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58화>
58. 네놈이 만들었구나!
청현진인의 침착함은 훌륭했다.
수호검이란 명성대로 그는 화산 제자들을 이끌고 침착하게 미로를 헤쳐 나갔다.
물론 그에는 매화일검이란 후기지수가 사제들을 잘 다독이는 것도 컸다.
청현진인의 격려와 매화일검 국보의 다독임으로 화산파 제자들은 다른 무인들과 다르게 꾸준히 미로를 돌파했다.
“이쪽으로 가면 될 것 같습니다. 미로 벽에 새겨진 문양마다 규칙이 있습니다.”
“과연 그렇구나!”
청현진인이 감탄했다.
과연 국보는 눈썰미가 좋았다. 아무리 어지러이 얽힌 미로라도 규칙이 있었다. 국보는 그 규칙을 발견했다.
규칙대로 움직이니 확실히 환경이 달라졌다.
회색빛의 벽의 색깔이 바뀌었다. 답답하게 짓누르던 공기가 맑아졌다.
즉슨, 뚫린 공간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됐다. 외부인지는 모르지만 맑은 공기가 들어오고 있어.’
드디어 미로 출구와 가까워졌다. 현재 규칙적으로 드러나는 벽의 그림을 보면 빠져나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자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국보가 목소리를 낮췄다.
“하면 쫓아오는 이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음!”
청현진인이 침음을 삼켰다.
화산은 마주치는 무림인에게 함부로 칼을 겨누지 않았다.
굳이 적을 만들 필요가 없었으니까.
한데 그 때문인지, 은근슬쩍 화산의 뒤를 따라오는 무림인이 하나, 둘씩 생겼다.
“미로를 빠져나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저들은 우리가 미로를 탈출할 수 있으리라 여겨 따라오고 있으니까요.”
“음.”
“장로님. 어찌 됐건 우리는 적혈검귀의 비급과 보물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건 저들도 마찬가지지요. 모두가 원하는 걸 가질 수는 없습니다.”
청현진인은 화산에서도 군자로 이름 높았고 헛된 피를 보기 싫어하는 온화한 성격이었다.
국보의 말 뒤에 숨은 저의는 저들을 따돌리자는 뜻.
하나 뒤따라오는 이들을 어찌 따돌리겠는가?
유일한 방법은 살인멸구 뿐이다.
‘젊은 혈기 탓인지 아직 패도적이구나.’
국보를 바라보는 청현진인의 눈동자에 언뜻 불편함이 떠올랐다.
‘천룡검협, 그 자의 눈은 그저 맑고 아름다웠는데…….’
비슷한 나이의 천무백이 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비교하고 싶진 않아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천무백은 인상적이었으니까.
물론 패도를 추구하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강호란 원래 그런 곳 아니던가. 그래도 화산의 무인들은 무인이기 전에 도를 닦는 도인들이다. 그 점을 명시해야 했다. 청현진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숫자를 나눠 흩어진다. 저들을 분산시켜서 최대한 따돌린 뒤에 모인다.”
“하지만…… 모두 따돌리는 건 불가능입니다.”
“안다. 그래도 최대한 따돌린다.”
국보는 간단한 해결법을 두고 빙 돌아가는 청현진인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무슨 작당들을 그리 은밀하게 꾸미는 것이오?”
콰아앙!
왼쪽에 있던 벽이 굉음과 함께 무너졌다.
청현진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호성노괴(虎性老怪)!’
천무백에게 단박에 나가떨어졌지만, 호성노괴는 무시 못 할 고수였다.
왜소한 외형에 주름살이 그득한 얼굴, 굽은 허리는 참으로 볼품없었다.
하나 열 개의 손가락에 주렁주렁 달려 날카로운 예기를 흘리는 손톱은 좌중을 섬뜩케 했다.
적어도 한 척은 될 듯한 손톱 끝에는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가공할 조공의 고수로 섬서에서 그의 악명은 자자했다.
‘이런. 따돌리긴 글렀군!’
비록 천무백의 기습에 나가떨어졌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진짜였다.
“보아하니 미로를 빠져나갈 방법을 아는 거 같은데, 그 정도는 강호동도들에게 공유할 수 있는 것 아니오? 설마 우리가 모두 여기서 죽기를 바라는 것인가?”
“…….”
“흐흐. 좋은 말로 할 때 출구로 안내해 주는 게 좋을 거요.”
청현진인은 침묵 했으나 그 광오한 어조에 국보가 칼을 뽑으며 나섰다.
“흥! 추잡한 노괴가 감히 화산을 경시하는구나!”
“크하하하! 애송아! 매화일검이란 소리를 듣더니 정녕 절세고수가 된 기분이라도 들더냐!”
호성노괴가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말을 하던 도중 득달같이 달려드는 기세에 국보가 황망해했다. 곁에 모여들었던 무림인들도 무지막지한 살기와 기세에 깜짝 놀라 이리저리 몸을 굴렸다. 순식간에 길이 열렸다.
“이, 이런!”
비록 매화일검이란 칭호를 받았지만, 강호에 본격적으로 출도한 건 이번이 처음인 터.
더구나 호성노괴와 같은 고수를 직접적으로 맞이한 적도 처음이다. 하여 갑작스러운 기습에 국보는 적잖이 당황했다.
돌연 침묵하던 청현진인이 걸어 나왔다.
“내 비록 피를 보기 싫어하나…… 화산을 무시하는 자는 단호하게 벌해야 함을 알고 있소.”
청현진인은 곧장 검을 뽑았다. 호성노괴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흥! 화산 장로는 몸이 강철로 이뤄졌더냐!”
“화산과 척을 지겠다는 것이오?”
“어차피 여기서 죽여서 살인멸구하면 누가 죽였는지 어찌 알겠느냐!”
호성노괴의 구부려진 양손이 청현진인의 머리를 노리고 들어왔다. 어찌나 빠른지 바람이 찢어지는 기괴한 파공음이 미로를 뒤흔들었다.
“고작 이 정도로…… 화산을 모욕하는가!”
하지만 청현진인은 그저 검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쩌저저저적!
열 개의 손톱과 검이 허공에서 어지럽게 얽혀들었다.
칼날과 내력이 가득 담긴 손톱이 순식간에 부딪히며 새빨간 불똥이 튀었다.
“어어억!”
촌각의 시간, 단 일합만으로 호성노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강철도 베는 손톱이 모두 허무하게 잘려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이어 검이 불쑥 튀어나와 호성노괴의 가슴을 찔렀다.
“크어억!”
급히 양팔을 교차하며 호신강기를 펼쳤지만, 그 충격으로 호성노괴는 벽을 뚫고 들어가 멀리 날아갔다.
“……!”
호성노괴를 단칼에 치우는 가공할 신위에 기회를 엿보던 무인들은 일순 침묵했다.
“더는 화산에 검을 겨누지 마시오.”
청현진인의 묵직한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온화한 성격으로 피를 보는 걸 싫어했지만, 피를 봐야할 순간에서는 거침없는 게 바로 청현진인이었다.
화산 수호검이란 명성이 괜히 생겼겠는가.
하나 그 이름에 모두가 수긍한 건 아니다.
“보아하니 화산은 미로를 빠져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는 거 같은데, 호성노괴의 말이 틀린 건 없지. 설마 여기서 헤메다가 물도 못 마시고 다 죽으라는 건가?”
무너진 벽 너머로 드러난 빨간 수염의 노인은 호성노괴와는 달리 엄청난 거한이었다.
“……무성적마.”
“오랜만이오, 수호검.”
“…….”
청현진인은 입을 다물었다.
무성적마는 악명도 높았지만 그만큼 실력도 뛰어났다. 화산은 그와 몇 번이고 싸운 적 있고, 청현진인도 여러번 겨뤄봤다.
“그쪽만 여길 빠져나가면 여기 남은 사람들은 다 죽겠지. 그게 정파인들의 의협인가?”
“그건 맞는 말입니다. 수호검. 무성적마의 뜻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틀린 말이 아니군요.”
이번엔 등장한 건 붉은 얼굴의 사내였다.
허리춤에 찬 큰칼과 홍면(紅面)을 보고 청현진인은 끝내 침음을 흘렀다.
“관성검이구려.”
“이리 뵈니 안타깝지만, 무성적마의 말은 맞습니다. 이대로라면 다 죽겠지요.”
“흘흘. 설마 화산의 정의로운 도사들께서, 그깟 비급에 욕심내서 여기 모인 강호동도들이 죽게 내버려 두겠는가?”
무성적마가 압박해왔다. 거기에 관성검마저 가세하고 다른 무림인들까지 가세하니 화산파는 궁지에 몰렸다.
‘어차피 싸우게 될 게 분명하구나.’
청현진인은 좌중을 둘러봤다.
모두가 하나같이 눈동자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그나마 정사지간의 인물로 의와 협을 안다는 관성검의 눈에도 숨길 수 없는 욕망이 넘실거렸다.
이리되면 여기서 극적으로 타협하고 탈출해도, 적혈검귀의 보물과 비급 앞에선 싸울 수밖에 없으리라.
청현진인은 한숨을 내쉬며 검을 곧추 세웠다.
“그 누구도 화산의 앞을 막을 수도, 그리고 넘을 수도 없소!”
쿵!
그게 신호였다.
무인들이 일제히 각자의 병기를 꺼내들고 뒤섞였다.
아니, 뒤섞이려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구궁!
“……!”
굉음과 함께 땅이 빙글빙글 돌았다. 중인들이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무, 무슨!”
청현진인은 급히 중심을 잡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로의 벽들이 바닥으로 내려가고, 다시 올라가고, 바닥이 빙글빙글 돌았다.
마치 미로가 재설계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피해라!”
청현진인은 바로 발밑에서 올라오는 벽에 훌쩍 뛰어올라 피했다.
곳곳에서 벽이 새로 솟구쳤다. 자연히 뭉쳐있던 화산파 무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 동안 땅이 움직이더니 이윽고 멈췄다.
“정신차리고 모두 정비하라!”
청현진인이 침착하게 소리쳤다.
급히 보아하니 흩어진 화산파 무인들은 많지 않았다. 세 명이 솟구친 벽에 의해 갈라졌는데, 셋 중에는 매화일검 국보가 끼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가?”
떨어진 쪽에 국보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국보라면 믿을 만하고, 미로를 풀 정도로 눈썰미도 좋고 머리도 좋으니까.
하나 그의 생각은 이내 섣부른 안도임이 드러났다.
“자, 장로님!”
평소 듣지 못했던 제자들의 당황스런 음성에 청현진인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무슨 일이더냐.”
“미로 벽에 새겨진 그림과 문양들이…… 싹 다 바뀌었습니다!”
“……뭐?”
청현진인은 얼빠진 얼굴로 벽에 다가갔다.
반나절 내내 미로를 헤쳐 나가며 찾았던 미로의 일정한 규칙들.
그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끝내 청현진인은 부들부들 떨다 이를 악물었다.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어떤 개새끼인지는 몰라도 내 반드시 찜통에 삶아 버려 주마!”
* * *
“헉!”
“머리는 안 때렸는데 왜 갑자기 부르르 떨어?”
“혹시 다음에 두고두고 절 패겠단 생각 했습니까?”
천무백이 한심하게 쳐다봤지만 능허는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왜 오한이 들지.’
능허는 슬그머니 천무백의 눈치를 봤다.
능허와 천무백이 서로 다른 점이 있다면, 생각을 현실로 옮길 수 있냐는 점이다.
그러니까 능허는 천무백을 패고 싶어 했지만, 실제로 할 수 없었다.
감히 천무백을 어찌 때리겠는가.
천무백은 달랐다.
다행히 그렇게 많이 맞지는 않았다.
아니, 더 맞았을지도 모른다.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떴으니까.
“에휴. 인간아. 네가 건든 게 아무래도 기관진식을 발동시키는 건갑다.”
“으음.”
“그걸 왜 건드렸니?”
“이게 좀, 반짝거리지 않습니까.”
능허는 다소 떨떠름하게 벽면에서 뽑아든 구조물을 보여줬다.
금박을 두른 듯한 장식이 달린 원뿔 모양의 구조물이었다.
누가 봐도 저도 모르게 툭 건들 만한 그런 모양새였다.
천무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 기관진식만 발동시킨 것이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들도 살벌한데.’
화살이 날아오는 건 예삿일이요, 바닥이 푹 꺼지고 날카로운 장창들이 박혀있는 건 기본이었다. 언제 어디서 함정이 나타날지 몰랐다.
일전에는 그저 어지러운 미로였다면, 지금은 온갖 함정이 도사리는 지옥과도 같았다.
더구나 이번에는 기파를 아무리 넓게 퍼뜨려도 소용이 없었다.
쿠구구구구.
“일각도 아니군. 반각마다 미로가 계속 바뀌니…….”
미로는 계속해서 바뀌었다.
능허는 혹여 또 맞을까 조용히 있었다.
아무리 봐도 편하게 나갈 걸 능허가 일을 그르쳤으니까.
하나 천무백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 문양들 말이지…….’
처음엔 그저 지나쳤지만 천무백은 이내 미로 구조가 바뀔 때마다 문양과 그림들도 바뀌는 걸 알아챘다.
천무백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는 유심히 미로가 바뀔 때마다 보이는 문양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대충 여덟 종류인가.’
무언가 언뜻 눈에 익은 그림들이다.
천무백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번쩍하고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설마…….’
이곳이 전진성단이 맞다면, 그리고 성단에 응당 있어야 할 성물이 있다면…….
천무백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몇 가지 가설이 휘르륵 지나갔다.
수없이 많은 전생을 살아오며 그의 머릿속은 비고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강호 전체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천무백은 그중에 하나를 찾았다.
‘먼저 검의 극의를 보고…… 우화등선한…… 너였구나. 네가 만든 곳이었더냐?’
천무백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숱한 삶을 살아오며 유일하게 인정했던 호적수.
그리고 어느 순간 우화등선했단 전설만 남기고 사라진 친우이자, 맞수.
천무백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네놈이 만들었구나!”
팔선(八仙)중 일인으로, 검선이라 부르던 자.
전진교의 창시자인 왕중양의 스승으로 알려진 자.
그리고 천무백이 인정했던 유일한 호적수.
“여동빈(呂洞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