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86화>
186. 허허…… 개판이로구나.
“가면 줘.”
“이제는 혁 공자에서 흑심방주로 돌아오는 겁니까.”
“분장한 게 아깝긴 해도, 쓸 만큼 쓴 얼굴이다.”
천무백은 그리 말하며 강가의 물로 얼굴을 닦았다.
온갖 분가루가 강물에 풀어지면서 자욱하게 물들었다.
능허가 신기하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곡지흠, 그 양반은 하오문주에 태생이 무인이면서 어째 이런 분장술은 기가 막힙니다.”
추적대 앞에서 천무백은 천룡검협이라 불리는 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유검제를 비롯해 대다수가 정파의 인물이었으니까.
추후 정의맹의 세력이 확장되면, 아무래도 천룡검협으로서 만날 확률이 높지 않겠는가.
“어렸을 때 기녀한테 자랐으니까. 화장 하나는 기가 막히지.”
“거참, 생긴 건 천생 무인인데. 어째 분장을 할 땐 섬세하기 짝이 없습니다.”
“인피면구보다 더 나아.”
실제로 무언가 얼굴이 확 변하는 건 아니다. 곡지흠의 분장은 본래의 얼굴에서 큰 변화를 주지 않는다. 다만 사람의 얼굴을 기억할 때 떠오르는 특이점만을 섬세하게 바꿔, 전혀 다른 사람 같은 인상을 주게 한다.
가령 지금 능허의 얼굴에 화상자국으로 일그러진 흔적 같은 것.
“여하튼 가면을 쓴 걸 보니, 이제 흑심방주로서 활약할 겁니까?”
“언제든지 벗을 수 있다. 상황 봐서.”
“왕전유는 또 언제 부른 겁니까?”
“명색에 회주인데, 이번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겠냐?”
“허참.”
왕전유도 흑회 회주다. 독고패를 통해 들어온 혈귀곡의 의뢰도 전해졌다. 물론 의뢰자가 혈귀곡이란건 철저하게 숨기고.
아마 왕전유는 쫓기고 있는 인물이 종남파인 것도 모른다. 종남파였으면 나서지도 않았겠지. 천무백이 의도적으로 숨겼다.
그저 엄청난 현금을 제시했기에 왕전유도 나섰다.
천무백의 충동질도 있긴 했지만.
“하긴, 흑도에게 가장 중요한 건 돈이죠. 돈이 있어야 내 애들 먹이고, 재워 주고, 잔치도 열어 주고, 장가도 보내 주니까.”
“거기에 왕전유도 회주에 오르고 의욕적이잖아? 독고패의 영향력을 밀어내려고 애를 쓰지. 그 상황에서 어마어마한 현금이 들여오면? 흑회는 단숨에 세력을 늘릴 수 있어. 혈귀곡이 내놓은 돈은 그만한 돈이야.”
“업적 하나 꽝 박아 버린다는 거네요.”
“그래. 생각대로 되면.”
천무백의 표정을 본 능허가 한숨을 내쉬었다.
“쩝. 그 양반 자기가 이용당하는 걸 꿈에도 모르니, 불쌍하네.”
“자, 가자. 능허야. 개판 만들러.”
“갑시다. 개판에서 노는 거야 내 자신 있죠.”
“노 저어라.”
“저 혼자요? 노는 두 개 있는데? 저 팔 하난데?”
“저으라고. 늦으면 두 다리로 젓게 해 주마.”
“······.”
에휴, 누가 누굴 걱정하랴. 본인 처지가 더 눈물 나는데.
능허는 체념하며 노를 저었다.
* * *
“다행입니다. 추적대가 비교적 하류에 있는 선착장에서 배를 구하고 있습니다.”
“다행이구나.”
태을검객의 보고에 강변을 바라보던 종리홍이 맥이 탁 풀리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잘 쫓아와 놓고, 굳이 하류로 간 이유는 모르겠다만. 천만다행이다.”
종리홍이 배를 탄 지점은 장강의 지류에서도 중류쯤.
추적대들은 하류에서 배를 탔다.
단순한 거리 차이는 약 반나절.
있는 힘껏 노를 저어 강을 거슬러 올라야 하는데, 반나절 거리라도 쉽게 좁혀질 수가 있겠는가.
상대의 명백한 실수다.
지금껏 마치 장강쪽으로 유인하듯 거의 농락하다시피 추적하던 놈들이, 어째 마지막에 실수한 듯했다.
“중간에 배가 암초에 걸려서 멈추지 않는 한, 쫓아오는 데 한세월이 걸릴 것이니, 참으로 다행이도다.”
종리홍은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애당초 목표였던 안휘성으로 빠지는 길은 무리더라도, 강서성에도 종남파의 속가문파가 몇 곳 있다. 그곳에 의탁하면 추적을 따돌릴 수 있으리라.
“우아! 바람이 물 같아여!”
긴장이 풀려서일까.
종리홍은 갑판 위를 조심스레 걷는 아이를 바라봤다.
‘바람이 물 같다니······.’
강바람이라 바람결에 물방울이 날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참으로 천연덕스럽고 순진한 말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전소용이었다. 유검제가 금지옥엽처럼 여기는 이유가 있었다. 종리홍도 저도 모르게 만면에 미소를 띄울 정도로 발랄했으니까.
‘참 미안한 일이구나.’
처음에는 분명 제 욕심으로 접근했다.
물론 애를 해치려는 마음은 단 조금도 품지 않았다. 단지 목적이 뚜렷했고, 욕심을 냈을 뿐이다. 하나 지금은 후회스러웠다.
‘차라리 유검제에게 진실을 말하고, 접근했다면.’
하지만 그럴 수 없던 이유.
‘천룡검협······ 그자 역시 왜인지는 모르나 오성물을 노린다. 과연 오성물의 모든 비화를 다 안단 말인가?’
바로 천무백 때문이다.
‘화산에서나, 그리고 무당에서 신령부까지.’
천무백이 신령부를 가져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종리홍은 직감했다. 천무백은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오성물을 노리고 있고, 신령부도 오성물 중 하나라고.
‘놈은 엄청난 정보력을 갖고 있다.’
만일 유검제에게 정식으로 접근했다면, 천무백이 알아차렸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그도 성물을 노리고 찾아왔겠지.
‘그가 오성물의 힘을 아는가?’
성물 하나만 따로 존재한다면, 그저 신령스러운 물품에 불과하다.
하나 오성물이 한데 모인다면,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우화등선······.’
종리홍의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토해졌다.
사실 우화등선은 여러 문헌과 설화에 종종 나오나, 실제로 그것이 가능한가에 관해서는 얘기가 많다.
종리홍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종남의 깊은 서고.
‘검선…….’
검선 여동빈.
그가 오성물의 힘으로 검에서 깨달음을 얻고 선계로 올랐다.
기록이 명백하게 남아 있다. 정확히는 네 개의 성물과 신녀가 옆에서 제례를 주관했다고.
‘물론 단지 그것만으로 한참 부족한 내가 등선은 못할 것이다. 하나 그 조금의 힘, 조금의 깨달음을 내가 소화할 수 있다면······.’
어차피 차기 장문인은 예약된 자리다.
종리홍의 눈동자가 타올랐다.
그가 바라는 건 더 높은 자리다.
“천하제일검문! 천하제일도문!”
북숭소림 남존무당.
강호를 대표하는 두 이름을 넘어 우뚝 선 유일한 하나의 힘.
화산을 넘어 천하제일검문이 되고, 무당을 넘어 천하제일 도문이 된다.
찬란하게 빛나는 종남파의 이름.
부단히 노력하고 부단히 경주하고, 그리고 응당 전진의 유산을 정통 후계자인 종남파가 취한다면.
과거 중원 도문을 대표하는 전진교의 도학과, 검선 여동빈으로부터 이어지는 중원 제일의 검까지.
그 모든 단서가 오성물에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아이의 힘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나아가면 될 일이다.’
의지를 다지듯, 종리홍은 주먹을 꽉 쥐었다.
“우아! 배가 많다아! 할아부지, 쩌어기 배가 많아여!”
그때였다.
태을검객의 품에 매달려 순진하게 소리치는 소용의 목소리에 종리홍의 얼굴이 굳었다.
‘배? 벌써 추적대가 따라왔단 말인가?’
예상보다 빠르다.
과연 소용의 말대로였다. 시선을 돌리니 수많은 배가 강 너머에서 모습을 속속 드러냈다.
‘어떻게 저리 많은 배를 구했지?’
더구나 단순한 어선이나 조각배가 아니다.
웬만한 유람선이나 상선에 필적하는 크기. 몇몇 배는 흡사 관아에서 운용하는 군선을 보는 듯 거대했다.
종리홍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추적대가 아니다!’
어디 거대 상단의 상선단인가? 그렇다면 문제없다. 시비를 걸 일도 없으니까. 상단이 칼 찬 무사들을 보면 그냥 지나칠 것이다.
하나 그건 너무 낙관적인 생각이었음은 곧 드러났다.
“자, 장로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스승과 의원 제자로 꾸몄지만, 태을검객은 그것도 잊고 장로라 부를 정도로 당황했다. 종리홍도 차마 그 점을 타박하지 못했다. 그 역시도 배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눈동자에 지진이 일었기에.
흑회 회주(會主).
장강수로총채주 하왕(河王) 왕전유.
흑회라는 건 종리홍도 잘 알았다. 흑도놈들이 연합을 만든다고 모인다는 그것.
하나 그것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건 밑에 있는 글자였다.
‘장강수로총채주…….’
장강의 왕. 수적들의 왕. 종리홍의 낯빛이 굳었다.
* * *
“저 배가 맞는 것 같습니다. 흑심방주가 보낸 신호를 생각하면요.”
철면장의 얘기에 왕전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갑판 위에 올랐다.
“작구나.”
참으로 초라하고 작은 배다.
“그렇지만 어떤 배를 터는 것보다 더 크다.”
왕전유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정도 돈이라면, 장강의 수로채를 정비하는 건 물론이고, 흑회에 풀 돈으로도 엄청납니다.”
“흑도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의리라지만, 의리가 만들어지려면 가장 필요한 게 바로 돈이지.”
왕전유는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다.
“흑심방주가 날 잘 도와주는구나.”
“어쨌건 회주님께서 잘되어야 흑심방주의 영향력도 커질 테니까요. 이번 감찰당주의 직위를 받은 것에서 깨달았을 겁니다.”
“흘흘흘흘.”
왕전유는 기껍게 웃었다. 그가 이번 일을 천무백에게서 듣고 두말하지 않고 나선 이유는 분명했다.
엄청난 황금.
자고로 흑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의리보다는 황금이란 말이 있다.
회주가 됐지만, 기반이 가장 약한 왕전유에게, 흑회를 깡그리 정비할 수 있는 엄청난 재화는 그의 영향력을 압도적으로 올릴 것이다.
그냥 대놓고 흑회 구성원들에게 돈만 풀어도 충성심을 끌어낼 수 있으리라.
“그래도 방심하지 마라. 한낱 의원들이라지만, 유검제의 딸을 납치한 놈들이다. 무언가 있는 놈들이다.”
“설령 무언가 있더라도, 배 위에서는 다른 법입니다.”
철면장뿐 아니라 왕전유도 자신만만했다.
흑회에서는 흑심방주에게 기댔지만, 이곳에서는 다르다.
배를 탄 수적들은 물 위에서의 싸움이라면 아주 이골이 났으니까.
왕전유는 갑판에 서서 우렁찬 사자후를 터뜨렸다.
“이곳은 장강이고, 장강은 나 왕전유의 영역이다! 누가 허락도 없이 이곳을 지나가느냐!”
그야말로 장강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일종의 기선제압이었다. 웅혼한 내공을 아낌없이 토해서 상대의 기를 죽이는 것.
하나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을 원하시는가! 통행료를 원한다면 흔쾌히 내드리겠소!”
종리홍이 튀어나와 그리 소리치자 왕전유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만만치 않은 놈이로구나.’
자신이 목소리에 내공을 실은 것처럼, 상대도 웅혼한 내공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그것만으로도 왕전유는 느꼈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겠군.’
왕전유는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통행료라! 그리 협조적으로 나와 주신다면야, 품에 안고 있는 여아를 내놓고 가시겠는가!”
“…….”
침묵이 맴돌았다. 하나 선택할 수밖에 없으리라.
애를 내놓던지, 강에 잠기던지.
그 짧은 시간에 왕전유의 선단은 시시각각으로 가까워졌으니까.
그때였다. 배 위에 있던 종리홍이 일순 검을 뽑았다.
왕전유가 흠칫하며 반응하려는 찰나.
이미 종리홍과 태을검객의 신형은 붕 떠올라 단숨에 선단 중 배 하나에 착지했다.
꽈앙!
착지하자마자 칼날이 폭풍처럼 일었다. 수적들의 팔다리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야말로 삽시간에 벌어지는 살육이었다.
상상하지도 못한 쾌속한 공격에 왕전유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대놓고 싸움을 걸겠다?”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배를 뺏어서 빠져나갈 속셈입니다!”
철면장의 얘기에 왕전유의 눈이 부릅떠졌다. 맞다. 종리홍이 올라탄 배는 길고 날렵한 모양의 쾌속선. 현재 선단 중 가장 빠른 배다.
자신의 조각배로 노를 저어 빠져나갈 수는 없으니, 쾌속선을 빼앗아 도망칠 속셈인 것이다.
왕전유가 불같이 분노를 터뜨렸다.
“포위해라! 배를 돌려서 포위해! 놈은 내가 잡는다!”
선단이 급하게 선회했다.
그때였다.
“회주님, 저기!”
“뭣?”
철면장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왕전유의 눈이 부릅떠졌다.
비록 왕전유의 선단에는 못하지만, 제법 많은 배가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배들은 싸움이 벌어지는 광경을 보고 멈칫하더니, 이내 기세를 올려 열렬하게 다가왔다.
“추적대로구나!”
추적대들은 가까워지자 볼 것도 없이 수적들의 배로 뛰어 올랐다.
그중엔 유검제도 있었다.
“악적들의 정체가 수적이었구나! 이 개자식들! 흑도들이 뭉친다더니, 감히 절강무림을 노렸던 것이더냐!”
유검제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왕전유는 황당했다.
“저게 대체 무슨 개소리야?”
허나 누구도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당장 수적들도 배를 기어오르는 추적대의 무사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으니까.
“이런, 망할!”
왕전유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배들이 서로 얽히고설켰다. 종리홍은 태을검객과 함께 배를 뺏기 위해 난동을 부렸고, 수적들은 그들을 포위했다. 한데 바깥에서는 추적대가 거침없이 파고드니…….
어느새 세 개의 세력이 강 위에서 어지러이 얽혀들었다.
그 광경이 마치.
“허허…… 개판이로구나.”
왕전유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빨리 아이를 뺏어 배를 몰아 빠져나가는 것이 답이다.
그리 생각하며 왕전유가 종리홍을 향해 몸을 던지려는 찰나.
“……흑심방주?”
어느새 나타난 천무백이 종리홍에게 다가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