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신검 (1)
단시에 나온 금녀검이 백선신검이었다니.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백무량은 손바닥에 내력을 집중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모두 지웠다. 부슥거리는 소리와 함께 가루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걸 멀리서 본 객잔 주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에잉, 쯔쯧. 낙서가 하고 싶으면 다른 곳에서 하지 그랬느냐?”
“죄송합니다, 어르신.”
백무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체 연세가 있는 데다 거리가 멀다 보니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다행이었다. 기절초풍했던 나머지 시야가 좁아졌었다.
그만큼 주백천의 시서화에 숨겨져 있던 행간은 충격적이었다.
‘상황이 무척 공교롭군.’
백무량의 눈동자가 자못 낮게 가라앉았다.
청해 일대에 백선신검의 소문이 퍼진 상황에서, 백선신검이 실재한다는 증거를 마주한 셈이었다.
그것도 백선신검의 위치가 은연중에 담겨 있는 증거를.
‘백선신검이 군옥산에 있다라…….’
단시에 담긴 군옥산도 그림처럼 비유에 불과하리라.
한번 감이 잡히니 백무량의 머리도 팽팽하게 돌아갔다. 어린 시절에 자주 뛰어놀던 청류강, 그 변두리에 여러 동굴이 있었다.
그때 백무량은 단시의 두 번째 단락에 집중했다.
일난풍화사, 동방청.
서왕모의 노래, 동쪽에서 들려온다.
주백천의 성격상 멋을 부리기 위해 넣은 단락은 아닐 것이다.
분명한 사유가 담겨 있을 터였다.
탁자에 걸터앉은 백무량은 자신의 과거를 끊임없이 회상했다. 즐겁고 행복한 기억이었다. 주백천의 배려가 느껴지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하하.
백무량이 소리 없이 웃었다.
이렇게 잘해 준 사형을 두고 강호행을 떠났던 자신이 조금은 한심했고, 다행이라 생각했다. 계속 곤륜파에 머물렀다간 사형만 귀찮아졌을 터였다.
‘나도 성장하지 못했을 테지.’
강호행에서의 경험 덕분에 백련교의 난에서 활약할 수 있지 않았던가.
물론, 백련교주에게 패배한 건 안타깝고 분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패배가 있었기에 사형과 학도사를 피신시킬 수 있었다. 자신이 어려진 몸으로 되살아난 까닭도 거기에 있으리라 여겼다.
‘그래도 앞으로는 지지 말아야겠지.’
현세의 곤륜파엔 주자령도, 주백천도 없었다.
현씨 조손이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오직 백무량 자신뿐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니 별안간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사소한 기억이었다.
일곱 살 무렵,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시절에 사형과 동굴에서 술래잡기를 했었다. 자그마치 구십구 년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동쪽.”
혼잣말을 중얼거린 백무량이 탁자에서 일어났다.
서왕모의 노래가 동쪽에서 들려온다.
그 말인즉 동굴의 두 갈래길 중 동쪽에 숨어 있던 자신을 의미했다.
휘이— 휘.
어둠이 무서워서 휘파람을 불던 어린 소년을.
백무량은 객잔 밖으로 나가, 청류강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
석양으로 물든 청류강 너머에 여러 동굴이 보였다. 일일이 모두 가 보지 못할 만큼 깊이가 넓은 곳들이었다.
하지만 주백천과 숨바꼭질을 했던 동굴은 하나뿐이었다.
나이가 어린 백무량이 길을 잃을까 봐, 주백천의 걱정과 배려가 한껏 담긴 장소였다.
“내가 잊었으면 어떡하려고…….”
석양이 완전히 어둠으로 물들 때까지.
백무량은 가만히 서서 청류강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
다음 날 아침.
객잔 주인이 백무량의 모습을 보곤 혀를 쯧 찼다.
“몸이 안 좋으냐?”
“잠을 제대로 못 자서요.”
“눈이 그렇게 뻘개서야 뭘 하겠느냐.”
그 말에 백무량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미리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땔감이라도 해 놓지요. 저한테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시니 잡일이라도 하는 게 속이 편합니다.”
“……쯧. 굳이 하겠다니 말리진 않겠다만, 힘들면 들어오너라. 나무는 충분하니 말이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백무량이 객잔 뒷마당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객잔 주인이 쌓아 둔 장작으로 그득했다.
‘연세답지 않게 건장하신 까닭이 여기 있었구나.’
부드럽게 웃은 백무량은 장작더미에 있는 손도끼 대신 칼을 뽑았다.
객잔 주인이 보았다면 강하게 꾸짖을 일이었다.
‘잘못 휘두르면 손목이 상하고, 제대로 휘둘러도 칼날이 무뎌진다. 특히 이슬을 머금은 장작은 도끼로도 쉽지 않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검으로 젖은 장작을 깔끔하게 잘라 낼 수 있는가.
감각과 집중력.
백무량은 곤륜 지부에서 있었던 싸움을 떠올렸다.
‘그때는 심상을 이용하여 초식을 완벽하게 펼쳤지만, 요행을 계속 바랄 순 없어.’
그게 가능했던 건 어디까지나 상대가 약했기 때문이었다.
적산이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면 심상을 구체화하는 도중에 자신을 두어 번은 죽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어렵게 느꼈던 검해의 단서를 버릴 수도 없었다.
백무량은 자신의 검신을 들여다보았다.
해답은 어젯밤에 정해 놓았다.
‘동시에 수련하는 수밖에.’
반복 수련을 통해 어려진 몸에 익숙해지고, 심상이 그리는 완벽한 출수에 도달한다.
운산보가 언제 추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에 너무 높은 목표였다.
하지만 불가능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백무량은 숨을 가다듬었다.
“……후우.”
시야가 확장되며 경직된 근육에 활력이 일었다.
태청신공의 내공과 지극한 호흡이 서로를 향상시킨 덕택이었다.
스윽.
백무량이 정자세로 검을 명치 높이까지 들자, 검기가 일렁였다. 곤륜산맥을 뒤덮은 운해처럼 짙은 회색의 검기였다.
십(十) 자.
그것을 심상에 떠올린 뒤, 지체 없이 검을 휘둘렀다.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장작이 네 조각으로 갈라졌다.
“좋아.”
척 보기에도 네 조각이 모두 동일하다.
백무량은 다시 숨을 골랐다. 조금 전에 쓴 오래된 호흡을 버리고, 새로운 호흡을 길었다.
그것을 총 사백 번.
아침이 정오가 되고, 삼백 번을 넘길 즈음엔 석양이 느릿하게 하늘을 표류하고 있었다.
도중에 내공을 소진하면 털썩 주저앉아 운기조식을 펼쳤다. 운기조식이 곧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다.
팔이 저릿하고 폐가 비명을 질렀지만, 백무량의 수련은 멈추지 않았다.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더라도 게으르면 경지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 주자령의 가르침이었다.
그렇게 밤이 되니…….
“이놈아, 제정신이더냐!”
화가 난 객잔 주인이 백무량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백무량은 자기도 모르게 검을 놓쳤다. 수련 중에 심력을 모두 소모한 탓이다.
그걸 본 객잔 주인이 욱하여 외쳤다.
“내가 언제 이렇게까지 하라고 했느냐?”
“제가 원해서 한 겁니다.”
“원해? 원했다고?”
객잔 주인이 백무량의 손목을 바깥쪽으로 비틀었다.
그러자 칼자루에 쓸려서 벌겋게 변한 손바닥이 드러났다. 젓가락으로 쿡 찌르면 핏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걸 본 객잔 주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정작 백무량의 표정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역시 물집은 안 잡혔군.’
백무량의 근골이 완성되어 있기에 이 정도로 그친 거였지만, 그 사실을 객잔 주인이 알 리가 없으리라.
“크게 다친 것도 아닌…….”
객잔 주인이 백무량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이놈! 당장 따라와라!”
“……네.”
백무량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객잔 주인을 뒤따라갔다.
단순히 거쳐 갈 뿐인 장소에서 이런 호의와 동정을 받게 될 줄이야.
백무량이 침묵하자, 그가 등짝을 때렸다.
“조용히 있는 걸 보니 잘못한 건 아는 모양이구나.”
“그게…….”
“변명은 됐다!”
“…….”
이래서 수련은 남에게 보이지 말아야 한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백무량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객잔 주인은 자신의 방에서 천과 물, 그리고 화상유(火傷油)를 챙겨 나왔다.
“쓸린 자국엔 이게 제일이지. 금창산은 발라 봐야 별 효험이 없으니, 알아 두어라.”
“감사합니다.”
백무량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굳이 뻗대 봐야 좋을 게 없었다.
그때 객잔 주인이 말했다.
“나한테 왜 청해에 있냐고 물었었지?”
“네.”
“사실 한 번은 떠났었다. 호광성을 비롯한 여러 곳을 떠돌아다녔지…….”
객잔 주인이 품에서 하나의 패를 꺼냈다.
‘만금상단!’
백무량은 놀란 표정을 애써 숨겼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칠십여 년 전의 만금상단은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상단이었다.
특히 만금(萬金)이라는 상호에서 황실과의 친분을 의심하는 이가 꽤 많았다.
‘그저 마을에서 성공한 노인인 줄 알았더니…… 만금상단의 일원이었다고?’
“뭐, 다 옛날 일이지. 여기서 만금상단이라고 해 봐야 누가 아느냐.”
특히 청해 놈들은 죄다 촌놈이라며, 객잔 주인이 껄껄 웃었다.
패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를, 송우현(松遇賢).
그걸 본 백무량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왜 돌아오신 건데요?”
“아무리 좌판을 많이 때려 보고, 견문이 넓어져도 사람이란 게 멍청해질 때가 있거든.”
나이가 지천명(오십)을 지날 때였던가?
혼잣말을 중얼거린 송우현이 피식 웃었다. 아무렴, 언제였든 무슨 상관이겠냐는 웃음이었다.
“노인네의 허세처럼 들리겠지만, 만금상단 내에서 인정도 받고 지체 높은 분들과 친분도 맺었었단다. 그러다…… 문득 떠올렸지.”
“무엇을요?”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큰 은혜를 베풀었던 도사를 말이다.”
송우현의 눈주름이 깊어졌다.
“내가 나이가 이래선지 이름을 까먹어 버렸지만, 평생의 은인이지. 훌륭하신 분이었다. 그의 은덕이 옛날에 얼마나 유명했는지, 벽에 그려진 시서화를 누구도 훼손하지 않았거든.”
‘사형을 말하는구나.’
백무량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송우현이 빙긋 웃었다.
“진지하게 들어 주니 마음이 한결 편하구나. 네가 지루해하면 어쩌나 걱정하던 참이었다.”
“괜찮으니 더 이야기해 주세요.”
송우현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래.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던 장원을 팔고, 가산을 정리했다. 한 가지 구하고 싶은 게 있었거든.”
“그게 뭔데요?”
“태청신단이라고 하는 물건이었지.”
“……!”
백무량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태청신단이 무엇이던가!
곤륜파의 차기 장문인을 위해 십 년 이상의 공을 들여 연단하는 신물(神物)이었다. 특히 태청신공의 정순함을 크게 증진시키는 효능이 있었다.
내공 자체가 늘어나진 않지만, 곤륜도에게 있어 가장 뛰어난 영약이었다.
백무량의 표정을 본 송우현이 하려던 말을 이었다.
“다른 도문이 어찌나 그걸 탐내는지, 높은 분의 도움 덕택에 겨우겨우…… 정말, 어렵게 얻었는데 말이다.”
“얻었는데요?”
“은인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송우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앞서 말했지 않느냐, 사람이 멍청해질 때가 있다고. 나는 그 사람이 살아 있는지도 모르는데 영약을 구하고 있었던 거야.”
“…….”
“우습지 않으냐?”
“우습지요.”
백무량은 대답했다.
“수십 년 전의 은혜를 갚기 위해 가산을 정리했다는 것 자체가 희극(喜劇) 아니겠습니까.”
“그놈 참, 어린놈이 얄밉게도 말한다.”
송우현이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백무량이 보기에 그가 진지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듯했다.
“하면 나도 가만히 질 순 없겠구나.”
“……?”
“어떤 정신 빠진 놈이 손자 같다고 공짜로 밥을 주고 재워 주겠느냐? 그것도 상인이었던 놈이, 이름도 묻지 않고?”
“그러면 왜 저를……?”
“태청신단을 구하다 보니 많은 도사와 중놈을 만나게 되더구나.”
송우현이 백무량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마치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상인은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거든.”
“그게 왜요?”
“은인의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눈은 잊지 않았다.”
송우현은 백무량과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많은 도사와 마주했지만 너만큼 닮은 사람은 없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