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310화>
310. 오고 있습니다
천마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시야에 검은 물결이 가득 담겼다. 오늘, 중원에 들어온 모든 마도가 총집결했다.
비록 혈귀곡이 무너지고, 종주들이 무수히 죽어 나갔더라도 지금 무인 마인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어마어마했다.
천마는 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네 명의 호법마왕들이 바닥에 몸이 붙을 정도로 부복해 있었다.
“한 명이 없군.”
무미건조한 목소리.
무심한 듯하나 마치 목소리가 뱀처럼 등골을 기어가는 느낌에 호법마왕들은 파르르 몸을 떨었다.
단명왕이 이를 악물고 겨우 입을 열었다.
“혈사왕이 싸움 중에 죽었습니다.”
“누구한테?”
“철장군주 모용수입니다.”
“고작 오대세가의 가주 따위인가.”
“…….”
백도무림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를 고작이라고 표현하다니.
하나 이해가 충분히 됐다.
천마에게는 오대세가의 가주래 봤자 ‘고작’ 이란 수식어가 붙을 수준에 불과할 테니까.
단명왕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찌 더 강해지셨단 말인가.’
입신지경을 넘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경지.
과거 창천검신이 그랬고, 지금의 천마가 도달한 위치였다.
바로 인외지경(人外之竟).
그러나 단명왕의 느낌은, 무언가 그 위치에서도 한 발짝 더 나아간 느낌이었다.
이 정도라면, 과거 무시무시했다던 창천검신과도 겨루어 볼 수 있지 않을까.
마도에서 창천검신에게 가진 감정이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지독한 공포라는 걸 떠올리면, 그만큼 천마의 기세가 강렬하다는 뜻이다.
천마가 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괴이천뇌를 잡아 왔다던 검종 종주는 어디 있지?”
“오늘 새벽 전장에 나갔습니다. 소규모로 벌어지는 국지전에서 무슨 계략을 꾸미겠다고요.”
“내가 오는데 자리를 비웠다?”
“…….”
“괴이천뇌는?”
“……검종 종주가 데리고 갔습니다. 백도 진영을 다 꿰고 있으니, 옆에 두고 전투를 치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내버려 뒀다고?”
마지막 발언은 천마가 하지 않았다. 천마 곁에서 유일하게 부복하지 않고 서 있는 장년인.
염왕의 호통에 단명왕이 비교적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도 서열로 따지면 나보다 위고, 검종의 종주요.”
“허허. 그래서 그냥 내버려 뒀단 이 말이냐?”
“실력도 강하오. 패천검마의 무공을 그대로 쓰고 있고.”
그러자 그 말에 흥미를 드러낸 건 천마였다.
“패천검마의 무공을 쓴다?”
“예. 지금껏 본 검종의 소수 마인들이 쓰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패천검마의 묘의 중 극히 일부만 쓰지만, 그 작자는 분명 오의(奧義)를 깨달은 듯했습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천마가 흥미를 드러냈지만, 그건 잠깐이었다.
이내 그는 나른한 얼굴로 손을 휘휘 저었다.
“됐다. 백도 진영에 놈은 왔느냐?”
“놈이라면……. 아 천룡검협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습니다.”
“그러면 검존은?”
“그 역시도 행방이 묘연합니다.”
“도망을 쳤을 리는 없고.”
그러자 염왕이 옆에서 말했다.
“모습을 숨긴 채 몸을 웅크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천마께서 모습을 드러내면, 부지불식간에 기습을 시도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기습이라……. 유백기가 나를 안 본 지 너무 오래돼서,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 모르는구나. 고작 기습이라.”
천마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한번 찔러 보지. 튀어나오나 안 나오나.”
“만일 나오지 않는다면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놈의 심장에 검을 박고 싶지만, 굳이 그걸 위해 저들을 살려 줄 이유는 없다. 백도의 상징들이 다 저 자리에 왔으니, 하나, 하나 죽이면 그것 역시 좋다.”
천마가 그리 말하며 손을 휙 아래로 떨어졌다.
아무런 계획도 짜이지 않았지만, 천마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아니, 지금쯤 와선 계획 따위는 아무 쓸모도 없었다.
천마.
그 존재 하나만으로 모든 계획이 쓸모없어진 셈이었다. 천마 자체가 곧 계획이었다.
* * *
“어찌, 완성할 수 있겠습니까?”
“쉽지 않아. 나로서도, 둘이서 해도 시간은 더 필요해. 시간이 있다고 해도 확답은 못 하겠네. 끙. 이걸 설아 혼자한테 시켰던 거냐?”
제갈선은 천무백을 노려봤다. 무려 괴이천뇌의 살기 어린 시선이다. 하나 천무백은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야 내가 아는 진법가 중에 최고니까 그랬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제갈설아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갈선이 혀를 쯧쯧 찼다.
“쉬운 진이 아니다. 고서에만 적혀 있을 뿐, 실제로 발휘된 적도 없는, 그야 전설속의 기문진법 아니냐.”
제갈선의 목소리는 연신 불퉁했다. 본래 제갈선은 제갈여강과 달리 천무백을 꽤 호의적으로 여겼다. 철신고검을 넘겨줬을 뿐 아니라, 사실상 백도 소수의 수뇌부에게 창천검신의 후인임을 공인까지 해 주지 않았던가.
하나 지금은 호의적일 수가 없었다.
자신을 포로로 잡아 온 행위부터, 제갈설아 혼자 이 어려운 기문진법을 맡겨 뒀단 생각에 절로 화가 났다.
“아니, 전설은 아닙니다. 실제로 발휘된 적도 있습니다.”
“실제로 쓰였다고?”
제갈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천무백의 목소리에 확신이 어렸기 때문이다.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조금의 의심도 깃들지 않는 목소리였다.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뭐겠습니까. 반드시 작동합니다. 태상가주께서 성공하시면, 역사에 남을 겁니다. 처음으로 제대로 진법을 완성하고 사용했다고.”
“끄응…….”
“일이 좀 급해졌습니다. 천마가 들어왔고, 아마 곧 전투가 시작될 겁니다.”
“안다.”
제갈선도 표정을 굳혔다. 그 역시 창대에 꽂힌 소림을 똑바로 보았다.
그 자리에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하나 지금 자신이 만드는 기문진법으로 과연 판을 뒤집을 수 있을까?
“자네는 가 봐야 하지 않겠나? 전장으로.”
“…….”
“천마가 왔다. 데리고 온 병력도 어마어마하고 정예하기 그지없다. 남궁조와 곽용이가, 그리고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가주들이 천마를 막을 수 있겠느냐?”
“제가 가면 막을 수 있을 거로 보십니까?”
“그렇다.”
“그들이 전부 저보다 강호 선배인데요.”
“그러나 자네는 창천검신의 후인이지.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들을 월등히 뛰어넘는다.”
천무백이 묘한 표정으로 제갈선을 바라봤다.
제갈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마대전, 정마대전 노래를 하지만. 사실 그게 어디 정마대전이었겠느냐. 천마와 창천검신의 싸움이었지.”
“…….”
“그러니 가거라. 네가 없으면 백도는 이 진법이 완성되기도 전에 무너진다.”
맞는 말이다. 하나 천무백은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가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차라리 제가 남아 태상가주와 소저를 도와주면서 기문진법을 한시라도 빨리 완성하는 게 제 일입니다.”
“…….”
제갈선이 묘한 눈빛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괜히 없는 말로 호언장담하는 사람이 아님을 잘 안다.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설마, 그가 오는가?”
“예. 능허가 오고 있습니다.”
“지금 나랑 장난치나?”
제갈선이 정색했다. 제법 한가락 하는 놈이니 천무백 곁에 붙어 있겠지만, 무슨 비장의 수인 것처럼 저렇게 말해?
천무백이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능허는 이미 갔고, 이제 유백…… 아니 사숙조가 오고 있습니다.”
“백기, 고 녀석이 드디어!”
“그리고 재앙도 함께 오고 있지요.”
“재앙?”
“중원오재 말입니다.”
천무백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 * *
시퍼렇게 질려 버린 얼굴은 누가 봐도 심각해 보였다.
“이…… 빌어먹을 사천의 잡것이! 독을 써?!”
야차왕이 거칠게 울부짖었다.
하나 당천무는 냉소했다.
“독공은 뭐 무공 아니더냐?”
“으아아악!”
야차왕이 괴성을 내지르며 대검을 쭉 휘둘러왔다. 그러나 기세 좋게 내지르던 대검은 중간쯤에 힘을 잃고 뚝 떨어졌다.
콰직!
거친 파열음과 함께 야차왕의 머리통이 처참하게 깨졌다.
“어후, 고놈, 두개골이 무슨 돌덩어리보다 두껍구나.”
“쯧. 그치 내가 잡은 거요.”
“무슨, 마지막 일격은 내가 했지.”
모용수가 철장을 닦으며 말했다.
그들은 자존심을 접었다. 홀로 싸우다 팽철처럼 죽을지도 모르는 일.
협력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당연히 협력했다.
야차왕을 상대로 협공을 가했다. 당천무가 독을 썼고, 모용소가 집요하게 맞서 싸웠다. 제아무리 호법마왕이라도 오대세가 가주 둘의 협공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유치한 싸움은 그만하세. 그럴 때가 아니니까.”
당천무가 손을 휘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야말로 결전이나 다름없는 거대한 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다.
마도는 일대 공세를 펼쳐왔다.
만일 오대세가의 병력만 있다면 진즉 무너졌으리라.
그러나 다행히도 지금은 아니다.
화산파, 종남파, 무당파, 개방, 청성파, 보타문까지.
그야말로 최정예들이 총집결했다.
지금 여기, 마도 전부와 백도 전부가 부딪치는 일대 결전이었다.
당천무의 시선이 그런 싸움에서도, 주위의 모든 기류를 빨아들이고 있는 지점을 바라봤다.
“천마…….”
저기 천마가 있다.
그리고 그에 맞서 싸우는 백도 측의 인사는 화려했다.
남궁조, 검후, 화산파와 종남파의 장문인, 정의맹주 곽용까지.
그들의 싸움은 점점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 * *
전장의 소음공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비명, 신음, 고함,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울음소리······.
하나 지금 적어도 주위 반경 십장까지는, 거친 숨소리만이 나직이 퍼졌다.
남궁조는 혼란스러웠다.
‘대체 이런 싸움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남궁조는 진심으로 슬펐다. 지금 자신의 편에서 같이 싸우는 면면은 화려했다.
검후, 화산과 종남의 장문인, 그리고 투신 곽용.
반면 상대편엔 딱 두 명이었다.
호법마왕 염왕(閻王), 그리고 천마.
“제법 재미있는 반항이다.”
천마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남궁조는 모욕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본인과 검후, 그리고 곽용 셋이 협공했다. 하나 천마는 자잘한 상처를 입었을지언정, 멀쩡했다. 오히려 곽용이 허벅지에 깊은 자상을 입어 거동이 불편해졌고, 검후 역시 기력이 소진됐으며, 남궁조 본인조차 거친 숨을 고르기조차 어려웠다.
더욱이 염왕(閻王)이란 자도 어마어마했다.
화산과 종남의 장문인, 무려 구파일방의 두 장문인의 협공을 수월하게 막아 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꽈아앙!
염왕이 발출한 강기에 두 장문인이 종잇장처럼 날아갔다.
순간적인 틈을 비집은 강력한 한 방. 남궁조는 화들짝 놀라 도와주려 했으나, 천마를 눈앞에 두고 몸을 빼낼 수가 없었다.
“크흑!”
“장문인!”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염왕의 공격이 면면부절 이어졌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하는 화산 장문인의 가슴팍에 일장이 쏟아졌다.
피하려 했으나 염왕의 장법은 놓치지 않았다.
콰직!
“……!”
하나 이어지는 광경에 염왕은 탄식을 터뜨렸다.
“하. 화산과 종남 장문인이 협공하는 것도 놀라울 일인데, 종남파 장문인이 화산을 구하기 위해 제 몸까지 던져?”
염왕의 장법을 그대로 뒤집어쓴 종남 장문인이 검은 피를 게워 냈다. 최대한 호신강기를 펼쳤지만 거의 소용이 없었다. 내부가 진탕되고 내장이 찢어졌다.
하나 그의 눈에는 묘한 열기가 떠올랐다.
“내가 그냥 희생한 것만으로 보이더냐?”
“뭐?”
그제야 염왕은 자신의 두 다리를 꾹 붙잡고 있는 기운을 감지했다.
“허?”
종남 장문인은 몸을 던져가면서 자신의 두 발을 꾹 밟고 있었다.
염왕이 코웃음 치면서 발을 빼려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염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미쳤군.”
“칼 찬 채 강호에 뛰어든 이들 중에 미친놈 아닌 놈이 세상에 있더냐.”
종남 장문인이 피로 물든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지금 그는 자신의 안위는 신경 쓰지 않고, 전신의 내력을 모두 쏟아부어 염왕의 발을 묶어 둔 것이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화산 장문인이 벌떡 일어나 검을 뿌렸다.
하나 애석하게도 염왕의 발은 묶였을지언정 손은 자유로웠다.
검붉은 마기를 둘러싼 양손이 화산 장문인의 검을 잡았다.
“검강을……!”
그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아무리 손에 기운을 덧씌웠다고 해도, 검강을 실은 검을 그대로 붙잡아?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지금 이 순간, 밀리는 즉시 죽는다. 검과 손을 통해 서로 장력 교환이 이뤄졌다. 하나 시간이 갈수록 화산 장문인의 얼굴에 암울함이 떠올랐다.
‘맙소사. 나보다 내력이 더 깊다!’
이대로라면 종남 장문인은 물론이고, 본인 역시 무사하지 못할 터.
그의 얼굴에 고통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푸욱!
“끄어억!”
누군가 벼락처럼 달려와 염왕의 몸을 스쳐 갔다. 동시에 염왕이 발작이라도 하듯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어깨에 손톱만 한 구멍이 뚫렸다.
“이, 이익!”
염왕의 눈이 충혈된 채 몸이 빳빳해졌다.
푹푹푹푹푹!
찌르기의 연속. 염왕의 등판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 온갖 구멍이 뻥뻥 뚫렸다.
어디선가 나타난 인영이 재밌다는 듯이 이죽였다.
“이야. 역시 몸집이 크니까 찌를 데가 많아서 좋네.”
“이, 비겁한…… 싸우는 도중에 뒤를 노려?”
“응. 이게 주군이 말하길 삼십육계 중에 얍삽하게 뒤통수 노리기랬어.”
“…….”
그딴 게 어디 있나 하는 생각이 불쑥 머릿속에 들었지만, 염왕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푸우욱!
사내의 검이 그의 목 정중앙을 완벽하게 관통했다. 아무리 속수무책인 상황이더라도, 호신강기를 일으켜 급소는 보호하는 게 무인의 기본이다.
하나 사내는 그 정도 호신강기쯤이야 우습게 뚫었다.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찌르기.
“끄르륵…… 넌, 누, 누구냐.”
피를 게워 내며 염왕의 몸이 허물어졌다. 죽을 때 죽더라도, 자신을 죽인 자의 이름을 반드시 듣겠노라는 강렬한 의지가 그의 생명줄을 조금이나마 붙잡았다.
사내가 비열하게 웃었다.
“나 독안사 능허야. 이 개새끼야.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