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59화 (59/318)

<검신재생 59화>

59. 아니, 이거 맞아?

어두운 암실이었다.

암실에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중 가장 왜소한 체격의 인영이 늙수그레한 목소리를 토했다.

“이 미로에 이런 장치가 있었나?”

“계획에 어긋나지는 않겠죠?”

“어긋나지는 않을 걸세. 다만, 가급적 많은 제물이 모이길 바랐건만.”

“기관진식이 하나도 없고 미로라는 점이 우리의 계획에 딱 맞아 떨어졌었는데……!”

“괜찮소. 그래도 화산이나 종남만 살아서 제물이 되어줘도 충분해.”

“음!”

“독은 어떻게 되었나?”

늙은 목소리의 물음에 비교적 날카로운 톤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이번에 새로 개발한 독은 이미 미로에 들어왔을 때부터 퍼뜨리고 있습니다. 무색무취이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지요.”

“더구나 미로를 헤쳐나가면서 내공소모도 심하고, 심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독이 퍼지기는 아주 좋은 상태입니다. 모두 훌륭한 제물이 되고 있어요.”

“아쉽군. 기관진식 같은 건 없었는데 말이야.”

애당초 이들이 이곳을 선정한 이유가 바로 미로와 기관진식과 함정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그들이 바라던 최고의 환경이었으니까.

하나 기관진식이 갑자기 발동되면서 안에 들어온 무인들이 숱하게 죽어 나가고 있었다.

이들은 무인들이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미로를 헤쳐 나와 모두 제물이 되어 주길 바랐으니까.

“괜찮소. 화산과 종남, 그리고 무성적마와 관성검. 이들만 살아 제물로 바쳐지면 충분해.”

“흡정마공으로 그들의 내공만 갈취해도……!”

그 말에 탁자에 둘러 앉은 사람들의 눈에 욕망이 번들거렸다.

상상만 해도 탐나는 듯 누군가는 붉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그들에게선 도저히 인간들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사이한 기운이 물씬 풍겨 나왔다.

“아, 그리고. 천룡검협. 그 자도 있습니다.”

“……천무백 말이지요.”

“예. 하남에서 우리 일을 다 그르친, 그리고 소림에서도 우리에게 큰 피해를 끼친…….”

“으음.”

“그자도 중독이 되었나?”

“무색무취의 독입니다. 심지어 증상도 없습니다. 절대 알아차릴 리가 없습니다.”

“그런가. 그러면…… 육성과 구진해의 복수도 되겠군.”

“그만하면, 이곳에 모인 모든 무인들에게 흡정마공을 펼치면…….”

“우릴 그저 하수인으로 부리는 저 붉은 귀신 놈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겠지.”

“의식을 준비하겠습니다.”

노인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탁자에 앉은 장로들도 모두 흡족하게 웃었다. 하나 노인은 속에서 불길함이 한줄기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천룡검협이라…… 붉은 귀신 놈들도 줄행랑치게 한 놈인데…… 으음. 아니다. 잘 되고 있다. 현재까진 계획대로 잘 되고 있어.’

노인은 애써 불길함을 부정했다.

계획은 완벽했고, 진행 역시 완벽했다.

이제 흡정마공으로 무인들의 내공을 모두 갈취하면 된다.

노인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 * *

“이거, 일 참 재밌게 됐어. 매화일검.”

“…….”

무성적마는 재밌다는 듯 입술을 말아올렸다.

“미로를 빠져나갈 방법을 화산만 독점하면 안되지. 이 어르신이 좋은말로 타이를 때, 어서 얘기하거라.”

“애석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던 방법도 이제 틀렸소.”

국보는 침착하게 말했다.

벽이 새로 솟구치면서 일정한 규칙을 가졌던 문양과 그림 역시 바뀌었다.

새로 나타난 그림도 잘 찾아보면 특정 규칙을 찾을 수 있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국보는 자신의 뒤에서 검을 뽑고 있는 이대제자 두명을 흘깃 바라보곤 검집을 꽉 잡았다.

“허어. 끝내 단단히 혼을 나야 정신을 차리겠는가? 어르신이 교육을 해줘야겠구나.”

무성적마는 붉은 수염을 치켜올렸다.

그의 창이 어서 피를 달라는 듯 날카롭게 빛났다.

‘여기서 죽인다고 해도 알 리가 있겠는가.’

외부와 철저히 은폐된 미로.

심지어 같이 있던 청현진인도 솟구친 벽 때문에 갈라졌다.

서로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

여기서 매화일검을 죽인다 한들 누가 알겠는가.

흉수를 알 수 없다. 의심이야 하겠지.

‘더구나 적당히 죽이기 전에 이 미로를 빠져나가는 방법 좀 캐내고.’

미로만 빠져나가면 어차피 다 죽여야 하는 경쟁자다.

특히 화산은 종남과 더불어 가장 큰 경쟁자다.

그러니 여기서 조금이라도 숫자를 줄여주는 게 이롭다. 하물며 상대가 매화일검이라면 말이다.

무성적마가 서서히 기세를 끌어올렸다.

국보는 살기를 느꼈는지 검을 뽑았다.

“후. 장로님들에게 얘기는 자주 들었지. 무성적마는 상대할 가치도 없는 호로자식이라고.”

“……허.”

“닥치고 덤비시오.”

“이런 오만방자한!”

무성적마는 화를 내며 순식간에 득달했다.

쩌정! 쩡!

“……!”

무성적마는 순식간에 공방을 나누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손목에서 저릿하게 느껴지는 반탄력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에 반해 국보는 검을 겨눈 채 묵묵히 서 있었다.

‘과연 매화일검!’

후기지수 중 남궁세가의 대공자와 제일이라더니.

과연 만만치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한 배분, 아니 두어 배분 높은 걸 생각하면 이렇게 한 발자국 밀려난 상황이 오히려 창피할 지경이었다.

“끌끌끌. 무성적마. 네놈도 다 늙었구나!”

그때였다.

국보의 침착했던 표정이 한차례 흔들렸다.

어느새 나타난 건 청현진인에게 한차례 당했던 호성노괴였다.

무성적마가 기분 나쁘다는 듯 화답했다.

“네놈은 맷집만 키웠구나. 지상에서는 웬 애송이한테 처박히고, 방금 전엔 수호검에게 나가떨어지다니. 아직도 멀쩡히 걸어 다니는구나.”

“……끙! 나야 수호검에게 당했지만, 네놈은 고작 애송이 하나한테 쩔쩔매고 있구나.”

국보는 입술을 깨물었다.

호성노괴와 무성적마는 둘 다 사파 쪽의 인물이다.

서로 안면이 꽤 깊었다. 물론 언제든 이익을 위해선 서로에게 칼을 겨누지만, 그 말은 반대로 생각하면 이익을 위해 힘을 합칠 수도 있단 뜻이다.

지금처럼.

“지금 굳이 싸울 필요는 없겠지?”

“화산이나 종남 애들부터 치워야지.”

“같은 생각일세.”

호성노괴가 이죽이며 한발짝 다가왔다.

절반이 싹둑 잘려나가 짧아진 손톱이지만 그게 우스워 보이진 않았다.

국보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라면 능히 홀로 상대할 자신이 있건만 둘은 솔직히 말해 무리였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 까진 해야지.’

국보가 자세를 바로잡자 호성노괴는 킬킬거리며 다가왔다.

“끌끌. 수호검 대신 네놈으로 만족해야겠구나. 애송…….”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무성적마의 눈이 부릅떠졌다. 순간 터져나온 굉음과 함께 앞에 있던 호성노괴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 무슨……!’

호성노괴가 살기를 뚝뚝 흘리던 자리엔 웬 젊은 청년 하나가 서 있었다.

아니, 젊지도 않았다. 누가 봐도 앳된 게 약관도 채 안 되 보였다.

‘어? 지상에서 그놈?’

무성적마의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어쩐지 익숙한 광경이었다.

무성적마의 시선이 한쪽을 향해 천천히 돌아갔다.

“으으으!”

호성노괴가 말 그대로 꿈틀거렸다.

이번에는 도저히 회생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양쪽 어깨가 충격으로 부서졌는지 축 늘어졌다. 안그래도 굽은 허리는 거의 접히다시피 꾸깃꾸깃 꺾여 있었다.

무성적마는 당황스러움보단 두려움을 느꼈다.

‘이번에도…… 아무것도 못 봤다.’

지상에서 호성노괴가 나가떨어질 때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못 봤다. 만일 저 자리에 호성노괴가 아니라 자신이 있었다면?

“아…….”

무성적마가 굳은 고개를 들어 청년, 그러니까 천무백을 바라봤다.

좌중이 일순 침묵에 빠졌다.

천무백이 다소 떨떠름하게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왜 거기 가만히 서 있냐. 피했어야지.”

“…….”

아니, 그게 왜 쟤 잘못인데?

“당, 당신은 누구요!”

무성적마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천무백의 고개가 모로 꺾였다.

때마침 뒤늦게 쫓아온 능허가 말했다.

“지금 저기 부딪쳐서 날아간 노인이 호성노괴고, 저 노인네는 무성적마네요. 섬서에서 제법 먹어주는 인사들입니다.”

“호성노괴? 무성적마? 뭔 듣도 보도 못한 잡놈들이 왜 이렇게 많아?”

“…….”

어, 그건……그냥 네가 모르는 건데.

하지만 능허는 속내를 입 밖으로 내뱉는 짓은 하지 않았다.

“뭐 상관없지. 어이. 노인네.”

“나 말이요?”

“선택하시오. 비키던가. 쳐 맞던가.”

“……!”

무성적마는 순간 멈칫했다.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선택지였다. 그 누가 자신에게 저런 선택을 강요한단 말인가? 감히 누가?

화산의 무인들도 자신에게 저러진 못했다.

무성적마는 속에서 울컥 치미는 걸 느끼며 천무백을 노려봤다.

하나 천무백의 두 눈을 본 순간 무성적마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깊은 두 눈.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깊은 눈은 언뜻 맑아보였지만, 그 안에는 당장이라도 집어 삼킬 거 같은 용이 꿈틀거렸다.

무성적마는 한쪽에서 이 광경을 넋 놓고 보고 있는 국보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체면을 버렸다.

“비, 비키겠다!”

“아니다. 그냥 좀 맞아야겠소.”

어?

왜?

“눈이 마음에 안 들어.”

뭐 이런 미친 새끼가…….

* * *

국보는 한쪽 벽에 꿈틀거리는 호성노괴와 얼굴이 퉁퉁 부어올라 알아보기 힘든 무성적마를 보곤 불쑥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저들도 가족이 있을 터인데…….’

무성적마와 호성노괴는 섬서 사파 무인을 대표하는 이들이다.

국보는 이 자리에서 무성적마를 쓰러뜨리고 명성을 얻을 생각에 살짝 설레기도 하지 않았는가.

그런 둘이 저렇게 비오는 날 개 쳐맞듯이 두들겨 맞고 쓰러진 모습은 상상도 못했던 광경이다.

국보는 이 사태를 만들어낸 천무백을 바라봤다.

“우선, 도움에 고맙단 인사를 드리오. 나는 매화일검 국보라고 합니다.”

천무백이 뚱한 얼굴로 국보를 바라보더니 능허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명한 놈이냐?”

“매화일검이라잖습니까.”

“…….”

국보는 입을 다물었다.

천무백의 시선에 ‘그래서 그게 뭐?’라는 글자가 둥둥 떠다니는 듯 했다.

국보는 울컥 치미는 걸 애써 가라앉혔다.

“실례지만 소협의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천무백이오.”

“…….”

성함 여쭸다고 이름만 말하네.

그럼 어떻게 알아?

천무백은 국보와 대화하는 게 귀찮은지, 아니면 무언가를 찾는지 고개를 이리저리 꺾었다.

능허가 대신 대답했다.

“천룡검협이란 별호를 가지고 계신 분이오. 보는 것과는 달리.”

“천룡검협!”

국보의 눈이 번뜩였다.

귀가 따갑도록 들은 근래 최고 유명인사가 아니던가!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됐다. 무성적마와 호성노괴가 왜 저리 쉽게도 당했는지. 그리고 내심 천룡검협의 명성을 질투하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질투를 하기엔 너무 강력한 무위였으니까.

국보가 살짝 열기에 찬 눈으로 천무백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말을 걸려고 했다.

“비키시오.”

“……네?”

“후우, 바쁘니까 빨리 비키던가. 아니면 쳐 맞고 비키던가. 아니면 뒤지게 맞고 비키던가. 댁도 선택하시오.”

“…….”

국보는 재빠르게 몸을 비켰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무성적마의 꼴을 보고도 안 움직이면 그건 멍청한 거다.

천무백은 국보의 뒤에 있는 벽을 향해 다가갔다.

벽에는 원뿔형의 구조물이 툭 튀어 나와있었다.

“그게 마지막입니까?”

“그래. 이것만 뽑으면 저것들 다 맞춰질거다.”

능허는 감탄하며 천무백을 바라봤다.

천무백은 별안간 무언가 깨달았는지, 미로 곳곳을 헤쳐 나가면서 원뿔을 뽑고 있었다.

원뿔 하나씩 뽑을 때마다 미로 구조가 계속 바뀌었는데, 눈치 빠른 능허는 벽에 그려진 그림이 점점 일정한 규칙과 모양으로 바뀌어가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지금 천무백은 원뿔을 하나씩 뽑으면서 미로를 맞추고 있었다.

“자. 이제 슬슬 여길 빠져나가자고.”

천무백이 가볍게 미소지으며 원뿔을 뽑았다.

능허는 지긋지긋한 미로를 빠져나간다는 생각에 싱긋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이내…….

쿠구구구구구구궁!

“어?”

“응?”

“……뭐, 뭐요.”

처음 미로가 바뀔 때처럼 바닥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더 격렬하게 진동했다. 흡사 지진이라도 발생한 것처럼.

“……주군.”

“응?”

“천장이…… 무너지고 있는데요?”

“그러네.”

“……이거 맞습니까?”

천무백은 멋쩍게 웃었다.

“틀린갑다.”

이 미친 새끼가 진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