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309화>
309. 옛날 생각나게 만드네
“척결마도(剔抉魔道)! 정의수호(正義守護)!”
천지를 진동시키는 외침과 함께 일단의 무사들이 진채를 떠났다.
사기백배한 질서정연한 무사들은 하나같이 진을 이루며 움직였다.
무당의 최정예 병력들이 일제히 출진했다.
장관이었다. 무당파의 깃발이 펄럭이며 항마를 일제히 외치며 달려 나가는 모습은.
무당파는 집결이 끝나자마자 장문인인 진청진인의 지휘에 맞춰 곧장 섬서로 향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소림방장, 혜량대사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소림의 정예들은 이미 섬서로 향했고, 이젠 무당파의 출진도 마쳤습니다. 총군사께서도 이제 전장으로 출발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제갈여강이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보타문과 청성파는 도착하지도 않았습니다. 적어도 어떻게 움직일지, 어떤 경로로 출진할지는 정해 놔야 하니, 어찌 제가 먼저 떠나겠습니까. 대사께서 먼저 출발하시지요. 소림은 이미 떠났는데, 방장께서 아직 남아 있다면 사기에 좋지 않을 겁니다.”
혜량대사가 가볍게 웃었다.
“나무아미타불, 항마의 뜻에 두고 싸우는 소림승들의 사기가 고작 제가 없다고 떨어지진 않을 겁니다.”
제갈여강은 쓰게 웃었다. 섬서와 가까운 소림은 이미 진즉 정예 병력을 섬서로 파견했다.
하나 혜량대사는 같이 움직이지 않고 굳이 구파일방이 집결하는 중경과 호북성의 접경지에 와 있었다.
이건 싸움을 피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다 제갈여강과 정의맹을 위한 배려였다. 제갈여강은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천하의 지붕, 북숭소림이다. 역시.’
혜량대사는 소림사의 방장이다. 그가 가진 명성과 강호에서의 소림의 위상은 어마어마했다.
당장 곽용과 제갈여강이 힘을 모아 구파일방을 결집하고 섬서로 출발하려 했지만, 이게 말처럼 쉬울 리가 없다.
곽용 개인의 명성은 높지만, 배경은 별 볼 일 없다. 중경의 중견문파의 문주가 아니던가. 제갈여강 역시 제갈세가의 가주라지만, 구파일방을 뜻대로 움직일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니 구파일방이 모인다고 해도 여러 잡음이 필연적으로 흘러나올 수밖에 없다.
아무리 위급한 싸움이라도, 제각기 문파의 이득을 추구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치.
제갈여강은 최대한 문파 사이의 알력을 중재하겠지만, 한계는 뚜렷하다.
하나 혜량대사가 단순히 제갈여강 옆에 있는 것만으로 이 모든 사태가 해결됐다.
천하의 지붕, 북숭소림.
예부터 소림은 세력이 아무리 약해졌다고 해도 강호 무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현 강호를 지배하는 수뇌부들 전부 소림이 사십 년 전에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는지 기억했다.
마도와는 달리 오로지 칼만이 아닌 명분 역시 중요시 하는 백도인 만큼, 소림의 위상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혜량대사가 제갈여강 옆에 있는 사실만으로도, 소림이 정의맹의 행사를 지지한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소림의 지지에 제갈여강은 비교적 수월하게 구파일방을 결집시키고, 병력을 조율하여 섬서로 출진시킬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대사.”
“고맙긴요, 강호동도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총군사. 비록 내가 군사보다 식견이 부족하고 지혜 역시 일천하나, 보타문과 청성파의 집결과 구성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긴 제게 맡기고 군사께선 속히 섬서로 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전 괜찮습니다. 대사.”
제갈여강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혜량대사가 저런 권유를 한 이유를 알아서다.
“아버지께선 그리 호락호락 당하실 인물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 역시 무슨 기발한 수 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괴이천뇌 선배께서 포로로 잡혔다는 말이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긴 합니다.”
“아버지께서도 할 일을 하다가 포로로 잡힌 것입니다. 저 역시 제가 맡은 일을 해야죠.”
혜량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곽용은 정의맹의 병력을 이끌고 섬서로 출발한 지 꽤 지났다.
방금 무당파가 출진해서 지금 이곳에 있는 수뇌부라곤 제갈여강, 혜량대사.
그리고 각각 호위를 맡은 정의맹의 추혼삭과 소림의 나한각주였다.
현재 모인 병력도 구파일방이 아니라 비교적 중견문파들의 무사들이 있었고, 이들은 가장 마지막에 제갈여강의 지휘 아래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때였다.
“군사, 군사!”
추혼삭이 다급한 목소리로 뛰어왔다.
제갈여강이 고개를 갸웃했다.
추혼삭은 일전에 무당파 내부에 있던 적건회의 부회주였다.
천무백이 적건회와 무당파의 갈등을 해결할 때, 부회주였던 추혼삭은 당시 항마의 기치에 이끌려 천무백의 권유대로 정의맹에 입맹. 수뇌부의 호법 장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적어도 제갈여강이 본 추혼삭은 진중한 인물이라 저런 다급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무언가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힌 제갈여강이 표정을 굳혔다.
“무슨 일입니까?”
“일단의 마인들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
“나무아미타불…….”
갑작스런 마인 출현에 제갈여강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하긴, 여기서 보름 넘게 백도 무인들을 결집하고 내보내기를 반복했으니, 알아차릴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 진채에 남은 무사가 약 오백여 명인데…….”
“적들의 숫자는 대략 이천이 넘습니다.”
“……!”
병력 숫자까지 들었을 땐, 제아무리 제갈여강이라도 냉정을 유지하긴 어려웠다.
“대체…….”
“저들이 오는 길을 보니, 저들 역시 섬서로 향하는 방향대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오는 도중에 저희 움직임을 보고 이쪽으로 오는 듯합니다.”
짧은 사이 추혼삭은 자신이 분석한 바를 풀어냈다.
백도가 섬서에 속속 집결 중이듯이, 마도 역시 마찬가지다.
중원 땅은 워낙 넓고, 전쟁에 참여하는 숫자도 엄청나서 이미 전쟁이 시작됐음에도 아직까지도 집결이 끝나지 않았다.
제갈여강은 급히 지금 진채에 남은 병력을 살폈다.
하필이면 무당파가 빠져나가 정예병은 부족하다.
지금 있는 무사들은 중견문파의 정예들이나, 구파일방과 비교하면 비교적 이선급 자원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혜량대사와 그를 호위하는 나한각주, 나한승 삼십여 명 정도.
이들은 일당백이다.
고민이 깊어지는 가운데, 추혼삭이 그런 고민을 단념케 하는 말을 마저 이어 붙였다.
“저, 그리고 이건 확실치 않지만……. 적들 사이에 천마를 상징하는 깃발이 나부끼는 걸 봤습니다.”
“……!”
천마.
그 단어에 제갈여강과 혜량대사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정말 천마가 직접 이끌고 오는 병력이라면…….
“그야말로 최정예일터. 숫자나, 무인들의 질로나 부족합니다.”
“지금 급히 빠져나가 섬서로 합류해야 하겠습니다. 우선 급히 사람을 보내 청성파와 보타문은 이곳에 모이지 말고 당장 섬서로 향하라 하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제갈여강이 급하게 움직였다. 하나 그때였다. 조용히 염불만 외우던 혜량대사가 제갈여강을 불렀다.
“총군사.”
“예. 대사, 어서 움직일 준비 하시지요. 놈들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빠져나가야 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예?”
제갈여강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의 시야에 혜량대사의 담담한 얼굴이 담겼다.
“적들은 우리를 발견하고, 정확한 경로로 오고 있습니다.”
“…….”
“제가 총군사의 곁에 있단 사실은 오히려 일부러 우리가 홍보했습니다. 정의맹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요.”
“맞습니다.”
“적들도 아마 소승이나, 총군사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 확률이 높습니다.”
“……!”
“정의맹의 총군사와 소림 방장. 쉽게 놓아 줄 이름은 아니지요.”
“그 말은…….”
“저들도 굳이 섬서로 향하는 도중에 피해를 입으며 전투를 치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는 이유는, 이 기회에 핵심 인사를 제거해 버릴 심산입니다.”
제갈여강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본인도 본능적으로 깨달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겉으로 드러내면, 동요가 심해지리라 여겨 애써 무시한 사실이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면 무사히 섬서로 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자기합리화에 불과했다.
“정말 저쪽에 천마가 있다면, 그러면 그만한 최정예가 호종하고 있을 테고, 우리가 쉽사리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대사. 압니다. 하지만.”
“그러니 제가 남겠습니다. 시간을 벌 테니 최대한 빨리 섬서로 향하십시오.”
“……!”
“소림은 백도 무림의 지붕입니다. 지붕은 움직이지도 않고, 그 자리 굳건히 서서 비나 눈, 우박, 천둥 모든 걸 감당해 냅니다. 그렇게 무림을 지킵니다. 괴이천뇌 선배께서 자리에 없는 이상, 총군사의 두뇌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이 곧 백도 무림을 지키는 일입니다. 소승이 남을 테니, 어서 가시지요.”
“불가합니다, 대사! 어찌 그런!”
“총군사!‘
혜량대사가 거칠게 소리쳤다.
지금까지 늘 온화한 목소리로 일관하던 혜량대사의 호통에 제갈여강의 몸이 흠칫 굳었다.
혜량대사는 무서울 정도로 굳은 얼굴로 안광을 번뜩였다. 지금껏 늘 부처같은 자애로운 웃음만 띠던 얼굴이 마치 야차처럼 강렬해졌다.
그랬다. 이것이 소림의 본 모습.
한없이 자애로우나, 분노할 땐 부처를 지키는 팔부신장처럼 강렬하고 폭발적이다. 지금 혜량대사는 거친 투기를 내뿜었다.
“가시오, 군사.”
“……!”
“나와 나한각주가 버틸 것이오. 아니, 어쩌면 이 기회에 나한진으로 천마의 목을 베고 싸움을 끝낼 수도 있겠지. 그러니 믿고 가시오, 소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희생과 강대한 적을 단 한 번도 두려워한 적이 없소. 그것이 소림이오.”
제갈여강은 그제야 이해했다.
어째서 소림사가 적으로 돌리면 재앙처럼 다가와 중원오재 중 하나인지.
왜 백도무림의 정신적 지주로 받아들여지는지.
제갈여강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섬서에서 꼭 봅시다.”
“당연한 일이지요. 천마의 목을 들고 가겠습니다.”
혜량대사가 웃었다. 예의 온화한 웃음이었다.
* * *
“…….”
천무백은 창대에 꽂힌 민머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쯧. 예나 지금이나, 하여간 불법 드리는 양반들은 고지식해.”
“…….”
천무백은 대수롭지 않게 혀를 찼지만, 옆에서 천무백의 얼굴을 바라보던 제갈설아는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심한 듯, 짜증난 듯한 얼굴 속에는 용암같은 뜨거운 분노가 흐르고 있었다.
적어도 제갈설아의 눈에는 확실히 보였다.
천무백은 지금, 단 한 번도 본적 없을 정도로 강렬한 분노를 보이고 있었다.
“옛날 생각나게 만드네. 정말로.”
천무백이 중얼거렸다.
사십 년 전에도 저치들은 저랬다. 죽을 줄 알면서 굳이 싸웠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다른 문파들처럼 적절히 생색내면, 창천검신인 나나, 아니면 제자인 백기가 어떻게든 도와줄 텐데.
“하긴, 그러니까 소림이지. 괜히 소림이겠나.”
천무백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다시 창대를 바라봤다.
소림방장 혜량대사.
나한각주 및 휘하의 나한승 서른 명.
전부 목만 남긴 채 창대에 꽂혀 있었다.
이건 경고였다. 반대편 백도 진영에서도 훤히 보일 수 있게 가장 높은 언덕에 꽂혔다.
천무백은 이를 으득 씹었다.
“거, 요란하게도 등장하는구나. 천마 새끼.”
천무백의 시선이 돌아갔다.
호법마왕들 사이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이.
천마.
저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