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소모 외전: Christmas Swing
1.
사람이 감상적으로 변하기 쉽다는 새벽 2시를 막 지났다.
오늘은 오후부터 유독 손님이 많았다. 진형은 반쯤 정신을 놓고서 홀을 누볐다. 기력다운 기력이 거의 남아 있질 않았다. 집에서 먹고 나온 저녁은 옛적에 소화됐고 야식은 도통 먹을 틈이 없었다. 자기뿐만이 아니라 〈웬즈데이〉 직원 전부 마찬가지다.
진형은 지금 막 손님이 떠난 테이블로 쏜살같이 걸음을 옮겼다. 8인석 테이블을 한 명이 치우기에는 역부족이라 느꼈는지 유원길이 바로 뒤를 따라붙었다.
이제야 조금씩 손님이 줄어들었다. 이곳을 정리하고 나면 직원끼리 돌아가며 휴식 시간을 만끽할 수 있을 듯했다.
계속 홀을 뛰어다니다시피 했더니 무척이나 더웠다. 좀 이따 찬 바람을 맞으며 담배 한 대 피울 생각을 하자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빈 병을 대형 쟁반에 잔뜩 올려 창고로 옮기고 난 후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이리저리 널린 그릇을 정리하는 원길을 도와 남은 안주를 한곳에 모으고 있자니 옆쪽에서 누군가 “진형 씨.” 하고 말을 걸어 왔다. 그 바람에 바쁘게 움직이던 진형은 손놀림을 멈추고서 목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형이 한껏 접객 미소를 지어 올리며 대꾸했다.
“네.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아니. 그건 아니고.”
이쪽과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남자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샐쭉 웃었다. 오묘한 눈빛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이 사람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할는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오늘 일 끝나고 어때. 시간 돼?”
형식적으로 웃어 대던 입술이 점차 애매함으로 일그러졌다.
진형이 속으로 예상했던 것을 남자가 고대로 입에 담았다. 상당히 오랜만에 듣는 말이기에 다소 얼떨떨했다.
〈웬즈데이〉에 오는 손님들 대다수가 진형이 이곳에서 했던 ‘미친 짓’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눈앞의 남자는 꽤 낯익다. 홀 직원과 자주 눈도장을 찍을 정도로 단골이라는 거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남진형의 미친 짓’을 지금껏 모르는 단골이 존재한다는 게 약간 신선하기까지 했다.
이제 막 12월에 접어들었다.
진형에게 크리스마스이브는 여태껏 공휴일 전날에 불과했지만 올해부터는 달라졌다. 심지어 애인과 처음 만난 기념일이다. 작게라도 선물을 하고 싶었다. 뭐가 어울릴지, 무엇을 주면 좋아할지 그런 것들을 고민해 보는 것이 난생처음이라 스스로의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행복한, 그런 나날을 보내고 있는 와중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금 자기 마음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 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애인이 있음에도 한눈을 파는 행위 역시 완벽하게 남 얘기다. 오히려 푹 빠진 건 이쪽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애정은 더더욱 깊어져만 갔다.
일단 웃자.
진형은 구겨진 표정을 다시금 웃음으로 고쳤다. 아무리 그래도 손님이니까. 얼굴 굳혀 가며 대꾸하는 건 최대한 피해야 할 일이다.
“저 애인 있어요. 몰랐구나?”
물론 〈웬즈데이〉 손님 모두가 남진형의 연애사를 알고 있는 건 아니다. 이 남자도 그중 하나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아주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알지.”
진형은 떨떠름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아는데도?”
“응. 근데 그거랑 상관있어?”
“네?”
“진형 씨가 한 사람한테 얽매이는 스타일은 아니잖아?”
아, 이 시발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애써 올려 두었던 미소가 이번에야말로 단번에 사그라졌다. 스스로 알 수 있을 만큼 표정이 싹 굳고 말았다.
가뜩이나 바쁘고 정신없는 날이다. 피로감이 극에 달한 와중에 이런 개소리까지 들으니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심지어 이 정도로 대놓고 불쾌감을 표시하는데 남자는 키득 웃기나 한다. 그게 점점 더 화를 부추겼다. 평온한 눈매와 홍조 띤 뺨을 바라보고 있자니 점차 열이 오른다. 당연하지만, 기분 좋은 열기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
좆같네, 진짜. 처마시려면 곱게 처마시든가.
남자가 눈치를 내다 버린 건 과한 음주 때문인 듯했다. 술병이 산더미처럼 쌓인 테이블에 앉은 일행 중 한 명이 남자의 팔을 잡으며 이쪽을 향해 멋쩍게 눈인사를 해 왔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웃는 얼굴에 진형 역시 어처구니가 없어서 픽 웃고 말았다.
그래. 친구가 술 처먹고 돌면 고생스럽지.
미안해하는 눈빛을 지어 올리는 그의 일행을 봐서라도 그냥 못 들은 셈 치려던 때였다. 진형의 뒤통수로 남자의 중얼거림이 꽂히듯 날아들었다.
“애인이랑 거의 1년 돼 가지 않던가? 진형 씨가 예상보다 오래 버텨서 깜짝 놀랐다니까. 슬슬 좀 쑤실 거 같은데, 그럼 난 어떤가 싶어서.”
머릿속이 확 부예졌다.
가당찮은 1절을 좋게 넘어갔는데 꼴같잖은 2절이 튀어나오니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단숨에 눈알마저 뜨거워졌다. 지금 머릿속에 쨍 울려 퍼진, 생각나는 모든 쌍욕을 퍼붓고 싶었다. 저 새끼의 아가리를 당장 짓이기겠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일하는 중이라고, 상대는 손님이라고.
그런 것을 되새길 겨를도 없었다. 진형이 분노로 반쯤 정신을 잃은 채 몸을 돌려 남자의 멱살을 잡으려던 때였다.
“형 형!”
다급한 외침이었다. 진형은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눈을 한 번 크게 떠 올렸다.
귀에 익은 호칭이다. ‘진형이 형’은 발음이 너무 어렵다며, 원길은 가끔 진형을 ‘형 형’으로 부르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자 원길과 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늘 조용하고 침착한 그가 목청을 올리자 주변 사람들이 무척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힐끗거렸다. 정작 원길은 언제 큰 소리를 냈냐는 듯 태평히 중얼거렸다.
“17번 테이블 좀 가 봐요. 선호 형 발이 묶였네.”
“아…….”
17번 테이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끊어졌던 이성이 다시금 이어 붙여졌다. 진형은 느릿느릿 어느 한곳을 바라봤다.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쉬자 부글부글 끓었던 가슴이 조금씩 편안해졌다.
구석진 자리의 2인석.
‘그’와 여기서 처음 만났을 때 함께 앉았던 자리다.
지금 막 손님이 떠났는지, 테이블은 술병과 그릇이 가득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날의 추억이 겹쳐졌다. 그러자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나아졌다. 전신을 장악하던 울화도 조금씩 내려앉았다.
진형은 속으로 웃었다. 손님이었을 땐 몰랐는데 함께 일하게 되니 이처럼 종종 원길에게 감탄하게 될 때가 있다.
원길은 정말 눈치도 빠르고 감도 뛰어나다. 진형이 가끔 짜증 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저 테이블을 바라보며 울분을 삭인다는 걸 진작 꿰뚫어 본 모양이다. 이러니 기선과 선호가 싸고돌며 예뻐 죽으려고 하는 거겠지. 그들만큼은 아니지만, 진형도 원길을 좋은 동생으로 여겼다. 체구는 작지만 언제나 듬직했다. 가끔 자기보다 연상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진형은 잔상이 사라진 의자에서 시선을 거두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마워, 원길아.”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진심을 다해 뒷말을 덧붙였다.
“정말로.”
“됐으니까 가 보기나 해요.”
원길이 픽 웃으며 턱짓했다. 진형 역시 마주 웃고서 정리했던 그릇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개소리를 지껄인 진상을 확인했다. 남자의 표정이 우거지상이다. 멱살을 잡힐 뻔한 뒤에야 이쪽의 불쾌감을 파악한 듯하다.
과거에는 꽤 취향에 근접한 얼굴이라고 생각했을 남자를 진형은 오로지 분노에 휩싸인 채 바라보게 됐다. 싸늘한 시선으로 한껏 노려보자 남자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이 순간 애인의 다정한 얼굴이 물씬 떠올랐다. 눈앞의 남자와 비교하는 것조차 그에게 실례라는 생각에 서둘러 머릿속을 털어 냈다.
‘난 어때.’라니. 무슨 자신감으로 비벼 대? 시발, 되지도 않는 게.
진형은 주눅 든 표정으로 이쪽을 힐끗거리는 남자를 경멸 어린 눈초리로 훑어 주고서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다음부터는 알아서 걸러야겠다.
앞으로 이 남자가 있는 테이블의 주문은 선호나 원길에게 맡기자고 마음먹었다. 오늘은 원길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지만,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거다. 있는 힘껏 멱살을 쥐어틀려 했던 손목이 아직까지도 욱신거렸다.
수거대에 그릇을 밀어 넣고 등을 돌릴 때였다. 받아 온 주문표를 주방 매니저인 강진에게 건네던 선호와 눈이 마주쳤다.
“야. 남진형. 너 표정이 왜 그러냐? 엄청 썩었는데.”
진형이 헛웃음을 뱉으며 대꾸했다.
“말도 마요. 형, 나 방금 사고 칠 뻔했잖아. 너무 빡쳐서.”
“뭐?”
선호가 기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만큼은 성격 죽이고 살아라, 어? 알잖아. 지겸이 형 기분 안 좋다고. 은수 씨 링거 맞고 온 뒤로 계속 저 상태니까.”
선호의 시선을 따라서 진형도 멀찍이 떨어진 카운터를 곁눈질했다. 안 그래도 무시무시한 사장님이 평소보다 훨씬 무뚝뚝한 표정으로 손님을 응대하는 중이다. 오늘 지겸은 출근하자마자 자신이 저기압이라는 사실을 거르지 않고 표현했다.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는 사장님 덕분에 직원들도 전부 긴장 상태다.
진형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애원조로 말했다.
“형, 죄송한데 오늘 저부터 좀 쉬고 오면 안 돼요?”
홀 직원 중 보통 가장 먼저 쉬는 건 선호였다. 이 순간만을 고대했을 직장 선배에게 이런 부탁을 꺼내는 게 쉽진 않지만, 언제까지고 뭐 씹은 얼굴로 홀을 누빌 수도 없었다. 찬 바람이 정말이지 절실했다.
선호가 눈썹을 쭉 올렸다. 꽤 놀랐는지 진형의 안색을 다시금 살피며 걱정스러워하는 목소리를 냈다.
“네가 그런 소리를 다 하고. 너 진짜 어지간히 짜증 났나 보다?”
“네, 좀.”
“뭐야. 뭔데 그래.”
“원길이한테 들어요. 내 입으로는 말 못 해. 참았던 욕이 튀어나올 거 같아서.”
“그 정도라고? 알았어. 갔다 와.”
고개를 끄덕거리며 선선히 허락한 선호에게 진형이 답례했다.
“고마워요, 형.”
긴 복도를 지나쳐 준비실로 들어간 진형은 캐비닛에서 휴대폰과 담배를 챙겨 뒷문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맞이해 주는 칼바람이 오늘만큼은 대단히 반가웠다. 뺨을 찢는 것만 같은 차디찬 냉기를 뚫고서 쓰레기통 쪽으로 다가갔다.
성마른 손놀림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연기와 호흡을 동시에 내뱉자 주변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씹새끼가. 왜 일하고 있을 때 지랄이야, 지랄은.”
정말이지 그랬다. 차라리 밖에서 그랬더라면 오죽 좋았을까. 성격대로 면상을 밟아 주지 못한 것은 꽤 오래간 한으로 남을 듯했다.
진형이 씩씩대는 틈을 타 바람이 대신 담배를 태웠다. 몇 모금 빨지도 않았는데 벌써 짧아진 담배를 쓰레기통에 쑤셔 박고서, 허리에 두른 검은색 앞치마로 손을 쑤셔 넣었다. 새로운 담배를 꺼낼 생각이었는데 손끝에 휴대폰이 먼저 걸렸다. 그것을 망설임 없이 움켜쥐었다. 어차피 담배는 분노를 삭이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했다. 확실한 치료제를 두고서 빙빙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꽁꽁 얼어 버린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꺼내 문장을 몇 줄 적던 진형은 이내 창을 껐다.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그가 바로 확인하고 답장을 보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좋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간절한 게 있었다.
진형은 휴대폰의 최근 기록 가장 상단에서 ‘민이 형♥’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진형 씨?
연결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상대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다정다감한 음성을 듣자마자 안 좋았던 기분이 싹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조금 전까지 울분이 제대로 안 풀려서 속이 갑갑했던 게 마치 거짓 같다.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형, 뭐 하고 있어요? 작업?”
- 네. 진형 씨는 쉬는 시간이에요?
“그렇죠. 안에만 있어서 몰랐는데 엄청 추워졌네요? 아까는 너무 더워서 바람 좀 쐬고 싶었는데, 이제는 몸이 다 얼었어요.”
덥다기보다는 화가 난 거였지만.
진형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음, 하고 무언가를 고심하던 그가 아주 조심스럽게 질문을 속삭였다.
- 저기, 진형 씨.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어디에서 티가 났지? 평소랑 비슷하지 않았나.
진형은 일단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무슨 일 있는 거 같아요? 나 목소리 안 좋은가.”
- 그런 게 아니라…… 진형 씨가 쉬는 시간에 전화하는 일 드물어서요. 그냥, 제가 혼자 신경이 쓰여서 물어봤어요.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늘 붙어 있기에 통화하는 건 제법 오랜만이다. 휴대폰으로 듣는 그의 음성도 참 좋다. 조용조용 이어지는 목소리가 마치 고막에 스며드는 듯했다.
진형은 나직이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쉬는 시간에 전화 안 하는 건 그대로 집에 가고 싶어지니까, 그게 문제라서? 목소리 들으면 형 얼굴 보고 싶어지잖아요.”
- 아…….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새하얀 얼굴을 발그레 물들이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으려나.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눈꺼풀만 깜빡댈 모습이 눈에 선했다.
“사실 방금 전에 짜증 나는 일이 있긴 했어요. 형한테 어리광 좀 피우고 싶어지더라고.”
수화기 건너편에서 흐읍, 하고 호흡을 작게 가다듬는 기척이 났다. 이윽고 그가 제법 가라앉은 음성으로 질문을 건네 왔다.
- 누가 진형 씨를 괴롭혔나요?
몹시 중대한 사안을 묻는 듯한 어조에 웃음이 튀어 나갈 거 같았다. 이 사람이 자기를 걱정해 줄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진다.
진형은 짐짓 심각한 어투를 꾸미고서 중얼거렸다.
“네, 괴롭혔어요. 무지막지하게.”
이번에는 좀처럼 대꾸가 없다. 그의 염려는 좋지만 안 해도 될 걱정까지 끼치는 건 내키지 않았다. 진형은 최대한 밝은 어조로 장난을 치듯 푸념을 늘어놨다.
“별건 아니고, 진상 하나가 아주 골 때리는 소리를 하는 거야. 앞으로 마감까지 두세 시간 남았는데, 짜증을 그대로 끌어안기보다 형 목소리 들으면서 풀고 싶었죠.”
골 때리는 소리.
좀 쑤시겠다거나. 너치고는 오래 버텼다거나.
예전이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말들을 들으며 이렇게까지 짜증이 나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울분이 치밀었을까? 아니었을 거였다. 오히려 시원하게 수긍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뭐든 가벼운 걸 좋아했으니까. 얼굴값 한다는 얘기도 웃으며 듣곤 했으니까. 무거운 연애는 좀 더 나이 먹고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한 사람한테 얽매이는 스타일은 아니지 않냐고.
과거에는 듣는 순간 그렇긴 하다며 순순히 인정했겠지. 그런데 이젠 그 어떤 말보다도 모욕감이 들었다. 길 가다가 난데없이 따귀를 맞은 것처럼 온몸이 화끈거렸다.
가벼운 모습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며 살았던 게 이런 식으로 돌아오자 매우 짜증이 났다. 잠시 잊었던 예전 모습을 들추는 듯한 진상 새끼에게도 화가 났고, 앞일 이렇게 될 줄 모르고 무절제하게 살았던 자기 자신에게도 분노가 치밀었다.
이제 나한테는 이 사람밖에 없는데. 이 사람뿐인데.
상대방이 이쪽에게 진지하게 굴면 본능적으로 발을 빼고 싶어 하던 예전 자신의 모습은 완전히 남의 얘기가 됐다. 오히려 그가 먼저 이 관계에서 발을 빼고 싶어 하진 않을까 걱정이다. 그에게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리는 기분이었다.
한참 이런저런 생각을 했음에도 저편에서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혹시 전화가 끊긴 걸까. 휴대폰을 내려 확인하려던 때, 마치 기습을 하듯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진형 씨, 있잖아요. 진형 씨 괴롭힌 그 사람 말인데요…….
“네.”
- 제가 혼내 줄까요?
“하하하!”
뜻밖의 말이었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어쩐지 조용하다 했다. 길게 고민한 끝에 결심하고서 한 말이겠지. 어쩜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을까.
진형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질문했다.
“정말? 형이?”
- 네, 진형 씨가 좋다고 하면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꼭 쥔 채 고개를 여러 번 끄덕거리고 있을 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 진형 씨는 직원이라 손님이 무례한 말을 해도 참고 넘겨야 했겠지만, 저는 〈웬즈데이〉 직원도 아니잖아요?
그는 꽤 긴 고민의 시간을 가지며 많은 것을 생각한 모양이다. 다시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새벽의 차디찬 바람은 여전했으나 이젠 추운 것도 모르겠다. 기분 좋은 열이 온몸을 감쌌다. 심성 곱고 상냥한 그가 이다지도 냉랭한 어조로 말하는 건 처음 들었다.
“우리 형 오늘 왜 이렇게 멋있지? 다시 반하겠어.”
수화기 건너편에서 살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 진형 씨가 〈웬즈데이〉에서 일하는 동안 짜증 나는 일이 왜 없었겠어요. 여태까지 그런 소리 제 앞에서 단 한 번도 안 하던 진형 씨가, 오늘은 얼마나 화가 났으면 저한테 이런 말을 다 했을까 싶어서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라도 해 주고 싶어요.
“아, 내 편은 역시 우리 형밖에 없다.”
- 전 늘 진형 씨 편이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요.
딱 자른 음성에 웃음부터 실실 새어 나갔다.
목소리만 들어도 큰 위로가 됐는데 그가 이다지도 강력한 애정 표현을 해 줄 줄은 몰랐다. 오늘 네가 개소리를 해 준 덕에 애인의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며, 진상 새끼한테 고맙다고 해야 할 판이다.
“아니에요, 형. 주정뱅이가 헛소리 좀 했다고 우리 형까지 나설 거 있나. 게다가 형이 그 새끼랑 말 섞는 거, 생각만 해도 미칠 거 같고.”
이건 지극히 사실이었다. 그가 윤 팀장이니 부사장이니 연락을 주고받는 걸 옆에서 볼 때마다, 일 얘기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 질투가 나곤 했다. 자기가 매우 사소한 것까지 질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애인 덕에 알았다.
진형이 잠시 웃고서 마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거든. 나 큰일 났어요. 형, 이거 어떡할 거야.”
- 네?
“이래서 내가 전화하는 게 망설여졌다니까요? 보고 싶잖아. 지금 당장.”
- 어…….
그가 우물거리며 웃는 소리가 났다. 진형 역시 조용히 벙긋거렸다.
“오늘 애인분이 아프셔서 사장님이 아주 날카로우시거든. 길게 손님 받을 기분이 아니신 거 같아서 최대한 빨리 마감할 거 같긴 해요. 아마 5시쯤 도착할 거 같은데, 형 졸리면 먼저 자요.”
- 아니에요. 진형 씨 얼굴 봐야, 그래야 저도 안심하고 잘 수 있으니까요.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진형은 쉬는 시간에 그와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마다 매번 같은 것을 적었다. 몇 시쯤 집에 도착할 거 같다고. 피곤하면 먼저 자라고. 그럼 그도 항상 똑같은 답을 해 주곤 했다. 몇 시가 됐든 기다리겠다고.
이 과정을 매일같이 반복하는데도 늘 처음 하는 것처럼 기분 좋다. 오늘은 전화라서 그런가. 평소보다 더더욱 마음이 일렁거렸다.
“형.”
- 네?
“내가 형한테 그 소리 듣고 싶어서, 매번 먼저 자도 괜찮다고 말하는 거 알아요?”
- 모, 몰랐어요.
“되게 좋거든. 형이 나 기다려 준다는 거. 들어도 들어도 안 질려요.”
겸연쩍은 듯 조용히 웃음 짓던 그가 떨림이 스민 목소리로 속삭였다.
- 앞으로도 쭉, 그럴 거예요. 항상 진형 씨를 기다릴게요.
진형이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수그렸다.
뺨이 붉어진 건 딱히 찬 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얀 입김이 사방에 흩어졌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연거푸 앓는 소리가 튀어 나갔다.
최근, 몹시 빈번하게 하는 생각을 이 순간 다시금 하게 됐다.
혼자만의 오해로 자칫하다가 그를 놓칠 뻔했다. 그날 모두가 보는 앞에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난동을 부렸던 ‘미친 짓’은 남진형 인생 통틀어서 가장 ‘잘한 짓’이다.
이 사람을 좋아하게 돼서 정말 다행이었다.
* * *
그에게 예고했던 대로, 진형은 5시가 막 지났을 무렵 605호 푯말이 붙은 문 앞에 설 수 있었다.
‘그의 집’이 ‘우리 집’으로 바뀐 것도 벌써 세 달째에 접어든다. 최대한 붙어 있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거를 원하게 됐다. ‘만난 지 반년 만에’ 같이 살고 싶어진 거였다. 만난 기간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보다는, 어떠한 거리낌도 없이 동거를 원했다는 것 자체가 자기에겐 꽤 놀라운 일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고윤민’이라는 사람에게 빠져 버렸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자 쇳조각이 단숨에 찬 기운을 머금었다. 진형은 저도 모르게 으, 하고 신음하며 서둘러 잠금을 풀고 현관문을 열었다.
“형, 나 왔…… 엇.”
아직 스니커즈도 벗지 못했다.
진형은 품으로 확 뛰어 들어오는 작은 몸을 반사적으로 받아 안았다. 허리에 감긴 야윈 두 팔이 마치 온 힘을 다해 이쪽에게 매달리는 듯했다.
뜻밖의 선물에 얼굴이 절로 풀어졌다.
“갑자기?”
진형이 키득거리며 농담조로 중얼거리자 가슴 근처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났다. 감싸 안은 마른 등이 제법 뜨겁다. 창피함을 누르느라 무던히 애쓰고 있다는 건 붉어진 목덜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형답지 않게 훅 들어오네.”
윤민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가 안으면, 진형 씨를 안아 주면…… 진형 씨 기분이 좋아진다고 그랬잖아요.”
“응, 진짜 좋아요.”
“그래서요. 오늘 안 좋은 일 있었으니까, 진형 씨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꼭 해 주고 싶었어요.”
온화한 음성을 들으며 천천히 고개 숙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윤민도 품에 푹 묻고 있던 얼굴을 떨어뜨리며 이쪽을 응시해 온다.
오늘도 윤민은 진형이 사서 떠안긴 잠옷 중 한 벌을 입고 있었다. 민트색 사선 스트라이프가 가늘게 들어간 진그레이 잠옷은 하얀 피부와 꼭 어울렸다. 외출하는 일이 드물기에 잠옷을 평상복처럼 입는 그를 위해서 편하고 부드러운 소재로 신경 써서 골랐다.
눈썹 근처로 잘 정돈된 앞머리 덕분에 그의 눈망울이 또렷하게 보였다. 귓가를 덥수룩하게 덮었던 머리칼도 전부 다듬었기에 귀여운 귓불도 그때그때 눈에 담을 수 있다. 아주 흡족했다.
진형은 윤민과 사귀고서 벼르고 벼르던 것들을 해치워 나갔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를 헤어숍에 데려가는 것이었다.
머리 스타일만 조금 바꿔도 훨씬 더 보기 좋을 거라고. 그간 계속 가지고 있던 확신은 바로 현실이 됐다. 숱을 쳐서 전체적으로 다듬기만 했을 뿐인데도 사람 인상부터 달라졌다. 새까만 머리 탓에 가뜩이나 창백한 낯빛이 더욱 부각되는 것 같았기에 따듯한 밤색으로 가볍게 염색도 하게 했다.
〈괜찮겠어요? 아무리 애인이라지만, 이 자식이 하라는 대로 다 해 버려도?〉
윤민의 머리를 도맡았던 디자이너는 진형이 평소 잘 따르는 친한 형 중 한 명이었다. 진형의 미친 짓을 〈웬즈데이〉에서 구경하며 박장대소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능청스러운 놀림도 윤민은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제법 신중한 목소리로 차분히 대답을 꺼냈다.
〈네, 괜찮아요. 진형 씨가 제 얼굴을 가장 자주 보니까…… 진형 씨 마음에 들면 저도 행복하고 좋거든요.〉
이것 보라고. 지금 내 애인이 하는 얘기 잘 들었냐고.
의기양양 턱짓하는 이쪽을 쳐다보며 오만상을 찌푸리던 남자의 표정만 떠올려도 웃음이 터질 거 같다.
서로 얼마나 바라보고 있었을까.
선한 눈매와 귀여운 콧방울.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작은 얼굴을 이리저리 훑던 진형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제야 윤민의 트레이드마크가 부재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형, 안경 안 썼네?”
윤민도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어깨를 꿈틀하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아…… 네. 조금 전에 눈약을 넣었거든요.”
진형이 희미하게 웃고서 조용히 되물었다.
“정말? 나한테 뛰어들려고 벗어 둔 게 아니라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그의 뺨이 확 붉어졌다. 입매가 절로 올라갔다. 난처한 듯 미소 짓는 게 너무나 귀엽다. 반듯하고 조그마한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것도, 실은 맞아요.”
수줍음을 꾹 누르고서 겨우겨우 내는 목소리였다. 거기에 한껏 상기된 귓불까지 시야에 들어오자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어졌다.
“지, 진형 씨? 어, 어어…….”
신발을 거칠게 벗으며 작은 몸을 살짝 들어 올렸다. 침대까지 이동하기에는 여유가 없다. 당장 조막만 한 입술에 혓바닥을 처넣고 안을 흠뻑 맛보고 싶었다.
진형이 벽 쪽으로 윤민을 가두듯 밀어 넣었다. 갈 곳을 잃고 허공에서 머뭇거리는 그의 양손도 낚아채듯 깍지 끼어 벽면에 고정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꺼풀만 끔뻑거리던 윤민이 단숨에 가까워진 미려한 얼굴을 보며 눈을 꾹 감았다.
“으, 으음…….”
거부감 없이 살짝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욕망 가득한 살덩이를 집어넣었다. 혀끝으로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더듬으며 입 안을 마음껏 핥았다. 질퍽하고 외설스러운 소리가 맞물린 입술에서 끊임없이 흘렀다. 그가 이따금 토해 내는 가냘픈 한숨조차 모조리 먹어 치웠다. 키스가 깊어지자 깍지 낀 손을 힘주어 붙잡는 가녀린 손가락마저도 사랑스럽다. 험상궂은 열기가 순식간에 하반신을 점령해 왔다.
참으로 신기하기 짝이 없다.
온종일 분주히 돌아다니고, 무거운 술병과 안주를 나르다 보면 마감 무렵에는 녹초가 되곤 한다. 퇴근길에는 윤민을 품에 가두고서 깊게 잠들고 싶다는 생각만을 하게 됐다. 그런데 정작 집에 돌아와 그를 앞에 두면 피곤함도, 수면욕도 깡그리 날아가 버렸다.
그동안 수십 번 탐하고 범했어도 욕심은 언제나 끝이 없었다. 허기를 채워도 다시금 공복이 찾아오는 것과 비슷하다. 이 사람의 모든 것은 자기 것이라고. 고윤민의 전부를 가졌다며 자신할 수 있음에도 언제든 갈증은 올라왔다. 이 작은 몸에 수없이 흔적을 새겨 넣었지만 늘 부족한 감이 있었다.
미쳤구나. 나 진짜 미쳐 버렸구나.
누군가에게 이토록 맹목적인 애정과 집착을 갖게 될 줄이야.
스스로도 몰랐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모습이다. 이러니 무서울 수밖에 없다. 이 사람을 잃을까 봐. 윤민과의 끝은 결코 오지 않을 미래라고 완벽하게 장담할 수 없다는 게 이따금 불안감까지 자아냈다.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키스에 몰두했을 때였다. 손등을 두드리듯 윤민의 손끝이 꼬물거렸다. 덕분에 조금쯤 정신이 돌아왔다.
작은 혓바닥을 여러 번 흠빨던 진형의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예상했던 대로 기다렸다는 듯 숨을 몰아쉬는 그를 보며 절로 웃음이 났다. 코로 숨을 쉬라며 늘 알려 줘도 윤민은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며 울상을 짓곤 했다.
“하, 하아…….”
가쁘게 숨 쉬는 그의 뺨이 붉디붉다. 달콤하게 녹아 흐르는 표정을 보며 사나운 욕정이 일었다. 윤민이 이쪽을 보며 웃기만 해도 배 속에 열이 고이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불길처럼 치솟는 성욕은 이제 아주 자연스레 받아들여졌다.
“형.”
“네……?”
그의 표정을 내려다보느라 잠깐 올렸던 몸을 천천히 숙였다. 작디작은 윤민에게 키스하려면 언제나 허리를 내려야 했다. 덕분에 그는 이쪽이 상체를 조금만 앞쪽으로 기울여도 그것을 키스의 신호라고 여기는 듯했다.
코앞으로 다가온 얼굴을 보며 윤민이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두 손은 붙잡힌 채였고, 코앞에서는 훤칠한 진형이 버티고 있다. 어디에도 도망칠 곳이 없었다. 키스를 예감한 덕분에, 안정감을 되찾았던 호흡이 삽시간에 어그러졌다.
진형이 남몰래 웃었다.
물론 이대로 그의 입술을 다시 빼앗아도 좋다. 키스하며, 그를 안아 올린 채 침대로 직행하는 것 역시 대단히 좋은 선택지 중 하나다. 하지만 그 전에 윤민을 슬쩍 놀리는 것을 빼먹고 싶진 않았다.
진형은 고개를 가볍게 꺾으며 홍조 띤 귓가에 입술을 바싹 붙였다.
“민이 형.”
“흣!”
단둘이 있을 때 부르는 애칭을 쉰 목소리로 속삭이자 윤민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신음했다. 좋으면서도 창피한, 행복하면서도 부끄러운. 그가 지금 이 순간 어떤 감정을 맛보고 있는지 매우 쉽게 알 수 있다. 맞잡은 손에서도, 들뜬 호흡에서도 그의 속내가 읽혔다.
“나 하고 싶어.”
진형이 귓불을 씹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형 안에 처박고서 진탕 구르고 싶다고.”
“그, 그런 말은 제발 좀…….”
“형은?”
나를 원한다고 말해 줬으면. 항상 기다리겠다고 말해 줬던 것처럼.
고개를 바로 하며 조막만 한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시선을 피하던 윤민이 한참 망설인 끝에 작게 중얼거렸다.
“저, 저도 진형 씨랑 하고 싶어요.”
만족스럽게 웃음 짓는 진형을 바라보며 윤민도 설핏 미소 지었다. 수치심으로 눈가를 붉히면서도 이쪽이 원하는 대답을 말해 준 그의 모습이 뇌리에 여러 번 아로새겨졌다.
진형은 윤민의 엉덩이와 어깨를 붙잡고서 그대로 안아 올렸다. 양팔로 목을 꼭 감아 오며, 이마에 살며시 입 맞춰 주는 연인의 사랑스러움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행복한 나날이다.
이 사람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언제까지고 이 행복을 만끽하며 지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 *
달콤한 통증이 전신에 자르르 퍼졌다.
“으음…….”
눈을 뜸과 동시에 혼자라는 걸 알아차렸다. 옆쪽으로 팔을 뻗어 봤지만 손끝에 닿는 건 이불의 감촉뿐이다.
윤민은 무거운 눈꺼풀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위쪽의 미세한 틈으로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빛 덕분에 더는 새벽이라 부를 수 없는 시간대이겠거니 싶었다.
이 깜깜한 공간은 진형의 작품이다.
아무리 생활 패턴이 비슷해도 누군가는 먼저 잠자리에 드는 날이 있을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비교적 널찍해도 원룸은 원룸이다. 침대에 누워 있어도 사람이 왔다 갔다 하며 내는 생활 소음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혼자 지낼 땐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이제 둘의 공간이 됐으니 진형의 의견도 중요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집의 치수를 줄자로 재던 진형이 인터넷 오픈 마켓에서 여러 가지를 주문했다. 속속들이 도착하는 것들은 무척이나 범상치 않았다.
가만히 구경이나 하라고 부탁한 진형은 혼자서 분주히 움직였다. 크림색의 길쭉한 목재를 격자로 조립하고 그 사이에 아크릴을 끼워 넣는 걸 멍청히 지켜봤다. 침대를 오른편 벽 쪽으로 바싹 밀고, 왼쪽에는 협탁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사이를 둔 후, 그 옆에 조립한 것을 설치했다. 순식간에 간벽 하나가 생긴 거였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 놀라기는 아직 이르다고 말하는 것처럼 진형은 바삐 움직였다. 천장에 니은 자 모양으로 레일을 박고 두툼한 차광 커튼까지 매달자 근사한 침실이 뚝딱 완성됐다.
그가 뿌듯한 표정으로 어떠냐고 물었을 때 생각나는 말이라고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진형 씨는 정말 천재 같아요.〉
〈몇 번이고 말하지만 형 콩깍지가 엄청 두꺼워서 그래요.〉
아니에요, 진형 씨는 천재가 틀림없어요.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겸연쩍은 듯 웃던 진형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며 속으로 연거푸 칭찬하던 그 순간이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생생히 떠올랐다.
불필요하게 자리를 많이 차지하던 4인용 식탁을 처분하는 대신 접이식 아일랜드 식탁을 들여놓았다. 부엌을 최대한 간소하게 꾸리자 거실 겸 작업 공간이 보다 넓어졌다.
베란다 옆쪽으로는 은은한 베이지색 소파를 들였다. 〈웬즈데이〉의 사장인 신지겸이 집들이에 부르지 않는 조건으로 하사했던 동거 축의금으로 구입한 거였다.
진형과 함께 고른 소파는 안락하고 푹신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새로 생긴 소파 자체보다는, 형이랑 오붓하게 노닥거릴 공간이 침대 말고 하나쯤 더 있길 원했다는 그의 속삭임이 훨씬 더 좋았다. 물론 진형에게는 비밀이지만.
그가 이 집에 오고서 익숙한 풍경이 하나하나 바뀌어 갔다.
생소해진 공간에 조금쯤 어색함을 느끼던 것도 아주 잠시였다. 이젠 그가 머물지 않는 이 집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언젠가는 그게 무섭기도 했다. 너무 수월하게 행복을 거머쥔 거 같아서 이래도 되나 싶었다.
하지만 혼자서 잠깐 겁에 질렸어도 그때뿐이었다.
예전에 진형에게도 말했지만, 고민하는 시간이 매번 아깝게 여겨졌다. 행복이 얼마나 남았을까 전전긍긍하며 속을 앓기보다, 차라리 함께하는 순간을 마음껏 누리자고 마음먹었다.
이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역시, 그 덕분이다.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웃어 주는 그의 미소 때문이었다.
“어……?”
생각에 잠겨 있던 윤민이 작게 신음했다.
멀찍이서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이 집 문을 자유자재로 열 수 있는 이는 딱 한 명뿐이니 지금 누가 들어왔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집에 없었던 거구나. 어디에 다녀온 걸까.
윤민의 얼굴이 조금씩 얼어붙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새벽의 기억이 참 애매했다.
진형에게 이끌려서 이 침대에 눕혀진 것도, 콘돔 없이 하고 싶다는 부탁을 들은 것도, 널찍한 어깨를 부둥켜안고 숨을 몰아쉬던 순간까지도 어찌어찌 떠올랐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나는 칭찬받아야 마땅하다고, 형을 세 번이나 보냈다고. 엄청난 소리에 대꾸조차 못 한 건 창피하다기보다 기력이 완전히 소진됐기 때문이었다. 끙끙 신음하며 그에게 안긴 채 욕실로 이동했던 것을 끝으로 전혀 기억나질 않았다.
진형 씨가 나를 씻긴 걸까……?
그에게 뒤처리를 떠안긴 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몽롱하던 머릿속이 단숨에 말끔해졌다. 확 뜨거워진 얼굴은 덤이다.
윤민은 저도 모르게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으…….”
잠시 얌전했던 통증이 재빠르게 전신을 누볐다. 허리와 허벅지가 저릿저릿했다.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음에도 피부에 각인된 감촉이 제멋대로 되살아났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어떤 식으로 주무르고 매만졌는지 기억날 때마다 뺨이 점점 더 뜨끈뜨끈해졌다.
일단 나가자.
한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엉금엉금 침대 끝으로 이동할 때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커튼이 살짝 열렸다.
그가 볕과 함께 흘러들어 왔다.
“형? 일어났네요. 몸 괜찮아요? 내가 좀 심하게 하긴 해서.”
윤민은 천천히 고개 들었다. 이쪽을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이 햇살보다도 더 눈부셨다.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천천히 대답하며 그의 머리칼로 시선을 옮겼다.
푸른빛이 감돌던 진형의 머리 색은 윤민의 생일 이후로 달라졌다. 내년부터는 착실히 고민해 볼 테니까, 올해는 필요한 걸 알려 달라고. 뭐든 들어줄 거 같은 그에게 윤민은 큰맘 먹고 계속 마음에만 품고 있던 소원을 꺼내 들었다. 잿빛과 보랏빛이 섞인, 3년 전쯤 진형 씨가 했던 그 머리를 다시 보고 싶다고.
얘기를 들은 바로 그날, 진형은 곧장 실행에 옮겨 주었다. 눈앞에 나타난 그를 바라보며 몇 번이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멀찍이서 훔쳐보고 그것에만 만족했던 나날이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한데. 그 사람이 이토록 가까이에 머무니까. 이쪽을 보고 웃어 주기까지 하니까. 민이 형, 하고 부르며 나를 꼭 안아 오니까.
진형 앞에서 우는 것은 싫었다. 울먹이는 얼굴을 들키는 건 꽤 창피하니까. 하지만 그날만큼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눈물 외에 다른 것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너무나 행복했다.
영원을 바라게 됐을 만큼.
햇빛 머금은 그의 머리칼이 오묘한 색으로 빛났다. 윤민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서 눈앞의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빤히 응시하는 시선을 기분 좋은 듯 만끽하던 진형이 침대에 천천히 걸터앉았다.
“형, 하루에 한 번씩은 내 얼굴이랑 머리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 알아요? 벌써 한 달째야. 형 생일 이후부터니까.”
“아…….”
“이 머리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생일 상관없이 바로 해 줬을 텐데.”
기다란 손가락이 뺨으로 다가왔다. 엄지 손끝이 피부를 부드러이 쓸어내리는 감촉을 느끼며 윤민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으음, 아니에요. 생일에 볼 수 있어서 더 좋았던 거 같아요. 진형 씨가 제 소원을 들어준 생일이니까 얼마나 특별해요. 여태까지는 생일 자체에 딱히 별생각 없기도 했고, 추억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었고……. 그랬는데, 올해 생일은 앞으로도 여러 번 곱씹으면서 행복해할 거 같아요. 정말 고마워요, 진형 씨.”
하고 싶은 얘기는 참지 말고 전부 하라고. 어떤 얘기든 모조리 듣고 싶다고.
진형이 부탁했기 때문에 윤민은 언제나 그것을 착실히 수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말주변은 여전히 답보 상태지만 그럼에도 괜찮을 거였다. 두서없지만, 형편없지만. 머릿속에 둥둥 떠오르는 것들을 그저 솔직하게 말하기만 해도 그가 만족하며 웃어 준다는 것을 잘 안다.
떨림 머금은 목소리를 듣던 진형의 눈매가 점점 부드러운 기색을 띠었다.
“우리가 3년 전에 만났으면 어땠을까.”
“3년 전에……?”
“네. 내가 이 머리를 하고 다니던 그때. 형이 나한테 용기 내서 말을 걸었거나, 아니면 내가 형을 발견하고 다가갔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형이 최근에 날 빤히 바라볼 때마다 가끔 상상하게 되더라고요.”
윤민이 눈을 크게 떠 올렸다.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전혀 가능성 없는 얘기처럼 들렸다. 지금도 소심함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지만, 그땐 더더욱 심했다. 심지어 〈웬즈데이〉에 막 다니던 무렵이라 누구랑 눈만 마주쳐도 어깨를 움츠리곤 했다. 진형에게 말을 걸었던 것도 사실 술기운 덕분이었다.
“근데, 오히려 그 시절에 형을 몰랐던 게 다행이었어요.”
“네?”
윤민이 괜한 생각을 하려는 걸 가로막듯 진형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입대를 최대한 연기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술 진탕 마시고 형한테 가서 기다려 달라고, 2년 금방이라고 울고불고 매달리거나?”
“아아…….”
“상상만 해도 쪽팔려요. 너무 폼이 안 나잖아. 가뜩이나 형 앞에서는 엉망이 되는 거 같아서 걱정스러운데.”
입대 연기 혹은 매달림.
어느 쪽이든 연인 사이가 된 것을 깔아 두고서 하는 상상이다.
윤민은 헛숨을 연거푸 토해 냈다. 괜한 걱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만약 기다리란 말을 들었더라면 오히려 반색하고 기뻐했을 자기 모습이 눈에 선하다는 부끄러운 소리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었다.
진형이 키득 웃으며 장난치듯 말을 걸었다.
“형 지금 내 얘기 듣고 한숨 쉰 거예요? 너 엉망인 거 알긴 아네, 하고 긍정한 건 아니지?”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윤민은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조금쯤 눈치가 생겨서 진형의 농담과 진담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것만큼은 단호하게 부정하고 싶었다.
“한숨 쉰 게 아니라 감탄한 거예요. 진형 씨가, 저를 위해 그 시절 머리를 해 준 것도 좋고…… 그러면서 3년 전에 만났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준 것도 고맙고, 어, 그러니까 제 말은…….”
급하게 말하려니 어조가 점점 어수룩해졌다. 이다음 꺼낼 말은 더듬고 싶지 않았다. 윤민은 천천히 호흡을 고르고서 진형과 시선을 마주했다.
“저요, 저는…… 진형 씨가 정말 좋아요.”
“…….”
그가 아무 말 없이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웬즈데이〉 뒷문에서, 함께 눈발을 맞으며 인생 최초로 사랑을 고백했던 그날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그때처럼 떨린다. 언제나 이렇겠지. 그에게 벅찬 마음을 털어놓을 때마다 늘 처음처럼 떨리고 긴장하겠지.
그래도 말해야만 했다.
가슴에만 담아 놓기에는 굉장히 커다래서, 넘쳐흐르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 하니까. 이 사랑을 주기적으로 진형에게 표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숨기는 것이 더 쉽고 편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게 됐다. 불가능하다.
마음을 다잡고서, 윤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진형 씨가 어떤 모습이든, 앞으로 어떻게 변해 가든. 전 그저 진형 씨가 참 많이 좋아요. 같이 지내면서 더 좋아졌고, 계속 좋아할 거예요.”
“…….”
“제가 다른 건 잘 모르지만, 아직 모르는 것투성이기도 하지만, 진형 씨에게 향하는 제 마음만큼은 확실히 알아요. 앞으로도 쭉 진형 씨에게만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정말…… 정말로 많이 좋아해요.”
뺨을 매만지던 손가락이 이동하며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이끌림에 머리를 맡기자 입술이 살며시 맞대졌다.
다정한 키스를 했다.
그의 혓바닥이 혀끝을 부드럽게 문지르고 쓸어내렸다.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있기 때문일까. 어쩐지 지금 이 순간 그의 감정이 읽히는 듯했다.
“항상 다행이라고 생각해.”
입술로 담뿍 느꼈던 뜨거움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역시 열기로 가득했다.
“운이 좋았다고도 생각하고요. 날마다, 매일매일.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눈가가 떨려 왔다. 촉촉한 음성을 듣고 있자니, 어쩐지 이쪽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형을 만나서, 형이 나를 좋아해 줘서, 나 역시 형을 좋아하게 돼서.”
진형이 두 팔을 뻗어 왔다. 윤민 역시 자연스럽게 널찍한 품으로 파고들었다. 서로를 가만히 안아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뭉클해졌다.
잠시간 서로를 끌어안은 채 온기를 누릴 때였다.
윤민이 지금 막 생각난 질문을 살며시 입에 담았다.
“진형 씨. 방금 어디 나갔다 왔어요?”
“아, 맞다. 네. 오늘은 뭐 차리기가 귀찮아서 빵이랑 우유 좀 사 왔어요. 배고프더라고. 생각해 보니까 나 결국 야식도 건너뛰었거든요. 그런데 집에 오자마자 형이랑 격렬한 운동까지 했으니.”
장난스러운 어투로 속삭이는 ‘격렬한 운동’이라는 말에 얼굴이 뜨거워지긴 했어도, 지금은 그를 걱정하는 게 우선이었다. 앞에 들은 말이 무척 신경 쓰였다.
“야식을 안 먹었어요? 배 많이 고팠겠어요.”
“나 사 온 거 형이랑 같이 먹고 싶은데.”
“그럼요. 먹을게요. 진형 씨가 사 온 건데요.”
끌어안았던 몸을 서로 아쉽게 놓아주었다.
먼저 일어난 진형을 따르듯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딛던 윤민이 움찔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아릿한 통증이 허리를 쿡쿡 찔러 왔다. 새벽의 기억이 또 머릿속에 펼쳐질 것만 같아서 의식적으로 아무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어설프게 웃어 보이며 다시 움직이려던 때였다. 진형이 두 팔을 뻗어 몸을 훌쩍 안아 올렸다.
“저 걸을 수 있어요. 진짜예요!”
“알아요, 알아.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형은 신경 쓰지 마요.”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냐고.
그런 항의조차도 할 수가 없다. 진형이 너무나 해맑게 웃으며 이쪽을 내려다보니 아무 말도 꺼내질 못하겠다.
어차피 무슨 얘기를 꺼내도 이 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간 수도 없이 겪었던 체험 덕분에 이럴 때 어떡하면 좋을지 답이 쉽게 나왔다. 아마 그는 웃어 줄 거다.
마른 두 팔이 진형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귓가를 잔잔히 건드리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윤민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괜스레 눈가가 찡해졌다. 자기가 예상했던 것을 진형이 그대로 해 줄 때마다 마음이 기쁨으로 넘실거렸다.
참으로 눈부신 일상이었다.