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98화 (98/318)

<검신재생 98화>

98. 장강의 수적.

“그, 그, 그, 당, 당신은 누구요?”

의원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천무백이 아낌없이 기세를 내뿜은 탓이다. 옆에 있는 비검문 무사도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떠는데, 한낱 의원인 그가 어찌 버티겠는가.

그는 급히 고개를 돌려 비검문 무사를 바라봤다.

“이, 이보시오 진공. 나 좀 도와주시오.”

하나 진공이라고 불린 무사는 움직이지도 못했다.

오히려 이 자리에서 그나마 자유로운 게 바로 의원이었다.

어설프게 익힌 심법은 천무백의 강대함을 외려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반면 무공을 제대로 익힌 진공은 천무백의 기세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어느 정도인지 체감하는 바가 더욱 컸다. 의원은 오히려 내공에 무지했기에 저리 말이라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진공은 감히 움직일 수도 없었다.

질린 얼굴의 의원 귓가에 천무백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어설픈 권위, 어설픈 지식, 어설픈 위치, 그것들을 써먹으려면 적어도 보는 눈은 키워라.”

“이, 이익, 나 무취의방에서 수학한 수선의(修善醫)요! 비, 비검문 소속이외다!”

“허 참. 진짜 어설픈 것들이 어쭙잖은 권위를 믿고 까분다더니.”

천무백은 오히려 지금 화를 내는 게 자신에게 자조가 들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맥이 탁 풀렸다.

어설픈 권위와 힘.

그것만 믿고 세상이 제 편한 대로 굴러가는 줄 아는 머저리.

이런 놈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만큼 쓸모없는 심력의 낭비는 없다.

“당, 당신 누군지 모르겠다만 이만 물러가시오. 내 비검문에 말하면 당신 여기 중경성에서 고개도 못 들고……”

천무백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빠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수선의는 허공에 하염없이 손을 몇 번 휘젓다가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샛노랗게 젖어드는 바지와 함께.

* * *

수선의는 희미하게 돌아오는 정신을 겨우 일깨웠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이 머무르던 비검문의 방안이 맞다.

방안을 가득 채우는 약재의 고아한 향.

하나 그 향속에 뭔가 야리꾸리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묘하게 불쾌한 냄새.

그게 무슨 냄샌가 싶어 킁킁거리던 수선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변소가 무너지기라도 했나. 어디서 오줌 지린내가 이리도 진동을…… 응?”

코를 킁킁대던 그는 지린내가 자신한테서 흘러나온단 걸 깨닫고 급히 이불을 치웠다.

“이, 미, 미친.”

그의 나이 36세.

이불에 오줌을 지렸다. 그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장탄식을 토했다. 그러다가 이내 누가 볼까 재빨리 이불을 치우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래도 지린내는 사라지지 않아 문을 열어놓고 급히 탕약을 달였다. 지독한 탕약의 냄새라면 이 정도 지린내는 묻히리라.

“일어나셨는가?”

그때였다.

방 밖에서 늙수그레하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수선의는 이 목소리가 누군지 안다.

비검문의 절대자, 곽용이었다.

그때야 수선의는 자신이 왜 섭진문의 폐허를 찾아갔는지 떠올렸다. 곽용이 직접 명했던 게 아니었나. 무슨 독이고, 흉수가 누군지 최대한 알아오라고.

하나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떠올랐다.

온몸을 꽁꽁 감싸는 천무백의 기세.

나지막하게 귓가에 꽂히는 천둥같은 목소리.

한 발짝 다가오며 부라렸던 그 지독한 눈동자.

엄청난 공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순간 눈이 떨리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 곽용이 문을 벌컥 열었다.

“수선의, 어떤 독인지 알아내셨는…… 으음?”

곽용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 샛노란 오줌으로 웅덩이를 만드는 수선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으니까.

“대체…….”

천무백에게 한 대 맞았단 소리는 들었건만, 이 무슨 해괴한 모습이란 말인가.

곽용의 입가에서 한탄이 흘러나왔다.

* * *

“답지 않게 너무 자비롭게 보내 주신 거 아닙니까?”

능허가 불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가.”

“그 수선의인지 숟가락인지 뭐시기요. 딱 한 대 때리고 기절시킨 게 답니까. 참교육 해 줘야죠.”

“오줌 지렸잖냐. 얼마나 수치스럽겠어. 다 큰 성인이.”

“그래도 하는 짓거리 보면 어휴…….”

능허가 흘깃 진지한 표정으로 잿더미의 냄새를 맡고 혀를 살짝 대 맛도 보고 있는 채가령을 바라봤다.

“아주 그냥 내가 요절을 낼 걸 그랬나 봅니다.”

“됐다. 어차피 그놈, 당분간 고생 좀 할 거다.”

“고생요?”

“혈 자리 하나를 풀어놨다.”

“네?”

“이제 매번 안에 천을 덧대고 다니면서 수시로 바꿔 줘야 할 거다. 조절 못 하거든.”

“……와.”

능허가 소름이라도 돋은 듯, 몸을 부르르 떨렸다.

“어휴 어딜 돌아다니지도 못하겠네요.”

“진공이란 비검문 무사가 여기서 있었던 일을 고할 테니, 비검문에 붙어 있지도 못할 테고. 쫓겨날 거다. 그리고 오줌이나 지린다는 의원을 어디서 쓰겠냐.”

“허…… 참. 잔인하십니다.”

“뭐, 그래도 의원이라고 하니, 스스로 침을 놓아 치료할 수 있을 거다.”

“…….”

능허는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그냥 뒈지게 처맞고 깔끔하게 끝내는 게 낫지.

저 무슨 수치란 말인가.

‘맞는 게 낫다. 맞는 게 나아. 암.’

그러다 능허는 불쑥 소름이 올라왔다.

‘내가 미쳤구나. 이젠 맞는 걸 너무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어.’

심하게 보면 아들이나 조카뻘, 그나마 낫게 보면 나이 차이 크게 나는 동생뻘인 놈에게 맞는 걸 자연스러운 상수로 생각하다니…….

내심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워진 능허였다.

“저, 천 공자님.”

그때 채가령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천무백이 손 두 뼘쯤은 더 커서 채가령은 매번 천무백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왜.”

“찾은 것 같아요.”

그 말에 한탄하던 능허가 벌떡 일어났다.

“찾았다고, 아가야? 진짜로?”

“네. 찾았어요. 아저씨. 그런데…….”

채가령이 말끝을 흐렸다. 무언가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천무백은 굳이 채근하지 않고 기다렸다.

이내 결심을 한 듯 표정을 굳힌 채가령이 말했다.

“석독(石毒)이에요.”

“석독?”

천무백도 처음 듣는 명칭이었다. 즉, 40년 전까지만 해도 나타나지 않은 독을 의미했다.

천무백이 설명하라는 듯 기다리자 채가령이 곧장 얘기했다.

“오랜 동굴 속에 사는 박쥐와 다른 짐승들이 대변을 보면, 그게 쌓이고 굳혀져서 돌이 돼요.”

“거기서 나온 독이다?”

“아뇨. 정확히는 청혈복(淸血蝠)의 대변이 모여서 만들어진 거예요.”

“청혈복.”

천무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피가 푸른색이라 청혈복이라 붙여진 이름인데, 문제는 그 피가 지독한 독성을 띠고 있었다.

오죽하면 한낱 미물에 ‘독왕(毒王나)’이란 별명이 붙었겠는가.

아주 희귀한 놈인데 천무백도 아주 먼 과거, 운남에서 얼핏 본 적이 있다.

“청혈복의 독기가 오랜 세월 쌓이고 굳어진 돌에서 추출한 독성을 가공해서 만들어진 석독이 있어요.”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되었구나.”

“네. 제가 알기론 20년 전에 처음 등장했어요.”

하면 천무백이 모를 수밖에 없다.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독이니까.

“워낙 독성이 강해 취급이 힘들어요. 아니, 알고 있는 사람도 중원에서 거의 없을 거예요. 실제로 사용된 적이 없으니까요.”

천무백은 그 얘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면 채가령은 어찌 알고 있는가.

그것도 화마로 다 태워진 미세한 독기만을 맡고, 살짝 맛만 봐서.

채가령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스승님이 제조하신 것이거든요. 활력의(活力醫)께서요.”

그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 * *

활력의(活力醫) 당준파.

무취의방에서 독학과 약학을 가르친 이며, 어렸을 땐 약선 밑에서 수학했던 의원이다.

거기에 채가령의 재능을 알아보고 무취의방의 규정을 어겨 가며 의방에 들여온 은사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사천당가 출신이었다. 정확히는 본가가 아닌 먼 방계지만, 어쨌거나 당가 출신인 만큼 독에 조예가 깊었다.

“그런가.”

사천은 비교적 운남과 가깝고, 청혈복이 서식할 수도 있다.

그곳 출신이니 청혈복을 보고 석독이란 독을 제조해 냈을 수 있었으리라.

“스승님은 독에 조예가 깊었지만, 별호에서 보듯 독을 약으로 이용하신 분이에요.”

독과 약은 한 치 차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게 말이 쉽지, 독을 약처럼 쓰고, 약을 독처럼 쓰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두 분야에 대해 조예가 깊어야 했고, 그걸 다루는 이의 실력도 범상치 않아야 한다.

활력의 당준파가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독을 약처럼 써서 사람의 활력을 되살린다 하여 붙여진 별호.

“그런 스승님도 이 석독을 약으로 이용하는 방식은 도저히 찾지 못하셨어요. 피 대신 독이 흐르는 말 그대로 독인(毒人)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하셨죠.”

“그래서?”

“석독을 온전히 봉인하셨어요. 추후에 더 배우고, 연구하겠다고 하시면서요.”

“근데 그 독이 지금 여기에 사용되었다 이거지?”

채가령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네. 틀림없어요. 석독이에요. 불길로도 완벽하게 태워지지 않는 독이니까요.”

천무백은 미간을 좁혔다.

“석독을 아는 사람은?”

“적어도 스승님이 무취의방을 떠날 때, 그리고 제가 쫓겨날 때까지만 해도 저와 스승님뿐이었어요.”

“…….”

하면 무슨 결론이 도출되겠는가. 천무백은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채가령의 얼굴을 바라봤다.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인정하기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채가령은 이곳을 멸문시키지 않았다.

하면 누구겠는가.

“스승님이 이런 짓을…….”

당준파밖에 없다.

천무백은 거의 무너질 듯이 창백하게 질린 채가령에게 다소 냉혹하다 싶을 정도로 질문을 던졌다.

“당준파, 그자 어디 있나.”

“그게…… 듣기론 사천으로 돌아갔네, 운남으로 갔네, 아니면 서장으로 갔네 여러 얘기도 있지만…… 수적들에게 붙잡혀서 거기서 의원 일을 한다고 듣기도 했어요.”

“수적이라…….”

천무백이 헛웃음을 지었다.

장강의 수적.

장강수로맹.

천무백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고 보니 여기 중경성도 장강이 흐르지?”

중경성은 높은 고원이 많이 있는데, 장강의 지류인 가릉강(嘉陵江)이 도시를 지난다.

그러니 이곳에도 간혹 수적 떼들이 출몰해 일을 벌이곤 하는데, 적룡방이 있고 비검문도 있으니 크게 활약하지는 못했다.

하나 장강 지류인 지릉강에 수로채가 있는 건 명백한 사실.

천무백은 채가령을 보며 속으로 혀를 쯧 찼다.

만일 당준파가 장강수로채에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리고 혈귀곡이 적룡방과 접촉한 것처럼 수로채와 협력했다면?

장강의 수적들도 적룡방 못지않은 사파의 사악한 놈들이 아닌가.

이런 혈사를 저지르는 데도 거리낌 없는 살인마들이기도 하다.

물론 당준파가 순순히 시킨다고 독을 뿌릴 만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지만.

이미 호선자라는 정파의 인물에 혈사를 일으킨 흉수 중 하나로 짐작되는 가운데,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참으로 공교롭구나.’

장강의 수적에게 잡혀간 당준파. 그리고 혈사를 일으킨 독이 당준파의 독이고, 때마침 근처에 장강의 지류가 흐른다.

참으로 공교롭지 않은가.

‘그래도 꼬리는 계속 잡히는군.’

천무백이 씩 웃었다.

아주 미세한 단서, 조그마한 꼬리라도 상관없다.

‘잡아서, 몸체까지 끌어당겨 버린다.’

천무백의 눈이 번쩍였다.

“능허야.”

“……주군, 제발 제가 생각하는 그것은 말씀하지 말아 주십쇼.”

상황이 돌아가는 걸 보고 무언가 느낀 능허가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천무백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뱃멀미하느냐?”

“……한다고 하면 봐주실 겁니까?”

“아니.”

“젠장. 안 합니다.”

“그럼 가자. 수적들이랑 장강에서 뱃놀이 좀 하자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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