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70화 (270/318)

<검신재생 270화>

270.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감숙성으로 가야합니다.”

황보숭이 심각한 얼굴로 소리쳤다. 옆에 당수군과 소항 역시 딱딱한 얼굴이었다.

깊게 가라앉은 분위기는 제갈설아도 마찬가지. 그나마 척마대 소속이 아닌 곡지흠만이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는 연치가 짧아 혈불이 얼마나 대단한 마두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귀마가 혈귀곡의 이인자라고 했고, 혈불은 우두머리라지요. 그럼 남궁진천이 못 당합니다.”

혈불이 간 방향이 감숙성이라는 정보.

귀마는 결단을 내렸다.

자신이 천마가 되려면, 현 마도세력이 천무백과 백도무림으로부터 파훼 되어야 한다는 것을.

특히나 천마에게 무한한 충성을 바치는 혈불과 친위세력이 약화되어야 함은 명약관화.

그래서 중요한 정보를 넘겼다.

물론 천무백은 귀마의 발언을 전부 신뢰하지 않았다.

즉시 곡지흠을 통해 하오문과 개방의 정보를 동원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감숙으로 정체불명의 낭인 무리가 움직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정체불명의 낭인 무리가 아무래도 혈불과 마인들일 확률이 높군.”

그들의 행적은 놀랍게도 남궁진천이 감숙에서 활동하는 범위와 거의 일치했다.

천무백이 귀마를 노려봤다.

“정의맹에 첩자를 심었군?”

“내 관할은 아니다.”

“첩자에 대한 정보는 넘기지 못 하겠다?”

귀마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혈불이 관리해. 난 첩자가 누구인지, 얼굴도, 이름도 몰라. 내가 네놈을 잡으러 온 건, 월야방의 구원요청으로 근방에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첩자의 정보를 혈불 홀로 관리한다?

천무백은 저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추후에 판단하기로 했으나, 만일 사실이라면 알만했다.

‘정보를 홀로 통제한다는 것이니,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군. 적어도 혈귀곡 내에선 말이야.’

그런데도 귀마가 찍소리도 못 낸다는 건, 그만한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실력이든, 업적이든 무엇이든간에.

“만일 첩자들이 많다면, 다른 사람들도 위험해요.”

제갈설아가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척마대를 기점으로 정의맹은 여러 무사를 바깥으로 내보내며 여러 작전을 시행 중이었다.

“자칫 다 각개격파 당할지도 몰라요.”

“적어도 우리가 파악한, 혈불의 움직임만큼은 막아야 합니다.”

천무백은 대답하지 않고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귀마를 봤다.

“귀마야.”

“왜 부르느냐.”

“지금 가면 구할 수 있겠냐?”

“이미 뒈져 있을 거다.”

“저, 저 추악한 노괴가!”

황보숭이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귀마가 눈을 한번 부라리자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춤 물러섰다.

귀마가 아무리 천무백에게 당했다고 한들, 기세가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건 당연한 사실이다.

“이미 나보다 먼저 움직였지. 지금쯤이면 그 남궁가의 용이라고 불리는 애송이는 진즉 죽었고, 남궁세가로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하오문주.”

“말씀하시오.”

“우리가 지금 안휘성으로 당장 움직이면, 남궁세가를 구원할 수 있나?”

“······아시면서 왜 물어보시오. 이미 늦었소. 하지만 검성이 남궁세가에 있으니, 오히려 혈불이 격퇴당하지 않겠소?”

하오문주가 단지 정보만 많이 쥐고 있는 사람은 아니다.

응당 그 위치까지 올라선 인물이라면, 정보를 가공, 분석하여 결론까지 내야 했다.

그런 곡지흠의 냉정한 말이었으니, 황보숭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붉으락푸르락 붉어졌다.

"그럼 이대로 남궁진천과 척마대원들이 몰살당하는 걸 귀로만 듣겠다는 겁니까?"

"황보숭."

"······!"

황보숭은 입이 꾹 닫혔다. 무심한 목소리엔 알 수 없는 묘한 힘이 담겨 있었다.

착 가라앉은 시선이 황보숭을 지그시 응시했다.

"애새끼처럼 굴지 마."

"······!"

황보숭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놀랍도록 냉정함을 유지하는 목소리에 새삼 자신이 방금까지 한 행동이 어떻게 비춰졌을까 뒤늦게 깨달아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언젠가 황보세가를 책임지고자 한다면 지금보다 더 냉정해져라. 분노하고 감정에 휩쓸린다고 마음대로 되는 호락호락한 강호가 아니야."

그야말로 촌철살인 같은 조언이자 충고였기에 황보숭은 이를 악물었다.

반박할 수 없었다. 천무백 역시 겉으론 감정의 희비조차 보이진 않았지만, 지독할 만큼 차가운 목소리에는 은은한 분노가 깃들었음을.

천무백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는 전형적인 녀석이다."

"······남궁 공자가요?"

제갈설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척마대에선 남궁진천을 소문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생겼다. 천무백의 지독한 수련에서 월등한 성과를 직접 보여 줬으니까.

전형적이라는 말은 너무 저평가가 아닐까 싶었다.

아니면 천무백의 눈높이는 얼마나 높기에 천하의 남궁진천도 저런 인물평을 듣는단 말인가.

"전형적이기에 지극히 정석적인 사람이지."

어쩐지 의미심장한 말이 이어졌다.

"전형적이기에 정석적이라고요?"

"전형적인 후기지수, 전형적인 청년 영웅. 타고난 재능과 월등한 신체, 화려한 배경과 뒷받침되는 내공. 수많은 협객의 이야기 속에서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전형적인 인물이지 않소?"

"그럼 정석적이란 뜻은······."

"생각지 못한 계책, 위기를 돌파하는 기발한 행동 따위는 없지만, 닥친 상황에서 가장 최선을 찾아 움직일 것이오. 정석적으로. 때론 가장 정석적인 상대를 깨기가 힘든 법이지."

천무백은 많은 전장과 전투를 겪어봤다.

상대해 본 적 중 가장 까다로운 상대는 기발한 계책이나 변수를 통해 판을 뒤엎는 승부사가 아니었다.

‘철저한 만큼 정석을 지키는 놈들이 가장 까다롭지.’

정석이 괜히 정석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오랫동안 수많은 현인과 고수들이 경험으로 쌓아 온 역사에서 오롯이 정수만 뽑아낸 것이 바로 정석이다.

남궁진천은 응용력이 부족하나, 뚝심 있게 정석을 유지할 재능을 갖췄다.

“정석을 지킨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소. 강인한 정신력과 출중한 실력이 바탕이 되어야 하지. 흔들리지 않고 굳건해야 하지.”

“남궁 공자가 그런 사람이라는 건가요?”

“맞소.”

“그래도······ 상대가 저 노인보다 강하다면.”

혈불은 귀마보다 강하다.

나이도 훨씬 많은 귀마를 대신해 혈귀곡의 우두머리인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연히 남궁진천이 아무리 정석적인 움직임으로 버틴다고 해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아마 근방의 백도문파를 규합하면서 어떻게든 버티면서 도주하고 있을 것이오. 동시에 정의맹과 자신의 가문에 구원을 청했겠지, 황보숭.”

“네.”

“정의맹의 소식통 통해서 들어온 정보가 있었나?”

“최근 접선했을 땐 없었습니다.”

천무백은 고심했다.

소식이 오지 않은 이유는······.

“아직 구원을 청하기 전이야. 아니면 지금쯤 연락이 오가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아직은 버티고 있다는 얘기 아닙니까!”

황보숭이 흥분하며 나섰다.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회에 혈귀곡을 깡그리 지워야지. 혈불은 내가 잡는다. 감숙으로 이동한다.”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 * *

“버텨야 한다. 버텨야 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티고, 조금만 더 도주하면 된다.

남궁진천은 기민하고 판단력이 빨랐다. 괜히 사람들이 그에게 남궁가의 용이라는 별호를 붙여준 게 아니다.

변칙적인 판단은 무리더라도, 그는 정석을 선호했다.

가장 완벽하기에 정석이다. 더구나 남궁진천은 과거의 남궁진천이 아니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천무백에게 여러 깨달음을 받았다.

기민한 판단력에 날카로운 감각이 더해졌다. 척마대의 일부 무사들을 잃었지만, 이만한 무사가 건재한 것도 순전히 남궁진천의 판단력이었다.

“근방의 백도 문파들이 무사들을 모아 오고 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벗어나면 섬서성이다. 섬서에만 가면 소림과 화산이 우릴 구원해줄 것이다! 그곳에서 버티면 아버지가 곧 대남궁세가의 모든 무사를 이끌고 오실 것이다!”

남궁진천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혈불.

지독하고도 소름이 돋는 절대자.

옛날 같았으면 그대로 호기를 부려 덤볐으리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천무백과 만난 이후 헛된 호기는 자신이 약자라는 걸 증명하는 것에 그칠 뿐이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상대할 자는 몇 명 안 된다. 천하제일을 논할 정도는 되어야······.’

남궁진천은 냉철하게 생각했다. 자신은 불가다. 천하제일을 논할 정도는 되어야 혈불을 잡을 수 있다. 맨 처음 떠올린 건 다름 아닌 아버지, 검성이다. 강호 인사들이 천하제일로 꼽기로 주저앉는 최강의 무인이 바로 아버지니까.

하나 남궁진천은 중원 곳곳으로 구원요청을 전하면서 불현듯 한 사람이 떠올랐다.

‘천무백······ 아니 대주.’

그의 가공한 실력을 잘 알았으나, 아버지와 비견될 정도로 천하제일이라 꼽을 수는 없다.

하지만 남궁진천은 계속 머릿속에 천무백 이름 석 자가 맴돌자 공교로웠다. 어쩐지, 아버지인 검성이 이곳에 오는 것보다, 천무백이 오기를 더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모르지. 정말 모르지. 대주가 내가 보지 못할 정도로 더 강대한 실력을 갖췄을지.’

그리 생각하며 남궁진천은 척마대를 이끌었다. 어떻게든 싸움을 피하고 도주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에 닿았다.

“혈불, 혈불이다!”

“젠장! 벌써 이만큼!”

결국, 뒤가 잡혔다. 혈불 역시 직접 행차한 만큼 최소한 남궁진천의 목은 거둬가야 했으니까. 남궁세가의 후계자를 죽이고, 나아가 남궁세가를 완전하게 지우는 게 혈불의 진짜 목적이었다.

정의맹에 남궁세가의 힘까지 합쳐진다면 정말로 골치 아플 터.

남궁진천의 얼굴은 아연해졌다.

‘더는 무리군.’

남궁진천의 생각이 옮았을까. 도주하던 척마대 무인들은 결연한 얼굴로 굳게 두 발로 섰다.

애당초 정의맹에 들어온 것도 마도와 싸우기 위한 마음이지 않았던가.

비록 파벌을 나누고 추악한 모습을 보여 줬다지만, 그들이 마도와 싸우고자 하는 마음은 변치 않았다.

“적어도 혈불 몸에 칼침 하나 박아 주자고.”

“까짓것, 설마 혈불이 휘두르는 장법이 대주의 귀싸대기보다 빠르겠냐.”

척마대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얘기에 남궁진천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다.

‘비슷한 수준이면, 적어도 한 방에 나가떨어지진 않겠군.’

설마 그 귀싸대기보다 빠르고 강력한 장법이 있을까.

그것도 버텨냈는데, 한방에 꼴사납게 죽진 않겠구나 싶은 남궁진천은 검을 곧추세웠다.

하나 그 자신감은 점차 옅어졌다.

“어리석은 중생들 같으니라고. 부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도주하면 쓰겠소?”

터벅터벅 걸어 나온 혈불은, 일견 보기에는 고아한 노승이었으나 역설적으로 기괴했다. 자비로운 듯한 웃음 아래로 손에 척마대 무사 한 명의 목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피에 젖은 부처라는 별호가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남궁진천은 입을 다물었다.

“죽여!”

그때, 목만 돌아온 동료를 보고 참지 못한 척마대원이 참지 못하고 뛰어나갔다.

남궁진천이 미처 말릴 새도 없었다. 그전에 장법에 머리통이 수박처럼 터졌으니까.

“아······.”

본적 없는 가공할 파괴력에 남궁진천마저 가슴이 욱신거렸다.

기세 좋게 월야방의 거점을 파괴하며 사기를 올렸던 척마대 모두 딱딱하게 굳었다.

월야방의 살수 따위와는 비견되지 않는 진짜 마인(魔人).

격(格)을 달리하는 압도적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

혈불을 중심으로 거대한 포위망을 갖추며 접근해오는 마인들의 물결.

도주하는 척마대의 배가 넘는 인원에 절망감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우둑!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질식할 것 같은 정적을 가로지르는 파열음.

척마대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향했다.

그림자처럼 조여 오던 마인들 사이로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빛이 번졌다.

처음엔 아주 작은 불씨였다.

한데 그 불씨가 이내 마인들을 불사르듯 타올랐다.

“······?”

마인들 사이로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를 느낀 남궁진천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마치······자신들이 혈불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 같은 당혹스러운 감정이 저들 사이에서 피어나고 있지 않은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이유를 깨달았다.

마인들의 비명과 솟구치는 피안개 사이로 새하얀 빛이 거침없이 공간을 가르고 있었다.

누군가 마인들을 거침없이 베고 있었다.

허공으로 솟구친 새하얀 후광 사이로 흩날리는 백발.

“······!”

하늘을 가득 메우는 순백의 원광(圓光), 혈불이 만들어낸 검붉은 기운을 깡그리 몰아내고, 쏟아지는 모든 공격을 잠식해 버리는 빛.

새하얀 무복, 어마어마한 기파에 휘날리는 거친 백발,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번뜩이는 맑은 정광(晶光).

백호(白虎).

어쩌다 마주할 수 있는 영물 백호가 아니라, 신화 속 사신수 중 신령된 존재를 보는 듯한 착각.

흡사 백호를 보는 듯한 압도적인 기백이 좌중을 무겁게 짓눌렀다.

홀로 서 있으나, 가득 메워져 있고.

홀로 칼을 들었으나, 만 명이 칼을 든 것보다 날카로웠고.

홀로 빛을 내고 있었으니, 그 빛이 무엇인지 깨달은 남궁진천은 이내 몸이 떨렸다.

“천하제일인······.”

하지만 아버지는 아니다. 검성은 아니다.

남궁진천의 머릿속에 오로지 한 명만이 떠올랐다. 본적도 없으나, 아버지가 그저 감탄하며 질시하고 경외하던 존재.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검존(劍尊) 유백기.

창천검신의 유일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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