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33화 (33/275)

흉조 (2)

“제정신이냐…… 그렇게 묻고 싶지만.”

고성진은 두 동강 난 날붙이를 내려다보았다.

찰나였지만 백무량이 펼친 검은 자신을 아득히 상회했다. 그의 나이가 십 대라는 걸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무위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운산보와 싸우는 걸 말리고 싶었지만.

“도사란 족속이 뭐, 한번 데어 봐야 깨닫는 법이니 어쩔 수 없지.”

뜻을 정한 사내에게 무슨 말을 해 봐야 들리지 않는 법.

고성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길을 비켰다.

“후배,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현천신장은 외팔로는 수련할 수 없으니까.”

“나 대신 종휘나 잘 봐주시지요. 어린아이니까.”

그 말에 고성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아닌 것처럼 말하기는, 하여튼, 알았다.”

“믿고 내려가겠습니다.”

저벅저벅.

고성진은 백무량이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천휘성(天輝星) 주위에 암성과 낙성이 둘러싸고 있었다.

천문을 겉핥기로 배우긴 했으나, 저렇게까지 흉한 위치는 난생처음이었다.

“빌어먹을 흉조.”

천휘성이 백무량이면, 자연히 암성과 낙성은 운산보주와 그 휘하 쓰레기들 아니겠는가.

고성진이 맑게 갠 하늘을 강하게 노려보았다.

***

“제정신이냐?”

고성진이 옆에 있었다면 손뼉을 치며 기뻐했을 말이다.

백무량은 눈을 치켜뜬 송우현과 시선을 마주했다.

“운산보의 살업을 지켜보는 것보단 낫지요.”

“그렇다고 혼자서 수백 명을 상대하시겠다? 허, 대단한 도사가 눈앞에 있었는데 알아보지도 못했네.”

차가운 목소리로 비아냥거린 송우현이 백무량의 어깨를 매만졌다.

“전처럼 그럴듯한 계획은 있는 게냐?”

“계획을 따질 생각이었다면 곤륜산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겠지요.”

백무량은 그가 분노할 걸 알면서도, 무덤덤한 목소리로 진실을 토로했다.

“곤륜신성으로 불리는 내가 직접 운산보의 무인을 타진하고 다닌다면, 나한테 귀추가 쏠리지 않겠습니까?”

“미친놈!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게 아니고서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면, 나는 불의를 보고도 목숨이 아까워서 지켜보기만 한 곤륜의 도사가 되겠지요.”

송우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곤륜파의 율법이라도 되느냐?”

“…….”

“목숨을 그렇게 내던지면 누가 땡전이라도 던져 줘? 아니, 애초에 백련교의 난 이후로 화전민만도 못하게 되지 않았더냐!”

“선한 행동을 하는 건 돈이나 명예를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송 노야.”

백무량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이 옳으니 그래야 하는 것뿐입니다.”

백련교의 난 이전에도, 곤륜파는 마교와 대적하거나 북적과 싸우며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럼에도 그들과 싸움을 이어 온 까닭은, 당연했다.

옳으니까.

그 당연한 도리(道理)를 위해 곤륜파는 불의한 적과의 싸움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준비해 주실 수 있습니까?”

“……놈!”

외마디 외침을 날린 송우현이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분노를 삭이고, 자신의 말을 곰곰이 곱씹는 듯했다.

그렇게 일각 정도가 흘렀을까.

“이길 수 있겠느냐?”

송우현이 대뜸 물었다.

“확신하지는 못합니다.”

“그래?”

백무량의 귀에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송우현이 날붙이 따위로 탁자를 긁는 것이 보였다.

“지금 무얼 하시는 겁니까?”

“와서 보아라.”

송우현의 말에 백무량은 그가 앉은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상인의 논리가 적혀 있었다.

행동에 따라 얻을 수 있는 이득과 미래를 위한 명예.

그런 것들을 미리 계산해서 위험을 감수해도 괜찮은지.

청해의 어디까지가 자신을 도울 수 있는 거리인지.

“……음.”

백무량은 작은 신음을 흘렸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상인의 언어란 비밀스러운 데가 있어서, 상업에 뛰어들지 않으면 같은 한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복잡한 구석이 있었다.

송우현이 써 놓은 말에는 특히 은어가 많았다.

“뭔 말인지 모르겠지?”

송우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왠지 모르게 자신을 놀리려는 듯한 모습이어서, 백무량의 입술이 삐쭉 튀어나왔다.

“뭡니까? 사람 우습게 만들고…….”

“이놈아, 네가 어르신을 우습게 만든 건 생각도 안 하냐?”

킬킬거리며 웃은 송우현이 대뜸 백무량의 팔뚝을 잡아챘다.

그의 시선이 손목의 퍼런 멍 자국에 멈춰 있었다.

“요, 요, 멍 봐라. 오기 전에도 누구랑 싸우고 온 거냐?”

“싸우기는요, 그냥 무인끼리 대련 좀 한 겁니다.”

“하여튼 무림인이란 족속은…….”

혀를 강하게 찬 송우현이 팔뚝을 잡아챘던 손을 놓았다.

“네 뜻이 옳고 바르다는 건 알겠다만, 싸움만으로 세상일이 해결된다더냐? 청해의 소인배라면 네가 운산보에게 대항해서 이 꼴이 난 거라고 원망을 쏟아 내고 있을 거다.”

백무량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제가 아는 방식은 싸움밖에 없습니다.”

“모르면 배워야지! 좋은 선생이 네 눈앞에 있지 않으냐?”

한껏 거드름을 피우는 척하던 송우현이 옆자리를 두드렸다.

“여기 와서 앉아라. 머리가 최소한 네 칼부림의 반은 따라가야 할 것 아니더냐!”

“칼부림이 너무 뛰어나니 그런 말도 듣는군요.”

백무량이 강한 자신감을 드러내자, 송우현이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저번에는 네 검에 전적으로 의지했으니, 이번에는 내 차례가 온 게지.”

백무량은 장난 어린 미소를 빼물었다.

“믿어도 되는 거겠지요?”

“허!”

송우현이 가소롭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고는 탁자에 적어 놓은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디까지 송우현의 인맥이 펼쳐져 있는가.

그리고 운산보의 지부가 어디에 있는지.

이런 일을 수년 전부터 준비해 왔던 사람처럼, 송우현의 계획은 막힘없이 이어졌다.

“언제부터 준비하신 겁니까?”

백무량이 감탄을 터트리자, 송우현이 아무렇지 않다는 양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괜히 만금상단에 있었겠느냐? 다 연륜에서 나오는 경험이 있기 마련이지.”

“든든하네요.”

“그래서,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말이다.”

송우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칼질 좀 한다고 마구잡이로 싸워서야 천명(天命)만 갉아먹는 셈이다. 남의 피를 흘리게 하면, 언젠가 너도 흘리게 되어 있단 말이다.”

“…….”

“될 수 있으면 더 죽이지 않고 이기라고 꾀를 빌려주는 것이다. 알겠느냐?”

송우현이 쏟아 낸 말에 백무량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분명 곤륜의 도사는 자신이거늘.’

어째 그의 충고가 더욱 도사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그의 충고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살업을 쌓고 있었다.

“명심하지요.”

“아무리 운산보가 천하의 개쌍놈일지언정, 넌 아직 어리지 않느냐!”

송우현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얽혔다.

백무량에 대한 안쓰러움, 혹은 연민인가.

아니면 운산보가 이렇게까지 강성해질 때까지 막지 못한 책무인가.

백무량은 속으로 생각했다.

‘모두겠지.’

송우현과의 대화는 지금을 포함하여 겨우 열 번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었다.

수십 년 전에 만난, 잊어도 이상하지 않을 은인을 찾기 위해 청해에 온 남자.

‘그것만으로 충분해.’

백무량은 오른손에 내공을 집중시키고는 수도로 탁자를 밀어냈다.

드르륵!

탁자가 불규칙하게 깎여 나가며 송우현이 적었던 글들이 사라졌다.

그걸 본 송우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 이게 무슨!”

“송 노야는 말리는 대신 어느 길로 가야 좋은지 말해 주었습니다. 나를 존중해 주고 있단 뜻이겠지요.”

백무량은 백선신검의 손잡이를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꾀를 내주었으니, 이제 몸으로 부딪치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 놈, 애가 멋있는 척해 봐야 그럴듯하지도 않다.”

송우현이 피식 웃었다.

“자리에 앉아! 아직 할 말이 남았으니.”

***

다음 날.

백무량은 산하객잔을 나서며 송우현에게 들었던 정보를 머릿속에 정리했다.

‘생각보다 송 노야가 알고 있는 게 많았어.’

진심으로 송우현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운산보 지부의 상세한 위치부터 시작하여, 서녕에 있는 본부에 정기적인 보고를 언제 취하는지.

그것을 조사해 놓고 지부 주변의 객잔을 포섭한 게 오 년 전부터였다.

언젠가 무림맹과 연락이 닿는다면 일망타진할 수 있도록.

‘자신의 피를 흘리지 않고 적을 제거하는 셈이니, 과연 송 노야다운 영리함이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인의 방식이었다.

백무량은 무인으로서, 그리고 곤륜파의 도사로서 남의 손을 빌리고 싶지 않았다.

‘도리를 바로 세우는 건 오로지 곤륜파의 현판 아래서 이루어져야 해.’

나중에 강호로 나올 현종휘와 현노윤을 위해서라도.

게다가 현재 백무량은 강호에서 어떻게 여겨지던가?

아직까진 후기지수 중에서 출중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 정도의 명성.

곤륜신성이란 별호에 더욱 큰 가치를 새길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구천검 이상……!’

곤륜파란 이름이 무림의 역사에 남아 있을지언정, 겨우 셋뿐인 문파를 대우해 주는 강호인은 없다.

그 현실을 뛰어넘을 방법은 오직 하나.

‘한 지역을 호령하는 고수가 되어 순수한 무(武)를 강호에 증명하는 것뿐!’

백무량의 시선이 서늘해졌다.

***

“움직이지도 못하는 노인을 때리고, 아녀자를 희롱하다니! 이 철유(哲由)가 벌을 내리마!”

철유의 노호에 운산보의 무인들이 히죽 웃었다.

“백정 놈이 감히?”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다리가 떨리는구나!”

“빌어먹을 놈들!”

철유는 이를 앙다물며 단검을 무인에게 휘둘렀다.

휘익!

얕고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도축하다 보니, 철유가 가진 검력은 웬만한 무인보다 무겁고 둔탁했다.

하지만 철유의 움직임은 느려도 너무 느렸다.

“그래서야 앞섶이나 벨 수 있겠느냐?”

“하하하, 우리가 가만히 서 있어 주랴?”

철유가 필사적으로 움직였으나, 무공을 모르는 움직임은 그들에게 비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다 한 무인이 조용히 철유의 뒤로 움직였다.

“요놈!”

“……!”

푸욱!

철유의 등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손가락 다섯 마디 정도 되는 단검이 틀어박힌 것이다.

“끄으윽…….”

하지만 철유는 움직였다.

머릿속을 관통당하는 듯한 통증에도 두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대지에 섰다.

그 고통은 철유의 고함으로 빚어졌다.

“이 악독한 놈들아! 모두 나한테 덤벼라! 이 철유는 너희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필생의 의지가 담긴 외침에도 무인들은 그저 히죽거릴 뿐이었다.

“뒈져 가는 놈이 목청만 좋아서는!”

“곧 있으면 오줌을 지리면서 목숨을 구걸할 텐데 말이야.”

“그러게? 으히히…….”

무인들이 음습한 웃음을 흘리며 철유에게 다가갔다.

‘이제…… 이제 끝인가.’

철유의 무릎이 살짝 굽혀지려는 그때.

“잘 버텨 주었다.”

한 남자가 철유 앞에 멈춰 섰다.

“네놈은 누구냐?”

“지나가던 도사다.”

백무량이 백선신검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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