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204화>
204. 반전이네
솔직히 말해 천무백은 어떤 일이 닥쳐도 당황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그랬다.
혈사문이 뿌린 독의 흔적을 봤을때도. 놀랐을지언정 당황하지 않았다. 혈귀곡이 과거 마도의 잔재임을 알았을 때도, 비다라를 목격했을 때도, 전혀.
지독한 부동심(不動心)이었다.
하나 그런 부동심이 살짝이나마 흔들렸다.
‘뭐, 형님이라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천무백은 당황스러운 감정을 억누르며, 눈앞의 광경을 쳐다봤다.
“형님 맞으시지요? 능허 형님 맞지요?”
웬 한참 젊은 사람이. 능허와는 전혀 상관 없을 듯한 번듯한 학사가 울먹거리며 아는 척을 하는 모습이라니.
능허가 저런 학사를 안다고?
젊은 학사를 바라보는 능허의 얼굴이 경악으로 번졌다.
아니, 그건 단순한 경악이라고 볼 수도 없는 매우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천무백은 선안에 수십, 수백가지의 색의 채도가 비쳤다.
기쁨, 슬픔, 놀람, 당황, 당혹, 반가움, 애틋함 모든 것들이 범벅되는 감정.
그러나 가장 밝은 빛무리는 반가움 속에 담긴 애틋함이다.
‘허.’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렀다.
설마. 그거 맞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하나의 가정에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색과 분위기다.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는 어색함. 그러나 천무백은 능허의 얼굴에서 떠오르는 감정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마치 오래전 헤어졌던 가족을 만났을 때의 반응과 매우 유사했다.
능허는 한참 침묵하며, 울먹거리는 젊은 학사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우물쭈물하던 능허의 입술이 아주 힘겹게 열렸다.
“혹시, 곡이냐? 그 쪼그만 곡이?”
거세게 떨리는 목소리.
젊은 학사가 울먹거리며 무너졌다.
“그래요, 형님. 막내 능곡입니다. 형님 막내 동생인 능곡이요.”
“……곡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요지경을 보며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허탈하게 웃었다.
세상에.
“여기서 형제 상봉을 다 보네.”
능허의 가족이었다. 그것도 친형제. 저 젊은 학사가. 이 흑도의 전형과도 같은 사내의 친동생이다.
천무백은 머리가 아찔해졌다.
“내가 겪어 본 최대의 반전이야. 진짜.”
“……저도 동감해요.”
제갈설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의 형제 상봉이라니.
그래, 가족이 있겠지. 있을 것이다. 고향에서 가족을 만나는 게 무슨 대수랴.
하나 가족의 행색이 전혀 예상 할 수 없고, 생각지도 못한 점이 문제였다.
‘전형적인 학사인데?’
이제 천무백보다 고작 서너 살이 더 많을까. 능허를 보고 울음을 터뜨린 젊은 학사는 전형적인 어린 유생의 모습이었다.
햇빛을 보지 않고 책만 읽은 듯 새하얀 얼굴과 가냘픈 팔다리와 작은 체구.
흡사 천무백이 처음 각성했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문약함의 전형.
물론 당시의 천무백은 더 심각했지만.
어쨌든 저 젊은 학사가 능허의 동생이란다.
“안 어울려요. 진짜로요.”
“나도 동감하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은 피를 나눈 형제가 맞았다.
정확히 말해서는 이복형제였다.
“……그러니까, 능허 네가 학사 집안의 장자라고?”
“절연하고 집을 뛰쳐 나왔으니, 그냥 과거일 뿐입니다.”
능허는 최대한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옆에 있던 능곡이 붉어진 얼굴로 소리치듯 만류했다.
“절연이라니요! 형님, 어찌 가족과의 연을 그리 단호하게 끊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전 똑똑히 기억합니다. 형님이 집을 뛰쳐나가실 때, 울음을 참지 못하고 나가시지 않으셨습니까.”
제 어깨를 잡으며 울먹거리는 능곡의 외침에 능허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걸 기억한다고? 곡이 네 나이가 고작 다섯이었을 텐데?”
“예. 맞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다섯이었고, 형님의 나이가 스물넷이었지요. 똑똑히 기억합니다. 그때 형님은 새벽에 몰래 나가기 전에, 저를 꼭 안아 주시곤 맛있는 거 사오겠다고 나가셨지요. 집을 나가신 지 18년 만에, 이제야 돌아오시다니요.”
능허의 얼굴이 더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아니, 그러니까 그걸 기억한다고? 다섯 살 때 일인데?”
“네. 기억납니다.”
“……생생하게?”
그러자 능곡이 뭐가 문제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기억납니다. 세 살 때 저를 형님께서 무릎에 앉혀 놓으시고, 천자문 가르치신 것도 기억나는데요.”
“아니…….”
능허는 우물쭈물 무언가 말하려다 이내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곡이 녀석. 녀석은 똑똑했지. 어린 시절부터.’
그래서 자신이 집을 뛰어나올 수 있던 거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동생 녀석이라면 아비의 뒤를 이어 훌륭한 학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불현듯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에 능허는 가슴이 막힌 듯 답답해졌다.
“뭐, 하여튼 됐다. 훌륭하게 잘 컸구나. 곡아.”
“형님, 이제 집으로 돌아오신 거지요? 그렇지요?”
능허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도 안 날 것 같은 냉정함이 깃들었다.
“아니. 우연히 볼일이 있어 산동에 온 거다. 나는 집에서 나온 이후, 모든 연을 끊었다. 집에 돌아갈 일은 없을 거다.”
능허의 단호한 말에 능곡은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그제야 반가움에 가려진 능허의 행색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에 새겨진 수많은 상처와 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는 허전한 오른 어깨, 그리고 한쪽 눈을 가린 외눈을 본 능곡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형님……. 대체 어떤 고난을 거쳐 오신 겁니까?”
“나는 강호인이고, 무림인이다. 아버지가 그리도 혐오하는 무도한 칼잡이고, 뒷골목의 더러운 흑도다. 아버지께서 이런 날 집안에 들이겠느냐? 20년 전에도 뜻이 맞지 않아 가계에서 내 이름을 파 버린 아버지가?”
“아닙니다. 형님. 가계에 형님은 그대로 장자로서 이름이 남겨져 있습니다. 아버지께선, 형님이 돌아오시리라 믿고 이름을 지우지 않았어요.”
“…….”
“아버지께 실망하신 거 잘 압니다. 하지만 아버지도 변하셨습니다. 형님이 나가신 이후, 벼슬도 그만두고 칩거하시며 매일 같이 슬퍼하셨지요.”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능허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것이, 약간의 충격과 감동이 전해진 듯싶었다.
하나 애써 그걸 감추며 겉으로는 냉정함만을 표출한다.
‘과거 없는 사람은 없다더니…….’
천무백은 속내를 짐작하곤 혀를 찼다.
선안을 얻은 이후에는, 세상이 많이 다르게 보였다. 상대의 감정을 추측이 아닌, 거의 정확하게 직시할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니까.
“됐다. 그래도 곡이 네가 이리 장성한 걸 본 것만으로 족하다. 집에는 가지 않겠다.”
조금은 딱딱한 목소리에 담긴 단호함을 읽어서일까. 능곡은 더는 뭐라 말도 못 하고 그저 울먹거렸다.
워낙에 다른 동생의 여린 모습에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어딜 봐서 저게 능허 동생이란 말인가?
‘그래도 언뜻 얼굴 윤곽이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선이 여리여리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비슷한 점이 보이긴 했다. 콧대나, 광대뼈나. 조금씩 비슷한 형태였다.
어쨌거나 상황을 대충 짐작한 천무백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왔으면 당연히 집에 다녀와야지.”
“……예?”
별안간 끼어드는 천무백의 말에 능허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천무백이 씩 웃으며 말했다.
“가자고. 집에.”
* * *
“안 갑니다.”
능허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자리에는 천무백과 능허만이 있었다. 제갈설아는 객잔의 방에 들어갔고, 능곡 역시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일단 피한 상황이다.
때문에 천무백은 좀 더 자세한 얘기를 할 수 있었다.
“대충 보아하니 무슨 불화가 있었던 거 같은데…….”
“내 기억하기도 싫은 가정삽니다. 그냥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고, 나도 집을 뛰쳐나온 것 그것뿐입니다.”
천무백은 가만히 능허를 쳐다봤다.
사실 능허가 학사 집안 출신이란 점은 분명 당황스럽긴 했다.
하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확실히 이상한 구석이 있긴 했다.
‘흑도 주제에 글자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서류 같은 걸 정리하는 데 도가 텄었지.’
강호의 생리를 생각하면 참 신기한 일이다.
흑도라고 무조건 일자무식만 있는 건 아니라지만, 천무백이 시키는 대로 척척 서류 정리하고, 거기서 요점만 요약하고 뽑아내는 능력은 단순히 싸움 잘하는 흑도라 보기엔 어폐가 있었다.
짧게나마 연화루를 운영하며 보여 주는 운영 능력 역시 마찬가지다.
그냥 칼 쓰는 흑도라고 보기엔 특이했다.
“그래서 내가 반말하는 거에 장유유서 들이밀면서 그리 경기 일으켰던 거구나. 하긴 유학을 배운 집안에서 웬 어린놈이 반말 찍찍해대는데, 얼마나 불편할까.”
“끄응.”
능허가 팔짱을 까며 시선을 돌렸다.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언제까지고 연을 끊고 살 거냐?”
“언제까지가 아니라, 집을 뛰쳐나온 순간 끊어진 연이요.”
“능허야. 지금 너 갈등하고 있는 거 아니?”
“갈등이요? 허! 이젠 독심술 익혔습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능허가 애써 탄식을 터뜨리며 고개를 휘휘 저었지만 천무백의 선안엔 감정이 뚜렷이 보였다.
여러 색의 채도가 점멸되는 걸 보니, 극심한 내적갈등을 겪고 있다.
“능허야. 그냥 주접 떨지 말고 가.”
“…….”
능허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속셈입니까? 언제부터 수하 녀석 가정사에 그리도 관심 깊었다고.”
“속셈은 무슨. 안타까운 사정을 어찌 지나치겠느냐?”
천무백의 유들유들한 말에 능허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내가 모를 줄 알고. 내가 학사 집안인 거 아셨으니, 어떻게 천하논전에 껴 보실 생각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이야. 우리 능허, 눈치 빠르네. 그럼 대화가 빠르겠다. 뭐 해? 안 움직이고?”
“와, 어떻게 변명 한마디 안 하고 그렇게 뻔뻔하게 얘기하십니까.”
천무백이 어깨를 으쓱였다.
“일거양득이다. 너는 가족을 만나서 좋고, 나는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어서 좋고.”
“허허…….”
“생각해 봐라, 능허야. 천하논전이 언제 끝날지 알고 죽치고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해? 네 말대로 얼른 끝내고, 하남으로 돌아가 아이가 나오는 걸 같이 봐줘야 하지 않겠어?”
“…….”
천무백의 설득에 능허는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 천무백은 어차피 자신이 한 말이 설득이 아님을 알았다.
‘그냥 핑계지.’
능허의 속내엔 집에 가보고 싶단 마음이 분명 존재했다. 하나 20년의 세월, 그간 쌓인 불신이 단단한 벽이 되어 쉽게 깨지지 않고 있다.
여기서 천무백의 설득은 설득이 아니다. 그저 갈등하고 있는 마음의 추를 한쪽으로 기울게 할 뿐. 능허가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숨기면서도, 집에 갈 수 있는 일종의 핑계.
능허는 한참 고민하다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썅. 그래요, 갑시다. 가.”
천무백이 씩 웃었다.
그 웃음에 능허가 잔뜩 골이 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수하 놈 가정사 이용해서 일 처리하려니 그리 기쁘시오?”
“그럴 리가. 능허 네가 가족을 만나는 거에 기쁠 따름이다.”
“허. 지나가는 개가 다 웃겠네.”
“아니, 이건 진짜다.”
천무백이 별안간 정색하며 진지하게 말하자, 능허가 흠칫했다.
“근래 무도에 진전이 없지?”
“그거야…… 뭐, 그렇죠.”
“벽을 만난 거다.”
“에이. 제가 무슨 입신지경에 가는 벽을 벌써 만납니까.”
천무백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절정의 경지 안에서도, 세부적으로 수많은 벽이 존재해. 그 벽을 깨고 또 깨고, 계속 넘어야 입신지경의 코앞에 가는 거지. 넌 지금 벽 앞에 선 상태다.”
“……그래서, 그 벽을 깨려면 제가 가족을 만나야 한다고요?”
“벽이란 곧 심마와 연결되고, 심마는 곧 마음의 화근에서부터 이어지는 편이지.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
“나도 네놈의 화근이 어디서 왔는지는 몰랐지. 흑도 생활하면서 쌓인 화라고 여겼으니까.”
천무백의 말에 능허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역시도 최근 벽을 실감하고 있었으니까.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는 실력에 조급함을 느꼈으니까.
천무백은 가만히 능허를 쳐다봤다.
‘언제든 쉴 수 있고, 때로는 힘들다고 기댈 수 있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조건 나를 지켜 주고, 지지해 주고, 우뚝 서 있어 주는 그런 것.’
무수한 삶을 살아오며 느낀 바는 그렇다.
무도의 길은 잔혹하고 냉혹하며, 고독하다. 칼날 위에 올라서서 끝을 향해 내달리는 경주는, 언제 칼에 베일지도, 칼날 밑으로 떨어질지도 모를 정도로 아슬아슬하다.
그것 자체가 곧 심마다. 그런 심마를 거둬 내려면, 때로는 거친 길을 가다가도 등을 기대 쉴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천무백이 그토록 청성표국과 가족을, 울타리 안의 것들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능허에겐 울타리가 없었다. 쉴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나마 설영이 있었지만, 모든 심마를 다독여 줄 수 없었다.
‘어쩌면…… 새로운 울타리가 되어줄 수도 있겠지.’
물론.
‘천하논전에도 참여하고, 일거양득이지.’
사실 그게 진짜 목적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