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37화>
237. 마지막 아량
“…….”
살수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가 한 명에게 향했다.
바로 승려의 행색을 한, 천무백의 말에 대답하던 자였다.
승려는 이들 중 가장 뛰어난 특급살수인 만큼, 최고서열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월야방에 특급살수가 열 명도 안 되는 걸로 알아. 옛날얘기니 지금은 모르겠다만, 큰 차이는 없겠지. 그러면 땡중, 네놈이 여기 대가리지?”
“……그렇다.”
“그럼 결정해. 내 의뢰를 받아들일 것인지. 백도와 마도도 아니고, 흑도도 아닌 정사지간의 살문이니, 내 의뢰도 받아들일 수 있는 거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의뢰는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리고 의뢰에 대한 거절 역시 월야방의 권리다.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모든 의뢰가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다.
가령 황제 암살 같은 말도 안 되는 일들도 있지 않은가.
여기서 거절한다고 해도 특별할 건 없다.
하지만 문제는 분명 존재했다. 상대가 치르겠다고 했던 값.
“의뢰비는…… 목숨인가.”
“월야방 전체의 목숨 값이면, 혈귀곡 곡주를 치는 값으론 적절해 보이는데.”
적절하다.
아니, 적절하다 못해 과할 것이다.
특급살수 일곱에 정예 살수만 이백 명이 넘는 명실상부 강호 제일의 살문.
그들 전부의 목숨 값이라면 혈귀곡의 곡주를 죽이기엔 차고 넘치는 값이다.
그것이 문제였다. 저 의뢰를 받지 않으면 값을 치르지 않는다는 뜻.
한마디로 그건 목숨을 거둬들이겠다는 의미다. 승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협박이군.”
“협박이지.”
“월야방은 협박에 굴복해 살행을 하지 않는다.”
“잘 선택해.”
“……?”
천무백이 빙글거리며 웃었다.
승려의 얼굴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제 감정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저 눈빛.
다 안다는 것처럼 가소로운 기색이 가득한 미소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두려웠다.
“문파의 존망이 지금 네 선택에 달렸으니까.”
“……!”
승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살수들의 눈빛을 읽었다.
처음 천무백을 상대하면서, 목숨을 던지면서 무공을 파악할 정도로 독심(毒心)을 지녔던 이들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들은 처연하다 할 만큼 두려움에 매몰되어 있었다.
승려는 탄식을 토했다.
그만큼 천무백의 압도적인 기세에 다들 질려 버렸다.
그래도 불구하고 승려는 애석하게도 천무백의 의도를 따를 수 없었다.
“불가(不可).”
너무나 단호한 대답에 천무백 역시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단지 내 의뢰라서 거절하는 것인가? 아니면 본래 의뢰자의 의뢰를 끝내기 전에는, 수행할 수 없음인가?”
“둘 다 아니다.”
“하면 뭐지?”
“암살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천무백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매사 태연한 천무백치곤 꽤 큰 반응이었다.
“암살 불가능한 대상이라는 판단이라고?”
살수는 살행 대상의 실력을 확실하게 점검한다.
도저히 살행을 시도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서면, 암살 불가능의 대상에 올린다.
천무백의 표정이 묘해졌다.
‘목숨 값을 걸었는데, 불가하다라…….’
그만큼 혈귀곡의 최상단, 우두머리의 실력이 그만하다는 얘기다.
천무백의 얼굴에 흥미가 떠올랐다.
“난 암살 가능한 대상이었나?”
“내부 회의 결과 시간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지금은 그 결과를 어떻게 생각해?”
“……정보가 부족했다.”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머릿속이 맹렬하게 회전했다.
정보가 부족했다고 한들, 의뢰를 받은 건 혈귀곡으로부터다.
‘내가 독마를 죽였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테지.’
전대의 대마두인 독마는 천무백의 손에 무참히 죽었다.
혈귀곡은 이 사실을 안 상태에서 월야방에 의뢰했다. 분명 최소한 독마와 동급 이상이라는 정보는 월야방으로 입수됐을 터.
그런데도 월야방은 살행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만큼 월야방의 저력이 깊다는 것을 증명하리라.
천무백의 생각은 더 멀리 뻗어나갔다.
‘독마와 최소 동수라는 판단에도 날 살행 대상으로 올렸다. 그런데 혈귀곡 곡주는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독마조차 우습게 여길 대마두라는 의미다.
천무백은 묘한 눈빛으로 살수들을 쳐다봤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푸르딩딩한 입술. 발끝부터 치미는 맹렬한 냉기는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아무런 혈도 역시 짚지 않았기에, 온몸이 천천히 바닥부터 얼어 가는 끔찍한 고통을 살수들은 느끼고 있었다.
“곡주, 그러니까 일성이란 놈의 무력이 어느 정도길래 암살 불가지?”
승려는 입을 꾹 닫았다. 의뢰자의 정보를 밝히지 않는 것 역시 살수들의 절대 명제.
과연 특급살수답게 온몸이 천천히 얼리는 와중에도 꿋꿋이 지켰다.
천무백은 조용히 쳐다보다가 다가가 손을 내질렀다.
쩌저저적!
“……!”
빙백신공은 북해빙궁의 절세신공.
거기에 선기가 스며든 극음지기는 말 그대로 파멸적이었다.
혈관 속의 혈액마저 얼려 버릴 극한의 냉기가 주입되자 살수들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몇몇은 천천히 얼어 죽는다는 공포 때문인지 눈물을 머금었다.
승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처연한 목소리였다.
“……그냥 죽여 주면 안 되겠소?”
“수많은 살생을 거듭했는데, 편한 죽음을 바라는 건 너무 양심 없지 않아?”
빙백신공의 극음지기 덕분인가.
싸늘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승려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사실 여기 있는 살수들 모두 살아남기를 포기했다.
천무백의 실력과 현재 가진 의도와 목적을 파악했으니, 살아나갈 수 있으리라는 판단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모두 죽음을 각오했다.
그렇다고 한들, 이런 죽음은 원치 않았다.
승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천무백은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체념했군.’
일부러 혈도를 짚지 않았다. 어둠 속에 스며드는 살수들은 일반 무인보다 더 감각이 예민하다. 그런 와중에 전신이 천천히 얼어서 죽어 간다는 지독한 공포는 아무리 철혈간담의 살수라도 버티기 어렵다.
차라리 편한 죽음을 바랄 것이다.
죽음을 앞둔 이들이라면, 조금은 초연해지기 마련.
얼굴 너머로 보이는 빛무리를 보며 천무백은 제 생각이 통했다는 걸 알았다.
승려가 문득 말했다.
“예전에 아주 큰 의뢰를 맡은 적이 있지. 난 그때 살수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막내였는데, 나 같은 신입까지 다 동원된 큰 의뢰였소. 얼마나 강력한 고수를 죽여야 하는 건지, 방주도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지.”
월야방 전체가 달려들 고수?
그럴만한 인물이라면, 적어도 천하에서 손에 꼽히는 사람들일 텐데.
“누구지?”
“검존이었소.”
“…….”
천무백의 표정이 살짝 굳자, 승려가 흐느끼듯 웃었다.
“정마대전 당시 월야방은 철저하게 몸을 숨긴 채 힘을 길렀고, 자신감에 차 있었지. 창천검신이 우화등선한 이후, 쪼그라든 마도의 잔당이 검존에 대한 살행 의뢰를 해 왔던 것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네놈들 판단력에 의심이 드는데.”
“맞소. 월야방만으로는 검존을 죽일 수 없었지. 5년이었소. 5년 동안 기다리고 기다려서 기회를 만들었지. 모든 환경과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었지. 그런데 검존에게 살수들은 모두 궤멸하였소.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마도의 인물이 난입했지. 알고 보니 그는 월야방과 검존이 서로 죽고 죽이는 동안, 어부지리를 취할 속셈이었던 거야. 그자가 오니 분위기가 급변하더군. 검존마저 당황한 기색이었으니까.”
“누구지?”
“전대의 인물인데, 어린 그대가 알지 모르겠군. 혈불(血佛).”
천무백이 쓰게 웃었다.
“혈불…… 그가 혈귀곡의 곡주로군.”
“…….”
대답은 없었지만, 긍정의 침묵이었다.
피에 젖은 부처.
천무백은 그 별호가 가장 어울리는 사내를 아주 잘 기억했다.
‘마도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강자였지.’
정마대전가 끝나가는 막바지에 드러나 큰 피해와 충격을 안겨 줬던 마두.
고작 20대의 나이에 마도에서 한손에 꼽히는 자였으니, 40년이 지난 지금은 경지를 짐작하기 어렵다.
‘입신지경은 넘었을 테고, 유백기, 요 녀석이 맹공에 당황할 정도였으면 지금쯤이면 절세지경에 닿았을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 정도라면, 월야방이 죽었다 깨어나도 의뢰를 받지 않겠다고 천명할 만했다.
‘이십대의 나이에 혈종의 종주를 잡아먹고 스스로 종주에 올라선 괴물이니……. 그랬군. 그가 혈귀곡의 곡주였어.’
충분한 정보다.
혈귀곡에 대한 정보는 많이 입수했어도, 그들의 우두머리의 면면은 파악하지 못했는데 이번엔 성과가 확실했다.
천무백은 문득 승려를 바라봤다.
좌중의 살수 중 둘 셋은 이미 스며드는 냉기를 버텨내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나머지도 시간문제였다.
승려의 처연한 눈빛이 천무백에게 닿았다.
“편하게 죽여 주시오.”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고통받으며 죽어 가는 걸 지켜보는 취미 따위는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이들을 살려 둘 만큼 천무백의 아량이 넓진 않다.
적어도 자신을 공격한 이들이고, 그 의도 역시 단지 더러운 살수의 살행이었으니까.
빠악!
천무백은 천천히 일장을 내질렀다. 살수들이 하나, 둘씩 머리가 깨져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승려 앞에 섰을 때, 승려는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월야방 전부를 어떻게 할 것이오?”
“목숨값을 받으러 가야지.”
“전부 다 죽일 생각이시오?”
“한 번 날 죽이려고 했으면, 두 번도 할 수 있겠지.”
“철저하게 강호의 은원을 따지는군.”
“강호인이니까. 너희도 강호인이고. 우리 모두 강호인인데, 어찌 강호의 생리를 무시하랴.”
“애석하군. 월야방이 살 방도는 있소?”
“그만큼 살리고 싶은 문파더냐?”
“……내 형님이 방주요.”
“친형제냐?”
“그렇소.”
“걱정하지 마라.”
“……?”
“혼자 저승 가기 외로울 터이니, 곧 형제를 보내 주마. 유비와 관우, 장비는 한낱 한 시에 죽지 못했지. 적어도 너희 형제는 비교적 근시일내에 저승 길동무로 만들어 주겠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아량이다.”
승려는 탄식을 토했다. 그러다 이내 웃음인지, 울음인지 헷갈리는 소리를 낮게 내며 말했다.
“한 번 베푼 아량, 더 베풀어 주시오. 내 마지막 얘기를 들어주시오.”
“뭔데.”
“내 시체를 태우지도, 묻지도 말고 그저 짐승들의 먹이로 놔두시오.”
“…….”
“그래야 우리 형님이, 우리 월야방이 상대를 잘못 건드린 걸 파악하고, 중원 어느 곳이든 어디로든 도망칠 결심하지 않겠소.”
“살수야. 살수야.”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강맹한 내공이 손에 실렸다.
“어딜 도망가든 말이다. 나는 날 공격한 놈들.”
승려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대로 일장이 내질렀다.
“모두 끝까지 쫓아갈 거다.”
퍼억!
천무백은 고개를 돌렸다.
냉기 덕분인지 꺼진 모닥불 아래로, 식어버린 차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천무백이 혀를 짧게 찼다.
“차가 다 식었군.”
* * *
천무백과 제갈설아는 밤길을 천천히 말을 몰았다.
시체들이 널부러진 곳에서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 하루를 지낼 순 없으니, 차라리 좀 더 늦더라도 근방 마을까지 가기로 한 것이다.
제갈설아가 문득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월야방 말이에요. 어떻게 하실 건가요?”
“가만히 내버려 둘 순 없소.”
“위험하지 않을까요?”
제갈설아는 물론 천무백의 무력을 믿었다. 과감한 결단력이나 도저히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자신감을 신뢰했다.
‘공자의 실력은 두말할 것도, 심할 것도 없어. 대단해.’
제갈설아의 눈이 빛났다. 무인으로서 보면 천무백은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자였다.
하지만 월야방이란 살문을 상대하는 건 또 차원이 다른 문제다.
“정마대전 때는 월야방은 침묵했다고 들었어요. 양측의 의뢰 모두 받지 않았다고.”
“그러면 좋겠지만, 지금은 아니겠지. 이미 혈귀곡의 의뢰를 받았고, 그 의뢰는 아직도 진행 중이오.”
“……공자님을 노리는 의뢰요?”
“골치 아픈 상황이지. 포기하기엔 혈귀곡의 보복이 두렵고, 그렇다고 계속 진행하기엔 날 끝내서 종지부를 찍어야 하니. 이미 목격하고 직면한 위험인 혈귀곡 대신, 날 노리는 걸 선택하겠지.”
아예 의뢰를 받지 않았으면 모를까.
한 번 받은 이상 포기하지 않는다. 좀 더 은밀해진 위협이 언제든 천무백을 노릴 것이다.
그러니 천무백 역시 위험하다고 월야방을 가만히 내버려 둘 이유가 없다.
또 이미 천무백과 척을 졌으니, 어쩌면 월야방은 차라리 마도와 대대적으로 협력하는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천무백이야 월야방이 오든, 월야방 할애비가 오든 다 쳐 낼 수 있지만 다른 정파의 인물들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 픽픽 죽어 나갈지 모른다.
‘화근은 제거해야지.’
그렇다고 당장 말머리를 틀어 월야방의 본거지로 향하기엔 시간과 거리의 제약이 있다.
천무백은 천천히 생각을 가다듬었다.
“정의맹에서 일단 조직을 꾸려야겠소.”
“조직이요?”
“젊은 무인들이 혈기를 못 이겨 따로 사조직을 만들고 각기 행동한다 하지 않소?”
“네. 아…… 그럼 공자님은 그들을?”
“정의맹에서 창설하는 조직에 그들을 끌어들여야지.”
그리고 그들을 이용해 월야방을 친다.
곧 앞둔 마도와의 대대적인 전쟁 전에 예행연습으론.
“딱 좋은 상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