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36화>
236. 목에 얼마나 걸렸는데?
월야방의 역사는 깊다.
월야방이란 이름이 강호에 알려진 지 어언 이백 년.
거기에 월야방의 전신까지 생각하면 무려 오백 년이 넘는다.
월야방의 전신은 흑야(黑夜)였다.
당시 흑야라는 이름은, 지금의 월야방보다 더 소름 끼치는 악명을 떨쳤다.
듣기만 해도 낯빛이 파리해지는 그런 이름이었다.
그런 흑야가 사라지고, 잿더미에서 월야방이 일어난 원인에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단 한 명의 검객에게…….’
당시만 해도 300년의 역사를 가진 채 강호의 절대적인 살수 문파로 악명을 떨치던 흑야.
단 한 명에게 무너졌다.
물론 작금의 월야방 살수들은 코웃음쳤다.
정파가 월야방의 과거를 깎아내리기 위해 퍼뜨린 거짓이라고 여겼다.
강호제일살문이란 명성을 지녔던 흑야가 고작 한명에게 무너졌다는 건 분명 믿기지 않는 얘기다.
흑야가 나서면 천하제일인도 도망을 쳐야 한다는 얘기가 암암리에 돌던 시절이었다. 그런 흑야를 무너뜨리려면, 천하제일이 아니라 고금제일이 나서야하리라.
그리고 만일 정녕 고금제일인이 존재했다면, 흑야가 감히 고금제일인에 대한 살행을 시도할 정도로 멍청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살문의 절대명제는 가능한 살행 의뢰만 수락한다는 것이니까.
‘그렇지만…….’
어쩌면 살수들은 지금 자신들이 똑같은 멍청한 짓을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쳐…… 꺽!”
외치던 살수의 목이 갈라졌다. 천무백의 손이 더 빨랐다.
기점으로 살수들이 무자비하게 달려들었다.
이전처럼 한 명씩 나섰다간 답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온갖 암기들이 쏟아졌다.
쉐엑! 쉐엑!
하나같이 틈을 파고드는 암기. 독이 묻어 있는지 암기가 번뜩였다.
까가가강!
맹렬한 속도로 떠나간 암기는 애석하게 단 하나도 천무백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피하거나, 또는 쳐 내거나. 쏟아지는 암기를 모조리 파훼한 천무백은 곧장 기묘하게 움직였다.
검이 춤을 추듯 곡선을 그렸다.
언뜻 보면 노을 아래 추는 검무(劍舞)처럼 보이는 모양새.
느리고, 궤적이 컸다. 전문 살수라면 응당 피하고 막고 반격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터무니없이 보였다.
“헉!”
푸악!
이상했다. 살수들은 피하지 못했다. 천무백의 검과 부딪치는 순간 족족 죽어 나갔다.
마치 검에 기묘한 힘이 작용하듯이 살수들이 검의 궤적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흡사 검으로 베는 게 아니라, 휘두르는 검에 살수들이 목을 길게 빼고 갖다 대는 듯한 모양새였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살수들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설마……?’
‘움직임을 모두 예측하고?’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얼핏 검에 인력(引力)이 발생하여 살수들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니다.
애당초 그런 인력이 어찌 검에서 흘러나오겠는가.
답은 하나였다.
‘움직임을 예측하고, 검을 휘두르고 있어!’
기묘하게 느껴질 정도의 궤적은 달려드는 살수들의 움직임과 경로를 한발 앞서 파악하고, 먼저 휘둘러졌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살수들이 검의 궤적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끔찍한 사실을 주지한 살수들의 얼굴에 공포가 번졌다.
하지만 설령 알아차렸다고 해도, 천무백의 검은 여전히 붉은 춤을 췄다.
언뜻언뜻 비치는 노을빛 아래 드러나는 선명한 미소에 살수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수많은 목숨을 거둬들인 살수들이 보기에도, 천무백의 선명한 미소는 진정 두려웠다.
동료 살수들이 수도 쓰지 못하고 죽어 나가면서 점점 더 진해지는 미소는 보기만 해도 섬찟했다.
천무백은 진정 기꺼웠다.
‘이런 식으로도 쓸 수 있군.’
천무백은 지금 이 순간, 그동안 쌓아 온 능력을 모조리 드러냈다.
‘감정은 곧 무기에 담기는 법이지.’
우선 선안이었다.
선안은 단순히 상대의 감정을 읽는 데에만 가치가 있는 게 아니다.
감정은 곧 검의 궤적과 신체의 경로를 예상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지표였다.
선안 너머로 드러난 감정이 더 급할수록, 상대의 검은 빠르고 직선적으로 노려올 확률이 높다.
감정이 진중하고 무거울수록, 묵묵히 견제만 하다가 약점을 발견하면 찔러올 확률이 높다.
수많은 경험을 층층이 쌓아온 천무백은 감정을 곧 상대의 움직임으로 연결하는 데 아주 능했다.
싸움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중요한 요소인 이유는 분명했다.
하물며 살수들이 아닌가. 얼굴 위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살수들이니, 지금 천무백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움직임에 경악하고 있었다.
‘거기에 염동력까지.’
감정을 모조리 파악한다고 해도, 경로를 완벽히 예측하는 건 아니다.
이따금 살수 중에 특출난 이는 감정을 치밀하게 다스리면서 검끝이 흔들리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천무백이 알게 모르게 이용한 건 바로 염동력이었다.
심장이 거세게 진동하면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선기는 염동력의 형태로 발출됐다.
천무백은 이 염동력을 세심하게 운용했다.
‘상대의 움직임을 이끈다.’
검이 휘둘러질 땐 수많은 외부의 힘이 작용한다.
자연의 바람부터, 내공에 반응하며 끓어오르는 자연기까지.
거기에 염동력이 교묘하게 간섭했다.
상대가 예측경로를 벗어나려 해도, 교묘하게 작용한 염동력이 칼끝을 원하는 위치로 유도했다.
단 살짝만 흔들고 비틀어서 유도해도, 천무백의 궤적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마치 천무백은 그저 가만히 검만 휘두르는데, 살수들이 목을 갖다 바치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숫자가 많이 오니 좋구나!”
별안간 터져 나오는 천무백의 광소에 살수들의 몸이 움찔 떨렸다.
진심이었다.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특징인 살수.
그런 살수들이 워낙 많으니, 천무백은 지금껏 새롭게 얻어 낸 능력들을 마음껏 시험하고 갈고 다듬을 수 있던 것이다.
살수들에겐 목숨을 건 사투였으나, 천무백에겐 그저 새로운 무공의 시험이었다.
천무백의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에 살수들의 공세가 멈췄다.
살수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파리해진 안색으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벌써 천무백의 손아귀에 죽어 나간 이들이 칠 할이 넘는다.
월야방에 일곱 명밖에 없다는 특급살수 셋이 포함되었는데, 그중 둘이 벌써 죽었다.
나머지도 한 번 맡은 살행은 실패한 적이 없다는 정예.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아니, 천무백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아무리 어둠 속이 아닌, 정면에서 부딪친 거라지만 이게 말이나 되는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
‘살행 실패!’
살수들의 의미심장한 시선이 서로 허공에서 부딪쳤다.
타앗!
동시에 한 명이 천무백에게 몸을 던졌다.
나머지는 자리를 피해 사방팔방으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한놈을 제물 삼아서 도망을 치려고?”
천무백은 코웃음쳤다.
동시에 천무백의 손에서 냉기가 흘러나왔다.
북해의 빙백신공을 극도로 운용하여 쏟아내는 극음지기가 살수의 발을 얼렸다.
“……이익!”
하반신이 그대로 얼어붙은 살수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혼자 남아서 외롭겠지만, 걱정하지 마라. 네 친구가 돌아올 거니까.”
천무백의 말대로였다.
“……!”
“이 무슨…….”
사방팔방으로 튀어나갔던 살수들이 혼이 나간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내 그들은 돌고 돌아 결국 한곳에 모인 사실을 간파하곤, 경악성을 내질렀다.
“진법!”
천무백이 흘깃 제갈설아를 바라봤다.
살수들의 모든 신경과 이목이 천무백에게 쏠린 사이, 제갈설아는 은밀하게 진법을 꾸몄다.
“후우. 그래도 찻값은 했죠?”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는 제갈설아의 뿌듯한 미소에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훌륭하오.”
동시에 천무백은 극음지기를 마구잡이로 쏟아냈다.
순간 살을 저밀 듯한 강렬한 냉기에 살수들이 흠칫 놀랐다.
그들로서는 이해 불가능한 광경이었다.
지금껏 전혀 다른 무공을 보여 줬던 사람이, 갑자기 빙공을 선보인다?
애당초 빙공만큼 사용하기 까다로운 무공이 별로 없다.
그만큼 오로지 빙공에만 집중하고 갈고 닦아야 제대로 된 실력이 나온다.
더구나 내공의 결도 완전히 달리하고.
한데 천무백의 강렬한 냉기는 살수들이 지금껏 느껴본 어떤 냉기보다 더 순도 높고 가장 농밀한 냉기였다.
그 말은 즉슨…….
“……!”
“어때? 친구들이 다 똑같이 서 있으니 이제 외롭지는 않지?”
홀로 남아 천무백을 상대하려 했던 살수의 눈이 질끈 감겼다.
단 한 명도 도망가지 못한 채, 무릎 아래로 얼어붙어 땅에 꽂힌 듯 고정돼 버린 살수들.
파리해지는 안색을 보며 천무백이 불현 듯 물었다.
“나 하나 잡겠다고 이렇게 우르르 몰려온 거 보니……혈귀곡에서 대우가 섭하지는 않았나봐.”
혈귀곡이란 이름이 거론되었지만, 살수들의 얼굴에 특별한 감정의 편린이 흘러나오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의뢰자를 추측할 수 있는 흔적을 전혀 내보이지 않는 지독함이다.
다만 그들이 천무백의 선안을 몰랐다는 게 안타까울 뿐.
천무백은 혈귀곡을 언급하자 얼굴 너머의 빛이 현란하게 바뀌는 걸 목격했다.
‘거의 당연했지만, 뭐, 확실하군.’
오죽하면 혈귀곡이 살수들을 이용했나 싶기도 하지만.
‘싸우는 마인들 마다 족족 죽어 나가니…….’
새삼 혈귀곡의 입장이 일견 이해가 간다.
제 세력이 소모되는 걸 더는 참을 수 없었을 테니, 차라리 살수의 손을 쓰겠다는 생각이겠지.
천무백이 살수들을 지그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목에 얼마나 걸렸는데?”
그러자 살수 중 누군가 잇새로 씹어 삼키듯이 말했다.
“우릴 고문해도, 의뢰에 대한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다. 월야행의 의지다.”
“뭔 개소리야?”
천무백이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철신고검의 칼끝이 척하고 향했다.
“나 말고, 너희들 목 말이야.”
순간 공기가 차가워졌다.
* * *
“월야방 전체의 목에 걸린 값.”
“퉷!”
가장 대거리를 했던 승려 복색의 살수가 핏물이 섞인 침을 뱉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특급살수였다.
“오만하구나, 참으로 오만하구나! 천룡검협이여!”
“오만은 고작 그 숫자로 나 잡겠다고 쫓아온 너희들 얘기고요.”
“……!”
“너희들 전부 목에 걸린 값이 얼마쯤 하려나?”
대답은 없었다.
천무백은 발치에 놓인 돌을 찼다.
툭, 하고 가볍게 찬 것 같지만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퍼억!
살수 한 명의 머리가 처참하게 깨져 나갔다.
“……!”
“혼자 얘기하기 힘들다. 능허라도 있으면 옆에서 끼어들 텐데, 쯧쯧. 자, 대답해라. 너희들 전부 목에 걸린 값이 얼마쯤 하려나?”
“…….”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퍼억!
또 한 명의 머리가 깨졌다.
“얼마지?”
“…….”
퍼억!
한 명 더.
돌멩이를 하나씩 찰 때마다, 내로라하는 살수의 머리통이 허망하게 깨져 나가는 모습에 서서히 살수들의 얼굴에 공포가 번졌다.
무기력함, 분노, 두려움, 경멸…… 모든 감정이 휘몰아쳤지만, 결국 모두 두려운 눈빛으로 천무백을 쳐다보는 건 공통이었다.
그렇게 하나, 둘 계속해서 머리가 깨져 나갔다. 아예 천무백은 묻지도 않았다.
“이러면 광현까지 가야 하나?”
“……!”
순간 살수들의 안색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광현.
월야방의 본거지가 있는 곳.
그곳을 언급한 사실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강호 인사 중 월야방의 본거지를 아는 곳은 하나도 없으니까.
만일 있다면 진즉 소탕당했을 만큼, 월야방에 원한을 가진 문파는 수두룩하니까.
한데 천무백이 그곳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다.
천무백이 표정을 쭉 살피며 피식 웃었다.
“뭐야, 40년 전이랑 그대로야? 아직도 안 옮겼어?”
“…….”
“거 한번 찔러봤는데, 월척이 걸렸네. 그럼 다시 묻지. 월야방 전체의 목에 걸린 값이 얼마지?”
이제 더는 대답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급살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공할 실력자다.’
천무백의 무공의 수준은 가공했다. 수준뿐인가. 선보이는 무공 하나, 하나가 절세무공이 아닌 게 없었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모든 정파가 모여 만들어 낸 기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양한 무공에 능했다.
하물며 살수들을 눈앞에 두고 오히려 웃는 철현간담의 배포까지.
월야방 전부를 죽일 수 있다는 의미가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끝내 그는 입을 열었다.
“적어도 월야방에 소속된 살수는 금 열 냥이 넘지.”
“그럼 넌? 보아하니 네가 특급 같은데.”
“백 냥.”
“흠, 백 냥이라. 세긴 세네.”
천무백이 웃었다.
어쩐지 불길한 웃음이었다.
“그럼 혈귀곡 대가리 치는데 값 충분하지? 월야방 전무의 목이라면.”
“……!”
“의뢰받아라. 대상은 혈귀곡 곡주, 일성(一星)이라는 자. 의뢰 값은 너희들 목숨 전부. 어때, 합리적이지 않은가?”
숨 막힐 것 같은 정적이 가라앉았다.
천무백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자, 이제 서로 죽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