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배 (3)
백무량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주백천이 기억되기는커녕 그의 묘비마저 사라진 상황에서 벽에 그려진 시서화는 백무량을 아연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게, 무슨…….’
백무량은 입을 쩍 벌린 채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 놀랍고, 의아했다. 본산에서도 사라진 흔적을 여기서 발견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적어도 삼 년.
그 시간 동안 수련한 뒤에야 주백천의 흔적을 찾아 나설 작정이었다.
한데 청류강 근방의 객잔에 있을 줄이야.
“…….”
시서화를 바라보는 백무량의 얼굴이 묘해졌다. 반갑기도 했고, 기뻤으며,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두 도사가 청류강에서 물놀이를 하는 그림이었다.
자세히 보면 청년에 가까운 도사가 소년과 놀아 주다가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그 아래에 스무 글자의 단시(短詩)와 날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두 사형의 필체였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 아니더냐?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스친다.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만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는걸요.”
눈을 감은 백무량이 과거를 추억했다. 고집 센 사제와 놀아 주며 짬짬이 책을 읽는 사형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아른거렸다.
그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추억에 파묻힐 순 없었다. 지금은 그때로부터 구십여 년이 흘렀고, 몰락한 곤륜파가 운산보에게 잡아먹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현실을 체감한 백무량은 그림 아래에 있는 단시를 바라보았다.
금녀검(金女劍), 군옥산동유(群玉山洞有).
일난풍화사(日暖風和詞), 동방청(東方聽).
서왕모의 칼, 군옥산 동굴에 있으니.
서왕모의 노래, 동쪽에서 들려온다.
‘군옥산이라면 서왕모가 살았다던 옥산(玉山)이고, 금녀검은 그녀의 칼이 아니던가?’
백무량의 미간이 좁아졌다.
주백천은 실학에 관심이 많았지 전설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한데 주백천이 쓴 단시가 전설을 논하고 있다니.
‘설마 위작인가?’
“오호라, 보는 눈이 있구나.”
“……?”
백무량이 고개를 돌리니, 음식을 가져온 객잔 주인이 흐뭇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옛날이야기, 좋아하느냐?”
백무량을 바라보는 객잔 주인의 시선에 오랜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
쿵!
고요하던 산하객잔에 큰 소리가 울리자, 몇 안 되는 손님이 모두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이름 모를 도사도 그중 한 명이었다.
“아이고오, 이러면 안 되는데!”
실수로 던진 양동이가 벽에 부딪혀 자잘한 금이 한가득하다.
점소이가 손가락에 침을 발라 벽을 박박 문대는 것을 보며, 도사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강호를 자주 왕래하며 들르는 곳인데 저 어린 점소이가 유독 실수가 잦았다.
그럼에도 내쫓기지 않은 까닭은 그의 실수를 즐기는 단골이 많기 때문이라.
“아이고, 송가 놈아! 그 정도면 실수가 아니라 맥이려는 게 아니냐?”
“하루 매상이 저기 메꾸는 데 쓰이겠구먼!”
“으으…… 어떡하지?”
어린 점소이가 울상으로 훌쩍이고 있으니, 도사가 찻잔과 문방사우를 챙겨 다가갔다.
“도사님?”
“잠시 비켜 보아라.”
도사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선기(仙氣)에 점소이가 울음을 뚝 그치고는 옆으로 물러났다.
스윽, 슥.
도사가 먹을 머금은 붓으로 일 획을 그으니 자잘한 금이 소나무의 나뭇잎처럼 변하였다.
“……와아.”
점소이가 크게 감명하여 감탄을 흘리자, 끼니를 때우던 손님도 젓가락질을 멈추었다.
스슥, 슥.
붓이 팔(八) 자를 그리니 곤륜산맥이 나타나고, 천(川) 자를 그리니 산맥 사이에 강이 차오른다.
그 무엇보다 점소이의 혼을 빼 놓은 것은 청류강에서 물놀이를 하는 두 도사였으니.
“시, 신선이신가요?”
어린 점소이의 질문에 도사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이런 볼품없는 그림으로 그런 칭찬을 받으니 부끄럽구나.”
“볼품없다니요! 누가 그렇게 말하면 코를 때릴 거예요!”
“하하.”
도사는 차를 들이켜며 그림 옆에 시를 써 내기 시작했다.
금녀검, 군옥산동유.
일난풍화사, 동방청.
도사의 일필휘지에 점소이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나도 모르겠구나.”
도사가 웃으며 대답하니 점소이가 빈 잔에 차를 채워 주며 다시금 물었다.
“알려 주시면 안 되나요?”
“겉에 드러난 뜻은 누구나 알 수 있으나, 행간(行間)은 연자에게만 보이는 법이지.”
“숨은 뜻이 따로 있단 말씀인가요?”
점소이가 자신의 말을 대번에 알아차리니, 도사가 감탄할 차례였다.
“오호라, 언문을 제법 공부한 모양이구나.”
“매, 매일 조금씩 공부하고 있어요.”
도사의 칭찬에 멋쩍어진 점소이가 뒷머리를 긁었다.
그 얼굴을 가만히 보던 도사가 말했다.
“내 너를 보니 점소이에서 끝날 상이 아니구나.”
“왜요?”
“천하게 태어났다고 살아갈 생이 천하진 않은 법이니까.”
툭툭.
도사가 어깨를 두드려 주자 점소이가 콧물을 훌쩍거렸다.
벽을 깼을 때 흘린 눈물에 후회가 있었다면, 지금은 힘차게 살아갈 용기를 얻었음이라.
도사는 점소이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낯부끄럽기는 하나, 본도가 그린 몇 안 되는 그림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하나하나 미래를 위한 안배가 준비되어 있지.”
“그, 그런 귀한 것을……!”
“주인께 잘 전해 주거라. 그림을 그대로 두시면 객잔에 복이 따를 것이라고 말이다.”
“아, 알겠습니다, 도사님.”
점소이가 진심을 담아 예를 표하니 도사는 문방사우를 챙겨 객잔 밖으로 나갔다.
“……살펴 가십시오!”
점소이는 사라지는 도사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점소이는 기연을 얻어 마을의 지주가 되고, 자기가 일하던 객잔을 사들였다.
노인이 된 점소이는 도사가 다시 찾아오길 바랐지만, 다시는 보지 못했다.
백련교의 난.
마교의 화마(火魔)가 곤륜파를 휩쓴 까닭이었다.
***
“그분의 의지에 따라 유족들이 저 그림을 철저히 관리하고 있단다.”
“혹시 이야기에 나온 송씨가……?”
백무량이 조심스럽게 묻자, 객잔 주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이런, 꼭 끝에 가서 내 자랑을 하게 되더구나!”
“충분히 자랑할 만하지요.”
자수성가가 어디 쉬운 말이던가?
기연이 있었다지만 무일푼으로 지주가 된다는 건 무척 험난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가 점소이였다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텃세가 있었을 게 분명했다.
따라서 백무량은 객잔 주인에게 물었다.
“굳이 청해에 있을 까닭이 있습니까? 작더라도 호광성의 땅을 사시는 게 나았을 텐데요.”
“끌끌, 그 나이에 머리 까질 소리만 주야장천 하는구나.”
달그락, 달그락.
음식을 내려놓은 객잔 주인이 의자에 앉아 손으로 턱을 괴었다. 이마의 주름이 깊어졌다.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했다.
백무량은 젓가락조차 들지 않고 그의 회상을 기다렸다.
혹시 주백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지도 몰라서였다.
음식이 식어 갈 때쯤에야 객잔 주인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름.”
고목(古木)처럼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노쇠에서 비롯된 무력함과 망각에 의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객잔 주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구나, 분명 평생 기억하기로 맹세한 은인인데도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분명 시서화에…….”
시서화를 가리키던 백무량의 손가락이 순간 멎었다.
주백천이라 쓰여 있던 날인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런, 이럴 수가.”
주백천의 묘비도 이런 식으로 사라졌던 걸까?
백무량은 날인이 있었던 여백을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그런다고 사라진 게 다시 나타나진 않았지만, 울분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그때 객잔 주인이 백무량에게 젓가락을 건넸다.
“훌륭하신 분이었다. 뭐, 네가 알 리는 없지만 말이다.”
“…….”
“자, 자. 식기 전에 어서 들어라.”
그렇게 말하는 객잔 주인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백무량은 그가 안타까워졌다. 현노윤이나 그나 주백천을 까맣게 잊은 까닭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뭐라도 좀 알려 주면 안 되오, 사형?’
단서를 하나 움켜쥐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간다.
되살아난 까닭 또한 마찬가지였다.
분명 사형과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
“…….”
백무량과 객잔 주인은 말없이 식사를 마쳤다.
그릇을 옮기던 백무량이 바깥을 보니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다. 아침에 내려오고 나서 행한 일을 떠올리니 부단히도 움직였단 감상이 들었다.
오늘 행한 일 모두가 살업이었다.
‘도사답진 않구먼.’
백무량은 한숨을 푹 내쉬며 시서화를 유심히 관찰했다.
객잔 주인이 했던 이야기 중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행간.
미래를 위한 안배.
이는 즉 시서화에 숨겨진 뜻이 있으며, 미래에 있을 연자를 위해 준비했다는 의미였다.
‘내가 살아날 걸 알았을까?’
확신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림에 그려진 일화(逸話)는 분명 자신과 주백천의 과거였다.
백무량 혹은 동시대의 도사가 이해할 수 있는 행간.
백무량은 그쪽에 초점을 맞춰 시서화를 들여다보았다.
“……!”
한 가지 생각이 백무량의 뇌리를 스쳤다.
‘알겠다. 알겠어!’
백무량은 청년 도사 왼쪽에 있는 소나무를 노려보았다.
기억에 틀림이 없다면, 어린 시절 주백천과 함께 나들이를 나가던 강가의 나무였다.
과연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두 도사가 큰 단서가 되었다.
‘나한테 전한 거였어!’
백무량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감돌았다.
어디 그뿐이랴.
생각 없이 그린 듯한 산맥에도 세심한 손길이 담겨 있었다.
‘선 사이사이에 있는 점은…… 곤륜파의 도관이었구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백무량은 저 그림이 그려졌을 시기를 떠올렸다.
백련교도에 의해 곤륜산이 불타기 이전.
‘그때의 곤륜을 기억하는 건 현시대에는 나밖에 없어.’
심지어 곤륜의 장문인인 현노윤이라 해도, 칠십여 년 전의 위치를 자세하게 알 리가 없었다.
백무량은 젓가락을 쥐고는 식탁에 칠십여 년 전 곤륜파의 전경을 쓱쓱 그었다.
처음엔 조금씩 머뭇거렸지만, 점차 손길이 빨라졌다.
스슥, 슥슥.
혼자만 알아보게끔 최대한 간결하게, 그러나 핵심은 놓치지 않는다.
백무량은 그림을 완성하고는 주백천의 것과 비교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비슷해! 이 그림의 위치가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겠다!’
주백천이 과거의 객잔 주인에게 말했던 행간!
그건 칠십여 년 전 곤륜을 기억하는 백무량만이 알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위화감을 느낀 백무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근데 점의 위치가 어째, 이어질 것 같지 않나?’
점을 이으니 산맥을 이루는 선과 겹쳐지며 획으로 변했다.
그걸 본 백무량은 몇 번 지웠다 그리기를 반복했다. 횟수가 늘어날수록 위화감이 점차 구체화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각 정도 지났을까.
젓가락을 내려놓은 백무량이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백선(白線).
“……백선신검인가.”
백무량은 단시에 쓰인 금녀검이 무엇인지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