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99화>
99. 근데 몇 살이세요?
“적룡방에 이어 이번엔 장강수로맹이라고?”
곽천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곽천후가 인상을 쓰든 말든 천무백은 태연했다.
“그래.”
“흉수 조사를 하러 왔다면서, 왜 이렇게 싸움을 여기저기 걸고 다녀?”
“그쪽일 확률이 높으니까.”
“후. 성화문을 멸문시킨 흉수는 적룡방과 관계있고, 이번엔 장강수로맹이라 이거지?”
“확실한 건 아니야.”
“일단 아버지께 얘기해 놓겠다. 하지만…… 적룡방처럼 대놓고 건들만 한 놈들은 아니야.”
곽천후의 말 대로였다.
장강수로맹은 말 그대로 수로채의 연합이었다.
장강은 거대한 강이다. 수로채가 한둘이겠는가. 수십, 수백으로 난립하는 수적들이 모여 형성한 일종의 연맹이 바로 장강수로맹이다.
천무백의 예상대로 당준파를 납치한 수로채가 딱 한곳이더라도, 그곳을 치면 결국 장강의 모든 수적을 다 상대해야 한다.
“그래서 비검문 손 좀 쓰자 이거지.”
“맙소사……. 우리 비검문을 멸문 직전으로 만들려는 속셈이냐?”
“아버지 강하시잖아?”
“전투에서 이길지언정 전쟁에선 이길 순 없다.”
곽천후가 이를 으득 갈았다.
그의 말대로 전투에선 비검문이 이길 확률이 높다.
구파일방과 자웅을 겨뤄도 떨어지지 않는 무사들과 천하십대고수보단 모자라지만, 그에 근접한다는 평가를 받는 곽용이다.
하나 전쟁은 다르다.
문파의 모든 걸 걸고 싸우는 게 전쟁이다. 전투 몇 번 이기면 뭐하겠는가. 무사들이 소모되면 결국 문파는 무너지고 말 테니까.
천무백도 그런 사실을 잘 알았다.
“최악의 순간에 그렇다는 뜻이다.”
“최악?”
“그래. 최악의 순간에 장강수로맹하고 한바탕 붙을 생각을 해놓고 준비하라고.”
“뭔가 생각이 있구나?”
“뭐, 이번엔 조용히 처리해 봐야지.”
“무슨 계획이냐.”
“딱히 계획이라기보단, 수로채 하나를 무너뜨려도 말이지. 누가 그랬는지 모르면, 복수도 못 하지 않겠어?”
천무백이 씩 웃었다.
* * *
“당준파의 행방에 관해선 하오문과 개방도 정확한 의견을 내놓진 못했습니다.”
개방과 만나고 온 능허가 그대로 보고했다.
“다만 당준파의 마지막 행방이 장강을 건너다 뚝 끊겼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혹시 장강의 수적들에게 당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답니다.”
“확실한 건 아니란 얘기지?”
이쯤 되자 천무백도 일단 한발 물러섰다. 단순한 의심 하나로 장강수적맹을 적으로 돌리는 건 정말로 미련한 짓이다.
수적들에게 납치당했단 가능성이 분명 있는 건 맞지만, 불확실성이 크다.
“그러면 치지 않을 생각입니까?”
천무백은 잠시 뜸을 들이다 채가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음. 가령아.”
“네? 네.”
채가령은 불쑥 이름을 부르는 천무백에게 크게 당황했다.
매번 이름이 아니라 그쪽, 거기 식으로 부르던 천무백이었으니까.
갑자기 호명하니 채가령은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해 목소리가 쭉 찢어졌다.
그 모습이 바보 같아 채가령은 얼굴을 붉혔다. 하나 천무백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무신경하게 물었다.
“당준파가 수적들에게 잡힐 정도로 무위가 약해?”
“글쎄요. 적어도 일류급은 된다고 들었어요. 거기에 독까지 잘 쓰시는 분이시니까…….”
일류라면 애매하다. 수적들의 수준이 어쩔지 모르지만, 배 위에서라면 충분히 납치당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물을 뿌리고 물에 몇 번 빠뜨렸다가 꺼내길 반복하면 절정고수도 정신을 못 차리지 않는가.
헛소문이냐, 아니면 진실이냐.
아무래도 헛소문일 확률이 높겠지.
“근데 말입니다. 주군.”
“왜.”
“가릉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수룡채(水龍砦)가 이쪽에선 유명하답니다.”
“유명?”
“장강의 만독(鰻毒)을 기가 막히게 사용한다고요.”
“장강만리의 독 말이냐?”
천무백이 머릿속을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십니까?”
“알지. 복어도 아닌 장어가 독을 품고 있는 놈이니까. 그중 수십 년을 산 놈은 영물처럼 영단 같은 독단을 품고 있어서 독인들에겐 영물 취급을 받지.”
“원래 흑도들이 독을 사용하는 건 뭐 흔한 일이긴 합니다만……. 조사해 보니까 장강만독은 그렇게 쉽게 다루고, 또 그걸 전투에서 이용할 정도로 많은 양을 확보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능허의 말에 천무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독은 전문 분야가 아니지만, 그래도 웬만한 독인들보다 더한 지식을 가진 게 천무백이다.
“한 방울만으로도 운남의 코끼리를 절명시킨다는 극독을, 자유롭게 사용한다고?”
“네. 그래서 근방 수룡채의 위명이 하늘을 찌른답니다. 뿐입니까. 장강수로맹 내부에서도 위치가 급상승했다고 하더라고요.”
“언제부터?”
“그게 얼마 안 됐습니다. 한달 전부터요.”
채가령이 고개를 갸웃했다.
“스승님은 2년 전쯤 사라지셨어요.”
천무백이 다시 능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전에는 만독을 썼더냐?”
“그게, 그전에는 그저 그런 수적채중 하나였답니다. 한번은 관아의 소탕에 없어질 뻔한 적도 있다네요.”
능허가 목소리를 낮췄다.
“냄새가 나긴하는데, 2년 전에 납치해놓고 한달 전부터 독을 사용하긴 했다면…….”
“자세한 사정은 알아봐야겠다만, 장강만리의 독을 자유자재로 쓴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구나.”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납치까진 무리더라도, 가령 당준파의 독을 다루는 비급 같은 건 취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2년이란 시간이 독을 취급하는 방법을 빼내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르지.
최소한의 연관성이 보였다.
“하면 움직여야겠군.”
“한데, 주군. 정말 장강수로맹과 싸울 겁니까?”
“왜.”
능허의 얼굴에 드러나는 건 명백한 걱정이었다.
“아니, 물론 주군이 질 것 같지야 않다만……. 수로맹이지 않습니까. 주군이 천룡검협이고, 청성표국의 자제인 건 이젠 익히 알려져 있는데 말이죠. 주군에게 복수는 못하더라도, 살아남은 수적 놈들이 표국의 표행을 방해하는 거야 아주 식은 죽 먹기 아니겠습니까.”
맞다.
비단 장강수로맹뿐만이 아니다. 흑도 놈들은 이런 데에서 은근히 합이 잘 맞는다. 평소에는 이권 하나로 아등바등 싸우더라도, 외부의 적이 나타나면 묘하게 힘을 잘 합친다.
더구나 수로채 하나를 들쑤시는 게 아니라 장강 수로맹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건…….
“더럽게 귀찮은 일이지.”
천무백은 그리 중얼거리다 채가령에게 물었다.
“여기 능허와 나를 처음 봤을 때, 어떤 사이로 보이더냐?”
“네? 아…….”
맥락없는 질문.
채가령이 급히 천무백과 능허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더니 능허의 눈치를 살짝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호위무사와 부잣집 도련님?”
“호위무사? 정말로?”
“음. 아니요. 사실은…… 약간 하인 같은…….”
“허!”
능허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탄식을 터뜨렸다. 속이 확 뒤집히는 것 같지만 차마 채가령에게 화를 터뜨리진 못하는 듯 답답한 기색이었다.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자, 그러면 지금은?”
“네?”
“지금 순전히 보이는 것만 말해 봐라.”
채가령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천무백을 바라봤다.
뭐 변할 게 있나 싶었던 채가령이 일순 흠칫했다.
둘의 외모는 변한 게 없었다. 하나 묘하게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지금까지 천무백에게 채가령이 느낀 건, 무언가 고귀함이었다.
그러니까 부드럽고 편안한 분위기가 분명 존재했는데, 동시에 범접하고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위압감이 공존했다.
그것이 또래인 채가령이 어려워하는 묘한 느낌이었다.
한데 지금은…….
“어, 흑도에게 납치당한 부잣집 도련님?”
“……아가야. 왜 갑자기 그리 변하느냐?”
능허가 바람 빠지는 소릴 흘렸다.
“그렇게, 그냥 느껴지는데요.”
“됐다. 내가 기세를 조절한 거니까.”
천무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능허야, 하오문 통해 인피면구 좀 구해 놔라.”
“네? 인피면구요?”
“아니면 내가 얼굴을 좀 고쳐 줄까? 축골공 정도는 아는데.”
“아휴, 아닙니다. 그 아픈 걸. 네. 구하겠습니다.”
“적당히 순한 인상으로.”
능허는 미간을 좁히면서도 순순히 그 뜻에 따랐다.
천무백이 계획 없이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또 뭔가 계획을 떠올렸겠지.
* * *
수룡채를 치기 위해선 가장 큰 난관이 존재했다.
“위치를 모릅니다. 장강 위에 있는 어디 섬이란 얘기도 있고, 어디 강변에 꾸렸다는 얘기도 있고.”
수룡채의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
너희가 당준파를 숨겼냐고 윽박지르던, 뭐든 하려면 일단 수룡채와 부딪쳐봐야 할 게 아닌가.
하나 그 위치를 모르니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개방에서는 거지들을 풀겠다고 했지만, 장강 위에서 거지가 나타나면 누가 봐도 개방도로 의심할 게 뻔했으니 정보채집에 시간이 걸릴 터.
천무백은 비검문과 하오문을 통해 다방면으로 알아봤으나 쉽지 않았다.
하여 직접 찾기로 했다.
“수적들에게 피해를 보지 않은 어촌을 찾아봐.”
“어촌이요?”
“그래. 수적들이 보통 표행이나 상행을 하는 상단을 털지만, 그래도 장사 안될 땐 어촌을 털거든? 이 중에 한 번도 안 털리거나 거의 무사했던 어촌이 있을 거야.”
과연 천무백의 말 대로였다.
“유가촌이란 어촌 마을 하나 있는데, 여긴 딱히 약탈당한 적이 없답니다.”
“여기로 간다.”
목표를 정하는 게 다소 시간이 필요할 뿐이지.
확신이 서면 천무백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능허 넌 인피면구 차고.”
“주군은요?”
“필요 없다.”
천무백이 고개를 홱 돌렸다. 능허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어…… 변한 게 없는데 변했네?”
“사람의 얼굴에서 눈꼬리만 바뀌어도, 콧잔등만 바뀌어도, 그리고 입꼬리만 살짝 바뀌어도 사람 인상은 달라지지.”
천무백은 평소보단 조금 더 순하고, 오히려 어린 느낌이 훨씬 강조된 인상으로 변했다.
늘 곁에 붙어 다닌 능허마저 순간 고개를 갸웃할 정도였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리고 같이 가자.”
천무백이 채가령과 연소운에게 말했다.
“저희도요?”
“당준파 얼굴 아는 사람이 여기 또 누가 있어?”
“네! 갈게요!”
채가령이 짐짓 기뻐하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그녀로선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 본인을 의원의 길로 이끌어 준 은사다. 무취의방의 규정과 숱한 반대에도 지켜줬던 또 다른 아버지시다.
그분이 살아계신다면 찾아뵙는 게 도리였다. 그녀는 그가 직접 독을 살포했으리라 믿지 않았다. 수적들의 협박에 시달리고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니 두 눈으로 확실히 보고 싶었다. 그뿐만 아니라 가문과 문파를 멸문시킨 흉수들을 잡기 위해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녀는 현실적이었다. 본인 스스로가 복수해낼 수 있으리라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복수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리 행할 생각이었다.
“일단 그 어촌으로 먼저 움직일 거다. 다만, 여기선 위장을 할 거야.”
“어촌? 거기 가면 알 수 있습니까?”
천무백이 씩 웃었다.
“수적들에게 수탈 한 번 안 당한 어촌이라니. 우습지 않아?”
“……?”
“어부나 수적이나 단 한 치 차이다. 굶주리면 수적이 되는 거고, 배부르면 어부가 되는 법이지. 그들이 수룡채는 아닐지라도, 알게 모르게 수적질하면서 인연이 있을 거다.”
“아…….”
“그런 와중에 천룡검협이 나타났다고 하면 어떻게 반응하겠냐? 철저하게 숨기겠지.”
채가령이 감탄한 눈빛으로 천무백을 바라봤다.
“그러니 위장한다. 능허야, 넌 대충 어디 있는 집 안에서 나온 어린 애들 데리고 구경시켜주는 숙부 역할이다.”
“제가요?”
“그래.”
“오냐. 숙부라 부르거라.”
“…….”
“그럼 저는요?”
채가령이 눈을 빛냈다. 능허가 대신 대답했다.
“남매가 어울리겠네, 둘이. 딱. 좀 멀리 부잣집에서 외유나온 남매를 데리고 구경시켜주는 삼촌 역할. 그쪽은 어, 호위무사 역할 괜찮겠네. 인상이 차가우니까 딱 좋아.”
“아하.”
능허는 숙부, 천무백과 채가령은 남매, 연소운은 호위무사.
채가령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천무백을 슥 둘러봤다.
인상이 바뀐 탓인지 채가령은 이전처럼 어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이 가득한 눈망울이었다.
“저기.”
“뭐냐.”
“근데 몇 살이세요?”
“……!”
“내가 누나 해야 하지 않아요?”
천무백은 침묵했고, 능허는 배를 잡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