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 (2)
거무튀튀한 내력이 강일산의 주먹에 모여들었다.
흡정마공으로 취한 어린아이의 얼이었고, 정기였다.
그것과 마주한 백무량의 귓가에 서글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생전에 느낀 공포와 고통이 생생히 담긴 것이었다.
까득.
아랫입술을 짓씹은 백무량은 회천각에 내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
백무량의 기도가 달라졌음을 느낀 강일산은 곧바로 쌍장을 교차했다.
아이치곤 제법 성취를 이뤘다고 생각했지, 이런 강맹함은 상정하지 않았다.
파앙!
강일산의 장저와 회천각이 부딪쳤다.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강일산의 손목이 기괴한 방향으로 비틀어졌다.
이를 지켜본 의원 우중이 입을 쩍 벌렸다.
단순히 손목만 부러진 게 아니라, 부러진 뼈가 핏줄과 힘줄을 끊었을 터였다.
백무량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정권으로 강일산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커헉!”
강일산의 입가에서 선홍색 핏물이 흘러내렸다. 심각한 내상으로 인해 기혈이 뒤틀린 듯했다.
그러나 백무량에겐 조금의 자비심도 존재치 않았다.
“아프더냐?”
그를 비웃은 백무량이 천근추를 펼쳤다.
한순간 뒤바뀐 무게에 반응하지 못한 강일산의 몸이 아래로 기울어졌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부러진 손목이 덜렁거리더니 피부가 퍼렇게 질렸다. 피부 아래에 피가 맺힌 것이다.
빠드득!
백무량의 발꿈치가 강일산의 발등을 뭉갰다.
일 초에 이어진 반식만으로 그는 완전히 패배했다.
“……큭!”
강일산이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하나 백무량에게 당한 분노와 모욕감이 그보다 컸다.
서둘러 강일산이 몸을 들썩이기가 무섭게 백무량의 팔꿈치가 관자놀이를 향해 휘둘러졌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강일산의 골통이 흔들렸다.
“네 이놈!”
강일산은 본능적으로 모든 내력을 담아 우장(右掌)을 휘둘렀다.
맞기만 한다면 흡정마공의 음습한 기운이 백무량의 기혈을 손상시킬 터였다.
그러나 백무량은 몸을 뒤로 뺀 지 오래였다.
그는 칠십여 년 전부터 능숙한 사냥꾼이었다.
‘아무리 많은 양의 내공을 가지고 있어도 맞히지 못하면 무의미한 법이지.’
백무량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승기를 확고히 잡은 이 순간에도 백무량의 움직임은 자로 잰 듯이 깔끔했다.
마지막으로 백무량이 백회혈을 내리치자, 강일산이 부르르 떨다가 절명했다.
뒤이어 그의 몸이 쪼그라들기 시작하더니 흡정마공으로 쌓은 음기가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생채기 하나 없이, 그야말로 백무량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
백무량은 그것을 지켜보며 삼청께 읍하였다.
정기가 뒤늦게라도 주인의 묘를 찾아 되돌아가기를…… 아이의 울음소리가 그치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옥추경을 독경한 뒤, 백무량은 뒤를 돌아보았다.
“뚫린 입이라면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우중을 바라보는 백무량의 눈이 전보다 더욱더 차가웠다.
겁을 한껏 집어먹은 우중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배, 백선신검!”
“뭐?”
“운산보가 백선신검의 소문을 탐색하고 있었네!”
백무량의 표정이 보다 진지해졌다.
“자세하게 말해.”
***
“우 의원이 여기까지 웬일이시오? 그것도…… 동문의 제자와 함께.”
현노윤의 말에 우중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곤륜산맥이 워낙 넓어야지요. 약초를 캐려다 길을 잃었지 뭡니까?”
“그렇소?”
현노윤이 정녕 저 말이 맞냐는 듯 백무량을 쳐다보았다.
우중의 말이 진짜인지 확인함과 동시에, 외인(外人)에게 구천검임을 밝히는지 물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러자 백무량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뉘인지는 모르지만 곤륜산을 헤매게 둘 순 없어서 데리고 왔습니다.”
“우중이 직접 몸을 움직일 사람이던가?”
“그럴 사정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현노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중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백무량에게 무언가 뜻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때가 되면 말해 주리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현노윤이 우중에게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접할 채비를 못 했소. 우 의원이 이해해 주시오. 미음이라도 괜찮겠소?”
“예? 아, 괜찮습니다.”
“금방 끓여 오리다.”
평소 현노윤이라면 무례하다 꾸짖어도 모자라거늘.
우중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현노윤에게 손을 뻗었다.
“아, 현 노야!”
“쉿, 쉿.”
백무량은 재빨리 우중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불청객으로 모자라서 미꾸라지처럼 굴 생각인가?”
“하지만…… 현 노야에게 비밀로 할 순…….”
“비밀로 해야지.”
백무량은 우중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정리했다.
청해 전역에 퍼지고 있는 백선신검의 소문.
그 당시 상처를 입은 채로 발견된 외지의 무인.
무인을 통해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고 있는 운산보.
어느 하나 만만치 않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학도사가 감당할 수 있는 화제가 아니었다.
‘운산보가 구파일방 중 하나와 결탁하고 있다면 더욱이.’
어쩌면 이번 기회를 통해 곤륜파를 무림에서 지우려고 할지도 모른다.
백선신검의 소문을 듣고 찾아간 악한에게 멸문당했다고 지어내면 그만일 테니까.
이런 상황에서 외지의 무인을 치료한 우중이 곤륜산에 기어들어 왔다는 것이다.
‘이놈이 제일 문제야.’
백무량의 인상이 자연스레 찡그려졌다.
강일산의 시체를 깊숙이 묻어 두긴 했지만, 그가 생전에 행선지를 말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곤륜파에 백선신검의 소식을 알려야 한다는 도의, 아니, 변명 때문에 일이 꼬였다.
백무량이 우중의 옆구리를 툭 찔렀다.
“악!”
“진짜 안 물어봤나?”
“뭐, 뭐를?”
“삼십 일이나 같이 지냈으면서 이름 하나 모른다?”
백무량은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우중에게 책망 어린 눈빛을 보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마당에서 무공을 수련하고 있는 현종휘가 시야에 들어왔다.
“하압, 합!”
현종휘가 소청권(小淸拳)의 쌍청장(雙淸掌)과 우청격(右淸擊)을 펼치며 걸음을 조심스레 옮기고 있었다.
어제 정강이를 수없이 얻어맞으면서 배운 호흡이었다.
그 호흡을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에서 지극한 노력이 느껴졌다.
‘녀석.’
백무량은 그 모습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많이 아팠을 텐데, 한 번쯤 반항하는 게 당연한 나이인데.’
곤륜파의 부흥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할아버지인 현노윤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인가?
현종휘는 모두 그렇다고 할 아이였다.
백무량이 보름 동안 아무리 밀어내도 끝까지 달라붙던 아이였다. 정강이를 아무리 맞아도 자기를 위한 것이라 여기며 이겨 냈다.
자신에게 없는 근기가 현종휘에게는 있었다.
곤륜의 대제자에 어울리는 성품과 인내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러.’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나는 싸움을 겪기엔 현종휘는 아직 어렸다.
백무량은 현종휘에게 시선을 거두고는 우중을 바라보았다.
“무슨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나?”
“굳이 곤륜파가 아니어도 곤륜산맥은 넓으니까. 숨어서 지내다 보면 운산보도 포기하지 않겠느냐?”
우중의 기탄없는 대답에 백무량은 한탄했다.
“무인은?”
“……?”
“자네가 두고 온 무인은 죽어도 상관이 없다?”
“거기서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우중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시체만 늘어날 뿐이지. 아니, 애초에 길바닥에서 죽을 사람을 살린 게 나다. 대체 어린놈이 뭘 안다고 지껄이느냐?”
“그랬군. 당신은 도움을 청하러 온 게 아니라, 도망치러 온 거였어.”
백무량은 엷게 웃었다. 말과 웃음에 담긴 조롱이 우중을 꾸짖는 듯했다.
우중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도망이 죄더냐?”
“죄는 아니지. 다만 그 뒤에 뭐가 있느냐가 중요한 거야.”
백무량은 백련교의 난이 일어나기 전, 강호행 중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잦은 싸움만큼이나 도주도 많았다. 성질을 이기지 못해 벌집을 건드렸다가 빈사에 이르기도 했다.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온전히 하늘의 도움 덕택이었다.
그 과거가 누군가에겐 미련한 짓으로 비춰지겠지만, 백무량에게는 아니었다.
강호를 거니는 백무량의 보보(步步)에 언제나 도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언젠가 되갚아 주겠다는 집념 또한, 확실히 지켰다.
그런 백무량의 눈에 우중은 겁쟁이로 보였다.
“적산이라는 놈이 말했던 것처럼 무인이 백선신검의 소문을 퍼트린 장본인으로 보이던가?”
“…….”
우중은 잠시 턱을 긁적이다가 대답했다.
“장본인이라면 적어도 방을 자주 비웠겠지.”
“그걸 그 자리에서 말했어야지.”
백무량의 말에 우중이 고개를 푹 숙였다.
도망치느라 생각할 겨를도 없었노라고, 우중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쯤이라면 무인은 운산보에서 고문당하고 있지 않을까.
분노가 비워진 자리에 죄책감이 들어앉았다.
백무량이 말했듯 적산에게 당당히 대답했다면 무인의 팔이 잘릴 일도 없었을 터였다.
“……젠장.”
그걸 아이에게 꾸짖어지고 나서야 깨닫다니.
우중이 가만히 주먹을 쥐고 있으니, 백무량이 그에게 물었다.
“여기서 머나?”
“무엇…… 아니, 객잔 말이냐?”
“그래.”
“어딜 가려고!”
“가까운 모양이군.”
우중은 백무량의 어깨를 붙잡으며 강하게 제지했다.
“너보다 한참은 큰 무인이 당해 내지 못한 상대다. 네가 가서 어쩔 생각이냐? 알량한 무공으로 될 성싶더냐?”
“그렇게 걱정되면 색마 놈이랑 싸울 때 말렸어야지.”
백무량은 우중의 팔을 떼어 놓고는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현노윤을 향해 외쳤다.
“어디 좀 다녀오겠습니다!”
“날이 곧 어두워질 텐데 괜찮겠느냐?”
“곤륜산이야 눈을 감고도 훤합니다.”
“이유는 묻지 않겠다.”
현노윤이 잠시 하려던 말을 멈추고는 백무량을 바라보았다.
저녁이 가까워진 시간에 어딜 가려는 건지.
장문령으로 물을 수야 있었지만, 현노윤은 그러지 않았다. 백무량이 곤륜파의 도사로서, 사조로서 행동하리라 믿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까지는 돌아와야 한다. 알겠느냐?”
“예.”
우중은 현노윤과 백무량의 대화를 들으며 허탈해졌다.
‘현 노야는 말리지도 않는단 말인가?’
백무량이 나이답지 않은 무공을 지니고 있다지만, 그래도 소년이 아니던가!
우중으로선 현노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허!”
우중이 황당해하는 사이에 백무량은 칼을 패용하는 둥 내려갈 채비를 마쳤다.
그 모습이 흡사 병정 인형과 같아, 우중은 적산의 대도에 백무량이 박살 나는 광경을 떠올렸다.
잠시 눈을 질끈 감은 우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따라가마.”
“……?”
“객잔까지 가는데 지름길이 어딘지 모를 것 아니냐! 걸음은 느리지…….”
“됐소.”
방금까지만 해도 우중에게 거리낌 없이 하대하던 백무량의 말투가 조금이지만 바뀌었다.
그 변화를 우중이 느끼기도 전에, 백무량은 우중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뭐, 뭣?”
“시간이 꽤 지났으니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잖나.”
백무량이 땅을 강하게 박찼다.
“볼품없게 보여도 빨리 가야지.”
***
쾅!
객잔의 문이 무너지며 요란한 굉음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소리가 시시각각 울렸다.
스르릉!
칼, 도 혹은 창.
갖가지 무기가 서늘한 빛을 드러냈다.
그 무기를 든 무인들 또한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
“누구냐!”
한 무인의 외침에 불청객이 대답했다.
“곤륜의 도사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