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83화 (283/318)

<검신재생 283화>

283. 내 손으로 다시

하지만 천무백은 유백기의 계획에 제동을 걸었다.

“방식을 바꾼다.”

예상치 못한 얘기에 유백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조직을 상대할 때 우두머리부터 제거하는 방법.

전생의 천무백이 가장 자주 사용하던 방식이다.

실제로 효과적이다. 어떤 조직이든, 특히 강력한 수장이 이끄는 조직일수록 말이다.

“하면 천마를 내버려둘 생각입니까?”

“천마를 죽여 봤자 새로운 천마로 갈아치울 게 분명한 놈들이다.”

유백기는 잠시 생각하다 동의했다.

정마대전 당시 천마의 명령과 권위는 절대적이며 존엄했다.

마교는 분명히 무력이 주가 된 문파지만, 근본은 종교다.

천마는 신의 대리자이자 화신(化身)이다. 천마가 죽는다고 신앙이 사라지지 않는다. 새로운 신의 대리자가 다시 나타나니까.

차기 천마가 재탄생할 건 자명한 일이다. 다만 그동안 시간은 엄청날 것이다.

“군천악에게 도전하며 내홍을 겪었듯이, 천마가 죽으면 심각한 내전이 벌어질 겁니다. 당연히 정마대전은 꿈에도 꾸지 못할 것이고요. 종국에 새로운 천마가 탄생한다고 해도, 백도무림을 위협할 세력으로 성장하기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입니다.”

“오래 걸릴 뿐이지, 전쟁은 예견된 일이지 않으냐.”

유백기가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다소 낮게 가라앉았다.

천무백의 말에 담긴 함의(含意)를 눈치챘다.

“다시는 전쟁이 벌어지는 걸 원치 않으신 것이군요.”

천무백이 손가락 세 개를 폈다.

“내가 정마대전을 겪은 숫자다.”

정마대전.

강호 역사상 그리 많지 않으나, 한번 벌어질 때마다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 문파와 무인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던가.

그야말로 무인들의 지옥도(地獄道)가 바로 정마대전이다.

“그런……!”

유백기는 침음했다.

기나긴 강호 역사를 돌이켜보면, 정마대전이 벌어진 기간이, 일어나지 않았던 적에 비교해 극히 짧다.

역사라는 긴 실을 쭉 늘어놓고 보면, 정마대전은 그 위에 찍힌 점에 불과할 정도로 찰나였다.

“세 번이나 겪으셨습니까?”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다. 냉정한 유백기도 정마대전이라면 치가 떨리는데 그걸 세 번씩이나…….

한데 천무백의 얼굴이 이상했다. 조금 일그러진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 번이 아니라, 서른 번이 넘는다. 음, 정확히 하면 서른세 번이군. 그중엔 열 번 정도는 정마대전이라기 보단, 새외의 무인집단과 중원의 무인들이 부딪친 것이라…… 백도와 마도의 대결은 아니긴 하다만.”

“…….”

유백기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무려 서른 번이 넘는 정마대전이라니. 그제야 천무백이 감당해 온 역경과도 같은 삶의 무게가 체감됐다.

단 한 번만 겪어도 맨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지독한 전쟁을 거듭하고 또 싸워 왔다니.

유백기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지자 천무백이 쓰게 웃었다.

“뭘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지어?”

“스승님…….”

“됐다. 어찌 됐든 난 그런 끔찍한 싸움에 이제 진저리가 난다.”

“하면 정마대전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는 걸 원하시는 겁니까? 아예 마도가 사라져서?”

“정마대전은 앞으로 없어야 한다. 설령 발생하더라도, 문파 대 문파의 싸움으로 국한되어야 해.”

유백기는 침음을 삼켰다. 얼마나 어려운 목표인지 경험으로 깨달았다. 온몸에 긴장이 들어가며 머리칼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백기야.”

“예, 스승님.”

“나는 이번 정마대전이 강호에서 마지막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리 만들 것이다.”

그야말로 강렬함이 깃든 목소리였다.

추상같은 의지가 담긴 목소리가 귀에 또박또박 박혔다.

“다음 정마대전부터는 내가 없을 것이니까.”

유백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말씀은……?”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삶이 내 지독한 윤회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유백기는 입을 다물었다. 천무백은 윤회를 끊는 길을 그 달걀귀신을 처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찌 처리하느냐, 더 강해지면 된다.

창천검신의 무위는 그야말로 인외지경의 경지.

사람이 이룩해 낼 수 있는 제일의 경지였으니, 더 강해진다면 딱 하나밖에 없다.

검극(劍極).

“이번 삶에서 난 검의 끝을 볼 것이다.”

천무백은 단언했다.

단 조금의 반론이 끼어들 여지없이 확고한 어조. 유백기는 스승을 잘 알았다.

적어도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은 지키는 사람이다.

설령 너무 허황한 소리라도, 천무백이 말했다면 반드시 그리된다.

저리 말할 정도라면, 이미 가능성이 확실히 보인다는 의미.

유백기는 진심으로 격동하는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스승님의 깨달음에 경의를 표합니다.”

“무슨, 누가 보면 벌써 검극인 줄 알겠구나. 아직은 아니다. 다만, 이번만큼은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여태껏 많은 전생을 거듭한 천무백도, 이번 삶만큼은 다르다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세 개의 단전에서 흘러나오는 세 가지 기운, 어떤 무공과 깨달음도 녹여낼 수 있는 새로운 천둔검법, 오성물로 인해 차곡차곡 쌓인 선기와 선안…….

어느 하나도 기연이 아닌 게 없다.

일반 무인이라면 저 중 하나만 얻어도 능히 천하제일을 목표로 둘만 한 기연임이 분명하다.

‘아니, 기연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법이지.’

천무백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세 개의 단전을 개통하고, 세 가지 기운을 담는 건 천무백이 아니었으면 기연이 아니라 주화입마였으리라.

천둔검법은 천무백이 아니었다면 여동빈이 남긴 바의 일부를 깨닫는데도 지난한 세월이 걸렸으리라.

하물며 오성물의 선기를 영에 담는 것 자체는, 전생을 거듭하며 단련된 천무백의 영혼이 아니었다면 불가했으리라.

이 모든 게 천무백을 위한 안배나 다름없었다.

수많은 전생을 거듭하며 쌓아 온 경험과 관록이 기연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이번 삶에서 이뤄지자, 천무백은 가능성을 엿보았다.

창천검신 때는 특별한 기연 없이 오로지 수련과 싸움으로만 이룩해 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연까지 겹쳤다.

‘이번 삶에서 윤회의 굴레를 끊는다.’

반드시 그리할 것이다.

“그러니 차후에 정마대전이 일어난다면, 무림엔 내가 없다.”

유백기는 멈칫했다.

참으로 광오한 말이었지만, 다름 아닌 천무백의 말이었기 때문에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천무백이 희미하게 웃었다.

“비단 저번 정마대전만이 그런 게 아니다. 강호 태동부터, 지금까지 모든 대전에는 내가 있었고 그걸 끝낸 것도 나다.”

“아…….”

어쩌다 보니 강호의 평화를 지킨 사람이 늘 천무백 본인이었지만, 적어도 천무백은 강호가 강호로 남길 원했다.

어느 하나의 세력이 통일하여 무공의 다양성을 말살하는 건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교를 그리도 경계하고, 직접 천마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거부한 것이리라.

“하면 어쩌실 계획입니까?”

“매번 대가리 먼저 치는 방식으로 싸워 왔는데, 해결이 안 됐으니 바꿔 봐야지.”

“그렇다면……?”

“아래부터 친다.”

“…….”

천무백의 말뜻을 깨달은 유백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래부터 친다.

그 말인즉슨…….

“아래부터 위까지. 멸살(滅殺)입니까?”

부활의 여지 없이 완전한 멸살.

천무백이 주장하는 바는 그랬다.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불가한 일인지는 천하의 유백기도 얼굴을 굳힐 정도였으니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천무백이 대답 없이 웃었다.

새하얀 웃음이었다.

유백기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무백의 계획의 우려를 표했다.

스승의 말이라면 섶을 지고도 불에 뛰어들 위인인 유백기가 걱정한다는 건, 그만큼 불가능한 계획이란 의미다.

유백기는 새외에서 무려 40년 가까이 마도와 싸웠다.

쫓고 쫓기며 죽이고 또 죽였다. 따라서 작금의 마도에 대해서는 가장 박식했다.

“마도는 거대합니다. 스승님. 그들의 중심이 되는 건 종교입니다. 무(武)는 표출되는 하나의 표현일 뿐, 그들의 사상과 종교가 중심을 잡은 이상 지울 수는 없습니다.”

“안다.”

“마도의 완전한 멸살이 불가능합니다. 설령 스승님께서 이번 전쟁에서 모조리 죽인다고 해도, 목표로 삼으신 정마대전을 아예 사라지게 하겠다는 건 힘듭니다. 결국엔 부활할 거니까요.”

“알아.”

천무백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자, 유백기는 멈칫했다.

표정과 눈빛을 보니 자신의 의문도 이미 생각했다는 뜻.

그렇다면 다른 생각이 있다는 뜻이다. 유백기가 침묵하며 기다리자 천무백이 쓰게 웃었다.

“재미없는 놈, 좀 더 다그치지 않고? 네놈이 나한테 큰소리치는 게 젊은 시절 생각나서 새로웠구먼.”

“그땐 철이 없었던 거지요. 스승님은 다 계획이 있으시군요?”

천무백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백기가 작게 감탄을 표했다. 역시. 자신의 스승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천무백의 대답에, 유백기의 얼굴은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마교를 내 손으로 다시 만들 생각이다.”

* * *

“감숙성에서 연락이 끊겼습니다. 개방의 마지막 연락을 통하면 모든 지부가 무너졌고, 지원 나간 철혈대 역시 궤멸했습니다.”

“허…….”

전해지는 보고에 곽용은 침음을 삼켰다.

철혈대는 정의맹에서 조직한 타격대다. 천무백을 주축으로 한 후기지수들의 타격대가 척마대라면.

철혈대는 완숙한 경지를 이룩해 낸 절정 무인들의 타격대다.

물론 대규모 인원은 아니다. 소수정예를 지향하는 타격대인 만큼, 빠르게 이동할 수 있으며 적재적소에 투입할 수 있다.

감숙성이 마도들의 침입으로 몇 없는 백도문파와 정의맹에 입맹한 문파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곧장 파견했다.

한데 그들 역시 궤멸했다니…….

곽용은 침음을 삼키며 옆을 바라봤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제갈여강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제 불찰입니다. 중원의 혈귀곡에만 중점을 맞췄지, 새외의 마도세력이 이만할 줄은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어디 군사 잘못이겠소.”

“무엇보다 정예들의 숫자에서 차이가 나는 게 문제입니다. 저들은 소규모로 인원을 분배해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만, 우리 쪽에서 정예들만 추려 보내지 않는 이상 각개격파 당할 정도입니다.”

정예들의 숫자 차이가 컸다.

물론 전체적인 무사들의 숫자로 보면 정의맹이 더 컸다. 백도 무림의 연맹체니까.

하나 통일된 세력이 아니다 보니 절정급의 정예고수들의 숫자가 현저히 부족했다.

조금은 실력이 떨어지는 일류급 무사들은 정의맹으로 보내어 힘을 보태지만, 절정급 이상 무인들은 각자의 문파를 수호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역시도 마도 놈들이 노린 것이겠지요.”

언제 자신의 문파가 공격당할지 모르니, 각 문파는 정의맹에 정예들을 보내기를 저어했다.

그러다 보니 정의맹에서 움직일 수 있는 무사들에도 한계가 있었다.

싸움이 벌어지는 곳은 중원에서 한두 군데가 아니니 문제였다.

“하나로 통일된 집단과 연맹체의 차이…….”

제갈여강은 통탄할 지경이었다. 새삼 자신의 아버지, 태상가주 제갈선이 머릿속에 문뜩 떠올랐다.

정마대전을 지휘하며 백도 무림의 무인들을 장기말의 말처럼 이끌었던 제갈선.

‘그건 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윽고 제갈여강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천무백…….’

아니, 정확히는 창천검신.

전무후무한 신화 같은 존재가 백도무림의 구심점이 되었으니까 가능했으리라.

구심점을 생각하니 제갈여강은 절로 천무백을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혈불을 쫓아갔다지?’

그 후로 소식은 없다. 웬만해선 천무백이 무사하리라 생각했지만, 혈불과 부딪쳐 본 남궁진천의 얘기를 들으면 여기 정의맹에서도 일대일로 대결할 사람이 없을 절대강자였다.

그러니 천무백이 무사하리라고 안심이 되지 않았다.

‘구심점이 되어 줄 사내야. 그가 당해선 안 돼.’

급히 근방에 있는 하남의 소림과 섬서의 화산, 종남에 도움을 청했다.

천무백을 도와 혈불을 잡아 달라고.

‘만일 천무백이 혈불의 목을 들고 돌아온다면?’

그러면 명실상부 구심점이 될 게 분명하다.

창천검신의 후인이자, 미래의 천하제일인, 거기에 혈불의 목을 베었다면?

‘그래도 창천검신 같이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을까?’

아버지에게 들은 일화를 들으면, 과연 사람답지 않은 위인이 바로 창천검신이다.

아니,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저번 정마대전에서 백도의 승리는 오롯이 창천검신이 만들어 낸 것임을 깨달았다.

천무백이 과연 그만한 구심점이자, 승리를 위한 열쇠가 되어 줄 수 있을까?

그때였다.

전령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그 모습에 제갈여강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어디가 당했는가…….’

하나 이어지는 보고에 제갈여강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보고드립니다. 천룡검협이 하남성에서 혈불을 격살했습니다!”

꽈앙!

보고에 곽용이 탁자를 강하게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아아, 과연! 천룡검협이!”

단 하나의 보고.

제갈여강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분위기가 바뀌었군.’

판이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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