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300화>
300. 광증이 옮았나
전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섬서성에 마인들이 일대 집결한 것이다.
자연히 섬서를 근거지로 둔 화산과 종남은 화들짝 놀라 정의맹에 지원을 요청했다.
“섬서성에서 결전을 펼칠 요량인가?”
곽용은 위급한 소식에 곧장 제갈여강을 불러 상의했다.
제갈여강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섬서성에서 건곤일척의 승부를 봐서 저들이 이긴다면, 단숨에 백도무림의 기둥들인 화산과 종남의 근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중원 전도(全圖)를 펼친 채 제갈여강은 설명을 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섬서성의 종남산과 화산을 짚었고, 이내 오른쪽으로 움직여 하남을 짚었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곽용이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으음…….”
“그다음엔 곧장 하남으로 가서 소림을 무너뜨릴 겁니다. 만일 결전에서 패배한다면, 제아무리 소림이라도 패배를 추스르기 전에 파도처럼 들이닥치는 마인의 물결을 막기는 쉽지 않으리라 판단됩니다.”
“소림이 무너진다면…….”
“사십 년 전 정마대전 때도 버티고 버틴 지붕입니다. 한데 그 지붕이 무너진다면…….”
“백도의 정신이 무너지겠군.”
“더구나 바로 밑에는 호북이 있고, 호북엔 무당파가 있습니다.”
“북숭소림, 남존무당…….”
백도무림의 거목이자 지탱하는 정신적 기둥.
“순식간입니다. 결전에서 패배하면 혼란에 빠질 터, 단숨에 구파일방의 절반이 날아갑니다. 아마 여기서 병력을 더 쪼갠다면, 안휘의 남궁세가, 호북의 제갈세가까지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겠죠.”
자세한 설명에 곽용은 침음을 삼켰다. 어째서 마도가 섬서성에 집결했는지 이해가 갔다. 단 한 번의 결전에서 승리한다면, 그에 대항할 수 있는 거대문파들이 단숨에 짓밟힐 수 있는 진로인 셈이다.
그야말로 끔찍한 가정에 곽용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하나 그의 눈빛은 두려움에 빠져 있지 않았다. 오히려 강렬한 투기로 타올랐다.
“이리도 자세히 설명하시는 걸 보니, 군사께서는 이미 예측한 것 같소.”
제갈여강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섬서성을 가장 유력한 후보로 봤습니다. 그에 따른 대응책도 준비했습니다. 이미 정의맹에 집결한 무사들이 차례대로 섬서로 향하고 있습니다. 화산과 종남이 버티는 사이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좋군.”
“구파일방의 장문인과 문주, 오대세가의 가주가 집결합니다.”
“오대세가의 가주들까지? 그자들이 군사의 요청에 움직였소? 구파일방과 달리 오대세가는 아무래도…… 백도 무림의 존속보단 가문의 안위를 더…….”
거기까지 말을 하던 곽용은 말끝을 흐렸다.
눈앞의 제갈여강도 오대세가인 제갈세가의 가주임을 깜빡한 것이다.
결국, 장본인 앞에서 욕을 한 꼴이 되어서 곽용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제갈여강은 분노 대신 쓴웃음을 흘리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다소 그런 성정이긴 하지요. 더구나 정예들을 가주가 이끌고 온다면, 가문의 본거지가 위협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오대세가의 구성은 늘 변해 왔다. 같은 백도지만, 서로 수없이 이합집산을 겪어 오며 싸우고 또 싸우지 않았던가.
이번 결전을 위해 가주가 정예들을 이끌고 나갔다가, 혹여 습격을 받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마도와의 건곤일척이 눈앞에 온 상황에서, 똑같은 백도의 뒤통수를 치는 건, 곧 무림공적이 되겠다는 뜻이지만.
세상에 미친놈은 많고, 욕심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법.
그런 작자들이 나오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하여 가주들은 아마 일부 병력을 보낼 수는 있어도, 직접 나오리라고 여기지 않았는데, 제갈여강이 그걸 해낸 것이다.
“정확히는 제가 해낸 게 아닙니다. 검성께서 윽박질렀지요.”
“검성이?”
검성, 남궁조가 거론되자 곽용이 고개를 갸웃했다.
“오대세가가 아니라 남궁세가가 유일(唯一)세가가 될 거라고 협박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
이 얼마나 광오한 소리인가 싶지만, 남궁세가의 저력이라면 그럴 만하다.
“그 양반이 아주 작정했군.”
“어쩌면 천하제일인이 될 기회니까요.”
제갈여강은 쓰게 웃었다. 남궁조가 괜히 그렇게 행동한 게 아니다. 곽용 역시 무엇인지 짐작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창천검신의 그늘이 그만큼 컸던가.”
“정확히는 검존의 그림자입니다.”
“하긴. 창천검신은 바라볼 수도 없는 존재였으니까.”
“창천검신과 검존은 저번 정마대전에서 백도를 지켜내며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검성은 아마 이번 정마대전에서 마도를 상대하며 진정으로 천하제일인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마음일 겁니다.”
때문에 남궁조는 나머지 오대세가를 반협박하여 직접 가주들을 이끌고 섬서성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검후께서 섬서로 향했고, 하남에서 은거하고 있던 약선 어른께서도 섬서에 도착하셨습니다.”
“아이고, 그 노인네들이 참…….”
“다들 섬서에 무덤 자리 알아보겠다고 먼저 움직였습니다.”
그야말로 전대의 고수들까지 동원되자 곽용은 점점 든든해졌다.
사십 년 전, 함께 했던 전우들은 물론이고 새로운 세대의 고수들까지.
이 정도라면 백도의 전력이 집중된 셈이다.
그러나 딱 하나.
곽용이 조심스레 말했다.
“천룡검협은 어찌 됐소? 섬서로 향하고 있다고 하오?”
“그건…….”
“군사의 여식을 보낸 거로 알고 있소만.”
“……사실 제 딸아이로부터 연락이 없습니다.”
“……?”
곽용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연락이 없다고? 제갈설아는 영특한 아이다. 곽용도 보면서 몇 번이고 감탄하지 않았던가.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당연히 알고 있는데, 연락하지 않는다?
보아하니 위험한 상황에 빠져 연락이 끊긴 것 같진 않다.
제갈여강의 얼굴이 똥 씹은 것처럼 찌푸려졌다.
“모릅니다. 천무백과 접촉했단 연락 이후 답을 보내질 않습니다.”
“허어. 그럼 설아는 천룡검협과 움직이고 있는가?”
“예…….”
“……이거야 원, 대체 천룡검협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딸자식을 보내는 게 아니었습니다. 천무백이 무슨 짓을 저지르든 막진 않아도 최소한 이 애비한테 보고는 해야 하건만…….”
곽용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게, 일찍 사위로 맞았으면 이런 일 없지 않았겠는가. 그럼 아무리 천 공자라도 장인의 말을 무시할까.”
“……맹주님.”
심각한 분위기에서 제갈여강의 힐난하는 얼굴을 보자 곽용은 긴장이 풀리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천 공자는 지금껏 마도에 대항하며 꿋꿋이 싸워 온 인사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천룡검협은 우릴 도울 것이오.”
거의 확신에 찬 어조였다.
이건 단지 이상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이다.
천무백은 이미 마도에 있어 찢어 죽여야 할 천하의 대적.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존재가 마도와 천무백이다.
서로를 죽여야만 살 수 있는 형세.
그러니 백도가 무너진다면, 천무백의 든든한 배경이 사라지는 꼴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논리라면, 천무백은 반드시 올 것이다.
물론…….
“대체 무슨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오.”
워낙 제 멋대로여야지.
* * *
천무백의 성격은 사실 딱 하나로 정의하기 어렵다.
본래 성격은 선천적일 수도 있지만, 세월의 영향이 더 크기 마련이다.
어떤 식으로 살아 왔는지, 누구와 함께해 왔는지.
그렇게 사람의 성격과 인격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제자인 유백기가 스승을 괴팍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길 망설이지 않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수십, 수백을 거듭하는 전생은 매번 새로운 삶이었고 새로운 길을 개척했으니까.
흉악한 살인마처럼 적을 베고 또 벤 적도 있으며, 깊은 산속에서 도인처럼 조용히 도만 닦은 적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삶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점이 몇 가지 있는데, 아무래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격이리라.
하나는 바로 싸움을 코앞에 두고는 지독히도 냉철하단 점이다.
“놈들의 노리는 수가 명확히 보인단 말이지.”
천무백은 돌아가는 형세를 살피며 마도의 목적을 추론했다.
“일단 저들의 의도대로 백도가 움직이고 있는 건 맞긴 한데.”
천무백의 얼굴이 묘해졌다.
“아무리 봐도 나를 딱 노린 것 같단 말이야.”
만리추종향이 비광에게 묻어 있다는 건, 천마도 알아냈으리라.
비단 천마뿐이랴. 몇몇 절대고수라면 충분히 알만하다.
자신들의 위치가 발각된 상황.
그럼 저들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무엇일까.
“원래대로라면 단단히 준비해 놓고 나를 기다렸을 거다.”
“그랬겠죠? 오히려 단단히 함정을 파고 유인했겠죠.”
“그게 날 잡기 위해선 좋은 선택이었을 거야. 그런데도 결전을 준비하는 움직임을 보인 건,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날 죽여 버리려는 속셈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능허야. 내가 죽는 걸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될 거 같냐?”
“그야…….”
능허는 입을 다물었다. 글쎄, 엄청 충격적이겠지.
젊은 무인들은 물론이고, 배경이 변변찮은 하류 무사들은 천무백을 거의 경외하다 못해 숭앙한다.
능허도 잘 알았다. 천무백이 지금 과거의 창천검신처럼, 마도에 대항하는 백도의 상징이 되어 가고 있음을.
“날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저들이 가지고 있는 거다. 저들이 아니라, 천마겠지만. 뭐, 어쨌든 어차피 날 죽일 거면 이왕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여 버려서 백도의 기세를 확 눌러놓겠다는 뜻이지.”
태연스럽게 살벌한 얘기를 늘어놓는 모습에 능허는 혀를 내둘렀다.
그때였다. 옆에 조용히 있던 제갈설아가 끼어들었다.
“그러면 위험하잖아요?”
사실 제갈설아는 이번 일의 위험성을 잘 알았다.
최종결전.
천마가 직접 등장하리라는 건 자명한 사실. 제아무리 천무백이라도 마도의 절대고수들과 싸우다 보면 분명 위험한 상황이 생기리라.
천무백에 대한 걱정과 백도 무림을 위한 대의가 서로 충돌되며 그녀의 마음은 복잡해져 있었다.
천무백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평생 살아오며 위험한 적이 없던 적은 없었소. 두려운 것이야 없지.”
싸움을 앞에 두고 냉철한 판단력으로 판세를 분석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철심(鐵心).
이것이야말로 천무백이 전생을 거듭해 오며 변하지 않는 선천적인 성격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었다.
“그런데, 이건 좀 마음에 안 들어.”
“……?”
“왜 자기들 맘대로 깔아놓은 판에 저들 뜻대로 주도해?”
“그야……뭐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아냐. 이건 마음에 안 들어.”
“…….”
능허가 미간을 좁히며 천무백을 바라봤다. 저 인간, 또 저런다 싶은 눈빛이었다.
전생을 거듭해도 변하지 않는 또 하나의 선천적인 특징.
그건 바로 반골(反骨) 기질이었다.
좋게 말해 반골이고, 나쁘게 말하면 그냥.
“놈들이 만들어 놓은 판을 엎어 버려야지.”
“청개구리 심보 나온다, 또…….”
천무백은 능허의 말을 무시하곤 제갈설아를 바라봤다.
“소저.”
“네, 네?”
제갈설아는 순간 화들짝 놀라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무백의 손이 별안간 자신의 어깨를 잡은 것이다. 그야말로 몸이 경직된 채 제갈설아는 조금은 가까워진 천무백의 숨결을 느끼곤, 호흡까지 멈췄다.
‘뭐, 뭐야. 갑자기?’
설마, 뭐, 그런 건가? 마지막 위험한 싸움을 앞두고 심중의 속내를 고백하는…….
그러나 이어지는 천무백의 말은 애석하게도 기대와는 달랐다.
“소저의 솜씨가 좀 필요할 것 같소. 날 도와주겠소?”
“……어, 솜씨요?”
“진법을 좀 써 봐야 할 것 같소.”
“진법이라면, 어 방어를 위한 진법을 말하는 건가요?”
실망도 잠시, 천무백이 얘기하는 게 곧 전투를 준비하는 것임을 깨달은 제갈설아는 표정을 바로하며 되물었다.
천무백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쑥대밭으로 만들기 위한 진법이오.”
“네?”
“저쪽 진영에 아주 위험한 진법들을 주구장창 설치하면 어찌 될 것 같소?”
“저쪽 진영이라면…….”
곰곰이 생각하던 제갈설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쪽 진영이라니, 설마…….
“마도 진영에 진법을 설치하라고요?”
천무백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설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천광마랑 싸웠다더니, 혹시 광증이 옮았나……?’
천하의 제갈설아가 그런 생각을 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