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69화 (269/318)

<검신재생 269화>

269. 이미 시작됐다

귀마는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 그의 나이도 구순에 가까워진 터.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었다.

천무백은 가만히 기다렸다. 차 한잔 없지만, 기다림의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귀마의 얼굴 너머로 변하는 갖가지 색채를 가볍게 즐겼다.

처음 천무백을 상대할 때만 해도 기세 좋고, 정력 넘치던 대마두였지만. 그런 모습은 이젠 사라졌다.

지금 천무백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저 노인이었다.

천무백은 지금까지 노인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노인의 생각과 노인의 감정, 노인의 사고방식을 이 세상에서 가장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 천무백이다.

‘한창 증손주의 애교나 즐기면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나이다. 그런 이가 아직도 정력적으로, 권력을 추구하고 패권을 추구한다. 인생의 황혼기에서도 끊임없이 싸우고 직접 나서기도 한다.’

어쩌면 노욕(老慾)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하나 천무백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욕심이 어디 젊은것들만의 특징이던가?’

욕심은 인생을 나아가게끔 하는 강력한 원동력이다.

구순이 넘은 저 귀마에게도 욕망이란 거대한 원동력이 남아 작동하고 있다.

원동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패권을 원하는 마음. 그건 진심이었다.’

천무백은 보았다. 감정의 색채. 흔들림이 없고 뚜렷했다. 진심이다. 귀마는 진심으로 마도의 패권을 강력하게 추구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마도만의 패권일까?

‘세상에 이인자로 태어나고, 이인자로 끝내고 싶은 사람은 없지.’

물론 한계를 알고 거기서 멈추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옆에서 누군가 충동질한다면?

‘끊임없이 더 높은 곳, 더 큰 권력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 욕망이, 정녕 마도의 패권이라는 신념에 닿아 있는가.

아니다.

저 수많은 감정의 색채를 보라.

‘마도가 패권을 이루면, 마도의 권력자인 본인의 권력도 더 커지는 것이니까.’

천무백은 귀마가 자신의 욕망을 마도의 패권이라는 거대한 신념으로 포장하고 있을 뿐이라고 판단했다.

귀마는 고민했다. 고심했다.

비록 마도천하를 노릴 수는 없는 마도라도, 그 거대한 도는 사라지지 않는다.

천무백과 정의맹의 힘에 위기에 빠진 마교. 그 마교를 자신이 접수할 수 있다면? 천무백의 말대로…….

‘내가 천마가 된다면?’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이 흘렀다.

천마(天魔).

마도의 정점.

귀마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천무백을 바라봤다.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는 얼굴을 보며 귀마는 지친 기색으로 물었다.

“날 천마로 만들겠다는 속셈인가? 그리고 마도를 네놈의 꼭두각시로 만들겠다고?”

천무백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꼭두각시는 무슨. 어차피 나는 천마를 죽일 거야. 혈불도 죽일 거야. 다른 간부들도 죽일 거야. 그런데 말이야. 죽여도 마도는 사라지지 않아. 도(道)는 흐른다고. 장강의 강물처럼. 그러면 수십 년, 수백 년 후에 군천악이나 지금 천마 같은 놈이 또 튀어나와서 다시 침공하겠지. 이젠 지겨워. 정말 지겨워. 정말로 지겹다고.”

“그땐 네가 없을 텐데.”

“한 수백 년 전에도 그 생각했었지.”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기에 귀마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얼굴에 피어로는 진한 씁쓸함에 차마 더 묻지 못했다.

새삼 자신보다 더 노인네 같은 얼굴이었으니까.

‘지긋지긋해. 마도 놈들.’

마도는 사라지지 않는다. 거의 불변에 근접한 진실이다. 그래서 천무백은 생각을 달리한다.

마도를 새외문파로 국한한다.

‘다 없애버린다고 되는 게 아니야.’

다 때려죽인다고 그게 되나? 아니다. 마도의 교리, 그들의 본성과 긴 세월동안 쌓아 올린 무공, 그들의 사고, 인식, 성질 자체를 뒤바뀌어야 한다.

천무백이 홀로 할 수 있나? 전혀. 천무백은 작금 강호에서 백도의 인물이다.

결국, 긴밀하게 협의할 사람이 필요하다. 바로 마도 내부에서.

지금까지의 마도를 싹 다 뒤엎고 교리를 수정하고 규율을 바꾸고, 성질 자체를 뒤바꿀.

그러려면 최소한 마도의 정점이어야만 한다. 무너진 마도를 재건할 수 있는 권력자여야 한다.

“……!”

천무백의 의도를 눈치챈 귀마의 눈이 번쩍 뜨였다.

“협력하자는 건가? 나하고?”

“마도의 정점으로서 권력을 추구하겠는가, 마도의 한낱 도구로 나에게 뒈지겠는가?”

“…….”

귀마는 입을 다물었다.

너무도 어려운 질문이었고,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천무백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생각해 보라고. 암종도 이젠 마도 패권을 한번 추구할 때가 됐지. 마류칠종이 뭐야. 마류칠종이. 종단은 하나만 있으면 그만이야.”

그리 중얼거린 천무백은 귀마를 뒤로하고 누각에서 나왔다.

흘깃 뒤돌아보니, 귀마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온갖 감정의 편린. 아무리 매력적인 조건이어도 쉽사리 넘어오진 않을 것이다.

‘천마를 거론할 때 떠오른 감정인 진짜 두려움이었으니까.’

개인의 욕망이 과연 천마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까.

‘뭐, 못 이겨도 상관없고.’

솔직히 말해, 천무백은 하면 좋고, 안 해도 나쁘지 않다는 견해였다.

천무백은 그저 미끼를 던졌을 뿐이다.

‘어차피 곧 뒈질 늙은이. 추악한 노괴, 음흉한 너구리를 어떻게 믿고?’

그렇다고 마교를 새외문파로 국한한다는 계획은 거짓이 아니었다.

천무백에게 다른 수단이 있으니까.

아니, 이쪽이 진짜다.

‘검종이 유일한 마도가 되고, 장노가 천마가 되면, 더없이 완벽하지.’

천무백이 빙긋 웃었다.

귀마는…….

‘그저 도구로 살고 죽어라.’

마도에서나, 천무백의 손아귀에서나.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다.

* * *

천무백은 잠시 북검회의 장원에서 머물렀다.

우선 당수군, 황보숭, 소항의 몸 상태가 곧장 움직이기는 좋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어쨌든 척마대의 임무는 달성했다.

살왕을 죽였다. 월야방은 이제 끝났다. 그러니 급히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천무백도 귀마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유심히 살펴야 했으니까.

또 천무백 역시 살왕과의 싸움, 그리고 이어진 귀마와의 싸움을 다시 한번 복기했다.

결과만 놓고 추론하자면 천무백의 압승이다.

이미 이긴 싸움을 뭣 하러 복기하냐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천무백에겐 매 싸움이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근질근질하군.’

천무백은 묘한 기분이었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진짜 간지러운 건 아닌데, 어디 피부 안쪽에서 무언가 근질거리는 기분.

지금의 기분이 딱 그랬다.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 전부가 근질거렸다.

내공의 흐름이 갑자기 변화한 것도, 양이 늘어난 것도 아니다.

운기조식을 해 봐도 근질거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천무백은 집중하여 제 몸을 관조했다.

‘아무래도 그 태극을 만든 것 때문에 이런 거 같은데.’

하단전은 중단전을 넘을 수 없다. 상단전 역시 중단전을 넘을 수는 없다.

혈맥과 기맥을 통해 섞일 수는 있지만, 기운이 다른 단전에 침투할 순 없다.

애당초 기맥을 통해 상단전과 하단전의 서로 다른 내기가 연결되는 현상도, 천무백의 선기라는 미증유한 힘이 아니었다면 불가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래. 이거였어. 선기는 그렇다 쳐도, 극음지기가 상단전에 침투해 있고, 항마기도 하단전에 들어가 있단 말이야?’

물론 아주 극소량이다. 천무백이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 보이는 극도로 적은 일부.

이것이 묘한 근질거림을 전해 주는 이유였다.

천무백은 황당했다.

‘이게 되나?’

제아무리 천무백이어도 이해가 안 가는 상황에 맞닥뜨리곤 하는데, 지금이 그랬다.

상단전의 기운이 하단전에, 하단전의 기운이 상단전에 들어갔는데 충돌이 없다고?

이건 중단전을 통해 연결되는 게 아니라, 그냥 침투한 건데?

‘주화입마에 백 번은 빠지고도 남아야 정상인 상황이거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천무백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게 나름의 기연이라고 여겼다. 태극을 이용해 세 기운을 하나로 합친 일.

문제는 그건 분명 외부에서였다.

내부의 단전에서 끌어올린 세 기운을 밖에서 합친 것이다.

한데 체내에서 이렇게 합쳐져 있다고?

새삼 등골이 싸늘했다.

‘귀마와 싸우던 도중 주화입마에 빠졌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그야말로 천우신조였다.

이 상태로 귀마와 싸웠다니. 만일 싸움이 격해져 내공을 다 끌어 쓸 정도였다면, 일이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을지도 모른다.

천무백은 조심히 내공을 움직였다.

일단 각각의 단전에 침투한 상반된 기운을 원래의 위치로 되돌려야 한다.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극한까지 닿은 집중력으로, 세심한 운용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無形)의 기운을 오로지 의지와 심법 하나만으로 움직여야 한다.

천무백은 있는 힘을 다해 집중했다.

우선은 하단전에 빨려 들어간 항마기부터…….

‘어?’

순간 천무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항마기를 슬쩍 움직이려는 순간, 그 항마기가 거침없이 더 깊이 파고들더니 극음지기와 섞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 강해진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이거 무슨…….’

아까는 극음지기 사이에 외톨이처럼 섞여 있었다면, 지금은 아니다.

극음지기와 한 몸처럼 서로 기운이 겹쳐지고 있었다.

이건 천무백이어도, 아니 대라신선이 와도 건들 수가 없다.

‘이건, 알았어. 일단 물러나고, 그러면 상단전을…….’

경천혼공을 조심스럽게 운공했다.

상단전에 들어간 극음지기는 더 위험했다.

뇌.

그 뇌에 냉기가 치민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위험하지 않은가.

하나 이내 천무백은 탄식을 터뜨렸다.

“이게 대체 뭐야?”

끝내 참지 못하고 천무백의 입에서 황당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어처구니가 없는 괴현상.

상단전에 침투한 극음지기도 하단전처럼 똑같이 섞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천무백도 건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 이거 또 환생할 뻔했네.”

자칫 잘못 건들었다가 아직 검극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그 달걀 얼굴을 또 만나게 될법했다.

천무백은 일단 조용히 관조했다.

“기운이 섞이고 동화되고 있어. 마치 내가 외부에서 세 가지 기운으로 태극을 만든 것처럼.”

지금 상태로는 위험해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변수다.

천무백이 모르는 변수. 천하의 천무백의 광대한 지식에도 없는 변수.

때문에 천무백은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문제가 없지만…… 이거야 원. 세 단전의 의미가 사라지는…… 어?”

순간 천무백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세 단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

“이거 설마……?”

그때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숨기려고 한 인기척이 아니라, 대놓고 나 왔다고 알리는 인기척.

귀마였다.

천무백은 귀마의 발걸음에서 그 감정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중요한 순간이라, 천무백은 일단 제 몸에 생긴 괴현상을 잠시 생각의 저편에 밀어 뒀다.

만일 잠깐 떠오른 사실이 진실이라면, 천무백에게 좋으면 좋은 일이지 나쁜 일은 아니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귀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추레하게 힘이 빠진 얼굴에선 피로가 절절하게 느껴졌는데, 눈만큼은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천무백의 입가에 씩 미소가 떠올랐다.

“결정했나?”

“내게 선택권이 있나? 내가 네놈의 권유를 따르지 않으면 죽일 생각 아닌가?”

“난 계속 말했어. 네가 정보를 다 내놓으면 죽이겠다고. 어차피 네가 죽는 건 기본 사항이야. 다만 길을 열어 준 것이지.”

귀마가 강렬한 안광을 토했다.

“천마가 죽고, 마도가 무너지려면 네놈들의 힘이 강해져야겠지.”

“결정했나?”

“당장 움직여야 할 거다. 천룡검협.”

“움직여?”

“내가 널 잡으러 북검회로 직접 왔다. 살왕과 협력해 널 죽이려고.”

“그래서 네가 잡혔잖아.”

“난 혈귀곡의 이인자, 암종의 종주, 가장 찬란한 다섯 별 중에 이성(二星). 그런 내가 움직였다.”

그제야 천무백의 얼굴도 묘해졌다.

“너만 움직였단 게 아니군.”

귀마의 고개가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렸다.

“네놈이 이끄는 무사들이 척마대라고 했나? 정의맹에 소속된 인물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이 시작됐다. 그쪽엔 아마 혈불이 갔겠지. 남궁진천을 죽이고, 남궁세가를 아예 없애버리기 위해서.”

“…….”

천무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천무백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귀마의 딱딱한 음성이 무거운 정적을 가로질렀다.

“이미 시작됐다. 정마대전이.”

천무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진짜로 바빠질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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