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205화 (205/318)

<검신재생 205화>

205. 보통 집안이 아니네

“형님, 정말입니까? 정말 집에 돌아가시는 겁니까?”

“……후우. 그래.”

소식을 들은 능곡이 달려와 기쁜 낯으로 매달렸다. 잔뜩 골난 표정이었던 능허도, 능곡이 방실방실 웃으며 매달리자 어쩔 수 없이 표정을 폈다.

제아무리 이복형제라지만, 능허의 머릿속에는 그저 아장아장 걷던 어린아이였으니까.

“…….”

천무백은 두 형제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참 기분이 묘했다. 그건 비단 천무백만이 아니다. 제갈설아가 살짝 들뜬 어조로 중얼거렸다.

“정말 형제처럼 안 보이네요.”

“그러게 말이오.”

아무래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악의 거물처럼 보이는 능허와 세상 때가 하나도 묻지 않은 듯한 어린 유생인 능곡.

둘이 형제라니.

“저 둘의 부모님도 못 믿을 것 같은데요.”

“이래서 사람이 살아온 환경이 중요한가 보오.”

“그러게요. 그럼 천 공자님은 대체 어떤 환경에서 살아오신 거예요?”

“나 말이오?”

“그렇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천 공자님의 행보는 참 특이하단 말이죠. 무가의 집안이 아니면서도 무학에서 독보적이고, 학자 집안이 아닌데도 학문에도 깊이가 있으시고.”

샐쭉하게 뜬 눈을 보며 천무백은 실소했다.

사실 뭐라고 대답해 주겠는가.

매번 삶에서 천무백은 괴팍한 사람으로 통했다. 때론 불같고, 때론 얼음보다 냉정하고. 한 사람에게서 보일 수 없는 여러 면모를 보였으니까.

많은 사람이 그런 면모를 궁금하게 여겼다.

어떤 삶을 살았길래 한 사람이 모든 분야에서 두루 밝은가.

천무백은 설명해 줄 수 없었다.

무수한 전생.

그 삶마다 매번 굴곡이 있었고, 살아온 환경도 다르다.

지금의 천무백은 그 수많은 환경을 거쳐 온 것이니, 제갈설아가 저리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능허에겐 자신의 진실을 말했지만. 제갈설아에겐…….

‘말해줘도 괜찮을까.’

글쎄. 그건 아직 모르겠다.

천무백이 대답하지 못하고 미소만 짓자, 제갈설아는 살짝 눈을 흘겼다.

“에이. 뭐 그런 거겠죠. 간혹 세상에 나타난다는 천재들 말이에요. 공자님도 그런 부류죠?”

“그걸 제갈가의 천재라고 불리는 소저에게 들으니 참 흥미롭네요.”

“흥. 그거 본인 얼굴에 금칠하는 거 아시죠? 제가 천재면, 공자님은 천재의 범주까지 벗어나는 거니까요.”

천무백은 멋쩍게 웃으며 시선을 슬그머니 돌렸다.

아마 자신의 비밀을 알면 저리 말할 수 없겠지.

‘천재라…….’

과연 자신이 천재인가?

천무백은 아니라고 여겼다.

수십, 수백의 삶을 거쳐 오면서, 단 한 번도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르지 못한 검극(劍極).

도저히 보이지 않는 그 아득한 경지의 너머.

평생의 숙원이 아니라, 무수한 삶의 숙원을 아직도 이루지 못했는데, 어찌 천재라고 여길까.

‘나는 범재(凡才)다.’

누군가 들었으면 탄식할 생각이었지만 천무백은 진정 그리 여겼다. 물론 다른 이들은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경험을 쌓기도 전에 그는 삼재검성으로 무림을 열었고, 매 삶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으며, 수많은 무공을 창안했으니까. 거듭되는 전생 속에서도 온전한 정신력을 유지하는 그는 분명 범재가 아닌 천재, 아니 그 이상이었다.

다만 본인이 그렇게 여기지 않을 뿐. 천무백은 시선을 돌렸다.

능허가 왜 곡부에 오기를 꺼렸는지 이제는 알겠다.

본가가 다름 아닌 곡부에 있었으니까.

물론 공자의 직계후손이 사는 공부는 아니었지만, 공부 근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법 학명 높은 학사 가문이라는 건데.’

학사 집안이란 걸 알게 된 순간.

천무백의 머릿속에 새로운 계획이 떠올랐다.

‘천하논전에 참가할 수 있는 건 학사만 가능하다. 그것도 평범한 학사는 아니고, 어느 정도 학명을 떨친 사람만 가능하지.’

만일 능허의 집안이 그만한 집안이라면?

‘대충 호위무사라 둘러대거나, 제자라고 둘러대면서 천하논전에 끼어들 수 있겠지.’

맞다.

칼 찬 무사는 들어갈 수 없으니, 아마 제자라고 위장해도 충분하리라.

천무백이나 제갈설아는 칼만 차지 않으면, 학사인 척 하는 건 어렵지 않다. 제갈설아 역시 똑똑하고, 천무백 역시 흉내는 낼 줄 아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천무백은 능허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도움이요? 도움을 바라는 부탁입니까, 아니면 명령입니까?”

“당연히 부탁이지, 능허야.”

“그럼 거절하겠소. 난 천하논전이고 나발이고, 그냥 집에 들렀다가 나갈 생각이니. 머리 아픈 게 싫어서 집안을 뛰쳐 나왔는데, 학자 행세를 하라고?”

“그럼 명령이다.”

“…….”

능허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천무백이 능허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좀 그러네. 괜히 다른 방법 찾느라 머리 빠개질 뻔했네. 그냥 미리 말했으면, 곧장 너희 집으로 가서, 천하논전에 참여할 수 있었잖아?”

“…….”

“거 참. 나름 같이 다닌 정이 있는데, 제집에 손님으로 받기 싫다고 모른 척 한 건 너무한 거 아니냐, 능허야.”

“아니…… 내가 무슨 그런 좀생이로 보입니까?”

억울한 기색에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뭐, 그만한 사정이 있겠지. 집안에서 버림받은 자식이 어디 너만 있겠느냐. 강호에 그런 인생은 수두룩할 거다.”

“누가 버림받았답니까. 나는 내 발로 뛰쳐 나왔다니까요.”

“그러니까 왜?”

천무백의 질문에 능허는 입을 다물었다.

핵심적인 질문에는 능허는 대답하지 못했다.

천무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봉합될 수 있는 문제인지 알아야 하는데.’

능허가 가문의 장자이자, 학사로 인정받아야 같이 천하논전에 들어갈 수 있겠지.

그러려면 우선 아버지와 화해를 해야 하지 않겠나.

이대로 능허가 돌아간다고 한들, 서로 갈등이 심한 것만 확인하면 결국 허사다.

‘여차하면 두 부자를 화해시켜야겠어.’

다행히 능곡의 태도와 대화를 보면 아버지 측도 후회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아무래도 이런 일은 자신보다 제갈설아가 더 나으리라.

‘보통 완고한 노인은, 어리고 착한 여자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만.

제갈설아처럼 선한 얼굴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하면, 귀를 기울인다.

비단 노인만 그런 게 아니다.

비교적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 인상이란 게 분명 존재하니까.

그런 면에 있어서 제갈설아는 최고의 선택지였다.

‘누가봐도 미인이니까.’

천무백도 제갈설아가 예쁘다고 생각한지 오래였다. 다만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

만일 제갈설아가 천무백의 머릿속을 들여다봤다면, 얼굴이 붉어졌으리라.

‘어떻게든 부자 사이를 화해시켜봅시다.’

갑작스러운 전음에 제갈설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천무백과 능허 형제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과연, 공자님은…….’

‘왜 그러시오?’

‘수하의 가정사까지 안타깝게 여기고, 도움을 주려고 하시다니. 능허 아저씨를 매일 타박하면서도, 은근히 챙겨주시네요.’

‘…….’

물론 되도 안 되는 오해였지만, 천무백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좋아요. 저도 능허 아저씨가 이왕이면 가족끼리 화목한 게 좋으니까요. 우리 열심히 해 봐요.’

유난히 ‘우리’를 강조하는 모양새였지만, 어쨌건 제갈설아가 의욕적으로 나서 준다면야 고마운 일.

천무백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전음을 나누는 사이, 능곡은 능허와 재잘재잘 떠들며 방향을 이끌었다.

얼마나 갔을까.

“저긴가?”

천무백의 눈에 제법 적당한 규모의 전각이 보였다.

높지만 약간은 낡은 담장, 조금은 아담하지만, 학문을 익히기엔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규모의 전각들.

천무백은 혀를 찼다.

저런 집이 있으면서, 왜 거친 흑도로 살았나. 새삼 능허에게 안타까움이 깃들었다.

“그쪽 아니요.”

능허의 뚱한 목소리에 전각을 향했던 천무백의 고개가 돌아갔다.

능허는 멋쩍은 얼굴로 다른 곳을 가리켰다.

“……어?”

같이 고개가 돌아간 제갈설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란 담벽을 쭉 따라가다 보면, 사람 한두 명이 밀어서 열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정문이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수많은 전각.

천무백의 광대가 씰룩였다.

“여기라고?”

“예.”

“여기가 능허 네 본가라고?”

“……그렇다니까요.”

“우리 제갈세가보다 더 큰 거 같은데요.”

어…….

이건 생각보다 더 큰데?

* * *

“…….”

“갑작스러운 손님은 예정에 없던 일인지라, 손님을 받는 데 부족한 게 많습니다. 부디 큰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집에 도착하자 능곡은 겸양 어린 투로 말했다. 하나 겸양 속에서도 뚜렷하게 느껴지는 건 자부심이었다.

자신이 속한 가문에 대한 자부심.

천무백은 그 자부심이 어디서 기인되는지 단숨에 이해가 됐다.

‘한림학사의 집이라…….’

대문앞에 붙여져 있는 명패.

한림원 출신 학사임을 증명하는 증표였다.

그러니까.

“능허야. 네가 한림학사 집안이더냐?”

“킁.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내 아버지가 그렇수다.”

“형님, 더 정확히 말해서는 6대를 거슬러 올라가, 아버지까지 총 7대를 이어 한림원에 적을 올리신 거지요.”

이어진 능곡의 설명에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평범한 학사 집안만 해도, 능허의 모습을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는데.

무려 한림학사의 집안이다.

그것도 한 대만 그런 게 아니라 7대를 이어 한림원에 적을 올린 명문가다.

천무백은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능허를 쳐다봤다.

“미련한 새끼.”

“왜 갑자기 욕입니까?”

“이런 집안을 걷어차고 흑도생활을 해? 에라이.”

“허. 사나이가 뜻을 품어 흑도의 칼을 잡았지만 전 한 점 후회…….”

“이런 집안인데 후회 안 했다고? 솔직히 말해봐. 너희 집 여기 아니지?”

“아니, 내 집 맞아요.”

“이런 집을 두고 흑도 생활한다고? 뭔 이런 미련한 놈이…….”

“그게 그렇게 이상합니까?”

“이상하기도 이상하거니와 믿기지도 않는다.”

능허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갈설아도 불신의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소저는 왜 그래? 응? 내가 이런 집안 출신인 게 안 믿겨?”

“아뇨. 믿어요…….”

“표정은 불신 그 자체인데?”

“제가 표정 관리를 못 해서요.”

“허허허허…… 이 양반이랑 다니더니 어째 뻔뻔함까지 똑같아졌나.”

“솔직히 이해가 안 되잖냐. 그냥 평범한 학사 집안이면, 뭐 까짓것 학문이 싫어서 뛰어나올 수 있다고 쳐. 이런 곳이라면 좀 다르지.”

천무백의 말에 능허가 소태라도 씹은 얼굴을 했다.

“아. 맞다. 둘이 이복형제라고 했지. 그러면 서자라서 차별을 받아서 뛰어나온 거구나. 아아. 그럴 수는 있지. 맞아.”

“내가 적장잡니다.”

“……에라이, 병신.”

천무백의 말에 속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온 능허가 반박하려던 찰나.

대문이 굉음을 내며 열렸다.

그리고 매서운 얼굴의 노인이 튀어나왔다.

순간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능허의 얼굴을 보며, 천무백은 짐작했다.

‘거 참. 부자가 하나도 안 닮았네.’

능허의 아버지였다.

* * *

천무백이 받은 인상은 단순했다.

‘진짜 꼬장꼬장함이 모두 몰린 얼굴이네.’

오척단구의 작은 체격이지만, 범인이라면 압도당할 만한 무언가가 흘러나오는 사람.

작은 거인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노인의 얼굴에는 온갖 풍파가 날카롭게 새겨져 있었다.

앉은 자리에서 단 조금도 굽지 않은 꼿꼿한 허리. 쭉 찢어지며 날렵한 눈매와 단 조금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강팍한 입꼬리.

전형적인 꼬장꼬장한 학자의 모든 것이 담긴 얼굴이었다.

‘능허가 곱게 늙으면 저런 얼굴 될 거 같기도 하고.’

새삼 뜯어보면 제법 닮은 구석이 있었다.

톡톡.

‘응?’

조용히 노인의 얼굴을 뜯어보던 천무백은, 자신의 옷깃을 잡아당기는 제갈설아를 돌아봤다.

“왜 그러시오?”

“너무 어색하지 않아요? 숨 막힐 거 같아요.”

“그렇긴 하구려. 방에 들어와서 무슨 말 하나 없으니.”

실제로 두 부자는 방에 들어온 이후, 말 한마디를 나누지 않았다.

아니, 대문에서부터 서로를 쳐다보기만 할 뿐,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야말로 숨 막힐 것 같은 어색함과 침묵이었다.

다행히도 그 침묵은 얼마 가지 않아 깨졌다.

노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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