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99화>
299. 가장 필요한 사람
전쟁은 정보전을 빼놓을 수 없다.
중원 전체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정마대전인 만큼, 적어도 정보 싸움에 있어서 백도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개방이라는 촘촘한 정보망은 중원 곳곳에 퍼져 있었고, 그에 필적하는 새로운 우군이 생겼다.
바로 하오문이다.
“틀림, 없겠지요?”
매사 냉철함을 보여 주던 제갈여강의 목소리가 다소 떨렸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내가 전해 준 정보 때문이었다.
단순한 정보라면 천하의 제갈여강이 동요를 일으킬 리가 없다.
오히려 터무니없는, 놀라운 내용이 담겼다고 해도 그 정보의 진위성을 파악하기 위해 더욱더 냉철함을 유지할 사람이 바로 제갈여강이 아니던가.
“하오문의 저력을 쏟아부은 내용이오. 진위성은 물론이고, 신뢰할 수 있는 내용이오. 이 하오문주 곡지흠이가 장담하겠소.”
안다. 다름도 아닌 하오문주가 직접 정의맹에 찾아와 넘겨 준 정보였다.
천무백과 함께 월야방을 치러갔다가 귀환한 척마대로부터 들었다.
곡지흠이 천무백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음을.
저번 정마대전에서도 정사지간의 문파라며 중립을 지켰던 하오문이 지금 백도의 편에 선 것도 오롯이 천무백의 덕분임을 잘 알았다.
개방이 중원의 정보력을 쥐었다고 해도, 하오문 역시 만만치 않은 저력의 이인자.
‘아니지. 최근에는 오히려 흑회까지 집어삼키고 있단 얘기도 있어.’
개방은 하오문을 경계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흑도, 녹림, 수적 셋으로 나뉘어 처절한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는 흑회를 알게 모르게 잠식해가고 있는 세력이 하오문이란 점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니 지금 하오문의 정보력이란 곧 중원을 통하는 수적들의 입과 모든 산이란 산을 통제하는 녹림의 눈, 그리고 뒷골목을 지배하는 흑도들로부터 전해져 오는 것.
‘한마디로 이 정보의 신뢰성은 매우 높다. 더구나…….’
물론 의심하지 않은 건 아니다.
만일 흑회가 마도와 손을 잡았다면?
그래서 이게 하오문을 통한 역공작이라면?
하나 그런 의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너진 하오문을 재건하다 못해 개방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길러낸 위인이다. 멍청해 보이지도 않아. 오히려 무서운 작자지. 그런 양반이 천무백을 배신한다는 선택까지 하면서 마도의 편에 설 리가 없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만일 내가 천무백을 배신한다면?
상상하기도 싫다. 아마 죽이고 나서도 저승까지 따라와 또 칼질을 하지 않을까.
어쨌든 제갈여강이 정보의 신뢰도를 확신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개방을 통해 모은 정보와 교차 검증해도 대부분이 일치해.’
약간 다른 점은, 오히려 하오문의 정보력이 더 날카롭고 직관적이란 사실이다.
그러니 정보의 진위성과 신뢰도는 두말할 것도 없다. 하나 제갈여강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하오문의 정보, 개방의 정보, 그걸 모두 크게 보면…….
“마도가 점거한 지역도 포기하면서 물러나고 있다니…….”
“천룡검협이 천광마를 잡은 영향도 크리라고 생각하오.”
“이상하다곤 생각했소. 아무리 그래도 자신들이 힘들게 점령한 거점마저 전부 포기하고 물러난다는 게. 그러나 그대가 전해 준 내용을 보니 무언가 보이는구려.”
곡지흠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하오문을 총괄하는 위인이다. 세상을 보는 눈은 깊고 넓다.
정보를 가공하고 분석하여 결론을 내리는 건 강호에서도 한손에 꼽는다.
그러니 곡지흠의 눈에 안 보일 리가 없다.
“저들은 준비하고 있소. 모든 전력을 재정비해서, 단 한 번의 싸움을 말이오.”
“…….”
“천광마의 죽음이 저들에게 경각심을 준 것이 틀림없소. 어디 천광마뿐이겠소. 혈불, 귀마, 독마, 천광마……. 저들이 자랑하던, 사십 년 전 정마대전에서도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들이 제각기 싸우다가 각개격파 당했지.”
“그래서 마도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단 말이오?
“군사의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소?”
“…….”
제갈여강은 침묵했다. 보였다. 아무리 봐도 그리 보였다.
마도의 세세한 움직임, 곳곳에서 전해져 오는 보고와 소식통.
백도의 두뇌들이 모인 군사부에서도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만일 정말로 그렇다면…….”
제갈여강이 말끝을 흐렸다.
그 말끝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지, 곡지흠은 알았다.
그래서 그는 정의맹에 왔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으니까. 만일 백도가 아예 무너져 내린다면? 하오문이라고 중원에서 멀쩡하게 지낼 수 있을까.
그만큼 두려운 내용이었다.
“천마. 그 자도 직접 올 것이오. 최종결전에 가장 강한 작자가 빠질 수야 없지.”
“허…….”
제갈여강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저들이 정말로 단 한 번의 결전을 준비 중이라면, 당연히 천마가 모습을 드러내리라.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군.”
천마의 무위가 어느 정도냐에 대한 얘기는 정의맹 내에서도 다툼이 끊이질 않는 화두였다.
이제는 지금의 천마가 군천악이 아닌 새로운 인물이라는 것도 널리 알려졌다.
‘최소한 군천악보다 위라는 얘기다.’
군천악.
사십 년 전 정마대전을 길고도 긴 싸움으로 끌고 간 그야말로 마귀같은 자.
창천검신의 어마어마한 신위 앞에서도 버텨 내고, 도망치고, 끈질기게 도전했던 자.
한데 당대 천마는 더 강하다는 게 중론이다.
반쯤 무너진 마교를 사십 년 만에 재건해서 다시금 정마대전을 일으킨 힘은 또 어디에서 오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전력을 다해야 하겠소. 하오문도 우리와 함께하겠소?”
곡지흠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천무백과 손을 잡은 이상, 그리고 암진혜검을 얻어 낸 이상 그에게 큰 빚을 진 셈이다.
물론 곡지흠도 하오문을 동원해 천무백을 도와줬지만, 아무래도.
‘암진혜검을 전해 준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지.’
또, 여기서 발을 뺀다고 해도 마도가 이긴다면 하오문 역시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은 자연스럽다.
“하오문도 정의맹과 함께 하겠소.”
“고맙소. 항마(降魔)의 기치에는 중원 동도가 모두 사해동포이니 형제일 것이오. 이는 정의맹의 총군사로서 보증하겠소.”
하오문의 전력은 아무래도 다른 문파에 비해 부족한 건 당연하다.
물론 암진혜검을 갖춘 곡지흠이야 백도에서도 수위권을 자랑하는 인사였지만, 전체적인 전력은 미약하다.
그런데도 제갈여강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비록 방금 전까지만 해도 외인(外人)이었지만, 군사께 조언을 드릴 테니, 이 부족한 작자의 말이라도 허투루 여기지 말고 들어주시오.”
“외인이라니. 마도 앞에 외인이 어디 있겠소?”
“당장 오대세가에 속한 고수들을 모두 동원하십시오.”
“……!”
“오대세가의 가주는 물론, 그들이 가진 전력 전부.”
“…….”
“구파일방의 방주와 문주, 장로들까지 소식을 전하여 불러 모여야 하오. 그들이 가진 최정예 무사들까지 모조리.”
제갈여강은 침음을 삼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정의맹 바깥의 인사였던 곡지흠이었기에, 그는 정의맹에 더 냉정했다.
“모두 한 자리에 모여야 하오. 백도의 모든 전력을 집중시켜야 할 때가 왔소.”
제갈여강은 침묵했다. 곡지흠의 굳은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래야만, 이길 수 있소.”
곡지흠은 조용히 기다렸다.
‘오대세가의 전력과 구파일방의 정예들까지 전부 내놓으라는 건, 치명적인 위험을 동반한다.’
아무리 백도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뭉쳤지만, 마도가 침범하진 않을 때 서로 숱한 싸움을 일으키는 문파들이다.
당장 화산과 종남은 서로를 소 닭 보듯이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다는 건 제갈여강으로서도 쉬이 선택할 수 없다.
만일 그랬다가 결전에서 패배한다면?
오랫동안 중원의 패권을 차지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단숨에 무너진다.
제갈여강이 책임질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죽어서도, 아니, 어쩌면 제갈세가 전체가 책임을 지고 사라져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선택을 종용해야만 한다.
‘아니면 지니까.’
천무백이 숱한 고수들을 잡았다고 마도가 약해졌는가?
아니다.
놈들은 검존 유백기가 수십 년을 추적하고 괴롭혔지만, 꿈쩍도 하지 않은 작자들이다.
무엇보다 아직 전쟁에 나서지 않는 마종의 마인들과 천마를 보좌하는 대장로들, 그리고 천마까지.
만일 한자리에 모여 대항하지 않는다면, 차례대로 각개격파 당할 수밖에 없다.
제갈여강 역시 그 사실을 잘 안다. 또 일의 여파가 어떻게 미칠지 역시 잘 알고 있으리라. 그래서 고민의 시간은 길어졌다.
얼마가 지났을까.
제갈여강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가하오.”
“……!”
곡지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저런 답을 내놓을 줄이야.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다고 생각이 든 곡지흠은 참담한 심정을 금치 못했다.
“그 무슨, 저들은 전력을 동원해 결전을 준비하는데, 우리 역시 그렇지 않다면……!”
“아니, 내 말은 전력을 동원해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오.”
“…….”
무언가 의미가 다른 듯한 어조에 곡지흠은 멈칫했다.
“천마가 온다면, 백도의 모든 고수들을 모은다고 해도 이길 수 있다고 여겨지지 않소. 저번 정마대전에서도, 그 어떤 고수도 천마에게 엄청난 위협이 되진 못했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일거요. 정의맹주인 투신이나, 소림방장이나, 무당의 장문인이든, 화산의 장문인이든 전부.”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어차피 이길 수도 없으니 포기하자는 건가? 설마, 그럴 리는 없다. 그러나 이내 천마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십 년 전.
“창천검신께서만이 유일하게 천마에 대적할 수 있었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천마가 천마일 수 있던 이유는 창천검신의 칼날 아래 살아서 그렇소.”
“……!”
“백도의 전력을 동원하는 것뿐 아니라, 천마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을 반드시 데리고 와야 하오.”
곡지흠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머릿속에서 두 명의 이름이 떠올랐다.
검존, 아니면…….
“천룡검협 천무백. 내 직감은 그자만이 천마에 대적할 수 있소.”
* * *
“상황이 그리 돌아가고 있군.”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버지께선 공자님이 오시길 간청했어요.”
천무백을 찾아온 이는 다름 아닌 제갈설아였다.
사실 천무백은 정의맹과 함께 싸우고 있지만, 그렇다고 정의맹의 명령을 따르지는 않는다.
척마대의 대주이긴 하지만, 그것 역시 정의맹의 부탁으로 맡았다.
실제론 맹주인 곽용이나 총군사인 제갈여강마저도 천무백에게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이건 제갈세가의 태상가주인 제갈선의 확실한 주의 때문에 그렇기도 했다.
사십 년 전, 백도의 두뇌였던 제갈선이 창천검신을 바둑판의 돌처럼 마음대로 움직이다가 크게 한번 혼난 적이 있으니까.
“말이야 혼났다고 했지만, 할아버지가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어깨가 결린다고 하소연을 하시니까요.”
“그렇소?”
“할아버지는 공자님이 창천검신과 매우 비슷하대요. 아무래도 같은 무공을 이어받아서겠죠.”
실제로 천무백은 지금까지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데 아무도 뭐라 하지 못했다.
실제로 엄청난 성과를 올리는 건 천무백이 유일했고, 현재 백도에서 천무백만큼 마도에 치명적인 피해를 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천무백은 그런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하니 제갈여강이 제갈설아를 보내는 이유도 명백했다.
“소저를 보낸 걸 보니, 정말로 격렬한 싸움이 벌어질 거라 생각하시나보군.”
“네, 맞아요.”
“흐음.”
천무백은 턱을 쓰다듬었다.
‘어쩐지, 이상하더군.’
만리추종향을 추적하던 중에 저들의 움직임이 이상한 걸 발견했다.
흔적을 지우려는 느낌은 전혀 없고, 오히려 대놓고 움직이는 기색이지 않았던가.
마치 들어오라는 듯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날 죽이고, 아예 싸움을 끝내겠단 속셈인가?’
단숨에 핵심을 짚은 천무백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판을 깔아 놨다 이거지.’
저들이 만들어 놓은 무대, 저들이 깔아 놓은 판.
천무백은 제갈설아의 요청대로 싸우러 갈 생각이다. 오히려 천무백도 원하던 바였다. 놈들이 요리조리 도망치지 않고 정면에서 끝내 버리는 것이야말로 간단하니까.
하나 고이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순간 많은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판은 엎어버리는 것이 재미있지 않겠소?”
천무백의 입가에 재밌다는 듯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