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16화>
116. 원체 좀 뜨거운 남자라.
칠면염라는 신중한 성격을 보여 주듯 다시금 천무백을 제대로 살폈다.
“흐음. 나도 문헌으로만 들어서 확실히는 모르겠다만, 이게 천신지체가 맞긴 하겠지.”
칠면염라는 침착했다. 일전에 잔뜩 흥분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유심히 천무백을 살펴보던 그는 이내 흡족한 얼굴로 천무백을 놓고 제갈설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갈설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칠면염라를 보며 몸이 뻣뻣이 굳었다.
지금껏 단약만 먹이고 손도 일절 대지 않않았다.
만일 납치당하지 않고, 비인색귀란 악명이 붙지 않았다면 그저 괴팍한 노인으로 여겨졌을 정도였다.
그것도 꽤 고강한 무공을 지닌 고수 정도?
한데 제갈설아는 직감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죠?”
그렇다고 그녀의 목소리가 두려움에 떨리진 않았다.
제갈세가의 여식임을 증명하듯, 오히려 위기에 처한 순간 이전과 달리 더없이 침착했다. 다만 창백하게 질린 얼굴마저 감출 순 없었다.
“조금 더 봐야 할 것 같았다만, 이제 상관없다. 저 천신지체가 손에 들어왔으니까 말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진 모르지만, 제가 제갈세가의 여식인 건 아시죠?”
“으하하하! 고작 제갈 씨의 이름을 내 앞에 들이미느냐!”
꽝!
칠면염라가 진각을 밟았다. 가공할 공력이 바닥을 타고 전신으로 전해졌다.
고강하다 못해 엄청난 경지.
제갈설아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이게 단순히 색귀라고? 절대 아니야!’
진즉부터 의아했다.
아무리 봐도 고작 색귀 취급을 받을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한낱 색귀한테 제갈세가의 여식이 수도 못 쓰고 잡힌다? 그게 말이나 되는가. 제갈설아의 무공만 해도 정종무학을 착실히 밟아 성과를 이뤘다. 비단 그녀뿐인가.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호위를 순식간에 무력화시키지 않았나.
제갈설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더구나 제갈세가를 무시하다니.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이 호북성에서 저런 미친놈은 없다. 완전히 미쳤거나. 그도 아니면 그럴 만한 고수라거나.
애석하게도 후자였다.
“내 젊었을 적, 제갈 씨를 비롯한 정도 놈들은 진작 사라졌어야 할 놈들이다! 그깟 창천검신만 없었더라면 이미 이 중원은 마도로 일통되었을 터인데! 창천검신 덕택에 살아 놈은 놈들 주제에 위세가 등등하구나!”
칠면염라는 제갈설아에게 손을 뻗었다. 무시무시한 손아귀가 망막에서 순식간에 커졌다.
이미 혈도를 짚어 사지가 봉인된 상태라 반항할 수 없었다.
툭, 툭, 툭!
한데 칠면염라의 이어진 행동은 의외였다. 손을 뻗어 마치 혈을 두드리듯이, 제갈설아의 몸을 여러 차례 두드렸다.
“……?”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리 느끼며 제갈설아가 의문을 품는 순간.
“끄으으윽!”
저 깊은 곳에서부터 고통에 찬 신음이 솟구쳤다.
눈이 새하얗게 뒤집혔다. 볼살이 푸들푸들 떨리더니 이내 온몸이 덜덜 떨렸다. 이미 창백하게 질렸던 얼굴에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앉아 있는 주위로 마치 얼음이 얼기 직전처럼 서리가 내려앉았다.
“목표로 삼았던 빙정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제법 쓸 만하겠구나. 저 자식을 잡아먹기 전에, 제법 괜찮은 식사가 되겠어.”
흡사 일부러 중얼거리는 듯했다.
마치 듣고 공포에 질려 울부짖으라는 듯이.
정신을 잃을 듯한 극한의 추위가 몰아치는 상황에서도 제갈설아는 그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뒤집힌 눈동자에 공포가 가득했다. 하나 그런 공포를 인식하기도 전에, 차가움을 넘어선 극통이 몸에 가해졌다.
극한에 달한 추위는 고통으로 변했다. 고통은 점차 감각을 마비시켰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비를 넘어서 아예 사라질 듯했다.
마치 사람이 아닌 빙정이 되는 것처럼.
“자, 그럼 이제 본 식사를 해 볼까.”
칠면염라는 그리 말하며 곧장 천무백에게 향했다.
‘흠.’
천무백은 사실 이 순간 잠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어느 지점에 나설 것이냐.’
지금은 천하의 천무백도 신중해야 했다.
‘칠면염라, 마조응.’
천무백도 익히 아는 얼굴이다.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지금쯤이면 당장 관짝 속에 들어가야 할 나이인데, 아직도 정정해 보였으니까.
‘그때보다도 더 높은 경지에 올랐군.’
직전 전생이었으면 다짜고짜 두들겨 패겠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창천검신이 아니라 천무백이었다.
물론 그간 천무백도 숱한 발전을 해 왔다. 전생의 경지를 다시금 밟아 가며 빠르게 성장중이다. 여러 깨달음을 새로 받아들여 오히려 전생보다 발전한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문제는 상대가 칠면염라 마조응이란 사실.
‘홀로 곤륜을 불태운 마귀.’
천무백은 피해자들의 시신에서 칠면염라의 흔적을 발견했다.
솔직히 말해 칠면염라 본인일 줄은 몰랐다.
아마 그의 제자거나 후인이거나, 뭐 하여튼 진전을 이은 놈이라 생각했다.
‘자신은 없다.’
상대해서.
‘질 자신은 없긴 한데.’
다만 천무백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정마대전에도 절정을 벗어나 입신지경에 발을 걸쳤다고 평가받던 게 바로 칠면염라였다.
고작 한 단계의 차이지만, 어마어마한 격차다.
절정의 경지에 오르는 것도 강호인 중 소수만 가능하다.
절정을 벗어나 입신지경에 단순히 발을 걸치는 사람은 강호를 통틀어 그 수가 많지 않다.
이미 40년 전 그만한 평가를 받던 칠면염라다.
‘다만 육체의 노쇠화는 뚜렷하다.’
아무리 천하제일이어도 자연의 이치를 벗어날 수 없다.
강대한 내공은 노화라는 이치를 조금이나마 늦춰 주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지금 칠면염라가 딱 한계였다.
‘그래서 이 지랄을 하는 것이겠지.’
온몸이 시퍼렇게 변해서 얼어붙고 있는 제갈설아의 상태는 일견 보기에도 심각했다.
‘아직은, 여유가 있다만.’
아직 시간은 있다. 빙정이 돼가는 과정이 고통스럽긴 하다만, 순식간에 사람이 한낱 빙정이 되는 게 금방 될 리가 없다.
천무백은 원상태로 돌릴 방법도 알고 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칠면염라를 우선 물리쳐야 한다.
‘물리치는 건 어렵지 않다. 까짓 이 악물고 싸우면 된다.’
그간의 깨달음, 쌓아 온 내공, 숱한 전생으로 새겨진 관록.
이길 수 있다.
‘죽이진 않고 잡아야 하는데.’
그것이 천무백이 고민하는 이유였다.
그를 살려야 했다.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아야 한다.
‘별수 없군. 숨만 붙여놓으면 될 테니까.’
천하의 칠면염라를 두고 그리 생각한다는 게 경악스러운 일이지만.
천무백으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죽일 자신은 있다. 하지만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는 건 천무백도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어쩌면 과정에서 자신이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 직전 전생이면 모를까.
칠면염라는 그만한 각오가 필요한 상대였으니까.
‘여기서 한판 붙어야지.’
더 늦으면 제갈설아도 위험한 상태에 빠진다. 천무백은 결정했다. 바로 싸운다.
하나 그때, 이어지는 칠면염라의 행동에 천무백은 당장 싸우는 계획을 취소했다.
“아해야, 네놈은 좋은 스승을 만났으면 천고의 기재가 될 법했다만, 어쩔 수가 없도다. 본좌의 극양지체를 위해 희생하는 것도 훌륭한 삶이리라.”
칠면염라는 그대로 천무백의 양 볼을 꽉 쥐었다. 그 압박에 입이 저절로 열렸다.
“잠깐이면 된다. 네놈은 천신지체이니 이거 하나만으로도 세상에 없는 완벽한 빙정이 될 거다.”
말과 동시에 무언가를 입속에 쏙 넣었다.
천무백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사람을 빙정으로 만드는 극음의 환단이다.’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저기 있는 제갈설아의 상태는 빙정으로 변하는 과정.
그간 먹은 환단은 극음의 기운이 담긴 것. 바로 지금 천무백의 입안에 넣은 것도 그런 종류다.
이걸 먹는 순간 극음의 기운이 전신에 휘몰아치리라.
극양지기, 극음지기.
한쪽으로 편향된 무공이 아닌 이상 강호인은 대체로 음양의 조화를 이뤄야 한다.
그래야 내공 운용에 차질을 빚지 않는다.
천무백의 신체 역시 음양의 조화가 거의 완벽하게 이룬 상태였다.
대자연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경천혼공의 위력 탓이다.
천무백이 일부러 그런 방향으로 유도했다.
‘이제야 신체의 균형이 잡혔다.’
처음 각성했을 때 천무백의 몸은 극도로 불균형에 치우쳐 있었다. 근육과 근육을 잇는 근맥은 처참했으며,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몸이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제대로 회복시키고, 무공을 익힐 만한 근골로 만드는 데 경천혼공이 큰 힘을 발휘했다. 그 과정에서 음양의 조화는 더 중요한 건 자명한 일이다.
여기서 극음의 기운을 받아들인다면?
당장 목숨이 위험하거나 한 건 아니다.
하나 천무백이 지금껏 맞춰 온 균형에 어긋나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도 거칠게 뿌리치지 않고 고민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극음지기는 어디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더구나 칠면염라가 가지고 온 환단에서 느껴지는 극음지기는 그야말로 가공했다.
마치 북해빙궁에서 얼음 덩어리를 통째로 들고온 듯한 느낌이니까.
‘아마도 그들의 비법이겠지.’
천무백은 칠면염라의 정체를 완벽하게 알고 있다.
하니 이 환단이 무엇인지 짐작되는 바도 있다. 추론이 정확하다면, 어쩌면 기연이 될 수도 있다.
천무백은 잠깐의 고민을 한 뒤.
‘기회를 두려워하랴!’
망설임 없이 목 뒤로 넘겼다. 삼키는 걸 확인한 칠면염라가 희미하게 웃으며 천무백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극에 달한 한기가 천무백의 뱃속에서 휘몰아쳤다.
천하의 천무백도 복부에서부터 전신의 기경팔맥으로 쭉쭉 뻗어가는 극음지기에 몸이 푸들푸들 떨렸다.
한쪽에선 충분히 음의 기운을 타고난 제갈설아, 한쪽에서는 천신지체의 천무백이 동시에 빙정이 돼가는 모습.
칠면염라는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드디어 본좌가 한 발짝 벽을 또 깨겠구나!”
천무백은 이제야 몸이 푸들푸들 떨렸지만, 제갈설아는 어느새 온몸이 차갑게 변해 있었다. 전신에 서리게 내려 앉아 있었고 눈썹과 머리칼 위에 눈이 쌓인 듯 새하얗게 변했다.
“거의 완성됐구나.”
칠면염라는 손을 뻗었다.
순간 그의 단전에서부터 용암과도 같은 극양지기가 솟구쳤다.
당장이라도 모든 걸 다 불태워 버릴 듯 강렬한 기운.
제갈설아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온몸에 몰아치는 극강의 한기에 온몸의 감각이 사라졌으나 정신만큼은 또렷했다.
한기가 마치 뇌에는 침투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애석하게도 그건 제갈설아에게 불행한 일이었다.
칠면염라가 무슨 짓을 하는지 똑똑히 보였으니까.
‘……!’
제갈설아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불길에 휩싸인 듯한 칠면염라의 얼굴이 마치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피부가 녹아 흘러내려 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급격한 노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괴이한 광경에 간담이 서늘하지 않다면 거짓이다.
“걱정 말거라. 네년의 유품은 직접 제갈세가로 갖다 줄 터이니!”
칠면염라가 괴이하게 웃으며 손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는 찰나였다.
까아앙!
어느새 천무백의 손가락에서 발출된 탄지공이 칠면염라의 뒤를 노렸다.
부지불식간의 기습.
전혀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뒤를 공격당했지만, 칠면염라의 반응도 극적이었다.
순식간에 몸을 빙그르르 돌려 불길을 뿌려 탄지공을 무위로 되돌렸다.
그러나 탄지공에 담긴 극음지기에 불길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천무백이 귀신처럼 다가와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커헉!”
칠면염라가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런데도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는지 그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하나 그는 자신에게 전해진 충격에 놀라지 않았다. 복부에 전해진 충격따위는, 지금 벌어진 상황에 비하면 절대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그는 믿기지 않는 기색으로 오연히 서 있는 천무백을 쳐다봤다.
그의 주위로 냉바람이 휘몰아치지만, 그는 멀쩡히 서 있었다.
“어찌…… 어떻게? 어떻게 극음지기를 버티는 거지?”
천무백이 먹은 환단은 그냥 환단이 아니다.
오랜 시간, 수없이 연구하고 만들어 온 정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북해빙궁의 사람들도 혀를 내두를 환단이다.
먹고 나서 저리 서 있을 수가 없다.
불신의 빛이 한가득 어린 눈빛이 닿자 천무백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원체 좀 뜨거운 남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