려 크게 반발하는 법이다.
“확실히, 직접 경험한다면 달라지겠지요.”
“저 아이에겐 내 신분에 대해 말했느냐?”
“아직 말하지 않았습니다.”
“잘했다.”
“계속 숨기실 생각입니까?”
“내가 만천하에 모습을 드러냈으면 하느냐?”
백무량의 말에 현노윤은 답을 신중히 골랐다.
어찌 보면 곤륜파의 명운을 가를지도 모를 질문이었다.
‘이미 답을 정해 놓고 물어보시는 거겠지.’
현노윤 자신이 곤륜파를 아끼는 만큼, 백무량 또한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답은 간단히 나왔다.
“아니요. 아직 곤륜이 사조님의 이름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좋게 말해 주기는…….”
백무량은 현노윤에게 핀잔을 흘렸다.
솔직하게 말해서, 어려진 몸으로는 구천검의 명성을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곤륜파가 명문 거파일지라도 이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백련교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구 할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곤륜 지부에 갇혀 있던 마인도 그렇지만, 사형이 남긴 편지를 보면 확실해.’
나머지 일 할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라졌으리란 희망이었지만…….
‘무림이 어디 바라는 대로 흘러가는 곳이던가?’
백무량의 흉중에 여러 대의가 복잡하게 뒤섞였다.
곤륜파의 재건.
곤륜파 무도의 완성.
사형 주백천의 행방.
백련교의 멸망.
어느 하나 가볍지 않았다. 하물며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조차 막막했다. 더욱이 백련교는 강호 십 대 고수였던 사부조차 이기지 못했던 강적이다.
그럼에도, 백무량의 내면은 청정하기만 했다.
“곤륜파의 기둥이 강건해지고 나서, 그때 해도 늦지 않아.”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조 앞에서 무슨 재수 없는 소리를 해 대느냐.”
백무량이 가는 시선으로 현노윤을 흘겨보았다. 그의 얼굴에 은은한 수선화 같은 미소만 맺혀 있었다.
백무량은 그것이 몹시 기꺼워서, 현노윤과 마주 웃었다.
‘풍화된 바위와 같았던 얼굴에 난풍(暖風)이 들기 시작했구나.’
척박한 환경과 어두운 과거에 파묻혔던 도사의 면모가 조금씩 참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백무량은 그를 스쳐 지나가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잘될 거다. 이 사조만 믿거라.”
“예.”
내내 어딘가 불안했던 현노윤의 음색이 어느새 굵직한 신뢰를 담고 있었다.
끼익.
처소로 돌아온 백무량은 머리를 마저 말리며 침구에 걸터앉았다.
씻기 직전까지도 눈앞에 검해가 아른거렸지만, 막상 잘 때가 되니 피곤하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고성진의 용태가 걱정되었다.
‘송 노야에게 맡겼으니 문제는 없다지만, 타지에서 제자가 다쳤으니…….’
공동파의 장문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다.
어쩌면 이걸 구실로 삼아 곤륜파의 무학을 탐할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든 순간, 백무량이 입을 쩍 벌렸다.
‘내가 고생을 많이 하긴 했구나.’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이렇게까지 의심하다니.
무엇보다 고성진이 보인 태도는 곤륜파에 대한 경의였지, 청성처럼 괄시한 적은 전혀 없었다.
백무량은 전신의 근육을 주무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다 문득, 백무량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왜 열려 있지?”
침소 옆에 있는 함이 반쯤 열린 채 묵향(墨香)을 풍기고 있었다.
호기심을 느낀 백무량은 조심스럽게 함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달빛 아래로 함 안쪽이 드러났다.
‘……이건.’
현천신장.
대충 휘갈겨 쓴 서체를 보니 고성진의 짓궂은 표정이 떠올랐다.
백무량은 말없이 현천신장의 첫 장을 펼쳤다.
그곳에는 고성진이 남긴 듯한 사죄가 적혀 있었다.
-후배가 그렇게 부탁했는데 말이야.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진 못하겠더라. 대신에 이렇게 글로 남기니까 용서해 주라.
“허, 참.”
백무량은 헛웃음을 흘렸다.
내용이 담백하다 못해서 사죄처럼 보이질 않았다. 그런데 그게 고성진과 어울렸다. 변명이나 사족을 덧붙였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 같았다.
물론, 그가 남긴 이 서책의 가치가 크기에 가능한 사죄였다.
“사문의 무공을 이렇게 유출하다니.”
만일 여기 있는 게 자신이 아니라 공동파의 도사였다면 파문이나 사지근맥을 끊는 형벌을 떠올렸을 터였다.
‘기껏해야 권로 몇 개를 배우는 정도라 여겼거늘…….’
사락.
백무량이 몇 장을 넘겨 보니 혈도의 흐름과 그림까지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오성(悟性)이 있다면 옆에서 지도하지 않아도 터득할 수 있을 정도였다.
‘고 선배가 큰 실수를 했군.’
백무량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서책을 남기던 당시의 고성진은 자신을 뛰어난 후배 정도로 파악했을 터였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자세히 써 놓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백무량과 운산보주의 싸움을 본 이상 엄청난 고수임을 알았을 테니까.
만일 그의 몸이 멀쩡했다면 당장 서책을 찢거나 태웠을 것이다.
‘나야 고맙지.’
그날 밤.
백무량은 현천신장을 곧바로 터득했다.
***
사방이 붉은색으로 칠해진 방.
그곳은 바깥과 완전히 격리되어,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백팔 개의 촛불이 빛을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그 방의 중앙에서 요안의 남자가 두 무릎을 꿇은 채 무언가를 암송하고 있었다.
“…….”
그가 한마디를 중얼거릴 때마다 한 줄기의 사특한 기운이 촛불 하나를 시꺼멓게 물들였다.
누가 보더라도 마공.
그것도 백련교 이후로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극성의 마공이니, 누구라도 두려움에 벌벌 떨 모습이었다.
그렇게 요안의 남자가 촛불 절반을 시꺼멓게 물들였을 때.
“오래 기다렸나?”
청해에서 돌아온 흑마가 갑작스레 방 안에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모든 촛불이 꺼져, 회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암실(暗室).
빛 하나 없는 공간에서 요안의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이게 뭐 하자는 짓이지?”
“남자가 다 커서는 촛불에 장난질을 쳐서야 되겠나. 빛도 보고 그래야지.”
“내가 직접 부르기 전에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을 텐데.”
“그랬나?”
흑마가 능글거리는 목소리로 요안의 남자를 자극했다.
일견 도발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요안의 남자는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자신의 수족이나 다를 바 없었다.
흑마의 동생, 백귀의 생사가 자신에게 달려 있으니까.
하지만 저대로 둬선 위신이 서지 않는다.
그리 판단한 요안의 남자는 서늘한 눈빛을 드러냈다.
“다음에도 이런다면 팔 하나를 가져가마.”
“네가? 나를?”
“누구를 말하는지 더 잘 알 텐데.”
“해 볼 테냐?”
흑마가 짙은 살기를 드러내자, 요안의 남자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뒤이어 남자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니 흑마가 두 손을 들었다.
“염병할 놈.”
“그래서. 갑자기 돌아온 까닭이 뭐지?”
“있어야 하던가?”
“…….”
요안의 남자는 흑마를 끈질기게 노려보았다.
그의 동생, 백귀를 볼모로 잡았음에도 이처럼 반항을 해 오곤 했다.
일방적인 상황임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진심으로 미련해 보였다.
그렇게 촌각이 흐르고 난 뒤, 흑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있었다, 있었어.”
흑마의 말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상반신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에게 내색하진 않았지만, 연락망이 돌연 끊겼던 일이니 궁금한 게 당연했다.
그 내심을 흑마가 알고 있었다.
“적어도 운산보주는 아니더군.”
“…….”
“뭐, 그놈 말고 다른 놈이겠지.”
흑마가 한껏 너스레를 떨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게 다인가?”
남자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흑마를 직시했다. 그의 동생, 백귀를 당장이라도 죽이겠다는 듯 살기 어린 시선이었다.
그러자 흑마가 다른 정보를 꺼냈다.
“네놈도 들었겠지만 요즘 곤륜신성이라는 후기지수가 대단하다던데?”
남자가 불쾌한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내가 알 이야기를 굳이 하겠다는 게냐?”
“반쯤은 사실이다.”
“……뭐?”
“운산보주를 홀로 죽인 게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남자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저 호사가들의 과장이라고 여겼거늘.’
‘곤륜신성이라…….’
전혀 상정하지 않았던 걸림돌이었다.
남자가 고민에 빠지자, 흑마가 비소를 빼물었다.
어쩌면 그 후기지수를 이용해 이놈을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머금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