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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30화 (30/318)

<검신재생 30화>

30. 본좌다

“능허야.”

“네.”

“여기서 살릴 만한 놈은?”

“화웅 놈이 제법 의리가 있습니다.”

“새끼야, 그렇게 말하면 누가 알아?”

“딱 봐도 곰처럼 생긴 놈입니다.”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주위에 있던 간부들은 능허를 알아보곤 놀랐다.

놀란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흑심방을 떠났던 능허가 되돌아왔다는 점이다.

‘능허?’

‘그 독안사?’

‘간부 자리 하나는 떼놓은 당상이었단 놈이었는데?’

두 번째는 그가 다름 아닌 저 괴물 같은 청년과 같이 돌아왔다는 사실이고, 지금까지 그걸 알아챈 사람은 놀랍게도 죽은 흑심방주밖에 없단 점이다.

그 점을 떠올린 간부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능허가 기척을 잘 숨겨서?

아니다.

‘저 놈!’

간부들의 동공이 크게 떨렸다.

미미한 미소를 걸치고 있는 천무백, 그의 존재감이 너무나 확연했고 압도적이다. 이 넓은 전각을 홀로 군림하고 있으니 주위에 누가 있는지 신경조차 쓰지 못한 것이다.

그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이 더 크게 느껴지자 간부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지금 천무백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으니까.

“능허야, 네가 접수해야 하니, 실력을 한번 보여 봐라.”

“거. 쉽게 갑시다. 단번에 처리하자는 건 그쪽 생각 아니요?”

“그쪽?”

“아니, 대단하신 주군의 영명한 생각 아닙니까.”

“그래. 그 생각에 네가 포함되어 있었다니까?”

“니런 썅!”

능허는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고 박도를 뽑았다.

동시에 좌측에 있던 쭉 째진 눈 간부의 심장에 박아 넣었다.

푸욱!

“컥, 능, 능허 너……!”

“거.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니까. 어? 밑에 애들 관리 좀 하라고 했잖소. 그쪽 애들이 내가 담당하던 지역 아낙네들 다 겁탈하는 바람에 내가 관아에서 무슨 꼴을 당했는지는 알아?”

“하여튼 이 새끼. 지 개인적 복수를 하고 있어요.”

“사내라면 모름지기 복수를 잊지 않아야 하는 법입니다.”

능허는 능청스럽게 말하고 다시 박도를 휘둘렀다.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게 이어지는 상황에 간부들도 퍼뜩 정신 차렸다.

“능허 저 새끼를 죽여!”

“배신자 새끼!”

“남은 눈알도 뽑아 버려!”

“이런 썅! 행패 부린 건 내가 아니고 저쪽이라고!”

물론 간부들의 집중공격은 능허에게 향했다.

분명히 이 상황을 유발한 건 천무백이다. 간부들도 안다. 천무백을 죽여야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고.

하지만 생각과 행동은 다른 법이다.

흑도가 무서울 땐 서로를 형제, 가족처럼 여기며 끈끈하게 뭉칠 때다.

흑심방은 아니다.

그들은 흑심방주의 교활한 협잡질과 이간질, 사람을 다루는 타고난 그 품성과 존재감 때문에 흑심방으로 존재했다.

흑심방주가 무참히 죽었다.

구심점이 사라졌다.

뭉칠 수 없는 흑도의 특징은 바로 지극히 이기적이란 점이다.

‘누가 저놈 좀 상대해 봐!’

‘난 못해! 방주 목을 단칼에 잘랐다고!’

‘검이 뽑히는 것도 보지 못했어!’

모두가 천무백을 피하는 사이.

공교롭게도 오른손을 잃고, 아주 잘 아는 능허가 가장 만만해 보였다.

“이런! 썅! 너희들은! 어? 옛정도 없냐? 응? 어?”

“배신자!”

“니미럴! 지들이 원하는 애들만 간부 자리 주려고 했으면서 뭐? 배신자아?”

능허는 이를 악물고 박도를 휘둘렀다.

하나 어색한 좌수로는 상대가 힘들었다. 더구나 간부들도 능허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난 놈은 많지 않았다.

한데도 능허는 벌써 둘의 목숨을 끊어 냈다. 대단한 성과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능허의 몸이 피에 젖어갈 무렵.

천무백이 허성을 바라봤다.

“허 표사. 한번 깨달은 바를 쏟아 내 봐.”

“예, 주군.”

쩌저저저저정!

허성이 움직이자 달려들던 간부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그간 갈고 닦은 양오검이 허공에 핏빛으로 수를 놓았다.

은은한 매화향이 혈향에 섞여 스며드니 천무백은 왠지 모르게 다시 강호에 나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아니지. 진짜 강호는 더 살벌하지.’

천무백은 조금은 씁쓸한 얼굴로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수백의 흑심방 흑도들이 있지만, 그들은 둥근 원을 형성한 채 감히 접근치 못했다.

천무백의 의도적으로 외기를 꽉 눌러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만일 움직인다면 먼저 목이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을 심어줬다.

하니 간부들은 하나둘씩, 허성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몇몇은 능허의 기발한 기습에 억울한 눈으로 죽어 갔다.

‘독한 놈. 기발할 정도로 독한 놈.’

천무백은 피범벅이 된 잇몸을 드러내며 날뛰는 능허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독하면서도 이상하다.

하는 짓을 보면 영락없이 반골 기질이 다분한데, 또 그게 싫지만은 않다.

‘그러고 보니 내 주위엔 늘 허성 같은 사람이 많았지.’

숱한 전생 대부분 거의 최강자의 위치에 군림했다.

그러다 보니 감히 능허처럼 대거리를 하는 놈은 별로 없었다.

좀, 신기했다.

오른손잡이가 오른손을 잃었다. 한데도 굴하지 않는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흑도의 논리에 철저하게 움직인다.

천무백은 흑도를 딱히 좋아하진 않는다.

하나 능허를 보고 생각했다.

‘흑도다운 놈이로다.’

세상에 흑도가 사라질 순 없다. 천무백이 한때는 몇 번 전생에서 없애려고 노력했다. 실제로는 성공했다. 아니, 성공 근처까지 갔다.

그러나 다음 생에서 보니 흑도는 다시 끈질긴 생명력으로 부활했다.

천무백은 차라리 흑도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없앨 수 없다면, 그걸 손에 쥐고 억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찔한 외줄 타기 같은 강호에서, 천무백이 기댈 수 있는 기반을 보호하는 울타리.

그것이 지금 천무백의 생각이었다.

물론 천무백이 생각하는 수준을 생각하면, 아직 한참 멀었지만 말이다.

그때였다.

“귀검사랑 대협!”

뒤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부방주 강개가 무릎 꿇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그가 눈알을 굴렸다.

“흑심방을 드리겠습니다!”

“전원 찬성해야 한다면서?”

“저는 찬성입니다!”

“허.”

이놈 봐라.

교활한 놈이네. 하긴, 이것도 흑도긴 하지.

‘능허의 흑도와는 다른, 날 것 그대로의 흑도.’

천무백은 동시에 흑도의 다른 면을 본 것 같아 새삼 신기했다.

능허의 흑도는 강호의 낭만이 조금이라도 풍기는 흑도다.

흑도만의 의리와 협. 흑도만의 의협이 있다. 흑도들은 그런 낭만을 주장하며, 의리를 내세우고 자신들에게도 의협이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는 다르다.

바로 눈앞의 강개가 그랬다.

의리 따위는 없다. 제 목숨이 가장 소중하다. 비굴하다. 살기 위해선 뭐든지 다 한다. 동료를 팔아먹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지금 말하는바.

본인은 찬성한다고 하니, 흑심방을 넘길 수 있다는 얘기는…….

“다 죽이고 너는 살려 줘라?”

“그렇습니다! 살려 주십쇼!”

“흠.”

“귀검사랑께서 이 자그마한 흑심방을 직접 운영하기는 귀찮을 터. 그래서 능허를 수족으로 부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법 잔머리를 굴릴 줄 안다.

문제는 그 음흉한 속내가 빤히 보인다는 사실이지.

천무백의 무심한 표정을 고개를 숙이느라 보지 못한 강개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능허 저놈은 간부 자리도 올라보지 못한 놈입니다. 귀검사랑 대협의 눈에는 참으로 볼품없고 작은 흑심방이지만, 그래도 경력이 있어야지요.”

“흠. 너를 써 달라?”

“그렇습니다.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의 분위기가 무척 묘했다.

마음에 든다는 뜻인 거 같기도 했고, 아니면 비웃음 같기도 했다.

세상 사람들은 각자 특기가 있다.

바닥을 전전하는 거지들마저 그사이에선 동냥질을 잘하는 순위가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흑심방이란 거대한 흑도방파에서 부방주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 바로 강개다.

그런 강개가 여기까지 올 수 있던 이유는 어쩌면 누구보다 빠른 위기를 감지하는 특유의 감각일지도 모른다.

‘말이 통하지 않을 놈이로다!’

이쪽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매번 여러 수를 생각해야 한다.

이 수가 안 통하면 빠져나갈 방법, 빠져나가기 힘들면 이겨 낼 방법, 이겨 내기 힘들면 상대를 엿 먹일 방법.

그렇게 늘 수를 궁리하고 또 준비해야 한다.

지옥 같은 흑도판이다.

강개는 수많은 원한을 사 왔다.

죄 없는 양민들을 수탈하고 겁간했다.

그중에 무림인 같아 보이는 놈은 건들지 않으려 노력했었다.

언젠가 절대고수가 되어 복수하러 올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게 강호니까.

하여 강개는 자신이 상대하기 힘든 고수가 나타났을 때를 대비했다.

“어르신! 귀검사랑 어르신! 부디 이 못난 강개에게 기회를 한번 주십시오!”

머리를 바닥에 쿵쿵 찢고 오체투지를 했다.

그러면서 마치 떠나는 연인에게 매달리는 사람처럼 바닥을 벅벅 기어 천무백에게 다가갔다.

이 장(丈).

천무백이 검을 뻗기에는 다소 먼 거리.

즉 몸을 충분히 빼낼 만한 거리에 도달하자 강개의 눈에서 사특한 빛이 번뜩였다.

‘지금이다!’

강개는 바닥에 머리를 찧는 척하며 고개를 크게 들었다.

“죽어라!”

더운 여름인데도 온몸을 꽁꽁 감쌌던 강개의 흑포가 북 터지는 소리를 내며 터졌다.

콰콰쾅!

동시에 흑포 안에 숨겨져 있던 쇠채찍이 뱀처럼 쉭쉭 대며 울었다.

촤르르르르륵!

철편(鐵鞭)이 춤추며 천무백에게 쇄도했다.

쇠채찍이 곧장 천무백의 몸을 감싸리라.

휘감기기만 한다면 문제없다. 강개의 눈이 살기로 반질거렸다. 서역에서 왔다는 기물인 은사철편(銀蛇鐵鞭)은 내력을 불어넣기만 해도 스스로 움직여 적을 으스러뜨리고 독니를 박아 댄다.

언젠가 흑심방주의 몸을 으스러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숨겨 왔던 강개가 가진 비장의 한 수였다.

강개에겐 철편을 휘두를 수 있는 충분한 거리.

하지만 천무백이 검을 뻗어 반격하기엔 어려운 거리.

천무백은 쇠채찍이 몸을 감쌀 동안 그저 손을 들어 올려 그것의 끝을 붙잡았다.

마디마디 달린 날카로운 철추(鐵鎚)가 으스러지며 몸에 박혀 드는 순간.

“귀검사랑인지 나발인지! 내 목숨 노리면 네 목숨도 내놓을 각오는 했어야지!”

이대로 쇠채찍이 천무백의 뼈마디를 으스러뜨리고, 마디마디마다 달린 철추가 몸에 박혀 들면 끝장이다.

강개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흑심방주를 죽인 외부의 적을 막아낸 자라면?

‘흑심방은 내 것이다!’

그때였다.

강개의 몸이 순간 파르르 떨렸다.

은사철편의 끝부분을 잡은 손목부터 욱신거리는 느낌이 전신으로 퍼졌다.

강개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이, 이런!’

어떤 상황인지 이해했다.

자신이 내력을 불어넣어 철편을 움직인 것처럼, 상대도 저 끝을 붙잡고 내력을 불어넣고 있던 것이다.

강개는 이를 악물었다. 평생 다 모은 내력이란 내력을 싹싹 모아 불어넣었다.

내력 싸움이다.

처음엔 강개의 우세였다. 모든 내력을 쏟아부으니 철편을 통해 전해오는 천무백의 내력이 일순 주춤했던 터.

천무백의 내력은 분명 적었다. 다만 도도했다.

마치 십만 대군을 홀로 막아선 무인처럼, 아주 적은 양이지만 강개의 내력을 모조리 찢어발기고 증발시켰다.

“부, 부방주 어르신!”

지켜보던 흑심방 무인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강개의 주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강개의 몸이 점점 수축해지더니 이내 목내이처럼 말라가는 것이 아닌가?

‘사, 살려줘!’

단전에 쌓인 모든 내력이 깡그리 증발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더 놀라운 건, 은사철편의 끝을 잡고 천무백이 내력을 주입하고 있단 얘기다. 은사철편은 강개가 잡은 손잡이 부분이 아니면 내력을 주입하기 쉽지 않은 재질로 이뤄져 있다. 한데도…….

상대의 내력에게 상대도 되지 않았다. 이대로 손을 놓고 도망쳐야 하지만 그조차 허락지 않았다. 손이 철편에 달라붙은 것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그제야 강개는 천무백의 눈을 바라봤다.

“……!”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쳤다.

한없이 무심한 눈빛.

그제야 강개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귀, 귀검사랑 따위가 이럴 순 없다! 넌 귀검사랑이 아니야!”

맞다. 절대로. 이건 귀검사랑이 아니다.

“도대체 누구냐?!”

그 순간, 강개는 세상이 어두워지는 착각에 빠졌다.

어둠 속에서 천무백의 새하얀 웃음이 번졌다.

“만고기재, 천하제일, 고금제일인……”

“뭣?”

천무백이 아무도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나 강개는 마치 귀 옆에서 천둥이 치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창천검신.”

“……!”

“본좌다.”

콰득!

천무백의 검이 강개의 두개골을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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