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조 (3)
스걱!
칼날이 휘둘러질 때마다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상대가 다섯 명이나 되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그야말로 압도적.
문자 그대로 도사 하나가 무인 다섯을 학살하고 있었다.
‘저 쪼끄만 꼬맹이가…….’
철유의 눈동자에 큰 파문이 일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그 아니, 도사의 검격은 외견과 비교해 너무 매섭고 강인했다.
저런 도사는 청해에 오직 한 명뿐이다.
“곤륜신성……!”
철유는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그 중얼거림을 들은 것인지, 백무량의 시선이 순간 자신에게 향했다가 떨어졌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생살이 저며지는 살기를 느꼈다.
‘이것이 무인의 기세인가.’
백정이 다가가면 돼지가 저도 모르게 울듯이, 사람을 수없이 베어 본 피 냄새가 그에게서 느껴졌다.
철유는 침을 꿀꺽 삼켰다.
겨우 저 나이에 저런 살기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놀랍고, 무서워서.
그러는 와중에 백무량의 칼질은 다섯 무인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했다.
일검에 사지 하나. 목숨은 의도적으로 늦게 취하는 듯했다.
운산보주에게 남기는 경고.
철유에게는 백무량의 모습이 그렇게 보였다.
촤악!
백선신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낸 백무량이 철유에게 다가갔다.
“당신의 외침을 듣고 왔소.”
“그, 그렇습니까?”
백무량의 말에 저도 모르게 존댓말이 나왔다.
왜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보다 어린 나이기는 하나, 그의 모습에는 평생을 갈고닦은 무인의 냄새가 났다.
철유가 백무량에게 굽실거리려던 그때, 그가 자신의 어깨를 붙잡았다.
“숙이지 마시오.”
“……예?”
“강자에게 그리 당당하던 사내가 왜 나 같은 꼬마에게 고개를 숙인단 말이오?”
백무량의 얼굴에 수선화 같은 미소가 맺혔다.
물속에 사는 신선(水仙), 곤륜산맥을 둘러싼 운해처럼.
그 앞에서 철유는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약관의 나이에도 무공을 배울 수 있습니까?”
“……!”
의외의 질문이었던 걸까?
백무량의 눈동자에 순간 이채가 일더니, 자신의 전신과 손바닥에 박인 굳은살을 훑어보았다.
긴장감을 이기지 못한 철유가 그에게 대뜸 물었다.
“아, 안 되겠지요?”
“…….”
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자신과 시선을 마주했다.
철유는 그것을 동정심으로 판단했다.
“하긴 너무 늦은 나이긴 하지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예?”
“나는 철유라는 사람의 의기(意氣)를 믿소.”
눈웃음을 지은 백무량이 곤륜산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청류강에 있는 산하객잔으로 가서, 곤륜파는 어디로 가면 되는지 물으시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입문하란 말이오.”
백무량이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될 거란 생각부터 하지 말고, 한번 부딪쳐 보시오.”
“……!”
철유는 순간 깜짝 놀라서 어떤 말도 이을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자신에게 등을 돌린 채 떠나가고 있었다.
“가면 내 욕을 할 테니까, 잘 좀 다독여 주게, 후배.”
“자, 잠깐!”
철유가 손을 뻗는 사이에 백무량의 신형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
지부 여섯 개.
무인 백하고도 스물둘.
백무량이 열흘 동안 청해 서부를 쏘다니며 죽인 숫자였다.
‘생각보다 쉬운데.’
백무량은 백선신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생각했다.
많은 숫자의 무인을 죽이고 다녔지만, 그동안 위험에 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신뢰할 만한 은신처, 교대하는 시간, 적의 숫자와 동향.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움직이니 싸움은커녕 손쉬운 사냥만이 반복될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곤륜신성’이란 별호에 악명이 깃들기 시작했다.
엊그제 마주한 운산보의 무인이 외치기를.
“사, 살인에 미친 애새끼다!”
곤륜 지부를 없앤 이후로 운산보 사이에서 백무량이라는 이름이 제법 회자한 듯했다.
물론 좋지 않은 쪽으로.
‘젖살도 빠지지 않은 애새끼가 살인에 미쳐서는, 무인이라면 보는 족족 벤다니?’
천을 내려놓은 백무량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러다가 곤륜신성이 곤륜살성으로 바뀌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자신이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적대할 상대가 아니라 공포의 대상이라면…… 아직 날 상대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뜻이야.’
머리가 좋은 놈이라면 운산보의 동향이 낱낱이 파헤쳐졌다고 여겼을 터였다.
하지만 운산보에 그런 놈은 없었다. 곤륜파의 빈자리를 날름 처먹은 탓인지, 대부분 단순하고 무식한 놈들 천지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기입니다, 대협! 이쪽으로 오시지요!”
청해인의 마음이 운산보에서 완전히 떠났다.
그 덕택에 백무량은 송우현이 심어 놓은 사람 외에도 많은 청해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저쪽 강 하류에 폐가가 하나 있습니다. 저희가 미리 손을 보고, 식량을 두었으니 며칠 지내는 데엔 괜찮을 겁니다.”
노인이 감사함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대협 덕분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본 산이 늦게 나서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노인에게 예를 갖춘 백무량이 강 하류로 나아갔다.
그곳에 도착하고 나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허.”
“오셨습니까?”
잡풀을 정리하고 있던 청년이 다짜고짜 두 무릎을 꿇었다.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앙다물었다.
저번에 만났던 철유 이후로, 어디를 갈 때마다 자기를 곤륜파에 입문시켜 달라는 젊은이가 찾아오고는 했다.
‘물론 사람이 부족해, 부족하긴 한데…….’
곤륜파가 어디인가?
과거 구파일방이었으며 오래된 역사와 전통이 있는 도문이 아니던가!
……물론 지금은 백련교에 의해 몰락하기는 했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입문시키는 곳은 아니었다.
백무량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거요?”
“그, 그게…….”
청년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인이라도 되겠습니다!”
“아니, 웬 하인이…….”
“어려서부터 배워먹질 못해, 은혜를 몸으로 갚는 법밖에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받아 주십시오!”
다짜고짜 저게 무슨 말인가?
백무량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초면에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한들,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참.”
“아!”
이제야 자기 잘못을 깨달은 건지, 청년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가 설명도 없이 마구잡이로 늘어놔서 죄송합니다. 그게, 그러니까…….”
청년의 이야기는 요약하면 이러했다.
화전을 일구던 촌락에 운산보의 무인이 들이닥쳐, 이런저런 갈취로 인해 사람이 굶어 죽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무인이 속해 있던 지부를 없애서 어려움이 해결되었다.
“……그래서 가장 나이가 어린 제가 은혜를 갚고자 온 것입니다.”
백무량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혹시 다른 사람이 시켰습니까?”
“아니요. 저 혼자, 제가 결정해서 왔습니다.”
청년의 눈을 보니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백무량은 다시금 그를 나무랐다.
“어디까지나 내가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왜 은혜를 갚는다고 찾아온 겁니까?”
“그러고 싶으니까요.”
청년이 꼿꼿이 서서 자신을 바라보았다.
저번에 만난 철유가 용맹하다면 그는 우직함이 돋보였다.
현노윤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그래, 마치 바위처럼.
백무량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허드렛일을 시켜도 군말하지 않고 하실 겁니까?”
“예. 잘합니다.”
“그렇게 결심했다면, 청류강에 있는 산하객잔으로 가십시오.”
백무량이 남서쪽을 가리켰다.
가볍게 생각해서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확실히 장문인을 도울 사람이 필요하긴 해.’
현재 곤륜파에는 개축 공사를 하는 인부가 머물고 있었다.
타인이 있으면 잡음이 생기기 마련이라고, 노인인 현노윤 혼자서는 힘에 벅차 보일 때가 많았다.
따라서 언제고 시간이 되면 현노윤을 도울 사람을 구할 생각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얻게 될 줄이야.’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초면으로 모든 걸 파악할 수 있을 리가.
백무량은 안섶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몇 글자를 슥슥 적었다.
“이걸 산하객잔에 있는 송 노야에게 전해 주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대협.”
청년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뒤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무량이 입술을 달싹였다.
“한데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우상벽(羽狀碧)이라고 합니다.”
“우상벽이라…… 기억하겠습니다.”
그 말에 우상벽이 의아한 낯빛을 드러냈다.
“소문과 다르시군요.”
“……?”
“사파에게 그리 악독하다기에 저도 한 대는 맞을 각오로 왔습니다.”
“내가 뭐 하러 때려.”
백무량은 피식 웃고 말았다.
하기야 청해에 출몰할 때마다 무인을 베고 다니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그럼 다음에 뵙지요.”
“예. 곤륜산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백무량과 우상벽은 서로에게 예를 표하고는 등을 돌렸다.
***
“우리가 무슨 탁아소인 줄 알아?”
“……예?”
우상벽이 눈을 두어 번 끔뻑였다.
‘송 노야라고 했던가?’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백무량이 일러준 대로 산하객잔에 와서 전서를 건넸더니, 갑자기 노인장의 표정이 팍 구겨진 것이다.
“아니, 염병할. 지 좋아서 가 놓고는 왜 사람을 툭툭 던져 대고 지랄이야?”
“저…….”
“알아! 처음 보는 노인네가 왜 저럴까 싶겠지!”
말을 사납게 쏘아붙인 송우현이 우상벽의 여기저기를 살폈다.
“힘 좀 써? 성질은 괜찮고?”
이게 무슨 저세상 질문인가 싶었지만, 우상벽은 성실하게 답했다.
“어릴 때부터 화전을 일궈서 힘은 제법 있습니다, 성격은…… 괜찮다고 자부는 합니다만…….”
“자부 말고. 보증이라도 서 줄 사람 있어?”
그렇게 말하는 송우현의 목소리가 몹시 단호했다.
우상벽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노, 농담이시지요?”
“농으로 들려?”
다시 한번 으름장을 놓은 송우현이 피식 웃으며 옆자리를 두드렸다.
예전부터 사람을 많이 다뤄 본 듯한 움직임.
그저 노인인 줄 알았는데,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자신이 자리에 앉자,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그놈한테 어떻게 보였는지 몰라도 말이다. 초석을 다지는 이 와중에 장문인 옆에 있으면 네가 무슨 신분이 될 것 같냐?”
“그래 봐야 잡일 하는 놈 아니겠습니까?”
“잡놈? 하! 그래, 잡놈은 맞지.”
꽈아악!
송우현의 오른손이 우상벽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근데 그 잡놈이 머리 옆에 있으면 뭐라고 불릴까?”
“제가 배우질 못한 놈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총관이라고 불리지.”
“……!”
우상벽은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송우현이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있어서 그러지 못했을 뿐.
“제, 제가 무슨 총관입니까?”
“쉿, 쉿. 조용히 말해라. 내 귀청도 떨어지고 객잔 백 리 바깥에서도 들리겠다.”
툭, 툭.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송우현이 우상벽에게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못 배웠으면, 이제부터 배우면 그만 아니냐. 나이도 어린 게, 응?”
“…….”
우상벽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을 끔뻑였다.
잡일이나 도우러 왔는데, 이런 중책일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전 그럴 일을 할 능력이 못 됩니다, 어르신.”
“처음부터 능력 좋은 놈을 쓸 생각도 없었어. 어차피 그런 놈들은 뒤통수칠 생각을 조금씩 하고 그러거든.”
송우현이 피식 웃었다.
“의리 있는 놈. 머리 조금 부족해도 성격은 투박한 놈. 일단은 그렇게 시작해서 올라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