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84화>
284. 난 미친놈이 싫어
감숙성의 기련산은 산맥의 길이가 수천 리가 되는 대산(大山)이다.
손가락을 세운 듯한 뾰족한 봉우리가 구름을 뚫고 솟았다.
무수히 솟구친 봉우리 밑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그야말로 험준함을 이뤄낸다.
벼랑과 벼랑 사이, 깊고도 좁게 파인 계곡은 사시사철 안개가 껴서 음산하기 짝이 없어 지옥곡(地獄谷)이라고도 부른다.
그런 지옥곡을 내려다보는 가장 높은 봉우리.
한 노인이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검붉은 기운이 몸 주위로 일렁였다.
자세히 보면, 단순히 일렁이는 게 아니라 마치 몸에 스며드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서 오는 기운인가.
저 깊고 음산하기 짝이 없는 지옥곡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자연기.
햇빛 한 점 들지 않아 차디찬 음기를 지녔으면서도, 지독한 사기까지 섞인 기운이 노인의 몸에 스며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노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군. 역시 지옥곡이야.”
언제였던가.
“검존 놈이 귀찮게 쫓아오는 걸 피하느라, 여길 오지 못했단 말이지.”
시간만으로 따져도 거의 사십 년에 가까운 세월.
노인은 이곳이 그리웠다.
애당초 인적이 드문 감숙이지만, 그중 기련산의 지옥곡은 누구도 찾지 않는다.
음산한 모습이 지옥을 연상케 한다는 단순한 이유만은 아니다.
“얼마나 많은 생명을 잡아먹었을꼬.”
여긴 무덤이었다. 거대한 무덤. 모든 생명을 집어삼킨 무덤.
깎아지른 듯한 벼랑 아래로 떨어진 온갖 짐승과 사람들의 무덤.
저 밑에 빠진다면,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결국 죽어버리니까.
저 밑에는 짐승의 뼈는 물론이고 산을 올랐던 수많은 인간군상의 뼈와 옷가지들이 잔뜩이리라.
억겁의 세월 동안 무덤이 된 지옥곡의 사기(邪氣)는 이 천하에서 존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하나 노인은 그런 사기를 마치 맛있는 음식이라도 탐하는 양 게걸스럽게 흡수했다.
오히려 가득 찬 포만감에 웃음을 흘렸다.
“이번 정마대전에서 천하를 얻진 못해도, 적어도 여기 감숙성만큼은 반드시 얻어야겠다!”
그래야 이곳에서 수련할 터이니.
물론 노인은 감숙성만 쟁취하는 걸 이번 대전의 목표로 여기지 않았다.
당연히 천하를 찬탈하는 것.
강호를 마도천하로 만드는 것.
그러면 자연히 이곳도 마도의 하늘 아래 놓이리라.
그때였다.
서 있기조차 힘든 봉우리를 놀라운 경공으로 뛰어넘으며 누군가 다가왔다.
도저히 경지가 가늠되지 않는 신위였다.
하나 그런 사내도 노인의 앞에선 허리를 굽혔다.
“무슨 일인가?”
“종주님, 혈불이 죽었습니다.”
“…….”
그러자 웃음기 가득하던 노인의 얼굴이 차츰 굳어졌다.
노인.
아니, 천마신교의 대장로이자, 마류칠종 중 하나, 광종(狂宗)의 종주.
천광마(天狂魔)는 미간을 좁혔다.
“혈불이 뒈졌다고?”
“예. 천룡검협의 손아귀에 죽었다는 소문이 백도무림에 자자합니다.”
“천룡검협이라…….”
소문은 익히 들었다.
중원에 남은 마도 동료들이 맥을 못 추게 만든다는 놈이랬지?
처음 그 소문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혈불이니, 귀마니 두 놈 다 한물갔구나.
고작 애송이 하나 때문에 모든 계획을 말아 먹어?
나는 검존을 상대하고 있는데?
얼마나 한심한지. 그래서 도움까지 줬다.
새외 마도도 검존과 쫓고 쫓기는 싸움 중에, 여력을 내서 독마를 파견했다.
혈귀곡이 야심차게 준비하던 비다라를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고 보니 비다라 계획이 무너진 것도, 중원으로 건너간 독마 녀석이 죽은 것도…….”
듣기론 독마는 검후, 그 노파한테 죽은 거라고 했었는데.
“모르겠군. 어쩌면 그것도 그 애송이일지.”
혈불을 죽였다.
그런 놈이라면, 독마를 죽였다고 해도 놀라울 게 없다.
혈불을 좋아하진 않지만, 천광마는 그의 실력만큼은 인정했다.
전대 천마에게 극찬을 받았던 기재가 아니던가.
천광마는 한숨을 내쉬며 보고를 올린 사내를 돌아봤다.
전신에서 살기와 투기가 넘실거렸다.
코끝을 간질거리는 혈향.
“어디서 한 푸닥거리하고 왔느냐?”
“오는 도중에 정의맹의 꼬리를 발견했습니다.”
“정의맹이라. 우습군. 백도 무림이 뭉치면 마도를 이길 줄 아는가.”
천광마가 비웃었다.
“아해야.”
“예.”
“저번 대전에서 우리가 왜 졌는지 아느냐?”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누가 모를까.
마도라면 누구나 안다.
그러나 마도의 최상위 권력가이자, 고수인 천광마 앞에서 떳떳이 말할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사내 역시 광종(狂宗). 제정신은 아닌 놈이다.
정신 나간 마인이 넘쳐나는 광종에서도, 종주의 호위를 맡을 정도면 보통 미친놈이 아니다.
비광(秘狂)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창천검신 때문이죠.”
“맞다. 그런데 백도 놈들은 착각하는 것 같단 말이지.”
천광마는 냉소했다.
“그깟 백도 놈들, 백이고, 천이고, 일만이고 모여 봐라. 두렵지 않다. 하지만 창천검신 하나는 두렵다.”
“…….”
창천검신에 대한 고평가에 비광은 쉬이 대답지 못했다.
그는 대전 이후에 태어난 후세대니까.
하지만 짐작되긴 한다.
“검존을 생각하면…… 창천검신을 상대한 선배들이 좀 불쌍하게 느껴지긴 합니다.”
“그래. 그놈 하나 때문에 새외에 있는 마도가 어디 한자리에서 계속 머무를 수 있었더냐. 도망치고 또 도망치고. 그러다 함정을 펴서 기다리기도 하고.”
사십 년 가까이 새외 마도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흔들렸던 이유는 검존의 집요한 추적과 공격 때문이리라.
고작 하나.
창천검신의 직전제자 검존.
딱 한 명의 무력이 하나의 세력을 얼마나 뒤흔들 수 있는지 마도 전부가 알았다.
그러니 창천검신 홀로 정마대전을 이겨 냈다는 말은 마도에서도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검존이 중원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놈이 백도무림하고 힘을 합치면, 어쩌면 창천검신처럼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잊었느냐?”
“네?”
“놈은 우릴 감당 못 한다.”
“…….”
“어째서 사십 년 가까이 마도를 일소하지 못하고 변죽만 올렸는지 잘 알지 않느냐.”
비광이 다소 불퉁한 어조로 말했다.
“잘 모릅니다. 그거야 종주님들이나 아는 거 아닙니까. 저희 같은 말단은 아는 게 있어야죠.”
“끌끌끌. 자세한 건 알 거 없다. 네놈이 알아야 할 건, 검존 놈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다. 억지로 수명을 늘리는 역천. 한번 역천을 행했으면 어디 명산에 들어가 조용히 살아야 하거늘, 매번 격한 싸움을 이어 왔으니 역천으로 지탱하는 몸도 정상이 아니다. 시간문제다.”
천광마는 단언했다.
실제로 그나마 최근에 부딪혀봤을 때, 천광마는 절실하게 느꼈다.
놈은 약해졌다고.
물론 흉흉한 기세와 파천황적인 압도적인 무력은 여전했지만, 체력이 현저히 떨어진 게 보였다. 지구전으로 싸움을 길게 이어 간다면 백이면, 백, 자신이 이길 자신이 있었다.
“놈을 만나면 말이다. 무조건 단시간에 싸움을 끝내려고 힘을 폭발시킬 거다. 어떻게든 도망치고 피하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라.”
“알겠습니다.”
검존은 두려워할 거 없다. 마도 몇이야 베겠지만, 이젠 더는 무서운 상대가 아니다.
다 늙은 호랑이에 불과할 뿐.
하지만 혈불을 죽인 천룡검협.
“늙은 호랑이가 가니, 새끼가 나왔구나.”
“…….”
비광은 내심 속으로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새끼 호랑이라니.
대체 어떤 새끼가 혈불을 죽인단 말인가.
그러나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천광마의 말을 자를 생각을 하지 못한다.
천광마. 본인은 천광(天光)이라 하여 하늘의 빛이라고 뽐내지만, 다 안다. 그가 그냥 미친놈이란 걸. 그것도 보통 미친놈이 아니라는 점을. 어떤 마인이 스스로를 하늘의 빛이라 소개한단 말인가.
그런 미친놈이니, 비광은 그저 조용히 침묵했다.
“아무래도 그놈을 잡아서 교주님께 데리고 가면, 좋아하시지 않겠느냐?”
“그야…… 목숨만 가져가는 게 낫지 않습니까?”
“교주님도 홀로 적적하실 텐데. 나이 차이도 크게 안 나고. 괜찮겠구나. 단전을 폐하고 적절히 노리개로 만들면…….”
비광은 침묵했다.
과연, 미친놈들의 종주, 광종의 종주. 천광마답다는 생각이 들 뿐.
“그래. 제물을 포획하러 가자. 새끼 호랑이인가, 아니면 천룡인가. 상관없다. 호랑이여도 그물에 잡힐 터이고, 용이어도 내 목을 비틀어 포획할 터이니!”
천광마가 광소를 터뜨렸다.
* * *
“대협, 대접이 너무 박한 게 아닌가 걱정스러울 따름입니다. 음식은 입에 맞는지요?”
유백기가 껄껄 웃으며 손을 저었다.
“맛있습니다. 아주 좋아요. 이 보잘 것 없는 늙은이에게 이런 과한 대접이라니. 오히려 부담스러울 따름입니다.”
“이런, 부담이라니요.”
천무백의 아버지, 천문경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우리 무백이가 이런 귀한 손님을 모셔오는데 연락이 없어서 제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강호 동도인데 특별할 게 있겠습니까.”
“검존이시지 않으십니까.”
유백기는 능청스럽게 껄껄 웃었다. 천무백과 함께 청성표국에 방문한 유백기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당연한 일이다. 유백기는 강호 어디를 가도 크게 환영받을 수밖에 없는 전설이나 다름없으니까.
천무백은 유백기와 의견을 어느 정도 공유한 이후에 우선 청성표국에 들렸다.
당장 정마대전이 시작되고 있으니 집에서 희희낙락할 시간은 없다만.
잠깐 생각을 정리하고 쉴 시간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천무백은 내일이라도 당장 떠날 준비를 마쳤다.
유백기가 천문경과 천유하에게 말했다.
“천 공자께선 정말 강호에서 보기 드문 강자요, 실력자입니다. 오히려 마도와 싸우는 데 있어 제가 도움을 받고 있어요. 반드시 승리하여 돌아올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말에 천문경과 천유하는 적잖이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무려 검존이 옆에 있으니, 점점 불길하게 변해 가는 강호의 기류에 걱정이 한가득하였는데 어느 정도는 마음이 놓였다.
유백기는 천무백 가족들의 반응에 쓰게 웃었다.
‘허허. 그렇게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막내아들이 어떤 계획을 세우고 계시는지 알면, 기절초풍들 하시겠소.’
불과 어제 나눴던 얘기를 떠올리며 유백기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 *
마교를 내 손으로 다시 세운다.
그 말을 처음 듣고 온전한 뜻을 이해한다는 건 유백기여도 어려운 일이었다.
“천마가 되실 생각입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는 듯 천무백의 얼굴이 뜨악해졌다.
“미쳤냐? 그딴 걸 왜 해? 그런 같잖은 수장 놀이를.”
“그러면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의 마교를 근본부터 뒤집어엎는다. 마도를 존속시키는 대신, 기존 세력을 싹 일소하고, 이름만 남게 만들어 둔다. 북해 빙궁이나 남만의 야수궁처럼 서장의 일개 새외문파로 말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대리인으로 내세울 것이군요?”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백기가 작게 감탄을 표했다.
“과연. 건넛방에서 마기가 느껴진다더니, 전 그저 포로인줄 알았습니다만.”
“귀마 녀석이다.”
“귀마 말입니까? 그 노인네 아직 살아있었군요.”
“그러게 말이다. 욕심은 득실득실해서, 뒈지지도 않고 살아있어요. 아주.”
“하면 귀마를 새로운 마교의 대리인으로 내세울 겁니까?”
“아니.”
“……?”
“사냥개는 사냥개로 쓰다가 버려야지.”
천무백이 희미하게 웃었다.
천하의 귀마를 그저 사냥개로 생각하는 모습에 유백기는 혀를 내둘렀다.
“자, 말단 조직부터 차근차근 깡그리 일소하면서 처리한다. 그러면 누가 나와서 막겠느냐?”
“아무래도…… 천광마가 나올 겁니다.”
“천광마? 그 광종의 미친놈?”
“예.”
천무백이 턱을 긁었다.
“그놈은 내가 맡으마.”
“그놈이 지금 새외마도의 핵심입니다. 광종에 속한 마인들이 가장 많을뿐더러, 제일 강합니다. 천광마 역시 혈불 이상이고요.”
유백기는 천무백의 실력을 아주 높게 평가했다.
감히 제자가 스승의 실력을 어떻게 평가하겠느냐지만, 적어도 지금 삶의 무력은 평가할 수 있지 않은가.
유백기는 천무백이 현재 자신과 비등하거나 살짝 아래라고 여겼다.
하지만 천무백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난 그 두 놈보다 위다.”
“…….”
“여하튼 천광마는 내가 잡는다.”
“혹시 개인적인 원한이 있으십니까?”
“왜? 넌 있느냐?”
“제 친우들 몇이 놈에게 죽었던 거 아시지 않습니까. 그동안 제가 놈만큼은 잡으려 했는데, 워낙 미친놈이라 행적을 알 수가 없어서…….”
유백기도 유백기 나름대로 천광마를 죽이고자 하는 이유가 확실했다.
하지만 천무백은 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미안하지만 놈은 나에게 양보해라.”
“이유가 있으시군요.”
“있지. 당연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천무백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난 미친놈이 싫어. 정말 본능적으로 혐오스러워.”
“…….”
“그건 아마 내가 정상인이라서 그런 거겠지?”
참으로 황망하게도, 유백기는 동의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