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87화 (187/318)

<검신재생 187화>

187. 그런 사람 아니라니까.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더니, 종리홍은 지금 상황에 딱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항시 바뀌어 예측할 수 없는 게 삶인 법.

강호도 넓게 보면 삶의 일부니, 마찬가지다.

“이 악적들을 모조리 멸절하라!”

유검제가 배 위에 불쑥 올라타 수적들을 참살했다.

단숨에 두 명의 목을 베며 쏟아내는 추상 같은 호령.

아군의 사기는 올려 주고, 적들의 사기는 저하시키는 위엄이 깃들었다.

종리홍이 작게 감탄했다.

‘천하십대고수에 근접한다더니, 과연! 강호의 변두리에도 천하의 고수가 있었구나!’

천하십대고수에 근접한다는 평을 듣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언제든 깨달음 한 번이면 입신지경에 오를 수 있는 강자. 아니, 몇몇은 입신지경에 간신히 발을 걸치기도 했다.

투신 곽용이 그런 사내가 아니던가.

‘나 역시도 정진하고 있다고 여겼건만, 아직도 멀었구나.’

유검제의 무위에 감탄만 할 수는 없었다.

“죽엇!”

수적 한 명이 악다구니를 쓰며 갈고리를 훅 휘둘렀다. 종리홍의 칼날이 번뜩였다.

서걱!

검이 번뜩이는 순간, 수적의 머리는 갑판을 뒹굴었다. 부족하다 여기기엔 종리홍의 실력도 범상치 않았다.

‘수적들이 도움이 되는군.’

종리홍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 배 위에서 싸우는 사람들의 표정만 보면, 오히려 황망해하는 건 수적들이었다.

“가까이 복건성에서 흑도들이 연합을 꾸린다더니, 이게 다 바로 절강무림을 공격하려던 속셈이었더냐!”

유검제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수적들의 머리통이 솟구쳤다.

비단 유검제 뿐이겠는가.

그를 따라온 추적대들은 하나같이 절강에서 내로라하는 무인들.

그중에서도 지금 배 위에 올라탄 이들은 정예 중의 정예.

수적들이 배 위의 싸움에서 아무리 유리하다고 한들,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종리홍의 시선이 홱 돌려졌다.

가장 큰 배, 유검제와 맞부딪치는 작지만, 옆으로 거대한 체구의 사내.

‘하왕 왕전유!’

깃발에 적힌 글자에 종리홍의 표정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흑회의 회주? 복건에서 흑도놈들이 끝내 연합을 이뤘단 말인가? 왕전유가 태룡방주 대신 회주라고?’

그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흑도들의 연합체, 거기에 회주가 된 하왕이 직접 선단을 이끌고 나왔다. 대체 왜? 흑도놈들이 어째서 이 여아를 노린단 말인가?’

자신이야 전소용이 신녀인 걸 아니까 노리는 것이다만.

흑도는 어째서?

“감히 흑도 잡놈들이 내 아이를 납치하고, 절강을 무너뜨리려고!”

유검제는 노호성을 터뜨리며 검을 휘둘렀다.

까가가강!

“도대체 뭔 개소리야! 절강무림이고 나발이고!”

왕전유 역시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대도로 맞받아쳤다.

도와 검이 서로 얽혀들면서 배가 덜컹 흔들릴 정도였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종리홍은 지금이 기회임을 놓치지 않았다.

“우리에겐 이로운 상황이다. 수적놈들하고 추적대들이 싸우는 사이, 이 배를 탈취하고 빠져나간다!”

둘이 싸우는 사이 어부지리를 노리면 되는 일.

종리홍의 명령에 수적들을 베어 넘기던 태을검객이 배의 키(舵)를 잡기 위해 뛰쳐나갔다.

몇몇 수적이 막았지만, 태을검객이 휘두르는 검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한데 그때였다.

‘응?’

종리홍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느 순간 유령처럼 나타난 사내가 태을검객을 막아섰다.

종리홍의 표정이 변한 건 사내의 괴이한 행색 때문이 아니었다. 가면을 쓴 거야 그렇다 쳐도, 무언가 이질적이었다.

‘수적들과 다르다.’

호수같이 잔잔한 느낌. 급류를 타며 거칠게 배를 모는 수적들과는 전혀 다른 기운.

종리홍이 무언가 심상찮은 기색을 느낄 때, 태을검객은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죽기 싫으면 비켜라!”

상대는 살려 둘 가치가 없는 수적이다. 태을검객은 살의를 가득 담아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

쉐에에엑!

소림의 나한과 화산의 매화검수와 비교되는 종남의 태을검객.

날카롭고 빨랐다. 쉬이 막기 어려운 경로와 쾌속함.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에 종리홍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콰득!

“······!”

실 끊어진 인형이 저러할까.

기세 좋게 검을 내지르던 태을검객의 몸이 휘청거리더니 쓰러졌다.

종리홍의 얼굴이 굳었다.

공격이 있으면 방어가 있긴 마련이다. 그런데 공방이 오가지 않았다.

‘단숨에 혈을 짚었다?’

무인들의 싸움에서 거리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검을 든 무인의 공격 거리가 더 길고 범위가 넓은 건 당연지사.

한데 상대는 검을 뽑지 않았다. 오로지 팔을 뻗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훨씬 길이가 짧다. 검은 손의 연장이다. 그것이 검이란 병기가 탄생할 때의 이유였으니까.

손으로 일 장(一丈) 거리를 내지를 때, 검은 절반의 속도와 시간으로 충분하다.

한데 그 모든 상식을 단숨에 깨부쉈다.

다른 태을검객은 보지 못 했지만, 종리홍은 똑똑히 봤다.

‘순간적으로 보법을 밟아 혈도를 짚고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쾌속함이었다. 모든 물리적인 길이와 거리를 무시하는 압도적인 속도.

‘아무리 내공을 썼다고 해도, 가능하단 말인가?’

가능은 하다.

하나 전신의 움직임을 극도로 쾌속하게 하려면, 얼마나 내공의 수발이 자유롭고 수월해야 하는가?

더 놀라운 건 바로 살상이 아니라 제압했다는 점.

‘나라면?’

종리홍도 못할 건 없다. 하나 점혈을 짚는 게 아니라, 검으로 목을 베었으리라.

원래 죽이기보다 제압하는 게 더 어려운 법이니까.

그 무서웠던 태을검객이 단숨에 제압되자, 구석에 몰려있던 수적들이 반색했다.

“흑심방주다!”

“흑심방주가 오셨다!‘

“살려 주십쇼! 저 노인네, 어마어마한 고숩니다!”

“흑심방?”

종리홍의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무언가 이질적인 분위기와 태을검객을 죽이지 않고 제압했다는 점에서 혹시나 했다.

상대가 수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오해였다.

수적들이 마치 구원을 받은 듯 얼굴이 밝아졌으니까.

‘왕전유뿐 아니라 수적 중에 저만한 놈이 있었던가. 아니지, 흑심방주라······ 흑도들이 정말 힘을 합쳤나 보군.’

그리 생각한 종리홍은 거침없이 검을 뽑았다.

“비켜라. 우리는 단지 여길 빠져나갈 뿐, 살상을 계속하고 싶지 않다.”

“나도 그대를 상하게 하고 싶진 않소. 다만 아이는 두고 가시오.”

“······.”

종리홍의 낯이 싸늘해졌다. 서로의 목적이 분명하고, 양보할 수 없다. 사실을 확인했으니 협상은 불가하다.

그때였다.

“보타문의 검후가 왔다!”

“검후다!”

추적대들의 환희에 찬 목소리, 대조되는 수적들의 절망 어린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종리홍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왕전유와 치열하게 싸우던 유검제 사이로 검후가 강기를 흩뿌리며 뛰어들었다.

“소용이를 납치한 게, 흑도 놈들이었더냐!”

검후 역시 유검제와 같은 오해를 했다.

“뭔 개소리야, 이 엿 같은 정파놈들아!”

왕전유가 황당한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지르며 대도를 크게 휘둘렀다.

하나 검후의 난입은 치명적이었다.

“이, 정파의 개잡놈들이!”

왕전유의 몸에 상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아슬아슬했다. 당장 목이 떨어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다.

오히려 왕전유와 수적들이 추적대를 막아 주는 상황이었기에, 검후의 등장은 종리홍에게 달갑지 않은 신호였다.

검후 역시 아이를 거두려고 온 것이니까.

종리홍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검을 뽑았다.

“하면 어쩔 수 없군.”

종리홍은 곧장 검을 내질렀다.

잠깐의 망설임은 물론 있었다.

묵묵히 서 있는 사내.

검후가 왕전유를 제압하고 이쪽에 올 건 시간문제.

‘그 안에 잡아야 한다.’

쉽진 않다. 그러나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 종리홍 역시 이를 악물었다.

콰앙!

크게 전각을 밟고 종리홍의 신형이 쏜살처럼 육박했다.

단순한 직선의 움직임이 아니다. 신형이 빙그르르 돌며 찔러가는 검에 거센 회전력을 더한다. 검을 중심으로, 몰아치는 소용돌이가 대기를 찢어발기며 강렬한 파공성을 터뜨린다.

쐐에에에엥!

흡사 작은 소용돌이가 한 사람에게 직격으로 쏟아지는 듯 압도적인 광경.

그러나 그걸 받아 내는 사내는 정작 무심했다.

‘소용돌이에는 점이 있고, 그 점이 곧 중심인 법.’

천무백의 검이 불쑥 솟구쳐 얽혔다. 소용돌이의 강력한 저항을 꿰뚫고 중심으로 파고든다.

까가가가강!

칼날이 요란하게 부딪치며 불꽃이 화려하게 터졌다.

“……읍!”

단 한 번의 공방에 무려 수십 합이 오간 뒤, 종리홍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고수······!’

천무백을 바라보는 종리홍의 시선이 거세게 흔들렸다.

단 한 번의 공방으로 느낄 수 있었다. 비등은커녕, 자신보다 한수 위라고.

무려 종남파 대장로가 한 수 위라고 인정했다는 건, 최소한 입신지경에 닿은 강자란 의미.

‘어마어마한 고수! 이런 놈이 흑도라고?’

천하십대고수에 근접한다는 유검제도 이 정도는 아니리라.

적어도 유검제에겐 어떻게 하면 이길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데, 지금은 아니다.

‘이길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종리홍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대체 누구이기에······.”

절대 흑도 따위가 아니다. 수적 따위도 더더욱.

전소용을 노리는 또 정체불명의 고수다.

무언가 일이 걷잡을 수 없이 꼬여 가는 걸 느끼며 종리홍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순간.

태을검객 품에 안겨 있던 소용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싸우지 마여! 차칸 사람이에여!”

“······뭐?”

종리홍이 순간 멈칫했다.

싸움이 시작되고 조용히 안겨 있던 소용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하물며 그것도 적이 명백한 상대에게 착한사람이라니.

참으로 애다운 순진한 생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종리홍은 불현듯 이상함을 느꼈다.

평생 병상에 누워 있던 전소용은 낯선 사람들인데도 종리홍을 비롯해 태을검객을 유난히 잘 따랐다. 신녀의 운명을 타고났기에 소용은 선기를 가진 이에게 유난히 친근함과 호감을 드러냈다.

그러니······.

‘잠깐만. 흑도 놈에게 선기가 느껴진다고?’

그게 말이나 될 법 하는가. 선기가 느껴진다면 영험한 도인일 텐데. 그도 아니면······.

순간 비상하게 돌아가던 종리홍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충격이 강타했다. 그의 가늘어진 시선이 사내의 전신을 훑었다.

어쩐지 눈에 익은 체형,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잘 땋은 머리칼과 가면 아래로 드러나는 목선. 검을 잡은 태가 낯설지 않다.

선기가 느껴진다. 한데 도인이 아니다. 그러면 특별한 계기로 선기가 몸에 스며든 것이겠지.

“선기가 몸에 스며드는 계기라면, 엄청난 것이어야 하는데······ 가령 성물 같은.”

움찔.

그 순간, 상대가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종리홍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천······ 룡검협?”

* * *

천무백은 생각했다.

‘시간도 없는데…….’

종리홍에게 자신의 정체가 들킨다면?

천무백도 종리홍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종남파는 거대 정파다.

구파일방 중 하나이며. 정마대전 때 피해가 전무하여 지금은 구파 중 어떤 문파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문파.

혈귀곡을 기점으로 부활하려는 마도를 견제할 수 있는 칼.

괜히 천무백이 태을검객을 죽이지 않고 제압한 이유가 그거다.

어쨌건 정파니까.

한데 여기서 천무백의 정체가 들킨다면?

수적들과 손을 잡은 상황이라면?

생각은 꼬리처럼 이어져 판단을 내렸다.

“그런 사람 모르오.”

모른 척하기로.

“······.”

태연한 목소리에 의심하던 종리홍도 순간 오해했나 싶었지만.

“그래! 저 칼! 내 봤지, 화려한 장식!”

종리홍과 맞부딪치느라 금박으로 장식된 검집을 감추고 있던 면포가 떨어졌던 것.

가려두지 않으면 보는 이의 시선을 확연히 끄는 검을 종리홍이 어찌 잊겠는가.

“천룡검협! 그대가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이오! 수적과 손을 잡고 정파와 싸우고 있는 것이오?”

“아무튼, 그런 사람 아니라니까.”

“······아니!”

종리홍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저 복장 터지게 하는 말투와 갑작스레 변하는 껄렁거리는 태도.

아무리 봐도 맞다. 화산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성물을 빼앗아 간 천무백이 맞다.

“흑도들과 손을 잡다니! 천하의 협객이라는 천룡검협이 감히 할 짓인가!”

“종남파 대장로가 명문정파의 귀한 딸아이를 납치해가는 건 괜찮고?”

“······!”

딱딱하게 굳은 종리홍에게 천무백의 태연자약한 목소리가 꽂혔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번뜩이는 안광. 그것이 곧 천무백임을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때문에 종리홍의 몸은 오히려 딱딱하게 굳었다.

“서로 정체 밝혀지면 좋지 않은 건 피차일반이니, 우리 모른 척하고 각자 할 일 합시다. 여하튼 난 천룡검협 아니오. 응? 아이는 나한테 주고.”

“너는 대체 왜 이 아이를 원하는 것이더냐?”

“아이, 오성물과 관련된 거 아니요?”

종리홍의 얼굴이 찰나지만 미묘하게 변했다. 계속 응시하던 천무백은 놓치지 않았다.

‘물건이 아니라 사람도 성물에 포함되는지는 모르겠다만, 연관된 건 맞군.’

하나 천무백으로서도 여유가 없었다.

“시간이 없으니, 아이를 빨리 보내시오. 이대로 두면 위험하니까.”

“흥. 네놈이 비키지 않으면 내가 검후에게 목이 잘릴 판인데 위험하다고 걱정해 주는 거냐?”

“검후가 문제가 아니오.”

천무백이 정색했다.

지금 종리홍에게 가장 위협적인 건, 저기 왕전유를 갑판에 처박고 있는 괴물 같은 신위의 검후다.

검후에게 붙잡힌다면, 천하의 종리홍도 그저 잘라 주십사하고 목을 내밀 수밖에 없다.

“검후가 문제가 아니라니? 아무리 너라도 검후는 이기지 못해.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그러자 천무백이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냐는 듯 말했다.

“당신이 위험하다는 게 아니라, 애가 위험하다고.”

“애가? 검후도 이 아이를 제자로 거두려고 했고, 추적대가 어찌······.”

“내가 뒤엎은 개판에서, 호시탐탐 먹이만 가져가려는 놈이 밖에 있거든.”

저 멀리, 강변 너머를 바라보는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독마가 오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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