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44화 (44/275)

정리 (5)

무림맹의 청풍대가 청해로 출발했다!

선전포고에 가까운 소식이 동정호에서 강서 무림으로 주파했다. 운산보에 남아 있다간 무조건 죽을 판국인지라, 사파 무인 모두가 청해를 서둘러 떠났다.

그제야 무림인들은 청해를, 아니, 정확하게는 곤륜파와 백무량을 다시 보게 되었다.

뒤이어 곤륜파가 헛소문을 퍼트린다고 지껄이던 목소리가 하나둘씩 사라졌다.

그들 모두 깨달은 것이다.

과장이 섞였으리라 생각했던 소식이 진짜였음을.

“……아무리 그래도 검강은 아니겠지?”

“설마. 그게 진짜면 달마대사나 천마가 되살아난 것이게?”

“그렇지?”

확신 없는 대화가 오가며 무림인의 마음속에 조금씩 곤륜파의 크기가 커지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은 호남성의 군소 문파보다 작으나 시간이 지나면 날개를 달고 비상할 명문.

여기까진 칠십여 년 전의 평가와 엇비슷했다.

“곤륜신성이 현재의 무재를 가진 채 성장한다면…… 이립의 나이에 강호 십 대 고수가 되지 않을까?”

백무량의 존재.

십 대의 나이에 강기를 이루었다는 소문을 지닌 소년 고수가 곤륜파의 명예를 드높였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모르고 있었다.

급변하는 강서 무림 속에서 곤륜파의 숨통을 노리는 문파가 있다는 것을.

***

사대사행(四大蛇行)으로 유명한 사천 청성산.

그중 일행(一行), 유수행(流水行)에서 죽는 수행자의 숫자만 헤아려도 백이 넘을 정도로 험난한 고행으로 유명했다.

따라서 청성파의 도인들은 지독하기로 악명이 자자했는데.

특히 당대 장문인인 화도인(火道人) 유연걸(柳淵傑)은 성정이 괴팍하고 급하기로 유명했다.

“기록은 회수했느냐?”

“죄송합니다.”

“등자평은?”

“그게……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습니다.”

“허! 내가 저놈들한테 무언가 바란 게 잘못이지!”

유연걸은 일 대 제자들을 쏘아보았다.

그깟 곤륜파, 사파 놈 하나를 좌지우지하질 못해서 상황을 이따위로 만들었냐는 책망이 가득했다.

뒤이어 그의 시선이 백운각주에게 향했다.

“장로님께선 혹시 고견이 있으신지요?”

“고견이랄 게 뭐 있겠느냐.”

백운각주, 목원장이 느릿한 어조로 떠들었다.

“곤륜파가 무림맹에 무언가를 넘기기 전에 처리함이 옳다. 그러잖아도, 노태랑 그놈, 예전부터 껄끄럽게 굴었던 면이 있지 않더냐.”

목원장의 말을 경청한 유연걸이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회의를 진행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눈이 멀겋게 변한 집법당주 사군성이었다.

“집법당주께선 어떠십니까?”

“목가와 같다. 하지만 깔끔하게 처리하려면 그놈과 마주했던 놈들까지 처리할 필요가 있지.”

“예를 들면은요?”

“곤륜신성이라는 놈이 서녕에 도착했을 때, 근처에 아무도 없진 않았을 것 아니더냐.”

사군성은 말을 쏟아 내듯이 떠들었다.

“그놈부터 잡아서 족치면 노태랑이 남겼을 기록이나 장부 같은 걸 곤륜파가 취했는지 곧바로 알 수 있을 거다. 필요하다면 개방과 끈을 놔주마.”

“감사합니다, 장로님!”

유연걸이 포권지례를 취하자, 사군성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뭐, 사내가 큰일을 진행하다 보면 실수가 나오기도 하는 법이지.”

“하루빨리 진정시키겠습니다.”

“됐다. 아랫놈이 보좌를 잘했으면 이런 상황이 나오지도 않았을 터인데, 쯧.”

일 대 제자의 잘못을 꼬집은 사군성은 팔자걸음으로 걸으며 삼청전에서 나갔다.

그러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일 대 제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본 목원장도 유연걸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만일 이번 일로 몰락한다면…… 이 모든 잘못은 너희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이해하였느냐?”

“죄송합니다!”

“십수 년이 지났으니 괜찮을 거라고 말하던 놈은 죄다 죽은 모양이야. 흘흘.”

짙은 조소를 마지막으로 목원장도 삼청전에서 떠났다.

그러는 동안에 유연걸의 얼굴은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내가 네놈들 때문에 장로님 앞에서 망신을 당해야겠느냐?”

“시, 시간을 주신다면…….”

“시끄럽다!”

유연걸은 일 대 제자들을 향해 일갈했다.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청성산에서 떠나거라! 어떻게든 일이 커지기 전에 수습하란 말이다!”

“…….”

그 말에 일 대 제자 모두가 침묵했다.

사실, 그들 모두 유연걸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차였다.

유연걸이 처음 운산보 계획을 꺼낸 장본인이었고, 그의 뒤에 두 장로가 있었다.

하물며 유연걸이 어떻게 장문인이 되었던가?

무공만 뛰어날 뿐, 인망은 쥐뿔도 없으면서 장로들의 지지로 장문인이 되지 않았던가!

“망할…….”

누군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청성파가 작당 모의를 하는 한편, 백무량은 곤륜산에서 노태랑과의 싸움을 복기하고 있었다.

구천화우검의 검형을 연습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그와의 대결 중에 떠올린 의문을 해소하고 싶었다.

정확하게는 태청신공의 공력을 운해로 유형화했던 감각.

백무량은 그 감각을 천천히 떠올렸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백무량은 신중한 표정으로 태청신공을 운용했다.

그러자 태청신공의 공력이 허연 운해로 유형화했다.

“오…….”

탄성을 흘린 백무량이 손을 뻗었다.

스르륵.

운해는 그 손길을 거스르지 않았다. 운산보주에게 펼쳤을 땐 폭풍과도 같았는데, 지금은 순한 양처럼 보였다.

‘태청신단의 공능이라기엔 너무 과하지 않나?’

취한 자의 공력이 청명해지고 운해처럼 변한다지만, 이처럼 무인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곤륜파의 기록에서 아예 없었던 일은 아니었다.

‘곤륜파의 역대 장문인 중 팔 대 장문인 심천검(心天劍), 그리고 십삼 대 장문인 백연곡주(白煙谷主).’

그 둘은 운해로 화한 내공으로 신묘한 무공을 펼쳤다고 구전되어 왔다.

특히 심천검은 백선신검의 원래 주인이었다던가.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흘낏 곁눈질했다.

의문이 쏟아졌다. 구전으로 이어지던 운용법이 갑작스레 체화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끈질기게 바라보던 백무량이 지난 일을 반추했다.

‘돌이켜 보면 얻기만 했던가.’

분명 기쁜 일이었다.

과거에 실전된 무학을 깨닫고, 백선신검을 되찾고, 싸우는 도중에 많은 기연을 얻었다. 강호의 무인이라면 모두가 선망하는 일을 겪은 셈이었다.

하지만 백무량은 웃을 수 없었다. 도리어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이건 곤륜파의 가르침이 아니야.’

현노윤이 들었다면 기함을 토했을 생각이었다.

태청신공과 구천화우검이 곤륜의 가르침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물며 자신의 심상에 있는 검해는 곤륜파 무학의 총체이지 않은가.

실로 모순적이다. 조사를 모욕하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백무량의 본능은 그것이 옳다고 여겼다.

“얻기만 하는 거로 만족할 순 없어.”

백무량은 자신을 스스로 꾸짖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곤륜의 가르침이 무엇이더냐.’

백무량의 눈이 감겼다.

청해 곤륜의 도사는 일생 대부분을 호흡조차 버거운 환경에서 지낸다. 원석으로 태어난 자신을 깎아 내며 광휘를 흩뿌리는 결정으로 화하기 마련이었다.

그랬다. 곤륜파의 가르침이란 수양(修養)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백무량은 어떠한가.

사형이 남긴 안배를 얻고, 심상에 내재한 검해의 가르침을 받고.

‘얻기만 하고, 체화하려는 노력은 쏟지 않았지.’

물론 상황이 급박하고 어렵기는 했다. 수련에 쏟을 여유가 조금도 나질 않았다.

하나 만족하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 나이에 성강의 경지를 이루었으니 충분하다.

백무량은 자기도 모르게 만족하고 있었다. 운산보주를 꺾었으니 곤륜파에 평화가 찾아오리란 안온함이 내면에 있었다.

“……후우.”

들숨과 날숨.

백무량은 그 두 가지만을 집중했다. 그러자 몸속에 녹였던 태청신단과 영약들이 대맥을 쏘다니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백무량의 주위로 운해가 일렁였다.

그 움직임이 마치 호신강기처럼 보였다.

누군가가 백무량을 본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곤륜의 신성은 구름을 다루는 선인(仙人)이라고!

하지만 백무량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번민하고 있었다.

‘답은 곤륜파의 무학에 있을 거야.’

운해를 유형화하는 운용법이 어째서 실전되었는가.

자신을 그것을 어떻게 펼치고 있는가.

이 사실을 깨닫지 않고 넘어간다면 또다시 실전될 터였다.

그것은 곤륜파의 도사 이전에 백무량이 원치 않았다.

‘처음을 목표로 조금씩, 놓치지 않고.’

눈을 감은 백무량의 시야에 수많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사부 주자령의 얼굴과 읽었던 비급의 내용이 순간마다 떠오르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것은 검해와는 다른, 백무량이 지금까지 쌓아 온 무학의 기저(基底)였다. 가르침이 명멸할 때마다 감탄하거나 입술을 씹었다.

과거에 대한 아련함에 미소 짓고, 이걸 잊고 있었다는 한탄을 품고.

그렇게 처음으로 되돌아갔을 때.

백무량은 눈을 반개했다.

“조화였어.”

작게 뇌까렸던 백무량의 목소리가 서서히 기쁨으로 물들었다.

“조화였던 거야.”

백무량은 했던 말을 곱씹으며 가볍게 호흡했다.

스읍, 후.

들숨과 날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행동.

그건 백무량도 마찬가지였다. 곤륜파의 무공을 숙하게 펼치기 위해 호흡을 단련했을 뿐. 큰 의미는 가지지 않았다.

‘어설프게 알았던 거지.’

하지만 그곳이 곤륜산맥이라면 달랐다. 범인이라면 호흡조차 버거워하는 게 당연했다.

그 호흡이야말로 곤륜파 무공의 시작이오, 조화라면!

‘태청신공 또한 무언가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을 텐데!’

검사라면 자신의 공력을 검에 밀어 넣거나 제멋대로 주무르기 일쑤였다. 백련교주에게 죽기 전의 백무량도 그렇게 태청신공을 운용했다.

지금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건 틀린 운용법이었던 거야.’

하면 태청신공의 진정한 운용법은 무엇이겠는가?

백무량은 그 진의(眞意)를 거듭 고민하다가, 문득 백선신검을 쥐었다.

자신의 본능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검에 묻는 게 빠르지 않겠느냐고.

백무량은 본능에 긍정했다.

“후우우…….”

청풍검, 유운검, 분광검…… 구천화우검에 이르기까지.

검로를 펼치기 시작하니 운해가 조금씩 맥동하기 시작했다.

이에 백무량의 기감이 시퍼런 칼날처럼 벼려졌다.

‘검로에 놓는다. 아니, 풀어 두는 건가?’

중간에 실수도 하고,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갖은 긴장으로 생긴 땀이 백무량의 뺨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틀린 방향은 아니었다.

정답을 향해서,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콰르르……!

미동에 불과했던 움직임이 격해졌다. 종래엔 운해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기류가 뒤흔들리는 듯했다.

“……하하.”

백무량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착각일지도 모를지언정, 적어도 백무량은 그렇게 느꼈다. 태청신공으로 빚어진 공력에 심후함이 더해졌다.

가장 큰 만족감은 따로 있었다.

‘이렇게 체화하다 보면 언젠가는…….’

검해를 통해 곤륜의 무도(武道)를 완성한다.

백무량의 눈이 먼 옛날, 큰 꿈을 품었던 어린아이처럼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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